80화. 선택(選擇)
“가두신다고 해서 순순히 따를 수 없지.”
무왕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주예빈은 왕부를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그렇다고 쉬이 감행할 수는 없었다.
예신각을 포위한 이들은 흑룡위이기 때문이다.
무왕의 근접호위를 맡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들이다.
그들 모두를 속이고 빠져나가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절대 들키면 안 돼.”
여차하며 흑룡위를 때려눕히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문제는 흑룡위를 때려눕혀도 경계 체계가 잘 되어 있어서 왕부를 빠져나가기 전에 들통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
주예빈은 전표 몇 장과 창 한 자루만 챙긴 채 상황을 엿봤다.
밤이 깊어지고 경계의 틈이 생기는 순간이 바로 기회다.
‘지금!’
주예빈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창을 통해 예신각 지붕에 올라갔다.
창술을 펼칠 때와는 많이 달랐다.
걸왕의 가르침이 가장 녹아든 건 사실 창술이 아니라 보신경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흑룡위는 그녀가 예신각 지붕에 오른 걸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다시!’
주예빈은 소리조차 죽이며 다른 전각으로 넘어갔다.
빠르기도 했지만, 은밀하기까지 했다.
몇 개의 전각을 넘자 그녀도 자신감이 찼다.
‘별거 아니네!’
그렇게 왕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그녈 멀리서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흑갑주를 입은 노장군이었다.
“영훈아, 군주님을 부탁한다.”
“걱정 마십시오, 대형. 가자.”
“충!”
대장군의 명에 흑의인들이 주예빈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흑룡중장군(黑龍中將軍)과 흑룡위였다.
주예빈을 홀로 보내기에 세상은 거칠고 위험하다.
그렇기에 은밀하게 보호한 정예를 편성했다.
몸을 돌린 대장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빈이에게 무슨 일이라고 벌어지면, 그 누구도 용서치 않으니라…….’
* * *
부르르…….
한서불침(寒暑不侵)에 올랐음에도 이백은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런 그를 향해 초로의 사내가 물었다.
“이 대협, 왜 그러시오?”
“아닙니다. 호법님.”
개방 총타를 떠난 이백은 아직 하남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남을 떠나기 전, 만날 얼굴이 있던 탓이다.
그는 호법이라 불린 초로의 사내는 아니다.
“그보다 오랜만이오, 그때는 고맙다고 인사도 못 했구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소. 이곳 천향루는 미식, 미주, 미녀로 유명하오. 기대해도 좋소.”
“…감사합니다.”
초로의 사내는 무림맹의 호법, 소요자였다.
하남하면 떠오른 게 몇 있다.
소림, 개방, 무왕부 그리고… 무림맹이다.
무림맹에는 이백의 의형 제갈천기가 몸 담고 있는 곳이다.
이백은 그를 보기 위해 무림맹에 방문했다.
허나 정작 제갈천기를 만날 수 없었다.
군사부는 맹주전만큼 중지(重地)로 외부인은커녕 무림맹 소속이라도 허락 없이 출입이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분석한 정보나 수립된 계획은 무림맹만이 아니라 무림 전반에 영향을 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갈천기는 그런 군사부에 속한 소군사(小軍師)를 맡고 이었다.
만나고 싶다고 해서 바로 만나긴 어렵다.
그렇기에 인사도 못 하고 떠나나 싶을 때, 소요자를 만나게 되었다.
“정말 괜찮겠소? 천향루의 기녀들은 미색은 물론 재주 역시 뛰어나기로 유명한데?”
“괜찮습니다. 호법님과 조용히 한잔하는 게 더…….”
소요자의 호언처럼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상다리 휘어질 정도로 많이 나왔고, 미주 역시 상 한쪽에 놓여 있었다.
헌데 시중을 들어줄 기녀 한 명 없었다.
주예빈의 일로 여인이 불편해진 이백의 뜻 때문이다.
“왜 그러시오, 이 대협.”
“…술은 나중에 마셔야 할 거 같습니다.”
술병을 들고 소요자의 잔에 따르려던 이백은 멈칫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소요자는 당황했다.
허나 그도 곧 알 수 있었다.
“누구십니까.”
“비영(秘影)이 호법님과 이 대협을 뵙소.”
이백의 물음에 허공에서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낯선 이의 등장에도 두 사람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기척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소요자의 경우 비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총군사님께서 날 찾으시오?”
“…이 대협을 청하셨소.”
그는 총군사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비영이었다.
소요자는 당연히 총군사가 자신을 부른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가 청한 건 바로 이백이었다.
“동행해주시겠소.”
“…호법님, 먼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총군사님께서 찾으신다면 어쩔 수 없구려. 다녀오시오.”
소요자에게 허락을 받은 이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비영을 따라 천향루를 벗어났다.
소요자는 눈앞에 차려진 상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커험… 혼자 먹긴 많은데, 기녀들을 불러볼까.”
* * *
“이리 갑자기 청해 미안하네.”
무림맹의 군사부는 어떤 면에선 맹주전 이상으로 삼엄하지만, 비영의 안내를 받은 덕분에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애초 총군사의 허락이 떨어졌는데, 누가 앞을 막겠는가.
“아닙니다. 기회만 된다면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이라… 그 말 참, 오랜만에 들어 보는구나.”
이백의 말에 총군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중경은 무림맹의 총군사이자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다.
그의 손주들조차 할아버님이라 부르는 자는 없는데, 정작 이백의 입에서 그리 불리니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불편하시다면 총군사님이라 부르겠습니다.”
“하하, 아니네. 내게 그리 불러주는 이가 없었는데, 네가 그리 불러주니 고맙구나. 앞으로도 그리 불러주게나.”
다행히 총군사는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백을 향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예, 할아버님.”
“들었다. 천기의 아우라고?”
“예, 천기 형님께서 아우 삼아주셨습니다.”
총군사는 이백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음이 편했다.
자신을 무림맹의 총군사나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로 대하지 않고, 조부로 대해주니 잠시나마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많은 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천기에게 좋은 아우가 생겼구나.”
“제게 좋은 형님이 생긴 것이지요.”
말 역시 예쁘게 하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즐거운 대화가 얼마간 지속되었다가 그의 얼굴이 총군사로 돌아왔다.
“내 널 이리 부른 건 한번 보고 싶었기도 했지만, 해줄 말이 있기 때문이란다.”
“말씀하십시오, 할아버님.”
총군사가 진중하게 바뀌자 이백 역시 진중하게 들을 자세를 취했다.
“이 자리에 있다 보면 이런저런 사실을 알게 된단다. 그러다 우연히 일련의 사건들이 은폐되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조사에 착수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은폐를 포착했던 증거조차 사라진 것이다. 그제야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상대라면 쫓는 게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미끼를 던졌다.”
무림맹은 산하에 비각(秘閣)이란 정보조직을 운영할 뿐만 아니라 정파제일이라는 개방에서도 정보를 제공받는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정보 역시 사라진 건, 오히려 적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총군사의 눈빛이 빛났다.
“다행히 미끼를 덥석 물더구나. 헌데 미끼를 문 건 꼬리라 하긴 너무 거물이었단다. 그게 누군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이백이 알 턱이 없다.
허나 총군사가 이리 물은 건, 이유가 없을 리가 없다.
“노부와 동시대에 활동한 노마들… 흑백쌍괴(黑白雙怪)였다.”
“설마…….”
이백의 눈이 커졌다.
그 역시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백의 반응에 총군사는 고갤 끄덕였다.
“맞다. 네가 쓰러트린… 그들이다. 미끼를 문 게 흑백쌍괴일 줄은 몰랐던 노부의 불찰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천기는 물론 소요자 역시 잃을 뻔했어. 고맙구나.”
“아닙니다.”
흑백쌍괴는 신산(神算)이라고 불리는 총군사조차 계산치 못한 크나큰 변수였다.
소요자도 대단한 고수이지만, 흑백쌍괴 둘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다.
뒤늦게 그들의 존재를 알았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할 정도다.
“흑백쌍괴의 입만 열 수 있었다면 많은 정보를 알아냈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죽고 말았지. 대신 일성도장을 심문하려 했지만, 그 역시 제거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단서가 끊겼지만, 최근 연관이 있을지 모를 인물을 포착했다. 혹 집히는 자가 있느냐.”
“혹시… 십병암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백은 혹시라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흑백쌍괴처럼 자신과 연관이 있는 자란 느낌을 받은 탓이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
총군사는 고갤 끄덕였다.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물론 증거는 없다. 다만… 낭왕이 쓰러트리지 못한 흑도의 고수.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지 않느냐?”
“…….”
입을 열 수 없었지만, 부정하지 못했다.
사파무림에서도 화경고수는 한 손으로 셀 정도다.
그런 화경고수가 흑도에 있다?
그것도 누군가의 수하라니.
의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흑백쌍괴만이 아니라 그도 암류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이백은 [영웅 : 무림전설]의 스토리 작가팀 소속이었기에 이 게임 속에 숨겨진 암류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스토리 작가팀 소속이었다고 해도 이백은 일개 대리에 불과했기에 모든 스토리를 알지 못했고, 특히 암류의 상세한 정보 역시 알지 못했다.
퀘스트 ‘융중혈사’가 벌어질 것만 알았지, ‘융중혈사’의 최종 보스가 흑백쌍괴인 걸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암류의 정체나 구성원을 알 리가 없다.
이백은 자신이 의도치 않게 암류의 행보를 막고 있던 것이며, 이미 얽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그자가 끝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
화경고수를 부리는 자가 있을까 싶지만, 이백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십병암귀 역시 강하지만, 최종 보스로 삼기에는 존재감이 약했다.
‘음흉한 강 팀장이라면 최종 보스가 이 정도일 리 없지.’
최종 보스를 통해 유저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걸 즐기는 변태가 바로 그라는 건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이백은 총군사가 단순히 조심하라는 의미로 부른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게 이런 부탁을 하긴 미안하지만, 도와줄 수 없겠느냐.”
“…예전에 목숨을 빚을 진 분들이 있습니다. 아직 그 빚을 모두 갚지 못했습니다.”
이백은 거절의 뜻을 밝혔다.
동정상단을 잿더미로 만든 암도를 베고, 남악 축융봉에 나타난 괴한을 물리쳤으며 형주상단에서 일 년간 지켰으나 칠여 년 전의 목숨 빚을 갚았다 생각하지 못했다.
암류를 쫓다가 검모궁에게까지 마수가 끼칠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총군사의 입에서 경악할 말이 나왔다.
“검모궁 말이더냐.”
“…!! 그, 그걸 어떻게…….”
얼마나 놀랐는지, 이백의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총군사는 이백과 검모궁의 관계를 알고 있던 것이다.
폭탄을 던져 놓고도 총군사는 담담히 물었다.
“뭘 그리 놀라느냐, 이 할애비는 무림맹 총군사란다. 그 정도도 알아내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비록 흑백쌍괴의 배후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해서 무림맹의 정보력이 하찮은 게 아니다.
그들이 알아내지 못하면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다.
그런 무림맹의 정보력으로 밝혀내지 못한 암류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결코 좋은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막는 게 검모궁에도 좋지 않을까 싶다.”
“…….”
부정할 수 없었다.
허나 쉬이 긍정할 수도 없다.
이백의 침묵은 이어졌고, 결국 입을 떼었다.
“…저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