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군주(郡主)
“그대…….”
예신군주의 육신에 손을 댄 건 아니나 사실상 제압이 된 상황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진중해지자, 침묵하던 무왕부의 무장(武將)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전장을 떠났다고 한들, 그들의 흉폭한 기세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방긋 웃는 예신군주의 모습에 무장들은 움찔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은 듯싶다.
허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여느 사내 못지않은 진중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 의미를 아는지 무장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구, 군주님.”
“왜 그러는가.”
당황한 기색으로 묻는 무장을 보며, 예신군주는 사내와 같은 말투로 돌아왔다.
착각했다 생각한 무장들이 안도하기 무섭게 그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곤 이백을 향해 물었다.
“공(公)의 존성대명(尊姓大名) 이가 성에 백이 되시옵니까.”
“그렇습니다. 군주님.”
그녀의 변화된 태도에 이백은 당황스러웠다.
예신군주의 이런 변화가 의미하는 걸 아는 무장들은 사색이 되었고, 항룡개 역시 난처해 보였다.
그것을 느낀 이백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왕족에 대한 예가 아님을 알지만, 그는 급히 몸을 빼야겠다 생각했다.
“제가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소녀 주예빈이 백 가가께 인사드립니다.”
예신군주 주예빈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평소 그녀라면 포권 혹은 군례를 취했을 것이다.
헌데 이러한 방식으로 인사를 한다는 건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자신들이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는 걸 깨달은 무장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달려왔다.
“구, 군주님, 이러시면 아니됩니다!”
“마, 맞습니다! 왕야께서 아시면 소장들은…….”
군부무공은 특성상 외공이 발달한 만큼 무장들은 하나 같이 체구가 크고 건장했다.
그런 외형과 어울리지 않게 애원하는 모습이 퍽 어울리지 않았다.
주예빈은 무장들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무장들은 움찔했으나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약혼자이신 양 공자께서 아시면 불편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왕야께서도 곤란하실…….”
“약혼자는 누가 약혼자인가!”
무장들의 말에 당황한 주예빈은 다급하게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이백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백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안도한 주예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께서 양 장군님을 아끼셔서 농에 웃어주셨을 뿐이거늘…….”
“군주님, 왕야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시지 않습니까! 부디 생각을 바꾸소서!”
눈치가 둔하지 않은 이백이기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항룡개에게 전음입밀을 보냈다.
―이분들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시면 알려주십시오.
―…군주님께선 강자를 존중하고, 존경하십니다.
짧은 대면이지만, 그녀의 성향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항룡개의 말을 충분히 납득했다.
허나 이어지는 말에 얼굴에 파장이 일었다.
―그렇기에 부마(駙馬) 역시 강해야 한다 생각하십니다.
―부…마입니까.
이백의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항룡개는 불안감의 정체를 확인시켜주었다.
―강함의 기준은 바로 자신을 쉬이 제압할 수 있는… 이라 하셨지요.
―아, 아니지요?
이백은 애써 부정했으나 항룡개는 말없이 고갤 저었다.
그럴 본 이백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전현생을 통틀어 그에게 여인이라곤 없었던 탓에 이런 일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교정정의 미색에 심쿵한 적이 있으나 그녈 은공이라 생각한 탓에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제갈혜원 역시 그저 친우로 삼지 않았던가.
헌데 부마도위(駙馬都尉)가 거론되는 이 상황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가가, 오해하지 마십시오. 소녀의 마음은 오로지 한 명만 담고 있습니다.”
“약혼자분이 오해할 수 있으니, 그만 일어나…….”
이백의 말에 벌떡 일어난 주예빈은 무장들을 도끼눈으로 째려봤다.
그들 탓에 이백이 오해했다 생각한 탓이다.
주예빈은 다급하게 말했다.
“약혼자라니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소녀는 그런 거 없사옵니다!”
“하, 하하…….”
어색한 웃음이 그의 난처함을 대변해주었다.
더 이상 상황이 나아질 수 없어 보였다.
그때 항룡개가 움직였다.
푹! 푸푹!
“사…형…….”
항룡개의 점혈에 의해 주예빈이 의식을 잃고 신형이 쓰러졌다.
그녀를 부축한 항룡개를 향해 무장들은 당장이라도 무기를 휘두를 기세였다.
상대가 항룡개만 아니었다면 기세만이 아니라 휘둘렀을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오! 대협!”
“군주님의 화를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깨어나시기 전에 왕부로 돌아가십시오.”
화를 내던 무장들은 항룡개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주예빈의 몸에 손을 댄 건 큰 잘못이나 항룡개는 그녀의 사형, 오라비와 같은 존재다.
무장들과 달리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장들은 물론 무왕이 난처해질 일을 막은 셈이다.
개봉에서 무왕부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기에 서둘러야 했다.
무장 중 한 명이 이백에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오늘 있던 일은 잊어주시길 바라오.”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이백 역시 난처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없었던 일이 된다면 그의 입장에서도 환영이었다.
이백의 대답을 들은 무장들은 주예빈을 업은 채 서둘러 떠났다.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는 이백을 향해 항룡개가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대협께 좋은 연을 주선하려 했는데, 이리될 줄은…….”
“좀 당황스럽긴 했습니다. 아무리 강자를 좋아하신다고 해도…….”
그의 말에 항룡개는 쓴웃음을 지었다.
주예빈의 강자를 사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군주님께서 사부님의 무기명제자(無記名弟子)가 되어 창술을 익힌 후, 저와 가볍게 비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식이라고 하나 무왕의 핏줄답게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혀왔다.
무재(武才) 역시 대단해, 무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아비 무왕조차 존경을 표하는 기인을 만나게 되었다.
개방의 용두방주 걸왕을.
무림십왕답게 걸왕은 그녀의 자질을 알아봤고, 무기명제자로 삼았다.
이미 창술에 익숙해진 주예빈을 위해 걸왕은 창술을 창안해 전수해주었다.
항룡창법(亢龍槍法)은 새끼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자신만만한 그녀는 항룡개에게 비무를 청했다가 대차게 깨졌다.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당시에도 항룡개는 절정지경에 오른 고수였다.
아무리 주예빈이 대단한 무재를 타고났고 항룡창법이 절세적이라도 절정고수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옷자락도 스치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만 것이다.
“…당시 제게 시집을 오겠다고 하셔서 큰 소란이 일어났지요.”
“그래도 잘 해결된 거 같은데요?”
이백의 물음에 그는 고갤 끄덕였다.
아니었다면 사형이 아니라 상공이라 칭했을 테니까.
“제가 개방의 걸인이고, 군주님의 사형이기에 남매와 다름없으니 아니 될 일이라고 간신히 설득했습니다.”
“하, 하하… 그렇습니까?”
주예빈의 강자 사랑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이백은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결국 그녀를 쉽게 제압할 고수가 나타나야 이 소동이 해결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백에게 제압되었다지만, 주예빈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또래에서는 적수를 찾기가 어려울 듯싶다.
무림신성이라는 구룡삼봉.
그중에서 삼천룡(三天龍)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만, 쉽게 제압한다는 조건이라면 불가능하다.
이백이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깨어나셔서 절 찾아오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왕야께서 제지하시면 군주님이시라도 어쩌지 못하실 겁니다.”
아무리 군주를 사랑하는 무왕이라도 약혼과 같은 중한 일을 깨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백은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찜찜함이 나왔다.
‘그래, 별일이야 있겠어?’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백은 서둘러 하남을 떠났다.
* * *
“네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아느냐.”
초로의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낮은 목소리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은 듣는 이로 하여금 위축되게 만들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아바마마.”
“안다? 알면서도 그리한 거라면 본왕의 뜻을 거역한다고 생각해도 되겠느냐.”
왕(王). 무림에서 왕의 칭호를 받은 십왕과 다르다.
황제로부터 왕작을 하사받은 진짜 왕이다.
황자 시절부터 무(武)의 재능을 보여 많은 무관의 지지를 받았고, 장성해선 장수들과 함께 북부 이민족으로부터 중원을 지켜낸 거인.
초로의 사내는 바로 무왕(武王) 주휘다.
자연스럽게 풍기는 제왕지기는 주예빈을 압박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바마마의 명이라도 따를 수 없…사옵니다!”
“고얀! 군주를 예신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 하게 하여라!”
두문령(杜門令)이 떨어졌다.
그러자 무왕의 곁을 지키던 흑갑주의 무장들이 움직였다.
군주의 몸에 손을 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오직 무왕의 명령만 받는 그의 친위대 흑룡위(黑龍衛).
흑룡위의 수장인 흑룡장군들은 평소 주예빈이 숙부로 칭하는 이들이었다.
“군주님, 양해해주십시오.”
“아, 아바마마! 이, 이건 아닙니다!”
흑룡장군들이 주예빈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발버둥 쳤지만, 흑룡장군들을 뿌리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주예빈은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더 이상 그녀의 모습을 보이지 않자, 무왕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고얀 것. 사내 때문에 아비의 말을 거역하려고 하다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무왕의 얼굴은 그리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가에 장난기가 어렸다.
무왕은 입을 열었다.
“대장군, 알아봤는가.”
“이름 이백, 나이 스물다섯, 호남 형주상단의 호법을 맡고 있다 합니다. 무위는 초절정고수로 알려졌으니 정확하게는 측정…….”
대장군의 설명이 이어질 때, 무왕이 손을 들었다.
설명을 멈춘 대장군에게 물었다.
“스물다섯에 초절정고수라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개방에서 제공해준 정보이옵니다, 전하.”
왕부의 정보력도 떨어지는 편은 아니지만, 하남 이외의 정보. 그것도 무림의 정보를 단기간에 알아내는 건 어렵다.
다행히 주예빈이 걸왕의 무기명제자라 개방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관(官). 그것도 황족은 무림을 무뢰배 집단이라 생각하지만, 무왕은 생각이 트인 인물이다.
개방의 정보력이 동창의 아래가 아님을 인정한다.
그러니 의심할 수 없었다.
“불혹 전에 초절정지경에 오른 본왕보다 더 빠르군.”
“우내오존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지천명에 초절정지경에 오른 것도 흔치 않은데, 불혹 이전이라니.
그는 진정 무왕(武王)이다.
허나 그 이면에는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점이 크게 작용했다.
황실보고에 쌓여 있는 영약과 황실고수들의 희생 등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오른 초절정지경도 사실상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부족한 깨달음 대신 막대한 기운을 이용해 억지로 벽을 넘긴 부작용이었다.
그래서인지 강기(罡氣) 역시 위력이 떨어지고 내공 소모도 컸다.
물론 그러한 단점을 상쇄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내공이 단전에 쌓여 있으니 문제는 아니었다.
초절정고수로서 부족한 깨달음은 수년의 북방군 경험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러한 무왕보다 더 빨리 초절정지경에 올랐다?
개방에서 제공한 정보만 아니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보고 싶군.”
“명을 내리신다면 노신(老臣)이 다녀오겠습니다.”
무왕의 중얼거림에 대장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흑룡위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무왕부의 대장군.
무왕을 제외한 왕부 제일고수다.
“가능하겠는가.”
“목숨으로 완수하겠나이다.”
칠순을 넘긴 노구임에도 대장군의 눈빛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 눈빛에 무왕은 피식거렸다.
“되었네. 흑룡위에게 예신각을 보호하되, 막지는 말라 하게.”
“그 말씀은…….”
아쉬워하던 대장군은 무왕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무왕은 입꼬리를 올렸다.
“본왕의 핏줄이라면 제 짝을 스스로 쟁취해야지 않겠는가.”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