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항룡개(亢龍丐)
“흐흡… 하하… 흐읍~ 하!”
외팔 노인이 기이하게 숨을 쉬었다.
기이한 건 숨 쉬는 방식만이 아니었다.
그의 호흡에 따라 검은 아지랑이들이 피어나, 들숨과 함께 빨려 들어갔다.
해가 되는 건 아니었는지, 외팔 노인의 혈색이 조금은 돌아온 거 같았다.
“하… 젠장, 회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상이라는 게 쉬이 회복되는 게 아니다.
하물며 고수의 내상은 더욱더 어렵다.
외팔 노인의 수준이라면 쉬이 내상을 입지 않지만, 한 번 내상을 입게 된다면 그만큼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물론 그 시간을 단축시킬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여차하면 연혼갑을 제물 삼으면 되지만…….”
외팔 노인은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다.
연혼갑(練魂甲)은 그의 육신을 금강불괴로 만들어준 사공(邪功)이다.
수백의 여인과 사내를 제물 삼아서 완성시켰다.
수백여 명의 정(精)으로 만들어진 연혼갑이니, 이를 소모시킨다면 내상을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번 소멸한 연혼갑을 새롭게 이루는 건 어렵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건방진 놈, 노부가 있음을 알면서 소란을 피워!”
그의 호통과 함께 닫혔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밖에선 흑의인(黑衣人)과 붉은 도의(赤道衣)를 입은 자가 대치 중이었다.
흑의인들이 다수임에도 수세에 몰린 형세였다.
붉은 도의의 사내는 그들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흑의인들이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허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지 낑낑댔다.
“되었다. 들여보내.”
“조, 존명!”
외팔 노인의 허락이 떨어진 순간, 흑의인들을 구속했던 기운이 사라졌다.
그들이 물러나자 붉은 도의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혈법주(血法主)가, 총순찰을 뵙… 큭!”
“노부가 누구인지 아는 놈이 감히 소란을 피워?”
총순찰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혈법주의 목을 움켜쥐었다.
마음만 먹으면 목은 쉬게 비틀 수 있지만, 그는 풀어주었다.
혈법주는 의외로 멀쩡한 얼굴이었다.
“총순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은혜는 개뿔, 그걸로 뒈질 놈도 아니면서…….”
“…….”
혈법주는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다.
물론 총순찰이 진심으로 죽이려고 했다면 말이 다르다.
그는 혈법주가 속한 집단의 수뇌 중 한 명이다.
그게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군사의 왼팔이라는 놈이 왔지.”
“총순찰께서 정양하시는 동안, 지원하라 하셨… 크윽!”
총순찰은 또다시 혈법주의 목을 쥐었다.
허나 조금 전과 달리 진심이 담겼는지, 혈법주의 얼굴이 핏줄이 섰다.
총순찰은 살기 어린 목소리라 말했다.
“감히 노부를, 본 순찰령(巡察令)을 군사전(軍師殿) 아래 두겠단 말이더냐!”
“컥! 그, 그런… 게 아닙니…다.”
비록 내상을 입어 온전치 못하다 해도 그는 총순찰. 무림에선 십병암귀라 불리는 괴물이다.
혈법주가 가진 재주가 범상치 않다고 한들, 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다.
총순찰은 분노를 억누르며, 당장이라도 비틀어 버릴 거 같은 혈법주의 목을 놔주었다.
“날 이해시켜야 할 게야. 아니면… 군사와 얼굴을 붉히더라도 널 죽여 버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군사님께선 총순찰께서 정양하는 동안 순찰 중 한 명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흑천회 내부의 얼굴을 내세우는 게 낫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조종하는 건 순찰들보다는 속하가 낫다시며, 총순찰께서 복귀하시기 전까지만…….”
순찰령의 임무는 중원 각지에서 정보수집과 요인 포섭 및 암살 등을 맡고, 군사전은 수집된 정보의 분석 및 계책 수립 그리고 후방지원 등을 맡았다.
흑백쌍괴의 입을 막기 위해 움직인 무당의 일성도장이 순찰 중 한 명이다.
그의 죽음으로 무당에 걸어둔 고리가 끊어졌다.
순찰 중 한 명이 흑천회를 맡게 되면 그가 현재 맡고 있는 임무에 지장이 생긴다.
게다가 새로운 얼굴이 흑천회를 얻게 되면 주변의 의심을 살 수 있다.
그렇기에 군사는 혈법주를 통해 흑천회 내부의 인물을 괴뢰(傀儡)로 삼아 내세우려는 것이다.
혈법주는 총순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물론… 총순찰께서 허락하시면… 입니다. 그리고 군사님께서 총순찰께서 정양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 거라시며 이걸 드리라 하셨습니다.”
“천인혈(千人血)을?”
총순찰은 혈법주가 내민 핏빛의 보주(寶珠)를 보며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보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천 명의 목숨으로 정제된 귀물(貴物)이자 귀물(鬼物)이다.
그것도 아무나 제물로 삼은 게 아니라 오백의 동자(童子)와 오백의 동녀(童女).
즉, 일천의 순혈만으로 정제되었기에 그 효과가 어마어마하다.
흑백쌍괴에게 주었던 혈백환(血魄丸)은 천인혈의 찌꺼기에 불과할 정도다.
그런 천인혈을 내놓았으니, 총순찰의 화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분의 대계를 위해 총순찰께서 빨리 복귀하셔야 한다 하셨습니다.”
“좋다…. 군사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허나 알아야 할 게야. 노부를 기만하는 게 있다면…….”
총순찰의 눈에서 살광이 번들거렸다.
“그 대가는 톡톡히 지불해야 할 것이다.”
* * *
금군은 운태산의 야생원숭이들과 눈물의 이별을 맞이했다.
이를 본 이백은 괜히 자신이 나쁜 놈이 된 거 같아 입맛이 썼다.
그렇게 운태산을 내려온 이백이 향한 곳은 하남의 개봉이었다.
호북으로 돌아가기 전에 걸왕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안 계신 거군요…….”
“워낙 자유로우신 분이셔서…….”
개방의 총타로 간 이백을 맞이한 인물은 걸왕이 아니었다.
지천명(知天命) 정도 되어 보이는 초로의 걸개였다.
이백은 그의 허리에 매여진 띠를 본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헌데… 후개(後丐)이십니까?”
“운 좋게 그리되었습니다.”
그의 허리에 매여진 띠의 수는 여덟 개.
후개 후보 중 한 명이 아닌 이미 후개라는 의미였다.
건장한 체구는 분명 평범한 걸인이 아님을 알려주지만, 십만방도를 거느린 개방의 다음 대 수장이라고 생각하기에 너무 순박한 인상이었다.
허나 순박하기만 했다면 결코 후개가 될 수 없다.
그만한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초절정지경… 과연 개방이구나.’
이백이 가늠한 그의 경지는 초절정지경.
이백이 비정상적인 성장을 해서 그렇지, 지천명의 나이로 초절정고수가 된 경우는 극히 적다.
개방의 후계자다운 인재였다.
이백은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백이라 합니다. 형주상단에 적(籍)을 두고 있습니다.”
“이 대협, 저는 본방의 후개를 맡고 있는 항룡개(亢龍丐)라 합니다.”
개방의 자랑인 항룡십팔장의 항룡(降龍)과는 의미가 다르지만, 걸호(乞號)에서부터 개방의 기대가 느껴졌다.
순박해 보이지만, 정파를 대표하는 정보집단의 후계자답게 이백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제갈세가의 무영대를 통해 정보 교란을 했다고 해도 개방의 귀까지 속이긴 어려웠으니 당연하다.
“이걸 방주님께 전해주시겠습니까?”
“이건……?”
항룡개는 이백이 건넨 호리병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백이 미소를 지었다.
“후아줍니다. 방주님께 부탁드린 게 있어서…….”
“후…아주요! 이 귀한 걸… 사부님께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항룡개는 호리병을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받았다.
후아주는 돈이 있다고 해서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부인 걸왕에게 전할 귀한 술이니,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구화마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백은 운태산의 야생원숭이들이 만든 후아주를 몇 병 챙겼다.
귀한 술이니, 자신과 귀한 연을 맺은 이들에게 선물하기 위함이었다.
그중 한 병을 걸왕에게 전하게 된 것이다.
‘후아주라면 걸왕께서 모른 척하지 않으시겠지.’
걸왕은 지나가는 말로, 십병암귀에 대해 알게 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거인의 말은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으나 이미 보은전을 반납한 상황이다.
대가 없이 개방의 정보를 얻으려 한다는 건, 내키지 않았던 참이다.
헌데 때마침 귀한 술을 얻게 되었다.
‘보물에는 임자가 있다더니, 걸왕께서 후아주의 주인이셨구나.’
걸왕을 만나 확답을 받지 못한 게 아쉽지만, 용무를 마친 이백은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항룡개가 그를 붙잡았다.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만.”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이백은 고갤 끄덕였다.
형주로 돌아가 상단 사람들과 작별할 예정이었지만, 항룡개가 시간을 물은 거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다행이군요. 귀한 분을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서 시간을 여쭈었습니다.”
“그러시군요. 헌데 귀한 분이시라면…….”
개방의 후개쯤 되는 인물의 입에서 귀한 분이란 말이 나왔기에 이백으로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무왕부의 예신군주이십니다.”
“군주(郡主)시라면… 왕야의?”
놀란 이백을 보며 항룡개는 고갤 끄덕였다.
이백이 놀랄 만했다.
군주(郡主)란 친왕(親王)의 여식에게 하사되는 작호다.
게다가 무왕(武王)은 황제의 신임을 한 몸을 받는 친아우다.
즉, 황제의 질녀를 소개해주겠단 뜻이었다.
개방의 후개가 대단한 지위긴 하지만, 지체 높은 왕족에겐 천한 걸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군주와 연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요.”
“아닙니다. 믿기 어렵다기보다는…….”
“사실 예신군주께선…….”
항룡개가 예신군주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 때, 고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곳은 개방의 총타.
곳곳에 고수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들을 가로막지 않았다.
“사형, 소매의 흉을 보고 계셨습니까?”
“하하, 군주님. 그럴 리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자의(紫衣)를 입은 젊은 여인과 흑의(黑衣)의 중년 사내들이었다.
그중 젊은 여인은 스스로 소매라 칭하며 항룡개에게 농을 걸 정도로 친근함을 표했다.
그 역시 그녈 반갑게 맞이하며 흑의 사내들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이백은 의문이 들었다.
‘예신군주인 거 같은데… 소매(小妹)?’
소매는 누이가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다.
허나 항룡개가 예신군주의 오라비라 생각할 수 없다.
이럴 경우라면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었다.
항룡개는 그녀에게 이백을 소개했다.
“군주님, 이분은 본방의 귀빈이신 이백 대협이십니다. 사부님께서도 인정하시는 대단한 고수이시지요.”
“사부님께서 인정하신 고수시란 말입니까?”
항룡개의 말에 예신군주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백은 그녈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백이라 합니다. 군주님을 뵈어 영광…….”
“호오~! 진짜군!”
이백은 인사를 마치지 못한 채 물러났다.
한 자루의 창이 그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난 탓이다.
창을 휘두른 건 의외로 예신군주였다.
왕족에 대한 예를 갖추지 못한 질책이 아닌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걸 본 항룡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군주님, 이 대협께선…….”
“항룡출래(亢龍出來)!”
예신군주는 항룡개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이백에 달려들었다.
허공을 가르는 창은 방금 전보다 더 쾌속했다.
이백은 허리를 비트는 것으로 예신군주의 창을 피했다.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창을 움직였다.
“항룡유희(遊戲)!”
빗겨난 창간(槍杆)이 이백의 허릴 노렸다.
지척이었고, 창간의 길이도 짧지 않기에 결코 피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런 예신군주의 예상은 빗나가고, 이백은 발목의 힘으로 그녀의 연격을 피해냈다.
자신했던 연격이 통하지 않자, 그녀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허공으로 뛰쳐 오르더니 창날을 아래를 향해 휘둘렀다.
후욱!
“항룡재천(在天)!”
창날은 당장이라고 이백을 벨 기세였다.
쾅!
창날은 그를 대신해 애꿎은 바닥에 작은 구덩이를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창술이 연이어 통하지 않자, 예신군주는 이를 악물고 창을 휘둘렀다.
허나 그녀의 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이백이 창간(槍杆)를 움켜쥐고 있던 탓이다.
“이쯤 하시지요, 군주님.”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