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금군(金君)
“허허… 검모궁의 제자들이 이곳은 어쩐 일인가?”
낭왕은 이남삼녀를 향해 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노인을 보며 움찔한 후,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에 천랑들 역시 그들을 경계했다.
자칫 충돌할 위기의 상황에서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한 걸음 나섰다.
“어찌 아셨습니까, 어르신.”
“한천(寒天)의 기운을 풍기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느냐. 검모(劍母)의 제자더냐?”
낭왕의 말에 여인은 물론 천랑들 역시 깜짝 놀랐다.
검모라 함은 검후(劍后)와 함께 무림 여고수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강자다.
검모의 제자는 소검후 못지않은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아닙니다. 소녀의 사부님은 한천검랑(恨天劍娘)이십니다.”
“아… 아… 그 아이였군. 그래서 한천의 기운이 느껴졌군.”
낭왕의 말에 교정정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사부님과 안면이 있는 줄 몰랐던 탓이다.
“사부님을 아십니까?”
“검모…. 그러니까 전대 검모와 함께 만난 적이 있지.”
삼선자만이 아니라 전대 검모까지 만난 적이 있다는 말에 교정정은 물론 검모궁 일행은 긴장했다.
전대 검모와 인연이 있다는 말은 상대가 조심스러운 상대란 의미와 다를 게 없던 탓이다.
“어르신께선 누구십니까?”
“말학이 낭왕 님께 인사드립니다.”
“나, 낭왕!”
교정정의 물음에 낭왕 대신 엽사가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검향들은 깜짝 놀랐다.
형주상단. 그것도 이백의 거처에 낭왕이 있으니 당연했다.
“날 알아본 자넨, 누군가?”
“후밴… 무명소졸에 불과합니다.”
그의 대답으로 낭왕임이 확실해졌다.
엽사는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허나 그를 알아본 자가 있었다.
“탈혼사(奪魂射) 아닌가?”
“탈혼사? ‘그’ 탈혼사 말이야?”
천랑들의 말에 엽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로서는 원치 않은 과거이자 과오였던 탓이다.
낭왕의 시선이 엽사를 지나 송안에게 향했다.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군.”
“…….”
“…….”
평소 유쾌했던 송안답지 않게 굳은 표정이었다.
엽사 이상으로 그 역시 과거를 잊으려 노력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낭왕도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았다.
“헌데 검모궁의 제자들이 이곳은 어인 일인가?”
“백수 님의 흔적을 찾으러 왔습니다.”
교정정의 말에 한 여인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녀는 교정정에게 다가갔다.
“백수가 백이 삼촌인가요?”
“삼…촌? 소저께서 그분의 조카인가요? 제가 알기로 그분은 가족이 없다 들었는데요?”
교정정의 말에 당령의 얼굴에 서운함이 드러났다.
그녀의 반응에 교정정은 당황했다.
자신의 말실수를 했단 걸 깨달았다.
“백이 삼촌이 정말, 가족이 없다 했나요? 정말요?”
“그게…….”
바짝 다가와 대답을 촉구하는 당령을 보며 그녀는 더욱 당황했다.
그때 침묵하던 송안이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잘못 들었나?”
“송안 님, 왜 그러세요?”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칠검향 효령이 물었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에 그에게 향했다.
“백수 아우에게 의형이 있단 말은 들었다. 제갈세가의 옥협이라고. 그리고… 그를 만나기 전에 함께 살던 가족 같은 부녀가 있다 했는데…. 그들은 죽었다 들었다.”
“죽…어? 저희가?”
이백이 천문산장의 봉공이 되기 전에 그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인 자가 바로 송안이다.
그리고 당시에 이백의 과거 역시 듣게 되었기에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때 외팔이 초로의 사내, 당혼이 입을 열었다.
“그날 대설산을 급히 떠났기에 오해를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가씨와 장 협사를 위협한 놈들이 저희에게 죽었기에…….”
“아, 아… 그럼 정말…….”
당혼의 추론에 당령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자신들이 죽은 줄 알고 상심했을 이백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당령은 교정정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언니, 언니는 백이 삼촌과 어떤 사이에요?”
“저, 저는…….”
교정정이 그들을 대표해 말을 해서인지, 아니면 여인의 촉인지 그녈 콕 집어서 물었다.
당령의 물음에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대답을 들은 거 같았다.
당령은 씨익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언니, 저는 당령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 * *
히이~잉!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제법 경사가 있는 산이건만, 검은 말이 흡사 평야를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올랐다.
얼마나 빠른지 봉우리 하나 오르는 게 순식간이었다.
“강소 운태산(云台山)이 아닌가?”
야군의 등에 탄 이백은 어리둥절했다.
사라진 십병암귀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백은 형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구화마검이 취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소에 온 김에 후아주(猴兒酒)나 챙겨 보려 했는데… 쩝~”
특별히 술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허나 후아주가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술임을 알고 있었다.
의부(義父) 제갈윤호와 형주상단주 현유에게 작별 선물로 주면 좋겠단 생각에 이곳 운태산에 올랐다.
간과한 게 있었다.
운태산은 동네 뒷산이 아니다.
수많은 봉우리가 모여 무척이나 넓은 산이다.
정확한 위치도 모른 채 움직이면 몇 날 며칠 산을 헤매는 정도로는 찾아낼 수 없다.
무엇보다 구화마검이 말한 운태산이 강소의 산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후아주는 향도 못 맡을 수 있다.
“하… 포기해야 하나?”
후아주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있는지 확신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운태산을 몇 날 며칠 뒤질 생각은 없었다.
후아주 찾기를 포기하려던 차에 이백의 품에 있던 설군이 고갤 내밀었다.
두리번거리던 설군이 갑자기 뛰쳐나갔다.
“어? 어디가! 야군은 따라가 보자!!”
신격(神格)을 회복하지는 못했으나 신기(神氣)가 대폭 늘어난 설군은 그야말로 바람과 같았다.
허나 빠름만 본다면 영수(靈獸)가 된 야군도 빠지지 않는다.
이백의 말에 야군은 콧바람을 크게 내뱉더니, 설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후~우~욱~! 후~우~욱~!
얼마나 빠른지, 바람 소리가 뒤늦게 들리는 거 같았다.
둘의 술래잡기는 몇 시진이 지속되었다.
육신만큼은 화경에 오른 이백이니 엄청난 풍압 속에서 버텨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둘은 드디어 멈추었다.
그 순간 야군에게서 뜨거운 수증기가 대량으로 뿜어졌다.
전력을 다해 달리면서 몸 안에 쌓긴 화기를 분출한 것이다.
야군은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였다.
등에서 내린 이백은 야군의 등을 쓰다듬어주곤 설군에게 다가갔다.
“설군아, 여긴 어디야? 어디 왜 왔… 음?”
이백의 기감에 많은 기척들이 느껴졌다.
이 깊은 산 속에 사람들이 살고 있나 싶었다.
허나 기척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원…숭이?”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족히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원숭이에겐 인간으로 착각할 정도로 흡사한 기척을 느껴졌다.
게다가 야생원숭이라서 그런지, 동물원의 원숭이와는 몸집부터 달랐다.
낯선 인간의 존재를 발견한 원숭이들은 모여들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끼익!”
원숭이들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이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원숭이가 뿜어내는 위협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심장이 멈출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허나 완벽하지 않다고 해도 화경에 오른 이백에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게 화가 났는지, 덩치 좋은 원숭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후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흡사 권법 고수의 것 같았다.
“제법이네?”
이백은 원숭이의 주먹을 가볍게 받아냈다.
고통을 주긴 어려웠으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진 위력은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정작 주먹을 휘두른 원숭이는 아픈지 소리를 질렀다.
“끼익!”
그제야 원숭이들도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몽둥이를 쥐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몽둥이였다.
도구를 사용할 정도로 영특했다.
“이걸 어쩌냐.”
성난 원숭이 무리를 본 이백은 난감했다.
마냥 피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때리기도 뭐 했다.
그런 이백의 마음을 아는지 설군이 그들의 앞에 섰다.
작은 고양이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자 원숭이들이 비웃었다.
약자를 무시하는 모습은 정말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설군이 입을 열었다.
“크아아앙!!”
설군이 포효하는 순간, 당장이라고 달려들 거 같던 원숭이들은 쥐고 있던 몽둥이로 버려둔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일부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워했다.
짐승의 세계에서 힘의 서열이 더욱 확실한 법이었다.
아무리 야생원숭이들이 위협적이라고 해도 기세를 드러낸 백호의 앞엔 미력한 짐승일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포효가 들려왔다.
“크어엉!!”
힘이 느껴지는 포효에 경기를 느끼던 원숭이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음? 새끼… 원숭이는 아닌 거 같은데…….”
몸집이 큰 야생원숭이들과 달리 새끼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작은 원숭이었다.
게다가 야생원숭이들은 갈색의 털을 가졌다면 작은 원숭이는 밝은 금빛의 윤이 나는 털을 가졌다.
몸집이 큰 야생원숭이들은 자신보다 몇 배나 작은 원숭이를 향해 몸을 바짝 엎드렸다.
흡사 왕의 행차를 본 백성들처럼 말이다.
“영수?”
금모(金毛)의 원숭이가 영수라는 걸 눈치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설군과 금모의 원숭이 사이에 눈빛이 충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만한 표정을 짓던 금모의 원숭이가 기가 팍 죽어 설군의 눈치만 살폈다.
아무리 신격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해도 설군은 백호(白虎).
영수라고 해도 원숭이가 비빌 상대가 아니었다.
설군은 거대화 갈 것도 없이 갈무리하고 있던 신기를 드러내자 금모의 원숭이는 백호의 진체(眞體)를 느낀 것이다.
그렇게 금모의 원숭이를 제압한 설군은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이백의 품에 들어왔다.
그런 설군을 이백이 쓰다듬었다.
“잘했어, 설군아.”
이백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설군은 웃었다.
그 모습에 금모의 원숭이는 충격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고, 자신을 두렵게 한 존재에게 주인(?)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금모의 원숭이는 이백의 앞에 넙죽 엎드려 굴복의 의사를 밝혔다.
[영수 ‘금모신원’이 굴복했습니다.]
[영수 ‘금모신원’이 계약을 맺길 원합니다.]
[가(可)/부(否)]
이백 덕분에 영수로 성장한 야군과 달리 금모의 원숭이는 금모신원(金毛神猿)이라 불리는 영수였다.
“가(可). 너도 이제 내 친구다.”
[영수 ‘금모신원’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순간 금모신원의 금모가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설군, 야군에 이어 세 번째로 계약을 맺은 짐승이자 영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백과의 계약을 통해 설군을 느낀 금모신원은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덤볐다면 어찌 되었을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백은 금모신원을 바라봤다.
“금원(金猿)? 아니야. 기왕이면… 금군(金君)이라고 하자.”
금원이라는 이름도 잘 어울렸지만, 설군과 야군의 형제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금군이라고 지었다.
이백의 말에 금군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우끼기~ 우끼기~”
이름을 부여받았다는 건, 많은 짐승 중 하나가 아닌 하나의 존재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그게 바로 이름의 힘이다.
이름을 선물해준 것만으로 이백과 금군의 유대가 더욱 강해졌다.
“앞으로 잘 부탁해, 금군아.”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