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끊어진 흔적
“이제 어쩔 생각인가?”
걸왕의 물음에 이백의 머리가 복잡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걸왕은 피식거리곤 구운 오리의 다리 하나를 뜯었다.
거지는 거지다워야 한다며 반점(飯店)의 출입을 고사하는 걸왕을 위해 이백이 술과 구운 오리 한 마리를 사 온 것이다.
오리 기름에 입술이 반들반들해진 걸왕은 술을 한잔 들이켰다.
“크으~! 좋다, 좋아~! 다 산 노인 같은 표정 짓지 말고, 한잔 들게.”
“…….”
이백은 말없이 술 한잔을 마셨다.
반점에서 파는 술이라 해봤자 고급스러울 리 없고, 독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술이 독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심기는 더 복잡했다.
“흑천회주가 그리되었다고 이 바닥을 완전히 뜰 놈들이 아닐세.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다시 나타날 걸세.”
“그러겠지요.”
머리를 잃었다고 한들, 걸왕의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었는지 흑천회주의 시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시체의 상태가 너무 참혹해, 처음에는 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허나 시체에는 죽은 자가 남긴 많은 게 정보가 있다.
그 때문에 흑천회주의 죽음과 그의 죽음에 십병암귀가 있다는 것 역시 알아낼 수 있었다.
“그전까지 이 동네가 시끌시끌하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흑천회주가 죽었네. 그러한 비밀은 오래 숨겨질 거 같나?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려질 걸세. 그럼 흑천회의 영역을 차지하겠다 별의별 잡놈들이 다 움직일 걸세. 그게 아니라도 흑천회 내에서 회주 자리를 놓고 싸우는 녀석들이 없겠나? 당연히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흑천회의 영역은 강남 일대이지만, 흑천회주가 직접 관리하는 영역은 강소성이다.
특히 소주(蘇州)는 거대한 검은 돈이 흐르는 땅이다.
흑도는 물론 사파에서도 눈독을 들일 만하다.
개중에는 대리인을 둔 정파도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흑천회주에게 굴복해 휘하에 들어간 이들 역시 흑천회를 차지할 기회를 두고만 볼 리 없다.
이러니 조용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개방에선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두고 보는 거지. 본방이 협의지문이라고 불리는데, 흑도 놈들과 드잡질이라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거지들의 방파이고 무소유(無所有)가 원칙이지만, 의외로 개방도 알짜배기다.
개방이라고 공짜로 정보를 제공하는 게 아니다.
개방의 정보를 이용하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
그게 돈일 수 있고 정보일 수 있으며 협(俠)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개방의 도움을 받은 자들이 기부하기도 한다.
이를 바탕으로 개방은 객잔이나 반점 등을 운영한다.
그곳은 전직 개방도이거나 개방도의 가족들이 맡게 된다.
개방도라고 모두 천애고아는 아니었고, 그들의 가족에게 먹고살 기회를 주기 위함도 있다.
그들이 운영하는 객잔이나 반점에 흘러들어오는 정보를 수집하니, 개방의 또 다른 정보원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개방의 곳간은 가득 차지만, 수재(水災)나 가뭄 등으로 민초들이 어려워지면 곳간을 푼다.
이게 개방이 무소유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것도 그렇네요. 허나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건 민초들일 텐데…….”
“그게 삶일세. 모든 걸 본방이 도울 수는 없지.”
사람은 배가 고프기에 일을 하고, 몸이 아프기에 운동을 하는 것이다.
하늘이 인간에게 시련을 주는 건 그러한 이유다.
개방이 아무리 협을 중시한다고 해서 모든 걸 도울 수도, 도와서도 안 된다.
그들이 상대하는 건, 인간 같지 않은 자들일 때다.
그게 개방의 협(俠)이다.
‘십병암귀가 나타날 때까지 마냥 있을 수도 없고…….’
흑천회주의 죽음으로, 흑천회와의 악연이 끊겼다고 할 수 없다.
십병암귀가 살아 있는 한, 다시 형주상단과 검모궁을 노릴지 모르니 말이다.
이백은 복잡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은원의 고리를 끊는 게 이리도 어렵다니…….’
* * *
챙! 채챙!!
일곱의 사혈(死穴)을 향해 비수가 날아갔으나 빠르게 회전한 한 자루의 창에 의해 모두 튕겨 나갔다.
허나 비수는 속임수였다는 듯 어느새 창수(槍手)에게 다가가 발로 후려 찼다.
퍽!
여인의 발은 창수의 몸에 닿지 못했다.
어느새 창수가 창대로 막은 탓이다.
그녀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낑낑거렸다.
“히잉~!”
“요 녀석아, 당할 줄 알았느냐.”
실전을 방불케 하는 비무였지만,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있는 만큼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았다.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초로의 사내가 창수를 질책했다.
“그냥 피하지, 그 무식한 창으로 막으면 어떡하나. 우리 령이 다치면 어떡하라고?”
“커험, 우리 령이도 무림인인데 다치면서 크는 거지. 화초로 커서 쓰나?”
여인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따듯함이 어려 있었다.
그녀에게 애정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들보다 한 세대 위로 보이는 노인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거대한 칼(巨刀)이 들려 있었다.
이런 칼을 사용하는 도객은 흔할 리 없었다.
초로의 사내들은 노인을 향해 허릴 숙였다.
“어르신, 나오셨습니까.”
“낭왕 님, 몸은 어떠십니까?”
노인의 정체는 낭인막의 수장이자 무림십왕의 낭왕이었다.
초로의 사내들 역시 낭인막 소속으로, 내상을 입은 그의 호법을 서기 위해 움직인 낭인들이다.
그 수는 몇 안 되지만, 하나 같이 절정지경에 오른 천랑들이었다.
여인은 낭왕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몸은 어떠세요?”
“하하… 령아. 이 할애비는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낭왕은 여인에게 무척이나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손녀가 있단 소문은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혈육지간이 아니다.
그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삼남일녀(三男一女)로 특히 외팔이 초로의 사내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가주님은 뵙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낭왕과의 인연이 아가씨께 큰 힘이 될 테니…….’
그녀의 조부는 낭왕보다 더 대단하다.
그런 대단한 인물도 제 손녀를 만나보지 못했으니, 이런 살가운 관계를 맺지 못했다.
사천당가라는 거대한 배경과 권세를 가진 독선(毒仙)이라도 이 장면은 부러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인의 정체는 바로 당령이었다.
이백을 만나지 못한 그녀는 사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형주상단에 남았다.
북천표국의 대표두 홍원은 반대했으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표행을 마치지 못한 상황이라 계속 잔류할 수 없었기에 당외삼비와 장철우에게 그녈 맡기고 먼저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밝고 친화력 좋은 당령은 형주상단의 사람과 친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신세를 지고 있는 낭왕과 천랑들 역시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 경험 많은 천랑들을 통해 무림을 배웠다.
“휴~ 다행이네요.”
“허허… 걱정 끼쳐서 미안하구나. 그보다 재미있는 손님들이 왔구나.”
낭왕의 의미 모를 중얼거림에 곁에 있던 당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몹시 귀여워 보는 이로 하여금 입가에 미소가 어리게 만들었다.
그 시각, 형주상단의 상단주 현유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현 노야.”
중년 여인의 말에 현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관계가 썩 나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 부인은 잘 지내셨소?”
“잘 지냈습니다. 아, 이분은 본궁의 삼선자이십니다.”
중년 여인의 소개에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인이 포권을 취했다.
“우소교라 합니다.”
“검모궁의 선자님이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형주상단을 이끌고 있는 현유라 합니다.”
그녀는 검모궁의 삼선자 우소교였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자 하연주는 다른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들은 본궁의 칠검향, 팔검향 그리고 제 여식입니다.”
“처, 처음 뵈어요. 효령입니다. 상단주님.”
“교정정이 상단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설하입니다, 상단주님.”
하연주를 제외하면 선자 한 명에 검향이 셋이나 움직였다.
그들 일행이 모두 여인인 건 아니었다.
초로의 사내 역시 셋이나 되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백수… 님께서 계신 곳에서 오셨습니다.”
무림에서도 흔치 않은 궁객 한 명과 검객 두 명이었다.
현유는 그들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져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호법님께서…….”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우는 약한 녀석이 아닙니다.”
“하하, 맞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분명 무사할 겁니다. 녀석은…….”
“…….”
그들은 이백의 생존을 굳게 믿는 눈치였다.
그를 곁에서 수년 간 지켜봤으니,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천문산장의 궁객, 엽사(獵師)가 입을 열었다.
“백수 아우의 처소를 알려주시겠습니까? 흔적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너희도 잠시 나가 있거라.”
우소교는 세 검향을 향해 말했다.
현유는 중요한 말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형주상단의 하인이 들어왔다.
엽사와 미중년 송안(松安), 그리고 세 검향이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 남은 자는 현유를 제외하면 우소교와 하연주. 그녈 호위할 검교(劍敎)만 남았다.
검모궁와 천문산장이 움직인 건, 이백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형주상단은 어디까지나 본궁과 협력관계이지, 본궁 예하는 아닙니다. 해서 상회를 세울 생각입니다. 이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하연주의 말에 현유는 고갤 끄덕였다.
형주상단이 되는데 검모궁의 도움이 컸으나 그렇다고 수직관계는 아니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나 막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검모궁에선 재정을 위해서 새로운 준비를 하려고 하는 듯했다.
“어찌 도와드리면 되겠소?”
“현재 공안(公安) 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잡을 때까지 상단으로서 지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안보다는 사시(沙市)가 어떻소? 형주와 거리도 가깝고, 지금이라면 자리 잡는데 수월할 것이오.”
“사시라… 형주의 상권과 겹치지 않겠습니까?”
공안도 형주와 가깝기는 하지만 사시만큼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도 걸리지 않은 거리였기에 형주상단의 도움을 쉬이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형주상련의 일로 사시의 상권이 파고들기에 좋았다.
게다가 항운이 발달해 곡물, 면화, 소금 등이 집결해 어떤 면에서는 형주보다 짭짤한 지역이었다.
그에 비해 공안은 사시에 비해 상권이 안정된 편이라 자리를 잡는데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현유의 입장에서도 검모궁의 상회가 가깝다면 무력적 지원을 받기 편하다는 점 역시 고려했다. 그 역시 장사치인 만큼 이런저런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주는 우소교를 바라봤다.
그 의미를 아는지, 우소교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 일의 책임자는 하 부인이오. 그러니 하 부인께서 결정을 내리시오.”
“감사합니다. 삼선자님.”
우소교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 부인은 현유와 본격적으로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각, 집무실에서 나온 이들은 이백이 거했던 백수각으로 향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