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흑천회주(黑天會主)의 최후(最後)
이백이 남경에 당도하기 며칠 전이었다.
흑천회주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영, 아직도 찾지 못했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그의 불편한 심기가 묻어났다.
십병암귀만큼은 아니지만, 흑천회주의 곁에 모시는 암영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기에 납작 엎드렸다.
“송구스럽사옵니다.”
“…찾아라. 이리 죽었을 리 없다.”
“존명!”
흑천회주의 명을 받은 암영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홀로 남은 흑천회주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낭왕을 상대로 살아 남았다라…….”
흑천회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단순히 심기가 불편한 것만이 아니었다.
특히 아끼는 수하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기색은 더욱더 아니었다.
“무위를 숨기고 있던 것이냐, 암귀.”
흑천회주가 흑도의 제왕이라면, 십병암귀는 공포라고 불린다.
그런 십병암귀의 강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허나 그가 화경고수라는 건 예상치 못했다.
“존야(尊爺), 그분의 감시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흑천회의 주인이 된 것, 흔한 지방 흑도세력이었던 흑천회가 흑도의 하늘이 된 것 모두 젊은 날 그에게 손을 내민 한 존재 덕분이다.
감히 존명(尊名)조차 알지 못해 존야라고 부른 거인.
존야는 흑천회주에게 고수를 보내주었다.
그가 바로 흑천회주의 분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십병암귀다.
흑천회주는 십병암귀를 앞세워 각 성(省)의 흑도세력을 장악하고, 강남 일대까지 그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목표는 흑도일통(黑道一統).
강남 일대의 흑도를 장악한 이후 언제부터인지 삐걱거리는 걸 느꼈다.
그렇기에 흑천회주는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내실을 다지기 시작했다.
“역시 내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그랬다면 화경이란 걸 몰랐겠지.”
강남 일대를 장악한 이후 흑천회주는 웬만해선 십병암귀를 자신의 시선 밖으로 보내지 않았다.
아직 조력자로서 선을 넘지 않았으나 완전히 자신의 사람이 아닌 그를 풀어두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흑천회주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역시, 제거해야겠어. 놈이 먼저 딴마음을 먹기 전에…….”
십병암귀는 어디까지나 조력자. 믿고 방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화경(化境). 그들은 일기당천, 만부부당을 넘어 일인군단이라고 할 정도로 막대한 힘을 발휘하는 괴물이다.
허나 괴물이라도 결국 인간이다.
무림에서 기인만 많은 게 아니라 별의별 괴이한 물건이 많이 존재한다.
호신강기를 파괴할 수 있는 금용암기(禁用暗器).
만독불침조차 중독시킨다는 무형지독(無形之毒).
신선조차 취하게 만든다는 천일취(千日醉).
어린아이가 휘둘러도 천하를 쪼갠다는 신병이기(神兵異器)까지.
세상에 떳떳하지 못한 물건은 자연스럽게 음지에 모여든다.
그런 음지를 지배하는 게 흑도.
흑도의 제왕이 바로 흑천회주다.
괴물 같은 화경고수라도 만반의 대비를 한다면 죽이지 못할 게 없다.
“본좌가 이 자리를 어떻게 차지했는데… 내어줄 수는 없지.”
“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쉬이 거두는 게 아니군.”
누군가의 목소리에 흑천회주는 흠칫 놀랐다.
허나 곧 정체를 깨달았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암귀…….”
“그래, 노부다.”
허공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천회주의 말처럼 그는 십병암귀였다.
이젠 흑천회주를 주군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듯 더 이상 말을 올리지 않았다.
“그동안 무위를 숨기고 있었군.”
“병신 같은 널 안심시키기 위함이었지.”
고수는 하수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다.
허나 반대로 하수는 고수의 경지를 가늠할 수 없다.
지금까지 흑천회주는 그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헌데 이제 보니 그조차 거짓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흑천회주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본좌는 흑도의 하늘이다! 예를 갖춰라!”
흑천회주의 호통과 함께 검은 손(黑手)이 십병암귀에게 쇄도했다.
그걸 보며 십병암귀는 피식거리며 손을 휘둘렀다.
쾅!
십병암귀의 손 역시 검게 물들어져 있었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네게 흑천마수를 가르친 게 노부라는 걸 잊었나 보군.”
십병암귀가 절기를 전수한 게 암귀들만이 아니다.
흑천회주 역시 그에게 절기를 전수받았다.
그게 바로 흑천마수(黑天魔手)였다.
당연히 흑천회주의 수는 십병암귀에게 통하지 않았다.
흑천회주는 나직하게 말했다.
“낭왕에게 입은 부상이 가볍지 않을 텐데 무리하는군.”
“믿는 게 고작 그거였나.”
십병암귀는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허나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흑천회주의 말처럼 낭왕에게 입은 내상이 완전히 나은 게 아닌 탓이다.
그럼에도 움직인 건, 내상을 입었다고 한들 흑천회주 따윈 언제든 제거할 수 있단 자신감 때문이다.
“고작일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 순간 앉아 있던 흑천회주가 태사의(太師椅)에서 몸을 날렸다.
십병암귀와의 거리가 가깝지 않았으나 코앞까지 당도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 그의 손은 검게 물들어져 있었다.
물론 십병암귀 역시 당황하지 않고, 똑같이 흑천마수를 펼쳐 대응했다.
쾅!
흑천마수(黑天魔手) 대 흑천마수(黑天魔手).
충돌하는 순간, 반탄력에 의해 두 사람 모두 밀려났다.
그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달랐다.
굳어진 흑천회주와 달리 십병암귀의 표정에는 살짝 놀람이 엿보였다.
“9성? 속인 게 나만이 아니었군. 회주.”
“역시… 이걸로는 부족한가.”
십병암귀가 알고 있는 흑천회주의 성취는, 8성이었다.
헌데 9성의 흑천마수를 펼쳤다.
8성과 9성은 일성(一成) 차이지만, 그 위력은 전혀 다르다.
충분히 숨겨진 패로써 부족함이 없다.
허나 십병암귀를 상대로는 부족했다.
그의 내상의 수준이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깊지 않을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떡할 거지?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인가.”
“본좌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9성의 흑천마수가 분명 그의 숨겨진 패다.
허나 최후의 패는 아니다.
흑천회주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단약이었다.
그는 붉은 단약을 입에 넣었다.
“지금 영약 따윌 먹는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느냐.”
“영약? 독이라면 모를까.”
그 순간, 흑천회주의 육신이 커지고, 기세가 더 강렬해졌다.
실제로 그의 근육이 팽창하고 기운이 증폭되었다.
방금 흑천회주가 먹은 건 평범한 단약이 아니란 뜻이다.
십병암귀는 그가 먹은 단약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사라혈옥정(邪羅血玉錠)? 미쳤군, 미쳤어.”
“맞다. 본좌는 미쳤지. 미치지 않고,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복용하면 일정 기간 동안 천하제일인을 만들어준다는 전설적인 마약(魔藥)이다.
영약이 아닌 이유는 일정 기간 이후에는 모든 걸 잃게 되기 때문이다.효과만 본다면 군사 혈불(血佛)의 혈백환보다 뛰어나다.
그걸 알면서 사라혈옥정을 복용했다는 건, 십병암귀를 죽이고 싶은 그의 마음이 깊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흑도의 제왕 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굳은 염원이었다.
그 효과가 진짜라는 듯 흑천회주의 기운이 육안에 보일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걸 본 십병암귀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가 죽나 보자.”
“쿨럭… 젠장!”
십병암귀의 입에서 피가 섞인 기침을 했다.
흑천마수가 아무리 강력해도, 십병암귀가 익힌 절학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수세에 밀리는 건, 십병암귀였다.
낭왕에게 입은 내상도 내상이지만, 사라혈옥정을 통해 강해진 힘이 십병암귀를 상회한 탓이다.
“흐흐흐… 본좌를 죽이겠단 놈이 어디 갔나?”
“깝죽거리지 마라… 사라혈옥정 따위에 의지한 놈이!”
흑천회주의 비아냥에 십병암귀가 발끈했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다.
아직 기가 살아 있는 그를 보며 흑천회주는 흑수(黑手)를 움직였다.
서장의 전설, 포탈랍궁의 밀종대수인(密宗大手印)처럼 거대해져 십병암귀를 압살하려는 듯 짓눌렀다.
콰쾅!!
거대한 흑수, 흑천마수는 환상이 아니라는 듯 거대한 손바닥 자국이 움푹 생겨났다.
헌데 사람의 시체는 고사하고 혈흔도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 언제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십병암귀가 익힌 절학 중 하나인 유령보(幽靈步) 덕분에 간신히 피한 듯싶었다.
흑천회주는, 두 번은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거대한 흑천마수를 펼쳤다.
그것을 보며 십병암귀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든 죽일 수 있는 하찮은 자라 생각했던 그에게 이러한 취급을 받는 게 무척이나 자존심 상한 듯 표정이었다.
콰쾅!
십병암귀는 극성의 유령보를 펼쳐 흑천마수를 피한 후 흑천회주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달려들려는 순간, 또 다른 흑천마수가 그를 덮쳤다.
사람의 손은 두 개. 흑천회주는 그가 피할 걸 염두해 시간 차로 오른손에 이어 왼손도 흑천마수를 펼친 것이다.
“크윽! 쿨럭…….”
“흐흐… 잡았다.”
십병암귀는 흑천회주의 거대해진 왼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가공한 악력에 그는 피가 섞은 기침을 했다.
연혼갑을 익혀 금강불괴를 이루었다 생각했으나 그렇지는 못한 듯하다.
십병암귀의 입에서 비명이 이어질수록 그는 기뻐했다.
“죽어… 죽어… 크아악!”
“제, 젠장… 우웩!”
십병암귀를 압살시키려던 흑천회주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덕분에 십병암귀를 쥐었던 흑천마수가 풀렸다.
구속에서 풀려난 그는 피를 토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십병암귀가 풀려난 건, 흑천마수로 인해 괴로워하는 와중에 무형마공을 운용해 비수를 만들어 흑천회주의 눈을 노린 덕분이다.
내상이 극심한 상황이라 비수도 간신히 형성한 것인데, 조준이라고 정확하겠는가.
흑천회주의 눈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하고, 그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죽어! 죽어! 죽어!!”
비록 눈을 정확히 맞춘 게 아니라도 상처를 입혔기에 그 고통이 흑천회주의 이성을 날려버린 것이다.
조금 전처럼 거대해진 건 아니지만, 흑천마수를 마구 펼쳤다.
흑천마수가 닿는 곳마다 부서지고 으깨지며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물론 그들이 있던 전각은 진즉에 사라졌다.
흑천마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했다.
극심한 내상 때문에 흑천마수를 피하지 못한 십병암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킥! 네놈이 맞았구나!”
그의 비명에 흑천회주는 광기 어린 광소(狂笑)를 지었다.
십병암귀는 오른손으로 사라진 왼팔을 부여잡았다.
흑천회주가 이성을 잃고 마구 펼쳤던 흑천마수가 그의 왼팔을 앗아가고 말았다.
팔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는지, 십병암귀에게 다가갔다.
흑천회주는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칠흑같이 검은 흑천마수는 당장이라도 십병암귀를 짓눌러 버릴 거 같았다.
“네놈을 죽여, 그분께 알리겠다! 흑천회는 내 거라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 큭! 으아악!!”
십병암귀에게 향하던 흑천회주의 오른손이 피로 물들었다.
그 피는 십병암귀의 것이 아니다.
흑천회주의 핏줄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가 비명과 함께 몸을 비틀거렸다.
그건 시작이었다.
흑천회주의 육신 여기저기서 핏줄이 터지기 시작해, 혈인(血人)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혈인이 된 흑천회주를 보며 십병암귀가 차가운 조소를 지었다.
“약효가 끝났…군. 이리될 줄 몰랐더냐.”
“다, 닥쳐! 본좌는… 본좌는 이대로 끝나지…….”
퍽!
십병암귀가 휘두른 주먹에 흑천회주의 머리가 사라졌다.
그러자 그의 육신이 허물어졌다.
마음 같아선 자신이 당한 것 이상으로 처절한 죽음을 주려 했으나 십병암귀 역시 한계에 도달한 탓에 버틸 여력이 없었다.
“…젠장, 다들 비아냥거리겠군. 고작 기르던 개에게 물려 팔 병신이 되었다고.”
그가 빠져나오는 길마다 머리를 잃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흑천회주를 죽이겠다고 결정한 순간, 그의 측근들을 정리했다.
십병암귀를 향해 고갤 숙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흑천회주의 명을 받고 떠난 암영을 비롯한 암귀들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주군.”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