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걸왕(乞王)
“허… 재미있는 녀석이군, 그래.”
쪽지를 읽은 노인은 뭐가 재밌는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는 행색이 추레한 게 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동배로 보이는 또 다른 노화자(老化子)가 물었다.
“누가 말이오, 방주(幇主).”
“보시게.”
한 고을에서 문전걸식하는 거지들의 우두머리를 왕초라 부르지만, 감히 방주(幇主)라고 칭하지 않는다.
허나 딱 한 곳만은 거지들의 우두머리를 방주라 칭하는 곳이 있다.
구대문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천하제일대방 개방(丐幇).
노화자가 개방의 용두방주이자 무림십왕의 일좌를 맡고 있는 걸왕(乞王)이 바로 그일 것이다.
그리고 걸왕이 쪽지를 건넨 동배의 노화자는 일전에 이백을 만났던 추풍신개였다.
쪽지를 읽은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천회의 본거지를 알려달라니, 제정신이 아니군.”
“젊음의 패기 아니겠는가.”
천하제일을 앞다투는 정보집단인 개방의 수뇌답게 이백이 흑천회의 본거지를 알려달란 이유를 알아차렸다.
십병암귀가 벌인 일을 모른다면, 정보집단으로서 개방도 다 된 것이다.
허나 개방은 여전히 하오문과 함께 천하제일을 앞다투는 정보집단이다.
추풍신개는 걸왕에게 물었다.
“그럼 정말 알려줄 생각이오? 아무리 옥룡개를 쓰러트린 녀석이라지만, 상대는 흑천회외다.”
“보은전으로 요구했는데, 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걸왕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본 추풍신개는 한숨이 나왔다.
지금은 용두방주가 되었지만, 후개 후보 시절에는 가장 순위가 떨어졌다.
그의 재능이 부족했던 게 아니었다.
철이 없고 장난기가 많았던 탓이다.
“방주, 다 늙어서도 그 버릇 못 고치오?”
“흐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 하지 않은가.”
걸왕의 말에 추풍신개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난 어린 표정이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단순히 장난스러운 게 아니라 이 와중에도 냉철한 계산을 하고 있단 증거였다.
‘십병암귀의 무위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분명 본방의 실책이야. …흑천회의 실체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이백의 요구를 들어주려는 건 보은전 때문만이 아니었다.
개방의 실책을 바로 세울 기회로 생각한 탓이다.
결정을 내린 걸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는 게요?”
“바람 좀 쐬고 오지. 그 녀석에겐 알려주게. 흑천회가 남경에 있다는 걸…….”
말이 끝나기 전에 걸왕이 사라졌다.
개방에서 제일 빠르다고 알려진 인물은 추풍신개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걸왕. 그의 전력은 추풍신개조차 모르니 말이다.
“어휴…. 철협개는 천강개들을 소집해라.”
“철협개가 장로님의 명을 받듭니다.”
추풍신개의 말에 중년 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협개(鐵俠丐)는 오결제자인 당주이며, 천강개를 이끄는 인물이었다.
천강개(千强丐).
각 분타에서 분타주의 추천을 받은 인재들을 장로들이 직접 가르쳐 양성한 개방의 유일한 전투집단이다.
추풍신개가 그런 천강개를 소집한 건 이백의 요구를 들어주고 나 몰라라 하지 않겠단 의미였다.
협의지문(俠義之門)이라 불리는 개방다운 처사다.
“제때 당도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 * *
“흑천회와 참 어울리지 않는 도시네.”
남경은 무척이나 고풍적인 도시다.
남경은 강소성의 성도일 뿐만 아니라 육조의 고도(古都)라고 불렸던 땅이다.
무엇보다 북경으로 천도(遷都)하기 전까지 명(明)의 황도이기도 하다.
천도와 함께 많은 관리가 황도로 자리를 옮겼으나 여전히 많은 명문가와 권문세가가 자리 잡고 있으니, 흑도의 하늘이라는 흑천회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흑천회의 돈주머니(錢囊)인 소주에 본거지가 있을 거라 추측한다.
정작 흑천회는 이곳 남경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할 곳이기 때문이다.
허나 개방의 눈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무작정 쳐들어갈 수 없으니 우선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호북의 당양에서 강소의 남경까지는 정상적인 속도로 이동한다면 족히 두어 달이 걸릴 거리다.
만약 무림 고수가 경공을 펼치거나 말을 자주 갈아탄다면 한 달 정도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허나 보름 만에 당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록 남경이 안휘성만 지나면 바로 당도할 수 있는 위치라도 말이다.
헌데 이백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물론 그가 익힌 백수행공(百獸行空)은 대단한 보신경(步身輕)이다.
그렇다고 한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가능했던 건 야군(夜君) 덕분이다.
내단을 품고 영수가 된 야군은 전설의 천리신마(千里神馬)라는 되는 듯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지역이 바뀔 정도였다.
아니었다면 보름 안에 남경에 도착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그것도 사람들의 눈을 신경 써 관도를 피해서 달려서 보름이 걸린 것이지, 아니었다면 그보다 더 빨리 당도했을 것이다.
이백은 화려하지도, 허름하지도 않은 객잔에 들어갔다.
그러자 열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어린 청년이 그를 맞이했다.
“공자님,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쉬시겠습니까?”
“둘 다 할 생각이네. 그리고 이 녀석을 부탁하네. 보통 녀석이 아니니 조심하고.”
“예! 공자님!”
이백은 야군의 고삐를 넘겨주고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밤에 정찰하기 전까지 쉴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걸음을 멈췄다.
먼저 자리하고 있는 술꾼들의 대화를 들은 탓이다.
“천송장(千松莊)이 그리될 줄 누가 알았나.”
“그러게 말이야. 대체 어느 망종이 그런 짓을…….”
천 개의 소나무가 아니라 천년송을 둔 장원으로, 남경에서도 제법 유명한 곳이다.
황족의 별장이라는 말도 있었고 낙향한 고관의 장원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정작 장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허나 천송장이 언급되자 이백이 걸음을 멈췄다.
“범인은 잡았던가?”
“잡았겠는가. 딱 봐도 무림인 소행인 거 같은데, 관(官)이 뭘 할 수 있겠나.”
관무불가침(官武不可侵)이 원칙이라 무림인이 낀 사건에선 관(官)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애초 일개 관아에서 무림인을 상대할 능력도 없다.
단, 고위급 관리와 연관이 있다면 말이 다르다. 그땐 황실고수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무림 역시 그걸 알기에 고위급 관리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백이 술꾼들에게 슬쩍 물었다.
“실례지만, 천송장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음? 공자께선 타지 사람인가 봅니다?”
그들은 귀태 나는 이백을 보곤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히 밉보였다가 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백은 고갤 끄덕였다.
“호북에서 왔습니다. 천송장의 천년송(千年松)이 멋지다 들었는데…. 아, 여기 술 한 병 드리게.”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이백이 술을 주문하자 술꾼들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이백 역시 공짜 술을 술 생각이 없다는 듯 대답을 재촉했다.
“알려주시겠습니까?”
“커험… 공자께선 실망하시겠지만, 더 이상 천년송은 없습니다. 이게 다 어떤 망종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수십 명이나 죽고, 그 멋진 천년송까지 망가지다니… 에잉!”
그들의 말에 이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은 이백이 실망했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수십 명이 죽어? 나보다 먼저 움직인 자가 있단 말인가!’
황족의 별장 혹은 낙향한 고관의 장원이라 알려진 천송장의 정체가 바로 흑천회의 본거지였다.
그런 만큼 천송장에는 흑천회의 정예고수들이 포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수십 명이 죽었단 말은 가벼이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젠장, 대체 누가.’
그날 밤, 이백은 은밀히 천송장의 담을 넘었다.
* * *
“젠장, 하필 이런 날 걸릴 게 뭐야?”
“재수가 없으려니까.”
감색 옷을 입은 자들, 관아의 포쾌(捕快)들은 투덜거렸다.
얼마 전 살인 사건이 난 흉가를, 그것도 늦은 밤 지킨다는 게 얼마나 무섭겠는가.
허나 일개 포쾌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위에서 지키라면 지켜야지.
휘이~익~
스산한 바람 소리에 포쾌들은 움찔했다.
귀신이라도 나올 분위기에 침만 꼴깍 넘길 뿐, 누군가 담을 넘었다는 사실까지 알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가 천송장 안으로 스며들었다.
장원 곳곳에 거적때기가 놓여 있었다.
죽은 시체를 가려두었지만, 혈향까지 덮인 건 아니었다.
‘고수…….’
거적때기를 들어 시체의 사인(死因)을 살폈다.
머리가 으깨져 있었다.
잔혹한 손속이었지만, 반대로 고통도 느끼지 않게 단숨에 숨을 끊었다.
게다가 두 번도 필요 없이 일수(一手)였다.
다른 거적때기를 들어 또 다른 시체들도 살폈다.
목이 베이거나 심장이 뚫린 시체도 여럿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하나 같이 저항도 못 한 채 일격에 절명했다는 점이다.
흉수가 한 명은 아닌 듯하나 그 솜씨는 하나같이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의 시체들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이건!’
지금까지 지난 전각들도 훼손되긴 했지만, 그 형태는 남아 있었다.
헌데 장원의 주인이 거했을 가장 큰 전각은 형태조차 남지 않았다.
그가 놀란 건 그러한 사실 때문이 아니다.
그 터의 군데군데 남은 흔적 때문이다.
거대한 손바닥 자국이었다.
“밀종대수인(密宗大手印)?”
“흑천마수(黑天魔手)군.”
늙수레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갤 돌렸다.
그런 그를 보며 늙수레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직하게 말했다.
“허허… 이 늙은 거지 때문에 놀랐으면 미안하네.”
“말학 이백이, 방주님을 뵙습니다.”
이백의 말에 방주라고 불린 늙은 거지의 눈빛이 이채롭게 변했다.
이리도 쉽게 자신을 알아볼 줄 몰랐던 탓이다.
“노부를 아는가?”
“추풍신개 장로께서도 방주님 정도는 아니었으니… 어찌 못 알아보겠습니까.”
이백의 대답에 그는 고갤 끄덕였다.
늙은 거지는 개방의 용두방주 걸왕이었다.
당양에서 남경까지만은 아니지만, 개봉에서 여기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벌써 당도했다는 건, 걸왕의 경공이 대단하다는 걸 의미했다.
“하하, 그렇군. 노부가 생각이 짧았…….”
“…….”
걸왕은 이백을 가볍게 훑었다.
그의 눈빛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백을 훑는 걸왕의 눈빛에 감탄이 어려 있었다.
“이런 본방이 많이 게을러졌군. 돌아가면 애들을 족쳐야겠어.”
걸왕의 말에 이백이 피식거렸다.
무림십왕의 일좌답게 한눈에 이백의 성취를 알아차린 것이다.
개방이 파악한 이백의 성취는 초절정지경에 완숙해졌고, 극으로 향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옥룡개(취개)를 쓰러트린 것에 대한 계산이었다.
헌데 걸왕이 알아차린 이백은 무위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십병암귀에 이어 이 친구까지…. 무림에 기인이 많다지만…….’
알려지지 않은 초절정고수가 등장해도 놀랄 일인데, 무려 화경고수가 새롭게 나타났다.
천하가 발칵 뒤집힐 정보다.
그걸 이제야 알았으니, 개방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비록 ‘불완전한 화경’이나 그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싶다.
“방주님께서 흑천마수의 흔적이라 하셨는데, 흑천회주의 절학이…….”
“맞네. 흑천마공의 흑천마수일세.”
예상대로 흑천회주가 남긴 흔적이었다.
남경 천송장이 흑천회의 본거지가 맞다는 뜻이다.
헌데 의문이 있었다.
“흑천마수의 흔적이 한 명의 것이 아니군요.”
“흑천회주 이외에 흑천마수를 익힌 자가 더 있다는 뜻이지. 그것도 성취가 더 높은…….”
얼핏 보기에는 한 사람의 솜씨처럼 보이지만, 성취의 차이가 있었다.
이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에 의해 벌어진 흔적이란 뜻이다.
한 사람이 흑천회주라면, 또 다른 한 명은?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