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하산(下山)
“백이 삼촌이 반겨주시겠죠?”
마차 안, 방년의 여인은 왠지 들뜬 표정이었다.
19세는 적은 나이가 아니건만, 7년 전의 어린 소녀였을 때로 돌아간 거 같았다.
그런 여인을 보며 중년인이 고갤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네.”
“삼촌은 분명 멋지게 변했을 거예요! 히히!”
7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으나 한 사람의 인생에 변화를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어린 소녀가 어여쁜 여인으로 만들었듯이 말이다.
그러는 사이, 이동하던 마차는 멈추었다.
그 순간, 여인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걱정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헤헤~ 놀라시겠지만!’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어렸다.
그 미소가 너무도 아름다워 사내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못 배길 정도였다.
그런 여인의 마음을 아는지, 마차 밖은 소란이 일었다.
마차에 달린 표국기(鏢局旗)는 소란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北川(북천)]
상단의 무사들은 당황했지만, 그간 교육을 잘 받았는지 그들은 정중하게 물었다.
“북천표국에서 저희 상단에 어쩐 일이십니까.”
“북천표국에서 대표두를 맡고 있는 홍원이라 하오.”
홍원의 인사에 상단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사천제일이자 천하 십대표국에 꼽히는 북천표국의 대표두는 중견급 표국의 국주보다 인정받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홍원 그의 경력이다.
“흐, 흑룡창을 뵙습니다!”
“예를 거둬주시오. 본인은 북천표국의 일원일 뿐이오.”
흑룡창(黑龍槍) 홍원.
무왕(武王)이 북부군 총사령관 재위 시절, 곁을 지킨 다섯 고수 흑룡오위(黑龍五衛).
무왕이 총사령관의 직위를 내려놓고, 왕부로 내려갈 때도 따른 나머지 사인과 달리 그는 무림으로 갔다.
그의 거취는 한때 무림의 주목을 받았다.
헌데 홍원이 뿌리를 내린 곳은 고작 표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북천표국은 천하 십대표국에 들기 전이었으니 다들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지금은 홍원의 선견지명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사천십이대고수가 이끄는 천하 십대표국의 일원이 되었으니까.
“대표두님께서 저희 상단은 어쩐 일로…….”
“귀 상단의 호법으로 계신 이 대협을 뵙고 싶소.”
이백이 언급되자 형주상단의 호위단원들은 당황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호법님…께선 상단에 계시지 않습니다.”
“외출하셨나 보구려. 기다릴 수 있소.”
홍원의 말에 호위단원들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우물쭈물한 반응에 홍원은 의아했다.
그걸 알았는지, 호위단원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일인가?”
호위단원들이 난감해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돌려 보니 연륜이 느껴지는 중년 사내였다.
그는 표국기를 슬쩍 보곤 포권을 취했다.
“형주상단 호위단장님의 부관을 맡고 있는 양진이라 합니다. 위명이 자자한 홍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인을 아시오?”
초면인 자기 자신을 알아보니, 홍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양진은 미소를 지었다.
“북천표국의 용호 중에서 이런 높은 기상이 느껴지신 분이 흑룡창 홍 대협이라 들었습니다.”
“허허… 이것 참.”
양진의 말솜씨에 홍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제야 양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홍 대협께서 저희 상단에 어인 일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귀 상단의 호법이신 이 대협을 뵈러 왔소.”
양진은 호위단원들은 왜 당황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로서는 대답을 하기에 여의치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양진이 사과를 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호법님께선 계시지 않습니다.”
“들었소. 이 대협께서 계시지 않다는데, 정확히 무슨 뜻이오?”
이쯤 되니 홍원도 단순히 자리에 없다는 의미가 아님을 어렴풋이 느꼈다.
양진도 둘러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저희 상단에 살수가 들이닥친 적이 있습니다. 상단주님을 노렸던 것이지요. 다행히 살수는 물리쳤지만, 살수는 한 명이 아닌 듯싶습니다.”
“설마…….”
양진의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홍원의 눈이 커졌다.
그를 향해 양진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 사라지셨고,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은…….”
이백이 죽었다고 생각한 홍원은 말끝을 맺지 못한 채 흘려 버렸다.
그때 마차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마차에서 나온 이는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경공을 펼쳤는지 단숨에 다가왔다.
여인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백이 삼촌이 돌아가셨을 리 없다고요!”
“아,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흥분한 여인에게서 흑녹빛의 기운이 엿보이자, 기겁한 홍원이 다급하게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그녀는 쉬이 흥분을 가라앉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의 호통이 들려왔다.
“당령아!”
“아… 죄, 송해요. 아빠.”
호통 소리에 흑녹빛의 기운이 사라졌다.
그걸 본 홍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소, 장 협사.”
호통을 친 자는 당령의 양부 장철우였고, 아리따운 여인은 바로 당령이었다.
당령은 지난 칠 년 간 여러 무공을 배웠다.
그중 하나가 독심결(毒心訣)이란 내공심법이자 독공이다.
당외삼비(唐外三秘)의 독비(毒秘) 당은이 전수해준 만큼 범상치 않은 절학이었다.
허나 범상치 않은 절학인 게 문제인지, 이따금 제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심기가 흔들렸을 때가 그러했다.
그런 당령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은 셋뿐이다.
독심결을 전수해준 당은과 유일한 초절정고수 적무산.
그리고 의외로 이류에 불과한 장철우였다.
호북행에 그를 동행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상단호위들은 방금 자신들이 어떤 위기에 처할 뻔했다는 것도 모른 채, 눈만 끔뻑였다.
“오해하셨군요. 돌아오지 않으셨다 했지,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살아계실 겁니다. 호법님께선… 강하신 분이니까요.”
“그래요, 그럴 거예요. 백이 삼촌은 강한 분이시죠.”
당령은 이백의 무위를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강하다는 말에 동의했다.
그건 이백의 마음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시기에 호법님을 삼촌이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홍원의 입에서 아가씨라 불렸다는 것만 봐도 평범한 여인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헌데 삼촌이라고 부르기에 이백과 나이 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아 보였다.
그녈 대신해 홍원이 소개했다.
“아가씨께선 국주님의 조카이신…….”
“본가, 사천당가의 가주이신 독선 님의 손녀이시오.”
홍원의 말에 외팔이 초로인이 첨언했다.
그는 당외삼비의 맏이 암비(暗秘) 당혼이었다.
그는 아니, 그들은 가주의 명에 따라 당령을 호위하는 입장이었다.
당령이 호북에 가니, 동행하는 게 당연했다.
그들의 말에 양진과 상단호위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도, 도, 독선 님이라시라면 우, 우내오존의 독선 님 말입니까!”
“독선(毒仙)이란 성명(聖名)은 오직 한 분 만의 것이오.”
북천검(北天劍) 적무산의 조카라는 신분도 대단하지만, 감히 우내오존 독선의 손녀라는 신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대 무림을 이끌고 있는 무림십왕(武林十王)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다섯 절대자가 바로 우내오존(宇內五尊)이니 말이다.
결국 형주상단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 시각, 이백은 어딘가로 향했다.
* * *
웬 청년이 다리 아래로 향했다.
그는 잿빛의 승복을 입고 있었지만, 삭발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다리 아래로 가지 않는다.
그곳은 거지들의 소굴이기 때문이다.
“뭐야? 스님인 줄 알았는데, 땡중인가?”
“그러게 말이야.”
청년을 본 거지들은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오히려 정중히 물었다.
“분타주님을 뵙고 싶소.”
“뭐? 아니, 당신 여기가 어딘지 알고 하는 소리야.”
청년의 말에 한 거지가 물었다.
안다는 듯 청년은 고갤 끄덕였다.
“개방 당양 분타 아니오?”
“맞는데… 누군데 우리 분타주님을 뵙자는 거지?”
널브러져 있던 거지들은 자리에 일어나며 청년을 경계했다.
개방의 분타를 공격하는 건 미친 짓이다. 허나 세상에 미친놈이 너무도 많다.
그러니 대비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청년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평범한 철전이었다.
“이거라면 대답이 되었소?”
“돈으로 분타주님을 뵙자는 거야? 주려면 많이나 주지, 꼴랑 철전 하나가 뭐야! 철전 하나가!”
청년의 행동에 거지들은 오히려 분개했다.
그들의 반응에 청년은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이걸 알아보지 못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허나 다행히 철전의 정체를 알아본 자가 있었다.
“자, 잠깐!”
“왜 그러십니까, 부분타주님?”
중년 거지의 말에 젊은 거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리에 띠가 없거나 고작 한 개 매여진 젊은 거지와 달리 중년 거지는 두 개의 때가 매여져 있었다.
개방의 이결제자라는 의미였다.
개방의 방주가 구결인 것을 생각하면 전체로 봤을 때 이결제자는 대단할 게 없다.
허나 개방의 각 분타주가 삼결제자다.
그러니 이결제자라고 해서 마냥 무시할 건 아니다.
실제로 중년 거지는 당양 분타의 부분타주를 맡고 있었다.
“보, 보은전!”
철전의 정체를 알아차린 부분타주의 눈이 커졌다.
보은전(報恩錢)은 개방에 은혜를 준 자에게 주는 신패다.
그리고 보은전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장로급 이상이기에 십만방도를 자랑하는 개방에서도 보유한 자가 열이 안 된다는 뜻이다.
“이제 분타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분타주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취팔선보(醉八仙步).
개방의 제자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보법이지만, 구대문파와 함께 일방(一幇)이라고 불리는 개방답게 그조차 하찮지 않았다.
부분타주의 성취가 높다 할 수 없지만, 취선팔보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고작 이결제자가 이렇다는 건, 개방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부분타주는 그보다 서너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중년 거지와 함께 돌아왔다.
그는 청년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당양 분타를 맡고 있는 철면개(鐵面丐)요. 보은전을 가진 분이라 들었소만…….”
“보은전이라면…….”
청년은 철전. 보은전을 보여주었다.
보은전을 본 철면개는 고갤 끄덕였다.
“보은전이 맞군…. 실례오만 소협은 누구시오?”
“형주상단에서 밥 얻어먹고 살던, 이백이라 합니다.”
개방 당양 분타를 찾은 청년은 바로 이백이었다.
십병암귀에게 입은 부상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결 더 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리 산을 내려 올 수 있었다.
허나 그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은 십병암귀와의 전투에서 상당히 훼손되었고, 육신의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백은 옥천산에는 옥천사라는 절에, 사정을 설명하고 승복 한 벌을 얻을 수 있었다.
“아, 그…였구려.”
당양은 형주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인 만큼 당양 분타주는 형주상단은 물론 이백에 대해도 아는 눈치였다.
“이 소… 아니, 대협께선 이 거지를 찾으신 이유가 뭡니까.”
“흑천회의 본거지를 알고 싶습니다.”
“……!!”
이백의 말에 분타주는 물론 곁에 있던 부분타주 역시 눈이 커졌다.
흑도는 민초들의 피를 빨아먹는 망종들이라 칭하며 혐오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흑도의 하늘이라고 불리는 흑천회(黑天會).
그들의 힘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흑천회의 본거지를 물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흑천회의 본거지는 왜 묻는 것이오?”
분타주의 물음에 이백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라서 말입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