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십병암귀(十兵暗鬼) 대 낭왕(狼王)
크아앙!!
황소만 한 백호가 포효하며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거 같은 백호를 상대로 노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하!! 이런 영물이 있단 소린 듣지 못했거늘…! 얼마나 대단한 내단을 품고 있을지 기대가 되는구나!”
노인은 오히려 흥분한 듯 기뻐했다.
그는 십병암귀였다.
그리고 황소만 한 백호는 거대해진 설군이었다.
평소에는 힘을 아끼기 위해 새끼의 크기로 고수했지만, 십병암귀는 너무 강했다.
그러다 보니 기운을 소모하더라도 거체(巨體)를 이룬 것이다,
거체를 이룬 설군은 발톱의 날카로움, 질긴 가죽, 빠른 움직임까지 모든 면에서 상향되어 있다.
그 점이 오히려 십병암귀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금강불괴를 이룬 내 몸에 상처를 낸 발톱은 암기로 만들고, 가죽은 보의를 만들자. 무엇보다 내단을 흡수한다면 놈들을 누르고 그분의 곁에 설 수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그분보다 더…….’
흥분을 넘어 광기까지 엿보였다.
고수의 싸움에선 작은 방심이 생사를 가른다.
거체를 이룬 설군은 딴생각을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맹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감각으로 설군이 십병암귀의 빈틈을 파고 들었다.
서걱!
설군의 발톱이 십병암귀의 옆구리를 할퀴었다.
이백의 고랑(孤狼)은 비교도 되지 않은 위력이었다.
“큭! 오냐, 제대로 죽여주마!”
놀랍게도 금강불괴를 이룬 십병암귀의 옆구리가 피로 붉어졌다.
허나 치명상이라고 할 정도로 깊지는 않았다.
십병암귀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유령과 같은 움직이었다.
설군도 만만치 않았다.
쾅! 콰쾅! 쾅!
일인일호(一人一虎)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충돌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산은 초토화되어 황폐해졌다.
크르르.
으르렁거리는 설군은 붉게 물들어졌다.
일부는 십병암귀의 피지만, 전부는 아니다.
설군 역시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 것이다.
“끄응… 놀랍군. 아무리 영물이지만, 짐승 따위가…….”
상처를 입은 건 설군만이 아니었다.
십병암귀 역시 부상을 입었다.
다만 부상은 설군이 더 깊어 보였다.
설군은 한 번씩 사라지곤 영초를 통해 기운을 흡수했다.
허나 형주를 온 이후, 그 양이 많지 못했다.
게다가 설군의 성장은 계약자의 성장과 연관이 있다.
그런 탓에 십병암귀를 상대로 밀리고 있었다.
“더 이상은 노부로는 힘들군, 이제 그만 죽여주마.”
십병암귀의 오른손에는 창이, 왼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설군의 가죽이 훼손되겠지만, 온전한 상태로 죽이려다가 자신이 먼저 당할 수 있단 생각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십병암귀가 움직이려고 할 때,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문제는 그조차 신경 쓰일 정도로 강대한 기운을 가진 자였다.
“그 친구를 고향으로 보낸 애송이를 보러왔더니, 재미있는 걸 다 보는군.”
십병암귀보다 더 거구(巨軀)에 거대한 칼(巨刀)를 쥔 노인이었다.
이러한 조건을 가진 도객이 흔할 리가 없다.
“도왕(刀王)의 칼은 그만큼 무식하게 크지 않다 하니, 낭왕(狼王)인가.”
“자네는 나를 아는데, 나를 자넬 모르면 공평하지 않은 거 같은데?”
거구의 노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십병암귀의 예상대로 그는 낭왕이었다.
참마도(斬馬刀)보다 더 거대한 칼로 펼치는 도법은 대적할 자가 없다고 알려졌다.
비록 하북팽가에게 도왕이란 칭호를 양보했지만, 능히 도왕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 바로 낭왕이다.
그는 슬쩍 피투성이가 된 이백을 바라봤다.
“알 필요가 있나? 그리고 남의 것을 탐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지.”
“남의 것이라…. 아무리 봐도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낭왕은 취개의 일로 이백을 찾아왔다.
그렇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게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자 설군은 슬금슬금 이백의 곁으로 갔다.
십병암귀는 설군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지만, 낭왕이 신경 쓰여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낭왕 역시 설군이 신경 쓰였지만, 용무가 있는 이백을 보호하려는 듯한 태도에 신경을 거두었다.
신경을 분산시키기에 눈앞의 노인이 범상치 않아 보인 탓이다.
이쯤 되니 가장 조급해진 건 십병암귀다.
낭왕을 상대하는 사이, 설군과 이백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좋다! 저 녀석에게 볼일이 있나 본데, 양보할 테니 데리고 꺼져.”
이백을 양보하고 설군을 취하겠단 제안이었다.
크아앙!!
어림도 없다는 듯 설군이 울부짖었다.
이를 본 낭왕이 피식거렸다.
“싫다는데?”
“낭왕이라 불린다고 뵈는 게 없나 보구나!”
십병암귀는 자신의 진력을 숨기고 있을 뿐, 십왕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리고 십왕 사이에도 실력의 차가 존재한다.
하위에 속한 낭왕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 생각했다.
헌데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니 짜증이 났다.
그런 그의 태도가 낭왕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낭왕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뵈는 게 없다? 노부에게 그따위로 말하는 자가 있을 줄 몰랐군.”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없다. 그러니 서로 원하는 것을 취…….”
아차한 십병암귀는 한발 물러날 생각이었다.
낭왕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지금 그와의 싸움은 잃을 게 더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허나 이미 늦고 말았다.
거대한 칼이 어울리지 않게 쾌속한 움직임으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챙!!
십병암귀는 쥐고 있는 창과 도끼를 교차해 낭왕의 거도를 막아냈다.
“무형마공? 마교에서도 실전되었다 들었는데?”
“큭! …젠장, 오냐 네놈부터 죽여주마!”
십병암귀과 설군의 싸움이 십병암귀과 낭왕으로 바뀌었다.
화경고수 대 화경고수.
무림인이라면 이 싸움을 보는 게 평생 소원 중 소원일지 모른다.
이때를 노려 이백을 데리고 도망쳐야 할 설군이 어느새 작은 새끼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거체를 유지 못 할 정도로 기운을 소모한 건 아니었다.
더 이상 거체를 유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이미 설군 때문에 산에 있던 짐승들은 모두 도망친 상황이다.
헌데 웬 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척이나 잘생긴 흑마였다.
설군과 마찬가지로 이백과 계약을 맺은 야군이 그의 위험을 느끼고 달려왔다.
야군은 이백이 자신의 등에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깨닫고 목덜미를 물었다.
그러자 설군은 이백의 품에 쏙 들어갔다.
“이런 저 말은 뭐야! 이대로 놓칠… 큭!”
“감히 본좌를 상대로 딴짓을 하다니!”
이백의 목덜미를 물고 달리는 야군을 본 십병암귀는 기겁했다.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쫓을 수 없었다.
낭왕이 그를 놔두지 않은 탓이다.
물론 그 역시 이백이 사라지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살아 있으면 다시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이백은 낭왕의 호의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허나 잠시 유보되었을 뿐, 지금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죽여주마! 기필코 네놈을!!”
* * *
어두운 밤하늘이 붉은 서하(曙霞)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백의 목덜미를 물고 형주를 벗어난 야군은 전설의 천리신마(千里神馬)라도 된 마냥 빠르게 달렸다.
밤사이에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 형주와는 주변 풍경조차 달랐다.
놀랍게도 그곳은 당양에 위치한 옥천산이다.
이름난 명산만큼 유명하지 않으나 산세가 수려하고, 샘물이 따듯하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상류로 오르고 오르면 동물들이 다쳤을 때, 몸을 담그는 작은 약천(藥泉)이 존재했다.
이곳은 사람들조차 모르는 비처인 셈이다.
어찌 알았는지, 야군이 이곳으로 온 것이다.
야군은 이백은 약천에 담갔다.
상처 입은 동물들의 상처를 회복시켜주는 약천이라지만, 이백의 상처는 약천 정도로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약천에 몸을 담근 이백의 위에 설군이, 옆에 야군이 앉았다.
우웅~! 우웅~!
설군에게서 시작한 포근한 빛에 야군이 공명했다.
그때 이백의 눈이 황금빛을 밝혔다.
[혜안이 발동했습니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이 신기에 공명합니다.]
그 순간 황금색 빛이 이백과 설군, 야군은 감싸 안았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은 모두 이백의 육신에 흡수된 게 아니다.
그의 영육은 아직 불완전한 신의 불꽃을 모두 감당할 수 없던 탓이다.
그 일부의 기운이 사경에 빠진 이백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약천을 숨겨주고 있는 숲이 아니었다면 그 성스러움이 밖까지 벗어나갔을 것이고, 그로 인해 큰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성스러운 빛은 몇 날 며칠 지속이 되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 * *
콰쾅!!
밤부터 시작된 싸움이 어느새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화경고수들답게 아무리 작은 산이었다고 하지만 더 이상 산이라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황폐해졌다.
“빠드득. 네놈… 이겼다 생각하지 마라!”
끝이 보이지 않았던 싸움에서 의외로 먼저 물러난 자는 십병암귀였다.
설군에게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낭왕을 상대했다.
체력이나 기력 모두 먼저 소진되는 게 당연했다.
마음 같아서 팔 하나 잃는 한이 있어도 낭왕의 목을 취하고 싶었으나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주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낭왕이 중얼거렸다.
“흑천회의 십병암귀…였군.”
처음부터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아니다.
싸움이 이어지면서 십병암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낭왕 역시 십병암귀에 대해 알고 있었다.
흑도(黑道)에서 흑천회주보다 두려워하는 존재로 알려졌다.
헌데 그 무위가 이리도 대단한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화경고수였다니…. 설마 흑천회주는 오존(五尊)급은 아니겠지?”
무림도 그렇지만, 흑도에선 더욱 약자를 윗사람으로 모시지 않는다.
그러니 십병암귀가 주군으로 모시는 흑천회주는 그보다 더 강한 우내오존에 비견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단 결론이 나왔다.
사파의 뒷주머니라고 불리는 흑도에서 화경고수가 나온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우내오존에 비견되는 고수라니.
“그보다 어떻게 실전된 무공을 그리도 많이 익히고 있는 거지?”
하나하나가 한때 전설로 불리던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절학들이다.
그리고 오래전에 실전되었던 절학이기도 하다.
한 개만 익혔다고 해도 놀랄 일인데 무려 여덟 개나 익히고 있었다.
그의 별호가 십병암귀라는 걸 생각하면 그보다 더 많은 절학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다.
“흑천회가 복마전인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뭔가 있는 건가.”
낭왕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게 아니라면 코웃음을 쳤을지 모른다.
흑도 주제에 화경은 물론 전설적인 절학을 한 사람이 그리도 많이 익히고 있단 사실을 믿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본인이 직접 겪었으니까.
“으윽! …안 되겠어.”
십병암귀가 먼저 물러났다고 해서 낭왕이 멀쩡한 건 아니다.
그 역시 버티고 있는 게 용할 정도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지, 낭왕은 자리에 앉고 가부좌를 틀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이 일은 빠르게 무림에 퍼져나갔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