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형주상련(荊州商聯) (3)
“야, 막내. 표정이 왜 그래?”
이립쯤 갓 지났을 법한 청년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이를 본 불혹은 훌쩍 넘은 사내가 물었다.
그저자 막내가 불린 청년이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라 말했다.
“대 제갈세가의 가주님께서 행차하셨는데, 감히 이딴 곳에 내어주는 게 말이 됩니까! 부조장님.”
“야, 말조심해. 금검대의 일원으로서 품위를 잃는 건 곧 본가의 이름에 먹칠하는 거니까.”
그들은 금검대 고수들로, 객당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부조장은 눈을 부라리며 경고를 했다.
비록 천기수사가 무림 백대고수는 아니지만, 제갈세가의 가주라는 지위는 무림 최상에 속한다.
그런데 객당으로 안내했으니, 평소 동경하던 금검대에 최근 뽑힌 청년은 불만스러워했다.
부조장 역시 마음이 편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를 입 밖으로 드러내면 안 된다.
잠시 후, 한 무리가 다가왔다.
“형주상단의 상단주인 현유라 합니다. 가주님께서 저희 상단에 방문하셨다 들었습니다.”
“상단주님이셨군요. 금검대 제4 부조장입니다. 가주님께선 안에 계십니다.”
상단주가 직접 왔다는 말에 부조장은 언짢은 마음이 풀렸다.
허나 금검대의 젊은 대원은 아니었는지, 중얼거렸다.
“정신이 나갔군, 중소상단 따위가…….”
연륜을 보여주듯 현유는 못 들은 척했지만, 동행한 행수들은 그렇지 못했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허나 상대가 제갈세가인 만큼 나서는 자는 없었다.
대신 부조장이 이를 악물었다.
―품위를 잃지 말라고 했거늘, 네놈 돌아가서 보자!
―아, 아니, 부조장. 고작 중소상단 때문에…….
―닥쳐! 형주상단에는 가주님께서…….
그때 객당의 문이 열이며 지천명쯤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형주상단 일행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해 예를 표했다.
“현유 상단주님과 상단 여러분이시지요.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중년 사내의 정중한 태도에 형주상단 무리는 불편한 기색이 사라졌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금검대 막내라고 불린 청년은 의아했다.
중년 사내는 일개 중소상단주 따위에게 고갤 숙일 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곁에 있던 부조장은 사색이 되었다.
―야, 강경택이. 부조장이 되었다고 미쳤구나. 애들 교육 이따위로 시킬 거야! 대주님께서 조금 있다가 부조장급 이상을 집합시키셨다! 만성이는 이미 정강이 맞았다. 눈빛이 심상치 않더군. 이번에는 안 말려줄 거니 알아서 해라.
―부, 부대주님! 제, 제발…….
금검대 부대주는 제4 부조장의 전음에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헌데 눈치 없는 청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왜 부대주님께서 직접 나오셨… 왜… 그러십니까? 부조… 컥!”
“이 개새끼야! 네놈 때문에 나 엿 됐다! 너 돌아가면 뒤질. 아니, 조장님께 건의해서 퇴출시켜 줄 테니 각오해!!”
부조장에게 맞고 낑낑거리던 청년은 청천벽력과 같은 말에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부조장에게 맞은 이유는 물론 금검대 퇴출이라니.
정작 재능만 보고 그를 금검대 신입으로 추천한 부조장은 자신의 과거가 원망스러웠다.
‘미친 새끼, 가주님의 의자(義子)께서 계신 상단을 무시하긴 왜 무시해!’
* * *
“처음 뵙겠습니다, 제갈세가의 윤호라 합니다. 상단 발촉식에 방문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갈세가의 가주가 직접 일어나 반겨줄 뿐만 아니라 사과를 하니, 현유 등은 황송해 고갤 들지 못했다.
오히려 사색이 되었다.
이 모든 호사가 호법인 이백 때문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가 상단을 떠나면 과연 제갈세가와의 관계가 유지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닙니다. 대총관께서 직접 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이 제갈 모,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의 대화를 평온하게 진행이 되었다.
어차피 그건 인사치레에 불과하다.
제갈세가의 가주가 직접 행차한 이유가 나올 차례였다.
“최근 귀 상단이 힘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아, 실례되는 말이었군요.”
“아닙니다. 비밀도 아닙니다. 제가 부덕해 일어난 일입니다. 와룡상단에는 피해가 가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제갈윤호의 말에 현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형주상단은 와룡상단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즉,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후 와룡상단을 대신해 호북 남부, 나아가 중부의 상권을 담당할 예정이었다.
헌데 시작도 하기 전에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백마저 떠나버리면 제갈세가에서 거래를 유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땐 형주상단이 위축되는 정도가 아니라 휘청거리게 될 것이니, 내색하지 않았으나 현유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제갈윤호는 고갤 저었다.
“귀 상단의 잘못이 아닙니다. 혹시 암천회라고 아십니까?”
“구화당보다 큰 집단이라는 것 정도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구화당이 암천회 예하에 속해 있었지요. 그 구화당이 몰락하면서 암천회가 움직였습니다. 형주상련이라고 했던가요? 첩보에 의하면 련주가 된 추원이라는 자가 암천회 소속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
제갈윤호의 말에 현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구화당의 음모로 몇 번이나 위기를 맞이할 뻔했다.
다행히 이백에 의해 파쇄된 덕분에 실질적인 피해가 없었을 뿐이다.
헌데 그보다 더 거대한 집단이 형주상단을 노리고 있다니.
버텨낼 재간이 없다.
“암천회가 전면전을 벌이면 몰라도 뒷공작을 하는 것만으로 본가가 움직이긴 어렵습니다.”
“그…렇습니까.”
제갈윤호의 말에 현유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의 연륜으로도 심정을 숨길 수 없던 것이다.
참담했으나 제갈세가를 욕할 수 없었다.
“상계의 일은 상계에서 처리해야 하는 법. 이른 감이 없지 않으나 와룡상단과 분가(分家)에서 도움을 주기로 협의했습니다. 그리고 상관세가. 정확히는 일월상단 역시 한손 거들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암천회의 뒷공작이라도 두 상단의 비호를 받는다면 더 이상 수작을 부릴 수 없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 어찌 갚아야 할지…….”
그야말로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와 준 것과 다름이 없다.
현유와 형주상단으로서는 몸들 바를 몰라 했다.
“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부탁드렸던 조카가 멋대로 본가로 돌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갈 서기… 아니, 소저의 상황을 들었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소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구화당 사건 이후 제갈혜원은 무관(武館) 밖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곤 형주상단의 발촉식이 끝나고 방문했던 제갈세가의 대총관과 함께 본가로 돌아갔다.
물론 그 전에 현유에게 사정을 설명과 사과 그리고 허락을 구했다.
인재였던 그녀가 돌아가는 건 현유로서는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그녈 잡을 수도 없었다.
상관벽 등 상관세가의 고수들이 돌아갈 수 있던 것도, 사전에 제갈혜원이 본가로 돌아가겠단 이야기를 했기 때문도 있었다.
“많이 분했는지, 폐관에 들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좋은 약이 되었나 봅니다.”
“그렇군요.”
제갈혜원이 본가로 돌아간 건 도망친 게 아니다.
파운부에 이어 구화당까지 그녀는 짐만 되었다.
무(武)를 멀리했던 과거의 자신이 미웠다. 그렇기에 귀가(歸家)를 택했다.
제갈세가로 돌아간 제갈혜원은 원로원에 가서 가르침을 청했다.
당대에는 주로 검을 익히지만, 원로원에는 탄지신통과 소리비도를 익힌 원로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심심했던 그들은 그녀의 청을 얼씨구나 하며 받아들이고, 함께 폐관까지 들 정도로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 백이는 잘 지내지요?”
“예…….”
제갈윤호가 이백을 언급하자, 현유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반응을 놓친 제갈윤호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가주님을 속이는 건 실례일 테니, 사실대로 밝히겠습니다. 아직 시일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돌아가신다 합니다. 애초 저희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주시는 게 약조였으니까요.”
현유의 말에 제갈윤호는 살짝 놀랐다.
이백이 언제까지나 형주상단에 지낼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나 벌써 떠날 줄은 몰랐던 탓이다.
현유는 제갈윤호의 표정을 살폈다.
이백이 떠난다고 해, 도와주겠단 약조를 번복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가 떠날 예정을 알리지 않은 이유였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숨겨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언급하지 않으신 거지, 속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귀 상단에 약조한 건, 백이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형주상단에 손을 내민 건 이백 때문이 맞다. 허나 와룡상단, 정확히는 제갈세가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협력자가 필요했다.
그 협력자를 형주상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현유의 인망과 형주상회의 능력은 협력자로 삼기에 적합했으니, 설사 이백이 떠난다고 해서 번복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녀석, 왔나 보군.”
“예?”
현유는 제갈윤호의 중얼거림에 어리둥절했다.
그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녀석’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리며 ‘녀석’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진즉에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연락도 없이 왔는데 어찌 알았겠느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이백이었다.
제갈윤호에게 인사한 그는 안면이 있는 금검과 부대주, 1조장 등과 눈인사를 했다.
금검대에서도 예비조 성향이 강한 4조와 달리, 나머지 조는 이백과 동행한 적이 있기에 안면이 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살가운 대화에 현유 등은 깜짝 놀랐다.
그가 제갈세가와 연이 깊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가주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를 정도인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상단주님.”
“예, 호법님.”
“연 단장님께서 벽을 넘으셨습니다.”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
이로써 형주상단은 절정고수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경사였다. 허나 현유 등은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연자광이 절정고수가 되었단 말은 이제 이백이 떠날 때가 되었단 뜻이기 때문이다.
제갈윤호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 현유가 조금 전에 말한 시일이 되었단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허나 굳이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예, 그리되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비록 제갈윤호 등이 완전 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형주상단의 일을 자세히 밝힐 수 없기에 둘러 이야기했다.
―당장 떠날 건 아닙니다. 상단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는 있겠습니다.
현유는 무공을 모르는 탓에 전음으로 대답할 수 없었지만, 그의 배려에 눈인사를 했다.
이백은 제갈윤호 등을 모시고 자신의 거처, 백수각으로 향했다.
시가지 중심에 있는 상단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은 짐승들이 있었다.
낯선 인간들의 등장에 멈칫했던 짐승들은 이백을 보곤 다시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 모습에 제갈세가 일행은 황당했다.
“제가 기르는 애들은 아닌데, 자주 놀러 오는군요.”
“허허 그렇구나.”
제갈윤호는 이백이 청랑왕의 무공을 익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영향이 아닐까 짐작했으나 굳이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백수각 지붕과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들, 나무 아래 벌러덩 누워 있는 다람쥐, 개와 고양이 등은 형주상단과 시가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괴한들의 침입을 감시했다.
제갈혜원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감지한 것도 짐승들 덕분이었다.
백수각으로 들어온 이백은 제갈윤호에게 차를 내주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럼 본가로 올 수 있느냐.”
제갈윤호의 물음에 이백은 고갤 저었다.
“아직 갚아야 빚이 남아서 어려울 거 같습니다.”
“빚이라… 빚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일 년 가까이 지내며 형주상단을 도운 걸로 자신의 빚이 모두 갚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목숨 빚은 그만큼 무거운 법이니까.
게다가 천문산장이 기거한 5년간, 그들에게 많은 걸 배웠다.
모든 빚을 갚는 건 아직 먼일이라 생각했다.
“종종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언젠가 ‘본가’로 찾아가겠습니다.”
“허허, 그래. ‘본가’에서 보자꾸나.”
이백의 입에서 본가라는 표현이 나오자 제갈윤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제갈세가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니 말이다.
‘놈들은 언제 해결되려나.’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