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형주상단(荊州商團)
“젠장, 감히 날 가둬? 풀려나는 날, 네놈들은 모두 지옥을 맛보게 해주마!”
초로의 사내는 이를 갈았다.
도저히 자신의 신세를 받아들일 수 없던 탓이다.
캉! 캉!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닥쳐! 이 새끼야! 잠 좀 자자, 잠 좀!”
“…….”
초로의 사내는 이를 갈 뿐 반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성질을 못 참고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맞섰다.
허나 간수를 포섭했는지, 그가 갇힌 철창 안으로 들어와 무자비로 구타했다.
그렇다고 쉬이 성질이 바뀔 리 없다.
얼마 후에도 성질을 부렸고, 그날 밤도 어김없이 구타를 당했다.
몇 번을 반복하자 화를 참기 시작했다.
‘밖에 있을 때는 눈도 마주칠 수 없는 구더기만도 못한 새끼들이 감히, 형주유가의 주인인 나에게 새끼라고!’
초로인의 정체는 제형안찰사사의 뇌옥에 갇힌 유경표였다.
뇌물을 써 어떡하든 이곳을 나가려 했으나 안찰사는 도통 마음을 열지 않았다.
형주유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유씨상단이 형주에 활동 중인 상회와 상단들의 공격으로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형주유가는 유경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안찰사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어려웠다.
허나 이를 모르는 유경표는 악과 독기만 쌓여갔다.
“여길 나갈 수만 있다면… 재산의 절반 아니, 모든 걸 줄 수 있…….”
“오호? 그렇단 말이지?”
배려로 독창을 사용하고 있던 유경표는 낯선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누가 들어오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다.
“헉! 누, 누구냐!”
“쉬파! 닥치라고… 컥!”
놀란 유경표는 언성을 높였고, 잠을 자던 죄수는 결국 폭발해 소리를 질렀다.
제형안찰사사에 갇힐 정도라면 나름 악명을 날리던 죄수란 뜻인데, 성질 한 번 부린 대가는 너무 참혹했다.
철창 안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물로 저자를 죽였다. 고맙지 않나?”
“고, 고맙소.”
정말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유경표는 되묻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주겠다는 말, 진심인가.”
“무, 물론이오! 날 내보내 주시오! 그럼 내 모든 걸 주겠소!”
이곳에선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은 유경표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 유경표를 보며 입꼬리가 올라간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곳에 서명하면, 네 뜻대로 해주마.”
“이, 이게 뭔지…….”
불길한 느낌을 받은 유경표가 주춤했다.
그러자 그는 아쉬울 거 없다는 듯 내밀었던 서류를 거뒀다.
그 모습에 유경표는 심장이 철렁했다.
“싫으면 그만 돌아가지.”
“아, 아니오! 싫긴 누가 싫다고 했소! 여기! 여기에 서명하면 되오?”
철저히 을이 된 유경표는 그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얼른 서명했다.
그렇게 요구 사항을 들어주자 유경표는 다급히 말했다.
“워,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 빨리 날 빼주시오!”
“크크, 형주의 주인이라고 불리던 놈이 이리도 머저리일 줄이야.”
그의 비아냥에 유경표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성질은 꾹 참았다.
이곳만 나가면 모든 건 곱절로 갚아주겠다고 다짐하며.
허나 그건 그의 너무도 큰 착각에 불과했다.
우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유경표의 목이 돌아갔다.
“네가 원하는 대로 빼주마, 다만 그게 살아서라곤 안 했지. 크크.”
죽은 시체는 뇌옥에서 빼내어 버린다.
그러니 완전 거짓만을 한 건 아닌 셈이다.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네 상단과 널 이리 보낸 놈들을 몰락시켜줄 테니까. 이 암상(暗商)께서 말이야. 하하하!”
강남 흑도의 하늘, 흑천회주.
그가 부리는 귀신 중 하나인 암상.
그의 손에 유씨상단이 넘어갔다.
뇌옥에 갇힌 유경표가 서명한 양도계약서를 부정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자들 하나 처리 못 한다면 암상은 여태껏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흑천회주는 무능한 자를 곁에 두지 않으니까.
암상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호북을 다시 거둬 볼까.”
* * *
“축하드립니다, 상단주님!”
형주상회는 수많은 축하객으로 북적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상회의 틀을 벗어나 상단이 됨을 선포하는 날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형주 일대는 물론 호북 각지에서 축하객들이 찾아왔다.
현유의 인망도 인망이지만, 형주상회가 이룬 인맥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대인. 많이 준비하지 못했으나 편히 즐겨주십시오. …대인을 모시게나.”
“예, 상단주님.”
섬서로 떠났던 상행은 성공적이었다. 좋은 값을 받은 건 물론이고, 기대했던 백매상단과 줄을 댈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상단으로 발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제갈세가의 와룡상단과 상관세가의 일월상단까지 줄을 댈 수 있었다.
와룡상단도 와룡상단이지만, 일월상단과 줄을 댄 건 무척이나 큰일이다.
천하에서 가장 큰 열 개의 상단 중 하나가 바로 일월상단이다.
그러한 일월상단을 보유했기에 상관세가를 상가(商家)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일월상단과 연을 맺을 수 있던 건, 상관세가의 장로 상관벽의 주선 덕분이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기도 전이건만, 돈 냄새에 민감한 상계답게 그러한 사실이 빠르게 알려졌다.
덕분에 형주 일대만이 아니라 호북 각지에서 찾아온 것이다.
“게 없는가! 호조 참의(戶曹 參議)께서 오셨느니라!”
“대인께서 저희 상단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주상단의 상단주를 맡고 있는 현유라 합니다.”
호북성 최고 행정기관인 승선포정사사 예하 육조 중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戶曹).
참의는 참정(參政)을 보좌하는 육조의 이인자에 해당하는 직위다.
종 4품에 해당하니, 고관이라 할 수 없으나 고관에 나아갈 수 있는 위치라 할 수 있다.
“포정사 어른께서 현 상단주를 축하해주라 하셨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참의 어른께서 불편하시지 않게 안쪽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상계만이 아니라 호북성의 지방관리 중에서도 열 손가락은 아니라도 스무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 바로 참의다.
그런 그가 직접 방문했다는 것만으로도 형주상단의 위치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알려주었다.
상계와 관(官)은 물론 무림방파들 역시 사람을 보냈다.
축하객들이 늘어날수록 형주상단의 입지가 어떠한지 알려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 한숨을 내쉬는 무리가 있었다.
“하아… 이제 유씨상단을 밀어냈다 했더니…….”
“그래도 현 노야는 그들과 달리 독식하려 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걸 어찌 압니까? 앞으로도 그럴지.”
형주 일대에서 활동 중은 상회와 상단의 대표들은 근심만 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형주 일대의 상권을 장악했던 유씨상단이 몰락하면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헌데 형주상단을 찾아오는 이들을 보니, 이제 유씨상단이 문제가 아니었다.
형주상단이 독한 마음 먹는다면 유씨상단 이상으로 상권을 집어삼킬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방도도 없다.
그저 현유가 아량을 베풀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때 불청객이 찾아왔다.
“밖에 상을 차려드릴 테니, 물러나십시오.”
“허허…….”
늙은 거지 노화자(老化子)였다.
현유는 거지라고 해서 인색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잔치라고 할 수 있는 발촉식을 찾아온 거지를 박대하지는 않는다.
허나 많은 축하객이 찾아온 상황이다. 상단 안에 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형주상회의 선위무사(문지기)들은 노화자에게 정중히 물러나길 권고했다.
허나 노화자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러나라 하였소. 물러나지 않으면…….”
“무슨 일인가?”
상단 정문에서 실랑이가 벌어지자 누군가 다가왔다.
그를 본 선위무사들은 다급하게 말했다.
“사, 상단주님. 별거 아닙니다. 곧 해결할 테니…….”
“귀 상단의 경사를 축하하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멀리가지 마시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드릴 테니 술과 고기를 드시고 가십시오.”
현유의 말에 선위무사들은 당황했다.
그들이라고 노화자를 쫓아내려는 건 아니었다.
허나 상단 안에는 하나 같이 어깨에 힘을 주는 이들 투성이다.
그런 곳에 노화자를 들이면 오히려 뒷말이 나올 게 뻔하다.
그렇기에 상단 밖에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것인데, 현유가 오히려 안에 들이겠다니.
당황스러운 게 당연했다.
“허허… 소문대로이구려. 허나 괜찮소이다. 이 늙은 거지는 한 사람만 만나면 되오.”
“그게 누굽니까? 불러 드리겠습니다.”
“이백이라고 젊은 친구요. 귀 상단의 호법이라 들었소.”
“그를 어찌…….”
노화자가 찾는 이는 바로 이백이었다.
행색은 추레하지만 평범한 거지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이 늙은이는 개방의…….”
* * *
“절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장로님.”
연락을 받은 이백은 노화자를 찾아왔다.
그를 본 노화자의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허… 본방도 다 되었군. 이런 친구를 아직도 몰랐다니 말이야.”
“…….”
노화자의 입에서 본방(本幇)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걸인들 역시 무리를 지어 생활을 하긴 하지만 방파의 형태를 갖추진 않았다.
오직 한 곳만이 방파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곳은 바로 개방(丐幇)이다.
구대문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천하제일대방.
노화자는 개방에서 온 기인이었다.
게다가 허리에 일곱 개의 띠가 묶여 있었다.
이는 그가 개방의 장로란 걸 알려주었다.
“이 늙은 거지가 누구인 줄 아는가?”
“후배의 견문이 좁아 확신할 수 없으나 추풍신개(追風神丐) 장로님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방주인 걸왕을 제외한 개방 최고수가 바로 추풍신개다.
과거 걸왕과 함께 후개 자리를 놓고 경쟁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거물이 직접 이백을 찾아왔다는 건,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맞네. 이 늙은 거지가 추풍신개라 불리고 있네. 자넬 찾아온 건, 청할 게 있어서이네.”
“말씀하십시오. 후배가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인지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개방의 장로인 추풍신개의 청을 거절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허나 이백은 무당검선의 청도 거절한 인물이다.
아무리 추풍신개라도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거절할 생각이었다.
추풍신개는 살짝 놀라긴 했지만,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취개를 묻었다 들었네. 그를 거두고 싶네.”
“역시 개방 출신이었군요.”
이백은 추풍신개의 말에 놀라기보단 납득하는 눈치였다.
되려 추풍신개가 놀랐다.
이백이 그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알고… 있었나? 그가 본방 출신이라는 걸?”
“짐작했을 뿐입니다. 비록 권법으로 펼치고, 그 형(形)을 바꾸었다고 한들 그 속에 담긴 건 항룡십팔장이었으니까요.”
개방의 방주에게만 전해지는 이대절학.
항룡십팔장은 그중 하나였다.
그런 절학을 익히고 개방 출신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그게 거짓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말하면 항룡십팔장을 익힌 취개가 개방이 아닌 낭인막에 있었다는 건 의아할 만한 일이다.
추풍신개는 쓴웃음을 지었다.
“취개… 아니, 옥룡개(玉龍丐) 우리와 함께 후개 후보였네. 그것도 가장 유력한 후개 후보였지.”
개방은 용호풍운(龍虎風雲), 네 명의 후보 선별한 후 시험을 통해 후개를 선출했다.
선출된 후개는 용두방주의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게 된다.
후개로 선출된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삼인의 후보 역시 차기 장로로서 교육을 받아, 개방의 든든한 기둥이 되는 게 오랜 전통이었다.
허나 그런 전통이 깨진 게 당대다.
“당연히 자신이 후개로 뽑힐 거라 생각했다가 유운개(流雲丐), 그 친구가 뽑힌 게 억울했겠지.”
후개 후보는 용호풍운의 순으로 뛰어났다. 즉, 유운개는 후보 중 가장 가능성이 낮은 인물이었다.
반대로 가장 강했던 옥룡개는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허나 호검개(虎劍丐)를 죽이고, 비급을 훔쳐 달아날 줄은 몰랐지. 우리 모두…….”
기본적으로 개방은 구전을 통해 무공을 전수한다. 허나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총타에 비급을 보관해두었다.
비고(祕庫)의 보호는 장로들이 돌아가며 맡는다.
하필 장로들을 대신해 호검개가 비고를 잠시 맡고 있을 때, 옥룡개가 들이닥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때이기에 노릴 수 있던 것일지 모른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설마 부관참시(剖棺斬屍)를…….”
“그럴 리가 있겠는가. 비록 살아서 본방의 죄인이었다지만, 죽은 마당에 죄를 물 수 있겠나. 그저 마지막은 본방이 거둬야 하지 않나 싶네.”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허나 못 들어줄 청은 아니었다.
아니, 개방과 언짢아질 걸 감수하면서까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고맙네. 그리고 이건 방주께서 전하라 하셨네.”
검은 철전으로, 보은(報恩)이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개방이 은혜를 입은 경우, 이를 갚겠다는 증표인 보은전(報恩錢)이었다.
취개의 시체를 돌려준 것으로, 개방에 빚을 지웠다는 건 무척이나 큰 이득이다.
사실 보은전을 내어준 건 취개의 시체 때문만이 아니다.
취개로 인해 낭인막. 나아가 낭왕과의 마찰을 염두한 개방의 배려였다.
‘언젠가 크게 써먹을 일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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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