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당령
“하합!”
방년(芳年)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아리따운 어린 여인이 기합과 함께 손을 뿌렸다.
그러자 작고 예리한 암기들이 허공을 갈랐다.
중년 사내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휘두르더니, 쇄도하는 암기들을 낚아챘다.
어린 여인의 솜씨도 훌륭했지만, 이를 쉬이 무력화시킨 중년 사내의 솜씨는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하, 역시 공녀님이십니다. 벌써 칠절수(七絶手)가 6성이시라니요.”
“칫,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요. 6성이라고 혼 숙의 털끝 하나 못 건드렸는데요.”
투덜거리긴 했지만, 진심으로 분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녀라고 중년 사내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하, 이리 보여도 본가의 호법인데, 벌써 고전하면 어찌 공녀님을 지키겠습니까?”
“몰라요. 빨리 강해져서 제가 다 지켜줄 거예요.”
여인의 말에 그는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외모만이 아니라 그 마음씨 역시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공녀님.”
“물론이에요~!”
여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투지를 불태웠다.
그런 그녀를 보며 중년 사내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감탄했다.
‘6성… 아니, 8성인가…. 역시 그분의 핏줄다우시네. 천악 공자나 천우 공자도 약관에 간신히 6성에 오르신 경지이거늘…….’
칠절수(七絶手)는 금나수 동시에 암기술이다.
경지에 오르면 칠종(七種)의 암기를 동시에 다룰 수 있으니 결코 흔한 절기라 할 수 없다.
당연했다. 칠절수는 사천당가의 직계만 익힐 수 있는 수법이니 말이다.
허나 칠절수를 8성까지 익힌 자는 거의 없다.
칠종의 암기를 동시에 다룬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지만, 사천당가에는 그보다 뛰어난 암기술이나 하독술이 있기에 칠절수는 6성이면 기본을 닦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은 마치셨습니까.”
“아빠~!”
중년 사내의 말해 여인은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이제 여인의 향을 풍기기 시작했으나 아비의 앞에선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에게 안긴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큰 녀석이 아직도 아빠더냐? 나중에 사위가 흉볼까 무섭다.”
“흥! 감히 누구 아빠에게 흉을 봐! 그딴 놈은 이 당령의 서방이 될 자격도 없지! 없고말고!”
여인은 6년 전, 이백과 헤어진 장씨 부녀 중 여식인 장령이다.
6년이라는 시간은 소녀를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당령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양부 장철우와의 관계는 전혀 바뀐 게 없었다.
“이젠 아빠랑 평생 살겠다고는 안 하네?”
“헤헤~ 아빠도 새장가 가야지요.”
그는 새장가라는 말에 헛기침했다.
평생 당령만 보고 살았기에 장가를 간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사내였다.
외로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커험. 요 녀석, 못 하는 말이 없다.”
“칫, 요즘 유모랑 사이좋은 걸 모를 줄 알아요?”
당령의 말에 장철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녀가 유모라 칭한 여인은 당혼과 함께 당외삼비(唐外三秘) 중 독비(毒秘) 당은이다.
당외삼비의 홍일점이다 보니, 당령의 유모 역할도 함께 했다.
그러다 보니 당령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장철우와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6년이라는 시간은 없던 감정도 싹 트게 만들 만했다.
“나, 나는…….”
“하하, 뭘 그리 당황하는가? 장 제(弟), 나는 찬성일세.”
“나도 찬성이야, 아빠.”
당은의 오라비라고 할 수 있는 당혼마저 이리 말하니, 장철우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그의 순박함에 당혼은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당외삼비 모두 고아 출신이다.
비록 가주 덕분에 사천당가의 일원이 되었지만, 진짜 가족은 없다.
누이라고 할 수 있는 당은이라도 진짜 가족이 생긴다는 걸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축하해줄 생각이었다.
장철우가 비록 무공고수는 아니지만, 좋은 사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라면 자신의 소중한 누이를 맡겨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당령의 양부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 저…. 앗! 국주님께서 찾으신다.”
“외숙이요?”
당령의 수련 시간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장철우가 왜 왔나 했더니, 적무산의 호출이 있던 것이다.
“손님이 오셨다고…….”
“손님?”
당령은 갸웃거렸다.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곧 눈이 커졌다.
“설마… 백이 삼촌!”
“아쉽게도 백이는 아니다.”
장철우의 말에 그녀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실망했다.
지난 6년간, 이백에 대해 알아봤으나 알아낸 게 하나도 없는 탓이다.
장철우 역시 그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내색한다면 당령이 더 실망할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우선 가보거라. 국주께서 직접 말씀하실 정도면 분명 대단한 분이실 테니까.”
* * *
“외숙, 령이에요.”
“들어 오너라.”
허락이 떨어지자 당령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외숙 적무산만이 아니라 여러 여인들이 있었다.
평범한 여인들이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적무산은 당령에게 그녀들을 소개했다.
“령아, 인사드리거라. 검각에서 오셨다.”
“…당가의 령이가 검각의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눈이 커졌던 당령은 곧 신색을 회복한 후 포권을 취했다.
그녀는 지난 6년간 당외삼비에게 무공만이 아니라 무림 지식 역시 배웠다.
그러다 보니 검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절강성에서 떨어져 있는 주산군도에 위치한 비구니의 사찰 보타암인 동시에 여중제일검 검후를 배출한 검파.
무공을 익힌 여인으로서 놀라는 게 당연했다.
“아미타불, 검각의 제자 이옥환이라 합니다. 사숙이신 정원사태님과 사저…….”
이옥환이 대표로 일행을 소개해주었다.
그때마다 당령은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 검각의 제자들 역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소개가 끝나자 적무산이 이옥환은 다시 소개했다.
“이 여협은 검후님의 전인인 소검후이시다. 백전비무행 중에 본 표국에 방문하신 것이다.”
“소, 소검후이시라고요!”
다음 대 검후가 될 여인이라는 말에 당령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이옥환은 그녀를 향해 합장했다.
“저와 비무를 해주시겠습니까, 당 소저.”
“저, 저, 저, 저랑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당령은 말을 더듬었다.
이옥환은 고갤 끄덕였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에 동참한다는 건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고 당령은 고갤 저었다.
“저는… 그럴 능력이 없어요. 저보다는 외숙이 더…….”
“물론 적 대협께서 얼마나 대단한 고수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강자의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라면 적 대협께 부탁드렸겠지요. 허나 가르침은 어찌 고강해야만 할 수 있겠습니까? 당 소저와의 비무를 통해서도 분명 깨달을 게 있다 생각합니다.”
그녀는 당령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백전비무행의 상대 중에는 그녀보다 강한 고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여럿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데, 하물며 무위가 낮다고 한들 무림인이다.
어찌 배울 점이 없겠는가.
당령은 입술을 옴팡지게 오므리더니 고갤 끄덕였다.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미타불… 저야말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챙! 채챙! 챙!
당령의 손이 흔들 때마다 사방팔방에서 암기가 쏟아져 내렸다.
허나 이옥환의 검을 넘을 수 없었다.
검저유혼(劍低遊魂) 당자운의 암기술도 뚫지 못했는데, 당령의 암기술로 뚫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당 어른께서 이리 보내신 게, 그녀 때문이 아닌 건가.’
이옥환은 독선의 제안대로 북천표국으로 왔다.
그녀는 적태산에게 비무를 청했다. 허나 그는 거절과 함께 자신의 조카를 추천했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을 거절한 경우는 처음이었으나 이옥환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령을 만난 순간, 독선이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 거 같단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당령과 손속을 겨루어본 이옥환은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이에 비해 무척 뛰어난 솜씨였으나 사천당가에서 상대했던 고수 당자운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물론 예상하고 있었지만,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에 실망감이 없다 할 수 없었다.
채~앵!
언제 다가왔는지, 당령의 손이 이옥환의 후위를 노렸다.
허나 고작 이 정도에 당할 그녀가 아니었다.
“아직, 이에요!”
기습이 실패하자 당령은 고민할 것도 없이 물러났다.
놔주지 않겠다는 듯 이옥환이 따라붙었다.
당령이 익힌 영사보법(靈蛇步法)도 훌륭하지만, 검각의 수미관음보(須彌觀音步)는 결코 아래가 아니다.
검권(劍圈)에 도달하자 이옥환은 검을 휘둘렀다.
허나 그녀의 검은 당령이 아닌 허공을 베었을 뿐이다.
이를 본 검각의 제자들은 의아했다.
결코 이러한 실수를 할 이옥환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물러나던 당령이 다시 달려들었다.
챙! 채챙!
동시에 일곱 혈을 노렸으나 모두 이옥환에게 막혔다.
“아직, 이군요.”
공격이 실패하자 이번 역시 당령은 미련 없이 물러났다.
이번에야말로 끝내겠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빠른지 빛이 번쩍이는 순간, 이미 검이 휘둘러져 있었다.
허나 이번 역시 당령을 베지 못했다.
그녀의 보법 수준이 대가(大家)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이옥환과 달리 그녀의 사형제들은 당황스러웠다.
“대체 어찌 된 거지요? 이런 실수를 반복할 사저가 아닌데…….”
“그러게 말이야.”
당령은 이옥환이 생각하는 것만큼 보법의 대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검이 헛된 곳만 베는 의미 모를 행동을 반복했다.
그녀들과 달리 정원사태는 어찌 된 건지 깨닫고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과연, 사질에게 좋은 경험이 되는구나.”
“사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매가 왜 저러는지 아십니까?”
“독(毒)이란다.”
“예? 독이라고요? 허나 사매는…….”
이옥환은 독에 의해 일시적으로 감각이 왜곡되었던 것이다.
허나 그녀의 사형제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검각의 내공심법은 사마의 기운은 물론 독에도 저항력이 높았다.
특히 이옥환은 소검후답게 비전을 익혀, 만독불침까진 아니더라도 백독(百毒)이 무효했다.
“그러니 대단한 거란다. 본문의 심법이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면서도 감각만 왜곡시켰으니 말이다.”
하독술이라는 게 무작정 독을 퍼트리는 게 아니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하독하는 게 중요하다.
당령은 이옥환과 비무를 치르는 와중에 본인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독을 한 것이다.
허나 정원사태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당령은 하독술(下毒術)이 아닌 독공(毒功)을 펼쳤다는 것을.
기합과 함께 번쩍였다.
“아미타불!”
“꺄~!”
비명과 함께 당령이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다치지 않은 듯하나, 그녀의 옷가지가 베여 있었다.
결국 당령은 패배를 시인했다.
“제가… 졌어요.”
“아미타불… 좋은 비무였습니다.”
자신의 감각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이옥환은 기합과 함께 독기를 떨치면서 결국 승부가 났다.
‘역시… 당 소저가 맞았구나.’
독선이 이곳을 추천한 이유, 그게 바로 당령 때문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소검후께는 안 되네요.”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전비무행 동안 많은 분들을 겪어봤지만, 이리 깨달음을 많이 주신 건 이 대협 다음이었습니다.”
그녀의 백전비무행 상대가 절정고수는 물론 초절정고수까지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당령을 무척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대협 다음이라니, 이 대협은 어떤 분이신가요?”
“백수(百獸)… 이백이란 분이신데, 본녀보다 어리시지만 그 어떤 분보다 강하셨…. 왜 그러십니까?”
당령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이옥환은 어리둥절했다.
당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소, 소검후님보다 어리신 이, 이 대협의 성함이 이백이 맞나요? 호, 혹시 하얀 고양이…….”
“예? 어떻게 하셨습니까. 설군이라는 고양이를…….”
그 순간 눈을 부릅뜬 당령이 그녀의 양팔을 부여잡았다.
“어딨나요! 백이 삼촌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