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취개(醉丐)
“강한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백은 열성적으로 한 여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제갈혜원이었다.
파운부의 일이 벌어진 이후 그녀가 한동안 넋을 잃고 지냈다.
일개 시비라 하나 자매처럼 지내온 미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다.
그렇게 며칠간, 힘들어하던 제갈혜원은 자리를 털고 나와 형주상회에 출근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허나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그녀는 형주상회의 서기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이백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는 걸 깨달은 이백은 거절치 않았다.
“필요한 만큼 내공을 조절하는 게 핵심이야.”
“하, 하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된 위력이…….”
제갈혜원은 강해지고 싶었다.
그렇기에 상관벽이 아닌 이백을 찾은 것이다.
허나 이백의 가르침은 그녀가 원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제갈혜원. 건방지네.”
“……!”
나직한 이백의 말에 그녀는 발끈했다.
하지만 이백은 단호하게 질책했다.
“쉽게 강해질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강하지 않을 수 있지. 남들은 괜히 피땀 흘리고, 뼈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수련하는 게 아니야.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려면 돌아가. 상관 노야는 어떨지 모르지만, 난 네 응석을 받아주려고 내 시간을 할애하는 게 아니야.”
“…잘…못했어…….”
이백의 냉정한 말에 제갈혜원은 결국 잘못을 인정했다.
수련에 게을렀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자책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따스한 이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급해하지 마, 당장 강해질 수 있단 희망은 버려.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내자.”
“고마워…….”
제 손으로 복수하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에 조급해진 걸 알고 있었다.
허나 조급한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기에 이백은 차근차근 가르칠 생각이었다.
“탄지신통(彈指神通)은 소림의 탄지신공(彈指神功)과 달라. 관통력에 연연하지 마. 그 본질은…….”
제갈세가에는 소림의 탄지신공과 비슷한 명칭을 가진 지법이 있다.
그건 바로 탄지신통으로, 손가락을 튕겨 암기를 쏘아내는 암기술인 동시에 지법이다.
경지에 이르면 기(氣)를 암기처럼 쏘아낼 수 있는 절학이었다.
제갈혜원도 기본적인 권각술과 검술을 익혔지만, 심도 있게 익힌 건 아니다.
만일검(萬日劍)이라고 불리는 검을 제대로 익히는 건, 그녀가 원치 않았다.
제갈혜원이 원하는 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힘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소리비도(小莉飛刀)라는 절학에 소질을 보였다.
허나 무작정 소리비도만 익힌다고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 정확히는 제대로 된 위력을 기대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보완할 절기가 제갈세가에 있었다.
그게 바로 탄지신통이다.
조법만이 아니라 권장수지(拳掌手指)에도 능한 이백이기에 가능한 가르침이다.
“우선은 비도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다음이 정확하게 적중시키는 것이고…. 위력은 마지막이야.”
“알겠어.”
제갈혜원의 내공은 일갑자도 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위력만 생각하다간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내공이 고갈되어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이백은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갈혜원의 손가락이 붉어지더니, 두 시진쯤 지나자 피로 물들었다.
“윽!”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두 시진 동안 쉬지 않고 탄지신통의 수련을 했다.
손가락이 남아날 리가 없다.
고통스러움에도 제갈혜원은 빨리 강해져 복수하겠다는 열망이 너무도 커 수련을 중단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더 할 수 있…….”
“아니, 많이 수련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정확하게 수련하는 게 중요해. 그 손으로는 무리야.”
단호한 이백의 말에 그녀는 풀이 죽었다.
말이 두 시진이지, 상당히 긴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쉬지 않고 수련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알겠어.”
“분명 말하지만, 나 없는 데서 수련하지 말고 쉬어. 상태가 악화되어 제대로 못 할 상황이면 도와주지 않을 거야.”
제갈혜원은 풀이 죽은 얼굴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나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몰아세우는 게 아닌가.”
“이 정도로 말하지 않으면 말을 들을 녀석이 아니지 않습니까, 노야.”
그는 상관벽이었다.
제갈혜원이 걱정되어 은신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이백은 눈치채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그녈 보는 상관벽의 기운이 몇 번이나 흔들렸는데, 이백의 기감에 감지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기에 상관벽도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백 역시 그녈 위해 다소 미움을 살 수 있다고 한들, 가르침을 전함에 있어서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허어…….”
“응혈을 제거하고, 철심탕(鐵心湯)에 손을 담그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고 하지만 남은 응혈이 있을지 모른다. 처음부터 제거하는 게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회복만이 아니라 손가락의 단련을 위해 철심탕에 담그는 걸 제안했다.
뼈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철심초(鐵心草)에 여러 약초를 배합한 탕약이다.
장기 복용한다면 뼈가 튼튼해져 쉬이 부러지지 않는다.
“마시는 게 아니라 손을 담그란 말인가?”
“원하는 부위에 약기를 직접 흡수하게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외문무공을 전문적으로 익히는 이들의 방법이지요. 물론 그들에겐 철심탕보다 더 효과적인 비방이 따로 있겠지만요.”
천문산장의 식구인 교수(巧手)가 알려준 방법이다.
그는 명장이라고 불릴 만한 야장인 동시 외공으로 절정지경까지 오른 고수다.
그런 교수의 가르침이니 틀리지 않다.
실제로 이백도 효과를 봤다.
“허… 그런가? 노부는 왜 들어보지 못했지?”
“철심탕이 비싸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마시는 게 아니라 몸을 담글 정도라면 그 금액이 적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꾸준히 해오려면 보통 재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보통 고수들은 철심탕에 그런 금액을 지원할 바에는 영단을 구입해 복용하겠지요.”
장가계는 넓고 사람의 손길이 비교적 많이 타지 않은 심산유곡이다.
영초라 불릴 것들은 물론 약초들 역시 많이 자생하는 편이다.
그런 장가계를 앞마당처럼 돌아다니는 산인(山人) 덕분에 이백은 매일 호강할 수 있었다.
이백 이외에 약탕의 도움을 받은 이는 천문산장에 없었으니까.
“하긴 그렇겠군. 좋은 걸 배웠네. 지시해두겠네.”
상관세가는 정파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무림세가는 아니지만, 거의 근접한 가문이다.
동시에 상계의 입지는 오대세가보다 위다.
그렇기에 상관세가를 상가(商家)라 비아냥거리는 자들도 있다.
허나 도혼(刀魂) 상관세가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도객을 꾸준히 배출하는 가문이다.
상관세가를 비웃다가 골로 간 인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상관벽마저 돌아가자 이백은 하늘을 바라봤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천랑 여섯이라… 안 그래도 다들 일거리가 없다 죽상이었는데 다행이군.”
문사복(文士服)을 입고 있는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허나 평범한 문사가 아님을 알려주듯 단단한 체구와 보이는 이로 하여금 위축하게 만드는 험상궂은 얼굴이었다.
“어디 보자, 누굴 추천한다?”
“다섯 분은 총관께서 추천해주시고, 한 분은…….”
노인은 실질적으로 낭인막을 운영하는 총관 철검서생(鐵劍書生)이다.
서생 차림에 철검십삼결이라는 평범해 보이는 검법을 익혔다고 해서 붙여진 별호다.
허나 무난한 별호와 달리 그의 무위는 결코 무난하지 않았다.
“이보게 도부(屠夫).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게. 이 늙은이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홍안 어른을 모시려 합니다.”
“뭐? 취개를?”
구화마검의 의제 도부의 대답에 철검서생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붉다고 해서 홍안취개라고 불린다.
천랑이라고 다 같은 천랑이 아니다.
철검서생과 함께 삼태랑 중 한 명인 취개를 의뢰한다니.
그가 놀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예, 총관 어른.”
“그 주정뱅이는 의뢰를 받지 않네. 바람 귀신은 연락이 안 되고…. 노부는 어떤가? 돈만 많이 준다면 맡아줌세.”
구화당의 이야기를 들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철검서생은 난색을 표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자신을 추천했다.
그 역시 낭인이건만, 의뢰를 받지 못한 지 십수 년이 된 탓이다.
애초 초절정고수를 돈 주고 빌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철검서생의 말에 도부는 난색을 표했다.
그를 의뢰했다가는 구화당은 휘청이다 못해 폭삭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 홍안 어른을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주정뱅이는 의뢰를 받지 않는다 하지 않나.”
철검서생이 인상을 쓰자 도부는 움찔했다.
악명 높은 절정도객인 그라도 감히 철검서생 앞엔 오금을 펼 수 없었다.
오만 잡놈이 다 모인 낭인막을 휘어잡고 있다는 게 단순히 무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점잖은 척하지만, 성질 더럽기로 손에 꼽힐 정도다.
수틀리면 검을 쥘 수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 홍안 어른의 거처를 알려주시면, 직접 여쭤보겠습니다.”
“쳇! 오랜만에 몸 좀 푸나 했더니…. 반검(半劍), 취개에게 데려다줘.”
“예, 총관님.”
철검서생의 말에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쪽짜리 검이란 의미가 아니라 검을 꺾었다는 의미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자가 아니다.
그 역시 이십일낭숙의 한 명이니까.
도부는 반검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른…….”
“안 해.”
누더기 차림에 붉어진 얼굴. 취개였다.
그는 도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절했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모를 수 없던 탓이다.
십수 년간, 의뢰를 받은 적 없는 철검서생과 달리 취개는 수년에 한 번씩 움직였다.
삼태랑임에도 내키면 의뢰를 받았다. 은 한 냥에라도.
그렇기에 절실한 사정을 가진 자들은 취개를 찾곤 했다.
허나 그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지, 사연이 절실하다고 움직인 게 아니다.
그걸 알기에 대부분은 철검서생의 선에서 거부당하고 쫓아냈다.
“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실 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취개는 그냥 술에 취한 거지가 아니다.
흐리멍텅한 눈빛이 매섭게 바뀌는 순간, 섬뜩한 살기가 도부를 압박했다.
초절정고수의 살기는 절정고수인 도부라도 가벼이 여길 수 없을 정도다.
허나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
대형의 명도 명이지만, 구화당의 입장에서 그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부는 내공을 쥐어짜 버텨내며 소리쳤다.
“후아주!”
“…!! …지금 뭐하고 했지.”
그 순간,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제야 도부는 안도했다.
구화마검이 언급한 취개를 움직일 수 있는 보물.
그건 바로 전설의 술 후아주(猴兒酒)였다.
“후아주라고 말…컥!”
“원숭이가 만든 후아주를 가지고 있다고! 거짓이면 네놈만이 아니라 구화당은 사라질 게야!”
후아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원숭이가 만든 술이다.
원숭이가 어찌 술을 만들 수 있냐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전설의 술이다.
주조(酒造)의 대가들이 수없이 도전했으나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그렇기에 마셔보지 못한 술이 없다는 취개가 유일하게 맛보지 못한 술이 바로 후아주다.
그가 눈이 뒤집히는 것도 당연했다.
“컥, 컥…….”
멱살이 잡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컥컥거리는 도부를 내려놓은 취개가 흥분한 채 말했다.
“앞장 서라, 당장!”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