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이안환안 이아환아(以眼還眼 以牙還牙) (2)
퍽!
기습은 눈치챘지만, 제갈혜원을 구하느냐 자세가 엉성해 반격할 수 없던 이백은 튕겨 나갔다.
“혜원아! 괜찮으냐! 작은 할애비가 왔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고희는 지났을 법한 노인이었으나 기세가 상당했다.
분노에 찬 노인은 튕겨 나간 이백에게 달려들었다.
강렬한 도기(刀氣)를 뿜어내는 노인의 칼은 당장이라고 이백을 벨 기세였다.
그런 칼을 향해 이백은 손을 뻗었다.
꽈직!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도기가 실린 칼이 피육(皮肉)으로 이루어진 손에 붙잡히는 것도 부족해, 도신(刀身)에 실금이 갔다.
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색마 놈이 제법이구나!”
“상관세가에서 오셨습니까?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혜원이 친웁니다.”
이백은 쥔 칼을 놓고, 포권을 취했다.
노인의 칼은 다시 허공을 갈라 이백의 목 앞에 멈추었다.
휘두르는 것보다 멈추는 게 배는 어려운 법.
내공만 심후한 게 아님을 보여주었다.
멈추긴 했으나 아직 확신한 게 아니기에 칼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걸 어찌 믿지.”
“저분들이 증명해주실 겁니다.”
이백의 손가락이 가리킨 건 노인과 동행한 고수들이 부축하고 있는 허씨 형제였다.
지목당한 그들이 입을 열었다.
“마, 맞습니다… 장로님. 저…흴 구해주…셨습니다.”
부상이 심각한지 허씨 형제는 간신히 해명해주었다.
그제야 노인도 칼을 거두었다.
노인은 칼을 쥔 채 포권을 취했다.
“노부가 실례했소. 상관벽이라 하오.”
“역시 상관세가의 어른이셨군요. 이백이라 합니다.”
제갈혜원의 외가가 상관세가고, 그녈 지키기 위해 고수들이 오고 있단 걸 들은 적이 있기에 노인의 신분을 예상하고 있었다.
무극이도(無極二刀) 상관벽. 상관세가의 장로인 무극팔도의 둘째다.
상관세가의 장로는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고수들로, 하나 같이 절정지경에 오른 고수들이다.
그런 장로 중 한 명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제갈혜원이 무척이나 예쁨받고 손녀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호법인 광풍십팔도객(狂風十八刀客)의 넷과 도혼단(刀魂團) 고수들이 차출되었다.
“이 대협이었구려.”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혜원이랑 친우 사입니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거론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상관벽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허나 이런 사내라면 가까이 지내도 나쁠 것 없다 생각했는지, 깊게 묻지는 않았다.
“커험, 그래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상관벽의 입장에서 손자뻘인 이백에게 말을 올리는 게 편한 건 아니었다.
헌데 그가 먼저 편히 말해달라고 하니 상관벽으로서 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제안을 덥석 받은 게 민망한 듯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어찌 된 겐가.”
“자세한 것까진 알지 못합니다만, 저놈이 파운부라 하더군요.”
“……!!”
이백의 말에 상관벽의 눈이 커졌다.
상관세가가 호남에 위치했다고 한들, 파운부가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상관벽은 놀란 듯 되물었다.
“구화당의 파운부란 말인가!”
“그렇다 하더군요.”
이백이 너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상관벽은 자신이 아는 파운부와 곤죽이 된 자가 다른 사람인가 싶었다.
허나 거대한 전부(戰斧)는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파운부가 맞는다는 걸 증명했다.
상관벽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형문에 있던 놈이 혜원이를 노린 게 우연일 리 없고…. 구화마검의 뜻이겠군.”
“저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늙은 생강이 맵다고, 상관벽은 몇 안 되는 단서만으로 전말을 눈치챘다.
파운부만 해도 만만치 않은 고수지만,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그의 뒤에 있는 구화마검이다.
뒷골목 쓰레기 취급받는 게 바로 흑도(黑道)다.
실제로 사파의 뒷주머니 역할을 해왔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흑도에서도 고수가 나왔다.
구화마검은 무림 명숙조차 아래로 볼 정도로 강하다.
실제로 절정의 끝자락에 있는 상관벽 보다 강했다.
“으음… 알겠네. 뒤는 본가가 맡겠네. 그리고 혜원이를 구해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이백은 자신 돕겠다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
제갈혜원을 도운 건 어디까지나 그녀와 친우가 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녀의 가족이 와 있는데, 자신이 나서는 건 주제 넘는 일이다.
게다가 상관세가를 무시하는 걸로 비춰질 수 있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백이 돌아가자, 상관벽이 나직하게 말했다.
“본가에 서신을 보내야겠다. 지급으로…….”
* * *
쾅!
“이 새끼들이 정말,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구화마검이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후려쳤다.
성인 허리보다 두꺼운 탁자이건만, 박살이 났다.
파운부의 연락이 끊기고, 형문현의 흑도가 정리되었다.
허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구화당의 3할에 해당하는 하부조직이 무너졌다.
제갈혜원을 해하려고 했던 보복인 셈이다.
분노하는 그를 향해 초로의 사내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형, 회주께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제갈세가만이 아니라 상관세가까지 움직인 이상 본당만으로는…….”
구화마검의 얼굴이 구겨졌다.
당장이라고 검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이다.
허나 구화마검은 화를 꾹 눌렀다.
그들이 그의 의제들이기 때문이다.
도박에 미친 도치(賭痴)와 백정 출신인 도부(屠夫).
두 사람 모두 도법으로 절정지경에 오른 강자들이다.
“십여 년 전의 그 치욕을 맛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더냐!”
“그, 그건…….”
호북 흑도의 제왕으로, 무림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구화당에 난입한 자가 있었다.
그는 복속(服屬)을 요구했다.
구화마검은 불쾌함을 참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잔혹하게 죽여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면 어찌 되는지, 만천하에 알려줄 생각이었다.
허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곤죽이 된 건 사내가 아닌 바로 구화마검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의제였던 도치와 도부가 기겁하며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굴욕적인 복속이 이루어졌다.
허나 더욱 치욕적인 건, 그들을 제압한 자가 상대 조직의 수장이 아니란 점이다.
십병암귀(十兵暗鬼).
흑천회주도 아닌 그의 심복에 의해 구화당이 복속된 것이다.
녹림과 감정이 상할 수 있음에도 파운부를 의제로 삼은 것도, 초절정지경에 오를 싹이 보이는 적운투귀를 끌어들인 것도 치욕을 갚기 위함이다.
“게다가 놈은 득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
“하, 하지만 그 많은 돈을 가져가면서…….”
구화당이 과거부터 호북 흑도에 군림했으나 무한을 중심으로 돈이 되는 지역뿐이었다.
허나 지금처럼 작은 지역까지 손을 뻗은 건, 흑천회에 거액을 상납해야 하기 때문이다.
속세와 적당히 거리는 두는 무당과 본가 일대만 영향력을 떨치던 제갈세가가 그들을 신경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구화당의 무리수로 인해 급전적으로 일어지게 되었을 뿐.
결국 이번 일은 언제든 일어날 사달이었단 뜻이다.
“넌 상납받았다고 돈 준 놈을 신경 써주냐?”
“그, 그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뿐, 상납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보호해주거나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는다.
그게 바로 정파와 흑도의 차이다.
물론 정파 역시 시늉 정도만 할 뿐이다.
“우리의 효용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놈들은 우릴 대신한 놈을 세울 거야.”
“그런!”
도치는 언성을 높였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새 술은 새 부대라고, 구화당 그리고 구화마검을 대신한 자를 보내 새롭게 호북 흑도를 장악하면 그만이다.
초절정고수가 어디 흔한가.
허나 강남 일대를 지배하는 흑천회다.
초절정고수 한 명 수배하지 못할 리 없고, 설사 없다고 한들 절정고수 여럿으로 대신하면 그만이다.
체면을 생각하는 무당이나 제갈세가가 명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 큰 분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구화마검만이 아니라 그의 의제들 역시 알고 있었다.
도부가 입을 열었다.
“대형의 말씀이 옳긴 하지만, 본당의 전력만으로는…….”
“낭인막에 연락 넣어.”
“……!”
구화마검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닌 그렇다고 흑도도 아닌 어중간한 자들, 낭인(浪人).
다양한 이유로 어딘가 적(籍)을 두지 않고, 자신의 무(武)를 팔고 다닌다고 해 낭인(狼人)이라고도 한다.
그 실력 역시 천차만별이다.
물론 대부분이 이류 이하지만, 고수라 불리는 일류급 이상 강자도 존재했다.
얽매이기 싫어하고 자유로운 자들이지만, 매무(賣武)하기 위해선 이를 주선해줄 이가 필요하다. 그래야 쉽게 무를 파고, 살 수 있으니까.
그곳이 바로 낭인막(狼人幕)이다.
“천랑(天狼) 여섯.”
“대, 대형!”
구화마검의 말에 도치는 기겁했다.
낭인막은 크게 셋의 등급으로 구분한다.
이류 이하인 인랑(人狼).
일류고수인 지랑(地狼).
마지막으로 절정 이상의 천랑(天狼).
지랑만 되어도 대금이 가볍지 않는다.
하물며 천랑부터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거액이 필요하다.
천랑은 다른 말로 이십일낭숙이라 칭한다.
즉, 구화마검은 이십일낭숙 중 3할이나 되는 고수들을 고용하라 명한 것이다.
수금액의 상당 부분을 흑천회에 상납하는 걸 생각하면, 구화당의 기둥이 뽑힐 일이다.
허나 구화마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은 취개(醉丐)로 청부해라.”
“사, 삼태랑(三太狼)이라니요! 불가능합니다!”
취개라는 말에 도치와 도부는 기겁했다.
이십일낭숙 사이에 실력 차이가 존재한다.
대부분이 절정 초입이지만, 그 이상의 고수도 존재한다.
특히 상위 셋은 격이 다르다. 그들 삼인을 합쳐 삼태랑이라고 부른다.
그들만 따로 떼어 삼태랑이라 칭하는 이유는 무려 초절정지경에 오른 절세고수들.
천랑 다섯보다 취개 한 명이 몸값이 더 비싸다.
구화마검이 무리수를 던지고 있으니, 의제들이 기겁하는 게 당연하다.
“닥쳐! 너희 말대로 제갈 놈들과 상관 놈들이다! 신산 늙은이가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초절정고수가 한 명만 움직일 거 같아! 만약 두 놈이면! 너희가 막아낼 수 있더냐!!”
“…….”
구화마검의 호통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신산을 제외해도 제갈세가에는 호연신검과 금검이 있고, 상관세가 역시 무극신도가 있다.
한 명은 몰라도 둘은 구화마검도 불가능하다.
구화마검은 그야말로 막다른 길에 섰다.
몇이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이라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대금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취개를 움직일 만한 보물이 있으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구화마검은 확언에 의제들은 화들짝 놀랐다.
삼태랑은 몸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매무(賣武)하는 일이 드물었다.
애초 초절정고수를 돈을 고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다.
초절정고수. 하다못해 절정고수만 해도 일가를 세울 능력이 있고, 기존의 세력에 들어가도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항상 천랑은 열 명 안팎이다. 21명이나 존재한 건, 당대가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초절정급 역시 셋이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애초 낭인막은 막주가 없다. 낭인과 의뢰인을 조율하는 총관만 존재할 뿐이었다.
허나 당대에는 막주가 탄생했다.
얽매이기 싫어 낭인으로 남은 자들이 발발할 게 뻔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낭왕(狼王). 무려 무림십왕이다.
천대받던 낭인. 그리고 낭인막이 거대세력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다.
낭왕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고, 삼태랑도 쉬이 움직이지 않는 게 정설이다.
그런 삼태랑을 움직일 수 있는 보물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금한가 보구나. 취개를 꾀어낼 보물이 뭔지.”
“예! 대형! 대체 어떤 보물로 취랑을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궁금해하는 도치와 도부를 보며 구화마검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건 바로…….”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