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혜화(慧花) (2)
“우리 상회에서 일하고 싶단 말입니까.”
이십 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인은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품에서 소개장을 꺼냈다.
“아버… 대총관님의 소개장이에요.”
“으음…….”
현유는 여인이 건넨 소개장을 읽었다.
제갈세가의 대총관이 보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 와룡상단과 계약 맺을 시 상당한 지원과 이득을 약조하겠단 첨언도 있었다.
와룡상단과 같은 대형 상단과 함께 일한다는 것만으로 형주상회는 이득이다.
그런데 여인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그 이상의 득을 취할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거절하면 바보가 될 만한 조건이지만, 현유는 조심스러웠다.
“제갈 부단장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적혀 있는데, 호위단은 단장에게 일임해서…….”
“저는 서기로 일할 생각이에요. 걱정하지 않으셔서 되요. 길지는 않지만, 와룡상단에서 일을 배워 상단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요.”
현원마장으로 도망치기 전에 부친의 지시로 와룡상단에서 일을 했다.
혜화라는 별호답게 빠르게 제 몫 이상을 해냈다.
하지만 말이 그리워서 결국 현원마장으로 도망치고 만 것이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처소는…….”
“상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무관(武館) 하나를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오갈 생각이니 걱정하지 않으셔서도 됩니다.”
제갈혜원은 제갈세가의 직계이자 대총관의 여식이다.
그녈 홀로 보낼 수 없다. 그렇다고 고수를 형주상회로 보내는 건 그림이 좋지 않다.
그렇기에 무관을 인수해 합법적(?)으로 고수를 형주에 투입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정확히는 제갈세가의 고수가 아니다.
상관세가의 고수들이었다.
제갈혜원을 위해 상관세가가 움직이는 이유는 그녀의 외가이기 때문이다.
호남 악양에 본가를 둔 상관세가는 무림세가로서도 무명(武名)이 높지만, 상계에 그 명성도 높은 가문이다.
게다가 악양의 지리적 강점 덕분에 호남만이 아니라 호북에도 거래가 활발한 가문이다.
그런 상관세가와 제갈세가의 혈맹은 한때 무림에 화제였을 정도다.
“알겠습니다.”
“본녀는 상회주님의 아랫사람입니다. 말씀 편히 해주십시오. 상회주님.”
그녀는 제갈세가의 사람이지만, 이 순간부터는 형주상회의 서기다.
위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말투부터 바꿔야 하는 법이다.
제갈혜원의 말뜻을 이해한 상회주가 고갤 끄덕였다.
“제갈 서기, 내일부터 일할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도 가능합니다. 상회주님.”
적극적인 그녀의 마음가짐에 현유는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상단 일이 답답하다고 도망쳤던 제갈혜원이지만, 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확실하게 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와룡상단은 가문의 상단이지만, 이곳은 아니기에 자신의 행동으로 가문을 욕먹게 할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회주님, 제갈유기입니다.”
“들어오게.”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그가 찾아왔다.
현유는 그에게 제갈혜원을 맡겼다.
“오늘부터 우리 상회의 서기로 일하게 되었으니, 부단장이 안내해주게.”
“…예, 상회주님.”
제갈유기가 눈짓을 하자 앉아 있던 제갈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현유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오라비를 따라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제갈유기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호법님께 까불다가 혼났다고?”
“까불긴! 누가, 까불었다고……!”
제갈혜원은 오라비의 말에 발끈했다.
하지만 그의 엄한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아비보다 제갈유기를 더 두려워했다.
나이 차도 있지만, 바쁜 부친 대신 제갈혜원에게 학문부터 상단 일을 가르친 게 바로 그였다.
제갈유기의 가르침이 매우 엄해 지금도 그를 두려워할 정도다.
그나마 본가보다는 외부에 있는 경우가 더 많기에 두려움이 많이 희석되었다.
“호법께서 천기의 의제라고 쉬이 대하지 마라. 보통 분이 아니시다. 알겠느냐.”
“…….”
제갈유기는 형주상회에서 지내며 이백을 가까이 겪었다.
단순히 무공만 강하다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다.
이백이 형주상회에서 변화시킨 일들은 일개 무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신비한 매력을 가져,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런 그가 육촌아우의 의제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누이를 이곳에 보낸 어른들의 생각을 알아차렸기에 이백의 눈 밖에 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답은.”
“…예.”
제갈혜원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그도 더 이상 다그치지는 않았다.
이리 철없이 행동해도 생각이 없지는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아… 이 망둥이를 어찌할꼬.’
* * *
[‘야군’의 내공이 소폭 상승했습니다.]
말(馬)이 무슨 내공이냐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만은 않다.
짐승이 오랜 시간 자연의 기운을 쌓으면 영물이 된다.
다만 무림인과 달리 축기(畜氣)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그 시간 오래 걸리고, 영물이 되는 경우가 극히 적을 뿐이다.
야군의 경우 이백과 계약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 과정에서 이백에게서 ‘불완전한 신의 불꽃’을 흡수할 수 있었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은 일종의 자연지기(양기)의 정수다.
‘불완전한 신의 불꽃’이 내공으로 치환되어갔다.
“워~ 워~ 진정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히이잉~!”
야군은 아쉽지만, 이백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야군은 동공(動功)을 익힌 것처럼 움직이면 내공이 반응했다.
특히 달릴수록 내공의 반응이 커지고, 흡수한 ‘불완전한 신의 불꽃’이 내공으로 치환되어갔다.
그걸 알게 된 이백은 매일 잠깐이라도 야군과 형주 밖으로 나와 달렸다.
“자, 돌아가자~!”
“히이잉~!”
그렇게 수련(?)을 마친 두 인마(人馬)가 형주상회로 돌아왔다.
야군을 마사(馬舍)에 데려가던 이백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 있으면 안 되는 여인을 봤기 때문이다.
“…소저가 이곳은 어떻게…….”
“오, 오랜만에 뵙네요. 이 대협…….”
제갈혜원이 형주상회에서 일하게 되었단 걸 모르던 이백은 깜짝 놀랐다.
반대로 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던 제갈혜원은 놀라는 대신 머쓱한 표정이었다.
말을 좋아하는 그녀답게 마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때 하필 이백이 야군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다.
“…….”
“…….”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차라리 초면이라면 이보다 더 편했을지 모른다.
서로 찔리는 게 있는 상황이니, 더욱 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야군이 울었다.
“히잉.”
“아, 그래…. 들어가자.”
이백은 야군을 마사에 넣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그간은 마사(馬舍)지기가 해주었기에 직접하는 게 처음인 탓이다.
당황하고 있을 때, 제갈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
그녀의 목소리에 이백은 멈칫했다.
그러는 사이 제갈혜원이 그의 곁에 대신 마사를 열어주고, 고삐를 잡았다.
허나 야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약자인 이백과 그가 허락한 마사지기가 아닌 탓이다.
제갈혜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이백이 나직하게 말했다.
“괜찮으니 따라줘.”
“히이잉~”
야군은 약하게 울더니, 그제야 제갈혜원의 인도를 따랐다.
그녀는 야군을 마사에 넣을 뿐만 아니라 능숙하게 안장과 고삐 등을 풀었다.
자신을 구속하던 장비들이 사라지니 야군은 기분 좋은지 다시 한번 울었다.
말을 좋아해서 마장에서 살다시피 한 게 의미가 있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백은 뻘쭘한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끄응~ 마 노인에게 배워둬야겠네.’
만수통령술 덕분에 짐승을 부리는데, 보조 장비가 필요치 않았다.
야군 역시 부리는 것은 장비 없이 얼마든 가능하다.
허나 부리는 것과 말타기는 다르다.
보조 장비는 말의 조련만이 아니라 몸에 부담을 줄이며 오랫동안 탈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함이다.
마사지기 마 노인이 있기에 채워본 적이 없으니, 푸는 것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도와주어… 고맙습니다.”
“아, 아니에요.”
“…….”
“…….”
그들 사이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함을 참기 어려웠는지, 이백이 먼저 고갤 숙이곤 몸을 돌렸다.
그때 제갈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앞으로 형주상회에서 일하게 됐어요. 오다가다 자주 보게 될 텐데…….”
“…지난번에는 제가 지나쳤습니다.”
그녀가 먼저 용기를 냈는데, 무시하는 건 사내가 할 짓이 아니라 생각한 이백이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제갈혜원은 움찔했다.
그녀의 반응에 이백은 아차 했다.
이곳에는 동성끼리도 직접 손을 잡는 악수(握手)의 개념이 없었다.
보편된 인사법은 포권(包拳)이었다.
하물며 이성끼리 신체적 접촉을 해야 하는 악수를 할 리가 없다.
그걸 깨달은 이백이 손을 거두려 했는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을 통해 전해진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온기에 이번에는 이백이 움찔했다.
허나 오래 당황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백은 제갈혜원이 오해하지 않게 설명했다.
“악…수라는 서역의 인사법입니다.”
“그, 렇군요.”
오해가 깊어지지 않게 그녀의 손을 놨다.
허나 악수를 처음 해본 제갈혜원은 어찌해야 하는지 몰라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놓, 으셔도 됩니다.”
“앗! 예…….”
제갈혜원은 다급히 그의 손을 놓았다.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가면 또다시 어색한 관계가 유지될 것임을 알기에 이백이 말했다.
“아십니까? 저희 나이가 같다는 걸…….”
“예? 예…….”
그의 뜬금없는 말에 제갈혜원은 얼떨결에 고갤 끄덕였다.
이어지는 이백의 말은 더욱 뜬금없었다.
“서역에선 나이가 같은…. 혹은 나이와 상관없이 친우가 되면 서로 말을 놓는다 합니다.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말입니다.”
“그, 그 말씀은…….”
말속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는지, 당황한 제갈혜원은 말을 더듬었다.
친우라면 사내끼리 평대를 하긴 하지만, 여인이 사내에게 말을 내리는 건 예법에 어긋난다.
상대가 지체가 낮은 경우만 예외였다.
유가(儒家)와 달리 무림이 예법에서 다소 자유롭다 하지만 제갈세가는 명문 중에 명문.
무림세가인 동시에 지자의 가문이다.
예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상대는 육촌오라비의 의제이며, 몸담고 있는 형주상회의 호법이다.
그에게 말을 내린다면 제 아비가 당장 들이닥칠지 모른다.
아니, 아비는 둘째고 친오라비의 잔소리 세례를 받게 될 것이 뻔하다.
“애초 우린 처음에 반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잊어주세요.”
이백의 말에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제갈혜원 본인도 당시에 왜 그리 행동한 지 알지 못했다.
아무리 흥분했다고 한들, 처음 본 사내에게 그렇게 행동할 그녀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백은 그녈 타박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무안을 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과오는 잊고 친우가 되었으면 해서 하는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의형은 있지만 친우는 아직 없어서 말입니다.”
“…….”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제갈혜원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심정이 엿보였다.
이백은 기습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제갈… 아니, 혜원아.”
“어? 보, 본녀도 잘 부탁합…해.”
얼떨결에 손을 잡은 제갈혜원은 머리가 하얘졌는지 말이 꼬였다.
그런 그녈 보며 이백은 피식거렸다.
그렇게 이백에게 처음으로 여사친이 생겼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