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혜화(慧花) (1)
“본가의 흔적은?”
제갈윤호의 물음에 초로의 사내는 나직하게 말했다.
“의창효가와 형문의 주도로 벌어진 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심증이 있다고 한들, 본가와 연결 짓지는 못할 겁니다.”
호북 서남 지역에 큰 영향을 지닌 의창.
정파인 의창효가와 형문파의 영역이다.
허나 그들조차 손을 대지 못하는 세력이 있으니 바로 적운파(赤雲派)였다.
일개 흑도조직 따윌 명문정파가 눈치를 본다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적운파가 구화당의 예하라면 말이 다르다.
그런 적운파가 사라졌다. 의창효가와 형문파에 의해서.
“그 아이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구화마검. 네놈은 선을 넘었어.”
구화마검의 의제 중 한 명인 적운투귀(赤雲鬪鬼) 범달.
형주상회에게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지만, 이백을 노렸다.
그로 인해 붙잡힌 범달은 제갈세가로 넘어갔다.
제갈세가는 범달을 통해 적운파와 구화당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다.
그리고 정보를 의창효가와 형문파에 흘려 그들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적운파가 사라지고, 의창은 완벽하게 정파의 영역이 되었다.
“형문(荊門)도 정리하게. 사지의 두 개 정도는 찢어져야 섣불리 움직이지 않지.”
“조치하겠습니다.”
형문파는 의창의 강 너머에 위치한 형문산(荊門山)에 본파를 두고 있기에 주 활동 영역이 의창인 것이다.
그에 반해 제갈윤호가 언급한 형문현(荊門縣)은 융중과 형주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의창의 적운파처럼 형문현 역시 구화마검의 의제가 상주한 지역 중 하나다.
의창에 의해 형문현까지 정리한다면 구화마검의 힘이 상당히 위축될 것이기에 제갈세가 역시 언젠가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때가 지금 일 줄 몰랐을 뿐이다.
게다가 이백을 위해서 형문현에 구화당의 힘을 빨리 지우는 게 낫기에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만 돌아가 봐도 좋네.”
“…죄송합니다, 가주님. 소제가 여식의 교육을 못 했습니다.”
제갈윤호의 축객령에 초로의 사내는 물러나지 않고, 용서를 구했다.
제갈혜원의 일은 본가에 빠르게 전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와룡패의 주인과 얽힌 일이니 당연했다.
“대총관, 후우… 진호야. 네가 고갤 숙일 만한 일이 아니다.”
“아닙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제갈윤호는 대총관의 말에 난감했다.
그는 사촌아우이자,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불리는 제갈진호다.
고작 이런 일로 벌을 내린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제갈윤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그 말씀은…….”
제갈윤호를 가장 가까운데 모시는 대총관답게 제갈진호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제갈윤호는 그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마침, 유기가 형주상회에 있으니 가서 도우라 하게.”
“…그리 지시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진호는 착잡한 마음이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사촌 형이 원하는 게 뭔지 알기 때문이다.
그도 여식을 둔 아비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제갈진호가 돌아간 후 제갈윤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이거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는데?”
아들은 다른 누이들을 추천했지만, 제갈윤호의 생각은 달랐다.
성정이 보통이 아니라지만, 자신에겐 너무도 어여쁜 조카였다.
게다가 제갈혜원과 이백이 잘 된다면, 아들에게 더욱 힘이 실리게 된다.
그렇기에 조카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제갈혜원이었던 것이다.
비록 개운한 인연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인상이 깊을 거라 생각했다.
명분도 좋다. 친오라비를 도우라.
가주로서 자신의 아들을 밀어준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오추마야,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거라면 싸지, 암~! 싸고말고!”
교배를 통해 새끼를 낳는다면 현원마장의 자산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
그걸 기분 좋게 포기할 정도로 이백은 탐이 났다.
비록 아들의 의제이고 자신을 아버님이라고 부르지만, 혼인으로 묶이는 것만큼 확실한 게 더 어디 있겠는가.
허나 그게 이백의 평온한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대인 죄송합니다, 상회주님께선…….”
형주상회는 입구부터 북적였다.
상회주 현유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안 되겠는가? 커험… 이걸 약주 한잔하게.”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는데…….”
급기야 입구를 지키고 있는 호위단 무사에게 뇌물을 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회를 보호해야 하는 호위단 무사가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는 건 징계감이다.
사익을 챙긴다면 결국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
그로 인해 상회의 안전상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고하는 자네들에게 주는 게 무슨 죄인가?”
“커험…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윗분들께서 잘 말해두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사의 말에 중년 사내는 화색이 돌아갔다.
이게 통한다는 걸 깨달은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낭을 열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더 이상 형주상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뒷돈을 당당히 받았다.
사실 이건 제갈유기의 지시였다. 정확히는 현유 상회주와 협의가 된 일이었다.
무작정 막을 수 없으니, 적당히 호위단 무사들의 사기라도 높이자는 취지였다.
호위단장을 포함해 절반에 가까운 무사들이 상행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최대 전력인 호법 이백도 없는 상황에서 악의를 품는 일을 줄이기 위해 방책인 셈이다.
선위무사(문지기) 역할을 담당하는 호위단 무사들도 단독으로 뒷돈을 취하지 않고 동료들과 나누기에 내부 분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좀 들어가겠습니다. 비켜주시겠습니까.”
“이봐, 여기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곁에는 잘생긴 흑마가 한 마리가 있었다.
거구의 흑마는 그 위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상회주를 만나고 싶어 서성이던 자들은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때 한 중년인이 거드름을 피웠다.
“오호~! 좋은 말이군. 내게 팔게. 상회주께 드릴 선물이 부족한 거 같아 걱정이었는데, 비싸게 사줌세.”
“우리 야군이를 사겠단 말이오.”
중년인의 말에 청년의 표정과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존댓말을 하던 청년의 반응이 바뀌자 중년인은 움찔했다.
“비, 비싸게 사주겠다는데 지금…….”
“다, 다들 비켜주십시오!”
아들뻘인 청년의 반응에 기분이 상한 중년인이 강하게 나가려고 할 때, 호위단 무사들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들이 급히 사람들을 가르며 청년의 앞에 섰다.
“호위단 오상진이 호법님께 인사드립니다!”
“호위단 정호준이 호법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상행 물자창고를 지키다가 배신자 엄백에 의해 부상을 입은 무사들이었다.
다행히 그간 부상이 회복되어서 가벼운 임무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흑마를 사겠단 중년인은 사색이 되었다.
“호, 혹시 유, 유 상단주의 호위장을 제, 제압했다는…….”
“백수라 하오. 그리고 야군이는 내 가족과 같아 팔 수 없소.”
이백의 말에 그는 사색이 되었다.
형주의 무법자 혈당랑은 물론 유경표의 호위장까지 제압했다고 알려진 고수가 바로 이백이다.
형주상회주조차 말을 높이며 귀히 여긴다는 이에게 말을 팔라고 말했으니, 당연하다.
“그, 그게 그, 그러니까…….”
“상회주께선 잘 지냅니까.”
이백은 중년인의 변명을 무시한 채, 오상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매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들어가시지요! 상회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다행히 그간 별일이 없었나 보군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백이 움직이자 상회 입구를 막고 있던 이들은 썰물처럼 길을 열었다.
이백이 상회 안으로 들어가자, 오상진은 품에서 전낭을 꺼내 중년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곤 나직하게 말했다.
“상회주님께서 바쁘셔서 만나 뵙기 어려우실 거 같습니다.”
형주에서 나름 돈 좀 만진다는 그였으나 이로써 형주상회에 줄을 대는 건 사실상 물 건너가게 되었다.
형주상회의 호법 이백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모두에게 다시 각인시켜주었다.
“커험… 이만들 돌아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오늘은 상회주님께서 시간이 없으실 거 같습니다.”
* * *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상회주님.”
“호법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현유의 뜬금없는 말에 이백은 어리둥절했다.
그런 그의 반응에 현유는 미소를 지었다.
“와룡상단에서 호북 중남부 거래를 맡기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와룡상단이라면… 제갈세가의 상단 아닙니까? 그럼 제갈 부단장께서…….”
제갈세가의 중추 사업은 대부분 칠대분가가 맡고 있다.
허나 유일하게 상단만큼은 본가의 대총관 주도하에 운영되었다.
모든 재정을 분가의 주도로 이루어지면 주객이 전도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피로 이루어진 세가라도 해도 제갈세가와 같은 거대세가라면 직계와 방계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분란은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물론 제갈 부단장도 이유겠지만, 서신에 이백 호법님을 잘 부탁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
이백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서 기막을 쳤다.
“…제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상회주님 이외에 더 있습니까?”
“와룡상단의 일은 알려졌으나 호법님의 성함…. 안 되는 일인가요?”
“상회주께선 아시겠지만, 저는 검모궁과 연이 있습니다. 제 이름이 알려지면 검모궁의 적이 상회를 노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본명이 아닌 별명을 알려드린 겁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현유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무림인은 아니었지만 검모궁이 상당한 힘을 가진 집단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검모궁과 척을 지고 있는 적이라면 보통 세력이 아니란 뜻이다.
형주상회가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호법님의 본명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래야겠지만… 이미 늦었을지 모릅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검모궁에 요청해야 하겠군요?”
현유의 말에 이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방법이지만, 상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적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할 겁니다. 괜히 검모궁의 고수들을 청했다간 적에게 확신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자신 때문에 검모궁이 위험해지면 안 된다.
그러니 검모궁은 제외하고 계획을 짜야 한다.
“상단이 된다면 호위단의 규모를 넓혀야 하니, 무사들을 꾸준히 모집했으면 합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은 그리 할 예정이었습니다.”
무사 사십여 명이 적다고 할 수 없지만, 상단 경비만이 아니라 상행의 보호까지 생각하면 너무 적은 인원이었다.
그렇기에 형운표국에 의뢰를 했던 것이다.
호위단의 규모를 늘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고수들을 더 영입하고, 실력 있는 문파들과 줄을 댔으면 합니다. 무당파 속가문이 여럿 있다 들었습니다.”
“으흠… 노력해보겠습니다.”
상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검모궁과 연을 맺은 건데, 그 외에 문파들에 줄을 대면 돈이 이중으로 소요된다.
물론 이백이 상주한 것만으로도 검모궁의 연은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으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허나 그 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며칠 후 형주상회의 문을 두들긴 여인에 의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