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무당(武當) (6)
“아닙니다. 진인.”
검선이 맞이한 손님은 바로 이백이었다.
그를 찾아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선이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흘려 이백이 감지할 수 있게 했으니 말이다.
“무량수불… 백괴를 쓰러트린 그 영물이군.”
“예, 제 가족과 다름이 없는 소중한 친구지요.”
검선의 말에 이백의 품속에 있던 설군이 머릴 밖으로 내밀었다.
겉보기에는 새끼 고양이로만 보이지만, 무림십왕답게 검선이 느낀 건 달랐다.
초인지경(超人之境)이라고 불리는 화경(化境).
검선의 그런 화경에서도 완숙을 넘어 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오존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설군의 본질까지는 꿰뚫어 보지 못했으나 영물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늙은 도사가 자넬 청한 건, 본파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고…. 부탁이 있기 때문이네.”
“무당을 구했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저 흑백쌍괴에 대한 책임을 무당에 전가한 게 죄송스러워 신경 썼을 뿐입니다.”
일성도장을 적발한 건 우연의 부산물이다.
그리고 흑백쌍괴 역시 검선에게 쓰러질 자들이었다.
이를 알면서 생색낼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본파가 자네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일세. 이걸 받아주게나.”
“이건?”
작은 상자였다. 투박해 보였으나 검선이 내놓은 게 평범할 거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소청단일세.”
“그럼 더욱더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갈천기에게 전하려 했던 그 소청단이었다.
무당의 보물이라는 태청단만 못하지만, 소청단 역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그가 지난 밤에 한 일을 생각하면 소청단이 과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백은 소청단을 되려 밀었다.
“그도 그러더니, 어찌 다들 이리도 욕심이 없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갈천기는 아쉬워하는 기색이라도 느껴졌으나 이백에겐 그조차 느낄 수 없었다.
검선은 자신이 그와 같은 나이였다면 과연 소청단을 거절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허나 소청단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물론 이백은 소청단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이리 거절할 수 있었다.
초절정지경에 오르기 전이었다면 그 역시 흔들리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는 없다.
“아닐세.”
“제게 하명하실 일은 무엇인지 알려주시겠습니다.”
이백이 소청단을 거절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검선 정도 되는 거인의 부탁이 평범할 리가 없다.
소청단을 받게 된다면 거절하기 어렵다.
아무리 검선의 부탁이라도 무조건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에 소청단을 사양한 것이다.
“무량수불…. 흑백쌍괴가 끝이 아니라면 믿겠는가.”
“예?”
흑백쌍괴가 끝이 아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흑백쌍괴가 속한 집단이 있고, 그들에게 명을 내리는 존재가 있다네. 그 세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고, 중원에 얼마나 마수를 끼치고 있는지 알 수 없네.”
“…설마 부탁이라 하시는 게…….”
이백이 모를 리가 없다.
이 세상이 [영웅 : 무림전설]의 속인지 아니면 평행세계인지 알 수 없다.
허나 연관이 있다는 건 몇 번이나 겪어봤다.
[영웅 : 무림전설]의 방대한 세계관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애초 흑백쌍괴는 퀘스트 ‘융중혈사’의 핵심 인물일 뿐, 에피소드 ‘암류의 준동’조차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검선이 말이 아니라고 모를 수 없다.
“그들의 꼬리를 찾아주게.”
“…죄송합니다. 진인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누가 감히 검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허나 이백은 재고할 것도 없이 거절의 뜻을 밝혔다.
이리 단호히 거절당할 줄 몰랐던 검선은 당황했다.
“그들과 싸우라는 게 아닐세. 그저…….”
“진인의 말씀대로 얼마나 거대할지 모를 세력입니다. 흑백쌍괴조차 부리는 자들이겠지요. 그들의 쫓는 과정에서 충돌이 없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저에 대해 알려진다면 저만이 아니라 주변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백은 두렵기 때문에 거절한 게 아니다.
그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의형인 제갈천기의 제갈세가, 호법으로서 몸 담고 있는 형주상회, 천문산장과 검모궁까지 암류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그걸 알기에 이백은 검선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백의 말에 검선은 고갤 끄덕였다.
“맞는 말일세. 이 늙은 도사가 생각이 짧았네.”
“아닙니다. 오히려 진인의 뜻을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검선이 이백을 통해 암류의 꼬리를 잡으려 하는 이유가 있었다.
흑백쌍괴를 부리는 세력이다.
추적자의 최소 자격은 초절정고수여야 한다.
아니면 헛된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무당에도 초절정고수가 있다.
무당삼도와 무당신검.
허나 그들은 너무 유명해서, 은밀하게 움직인다는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뛰어난 무위와 달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강자가 필요하다.
무위와 명성은 비례하니,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다.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 이백이다.
비록 지난 밤, 그가 흑백쌍괴를 제압했다는 게 알려졌기에 소문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무당파 제자들을 입단속 시킨다면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건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에게 청한 것이나 이백은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의 말처럼 희생이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니, 강요해서 아니 된다.
“아닐세. 만약… 그들로 인해 중원이 위험해지면 도와줄 수 있겠는가.”
“저 역시 이 땅에 살고 있으니까요.”
이백이 강해봤자 검선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가 서넛이 있다고 한들, 검선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할 수 없다.
그게 무림십왕이고, 수위에 있는 검선이다.
그걸 검선이 모를 리 없음에도 이리 말한 건, 이백의 끝은 이 정도가 아닐 거란 막연한 느낌 때문이다.
고작 느낌이라 할 수 있으나 화경고수의 느낌은 결코 평범한 게 아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검선은 품에서 서책을 건넸다.
[太極武錄]
새로 적었는지, 먹향이 옅게 났다.
“고맙네. 이건 심심할 때, 끄적인 거네. 물론 본파의 절학을 적은 게 아니니, 거절하지 말아주게.”
“…감사합니다.”
태극무록(太極武錄).
무당파의 비급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무관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태극(太極)은 무당파의 시작이자 끝이다.
게다가 검선이 적은 거라면 그 가치는 무가지보(無價之寶)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부담스러웠으나 이번에는 거절할 수 없었다.
소청단에 이어 두 번이나 거절하는 건, 검선의 호의를 무시하는 걸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 봐도 좋네.”
“예, 진인.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검선의 축객령에 이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당파 본파로 향하는 이백은 자기 위안을 되새겼다.
‘잘한 거야. 난… 영웅이 아니니까.’
* * *
챙! 채챙!!
두 남녀가 검을 나누고 있었다.
가볍게 휘두르는 듯싶으나 그 검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수십 합을 나누었음에도 쉬이 승패가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사내가 승부수를 던졌다.
그의 검에서 은은한 청광(靑光)이 뿜어져 나왔다.
이에 반응하듯 여인의 검 역시 백황광(白黃光)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검기가 담긴 두 자루의 검이 충돌했다.
콰쾅!!
굉음과 함께 강렬한 반발력이 일어났다.
여인은 세 걸음 물러난 것에 비해 사내는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사내는 한숨을 내쉬더니 검을 거두었다.
“제가 졌습니다. 역시 소검후이십니다.”
“아미타불… 아닙니다. 결(決)을 내린 게 아니니, 무승부입니다.”
두 사람은 바로 제갈세가의 제갈천기와 검각의 소검후였다.
소검후 일행은 제갈세가에게 배정된 처소에 찾아왔다.
제갈윤호는 그녀들을 환영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제갈천기가 돌아왔다.
그의 기도가 바뀐 걸 깨달은 제갈윤호가 두 사람의 비무를 주선했다.
안 그래도 제갈세가의 검이 궁금했던 소검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괜찮습니다. 소검후께 패한 게 창피한 일이겠습니까?”
소검후가 그의 체면을 세워주었지만, 제갈천기 본인 역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마지막에 튕겨난 걸음의 수만이 아니라도 호흡이 거칠지 않은 소검후를 보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삼신룡과 비견되는 여협이다.
수십 합을 나눈 것도 어느 정도는 소검후의 배려 덕분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분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 막 절정에 오른 자신과 소검후의 격차는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무당의 상황이…….”
“아쉽지만, 사천으로 가볼까 합니다.”
백전비무행을 위해 호북에 온 검후 일행은 무한검문 등 호북 동부의 강자들과 비무를 한 후 서부로 넘어왔다.
호북의 마지막 상대는 제갈세가와 무당파였다.
제갈천기를 통해 제갈세가의 검을 겪어봤다. 이제 무당파의 검을 볼 차례인데, 아쉽게도 그들은 백전비무행을 받아들 상황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검각의 제자들은 무당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전에 가르침을 받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소검후는 제갈천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그의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소검후와 참관 중인 검각의 제자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어젠 감사했습니다.”
“아미타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은공.”
소검후의 말에 검각의 제자들 모두 청년을 향해 합장했다.
청년의 정체는 이백이었다.
그의 등장에 검각은 물론 제갈세가 역시 반겼다.
대공자의 의제이자 가주의 의자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이야기 들었네, 어제 굉장했다고?”
“검선께서 하신 일이니, 제가 굉장할 게 있었겠습니까? 그보다 성취가 있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네게 이런 말을 듣기 민망하네.”
이립의 나이로 절정에 오른 건 대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제갈천기는 민망한 게, 이백은 그조차 넘어선 무림 백대고수급 강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정고수가 되었다고 축하받기에 민망했다.
허나 이백은 고갤 저었다.
“민망하긴요. 축하받으실 일입니다. 형님.”
“하하 고맙다.”
이백이 많이 특별한 것이지, 제갈천기는 축하받을 자격이 있다.
이백은 소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절, 기다리신 겁니까?”
“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백전비무행은 단순히 비무를 통해 명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다양한 절학을 겪어보며, 소검후의 검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과 여러 번 비무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무공을 익힌 여러 명과 비무를 하지 않았다.
백전(百戰)은 검각의 정통이니 말이다.
당대 소검후 이옥환은 그런 검각의 정통을 깨는 행위를 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검각의 장로 정원사태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백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무인임을 그녀 역시 인정하고 있던 탓이다.
그리고 그와의 재비무를 위해 지난 수 개월간, 소검후가 얼마나 혹독히 수련했는지 아니 반대할 수 없었다.
“뜻이 그러시다면 받아들이지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