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무당(武當) (1)
“가…주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백의 말에 제갈천기는 제갈세가의 무리를 맞이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허나 곧 당황하고 말았다.
일백(一百)이 넘는 무리라는 것에 놀랐고, 그 중심에 있는 한 인물 때문에 두 번 놀랐다.
대(大)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윤호. 바로 그였다.
“무당파 장문인의 생신이신데, 대신 보낼 수 있느냐.”
“그…렇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제갈세가의 가주는 쉬이 본가를 비우지 않는다.
오대세가의 회합이나 무림맹의 요청 정도나 움직일 뿐이었다.
물론 무당 장문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이라면 충분히 예외 사항이라 할 수 있으나, 이번에는 제갈천기가 그를 대신해 무당파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무당검선에게 총군사의 서신을 은밀히 전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가주가 직접 움직였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는 행동을 할 자가 아니다.
제갈윤호의 시선이 아들의 곁에 있는 청년에게 향했다.
“그보다… 소개시켜 주지 않을 생각이더냐.”
“이 친구는…….”
“무림말학 이백이, 제갈세가의 가주이신 천기수사(天機秀士)께 인사드립니다.”
제갈천기가 소개하려 했지만, 이백이 스스로 인사했다.
천문산장에서 사용하는 별칭인 백수(百獸)라 소개할 수 있으나 제갈천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기에 본명을 밝힌 것이다.
천기수사(天機秀士).
제갈세가의 당대 가주이자, 신산(神算)의 붓을 이은 자다.
신산 제갈중경은 제갈세가의 새로운 역사를 쓴 기인이다.
문(文)만이 아니라 무(武)마저 십왕에 가장 근접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었을 정도다.
애석하게도 그의 피를 이은 두 아들은 제갈중경과 같은 문무겸전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각각 제갈중경의 검과 붓을 이을 재능을 가졌다.
천기수사는 제갈중경의 차남임에도 제갈세가의 가주위를 이을 수 있었다.
이는 제갈세가가 무림세가이지만, 동시에 지자(知者)의 가문이기 때문이다.
“무림동도들이 천기수사라 불러주는 제갈윤호라 하외다. 이 대협께서 흑백쌍괴(黑白雙怪)를 쓰러트렸다는 게 사실이오?”
“말을 낮춰주십시오. 천기 형님과 연이 닿아 형제의 술잔을 기울인 사입니다. 그리고 흑백쌍괴 역시 저 혼자 쓰러트린 건 아닙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결국 그들을 쓰러트렸다는 말이었다.
그런 자가 자신의 아들과 의형제라니.
제갈윤호는 아들을 대견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초절정고수를 의제로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세가 내에 제갈천기의 평가는 상당히 높아질 수 있다.
“커험… 그래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아버님.”
아들의 의제라 하니, 말을 놓았으나 천하의 제갈윤호조차 민망했다.
흑백쌍괴를 쓰러트렸다는 말은 그를 후기지수의 범주로 둘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만한 고수라면 응당 대우를 해줘야 한다.
“우선 아들 녀석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겠네.”
“고, 고갤 들어주십시오.”
대(大) 제갈세가의 가주가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은 전한 것이다.
아들의 은인이라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한 사내의 아비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의 말 한마디에 수백의 생사가 오갈 수 있는 제갈세가의 주인이기도 하니 쉬이 고갤 숙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결단을 내렸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칭호 ‘제갈세가 대공자의 은공’이 추가되었습니다.]
[칭호 ‘제갈세가 대공자의 은공’]
제갈세가에 속한 사업장을 할인된 금액에 이용할 수 있다.
제갈세가 대공자에게 호의를 가진 자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다.
단, 제갈세가 대공자에게 적의를 가진 자에겐 비호감을 가게 할 수 있다.
퀘스트 ‘융중혈사’의 보상이다.
허나 원래 보상은 ‘제갈세가의 은공’이었다.
‘제갈세가 대공자의 은공’의 칭호와 ‘제갈세가의 은공’의 칭호는 단어 하나 차이일 뿐이지만, 그 효과가 다르다.
융중혈사가 일어나기 전에 해결해버린 탓에 보상이 대폭 축소되고 만 것이다.
고갤 들은 제갈윤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패로 요구하면 그 어떤 요구도 한 가지를 들어주겠네.”
“아, 아버님! 그 패는!”
한쪽 면에는 ‘와룡’이라는 글자가, 다른 쪽 면에는 용이 엎드린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제갈천기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와룡패(臥龍牌)는 제갈세가주의 영부(令符)였다.
칭호 ‘제갈세가의 은공’과 함께 퀘스트 ‘융중혈사’의 보상으로, 그 어떤 요구도 한 가지 요청할 수 있는 대단한 아이템이다.
제갈윤호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만 있냐?”
“아, 아닙니다. 가주님. 제가 어찌…….”
제갈천기는 아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이백에게 와룡패를 내어준 의도를 눈치챈 것이다.
이백 역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귀한 물건임을 알지만, 거절치 않겠습니다. 가주님.”
“하하하! 고맙네!”
딱히 와룡패로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거절해 제갈윤호의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추가 보상: 와룡패를 습득하였습니다.]
[와룡패(臥龍牌)]
제갈세가의 영부. 제갈세가에 그 어떤 요구를 한 가지 요청할 수 있다.
칭호가 ‘제갈세가 대공자의 은공’으로 축소되었으니, 추가 보상 역시 축소되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와룡패를 추가 보상받게 된 건, 제갈천기의 의제라는 가산점 때문이다.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장남인 제갈천기에게 마음이 기우는 게 당연했다.
제갈윤호가 직접 행차한 진짜 이유였다.
“자네도 무당에 함께 갈 게지?”
“예?”
그는 이백이 무당에 동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이백의 목적지는 제갈세가였다.
허나 융중혈사를 막은 이상 굳이 제갈세가로 갈 이유는 없었다.
“아닌가? 다른 용무가 있는가?”
“그건… 아닙니다.”
용무를 마친 이상 형주상회로 돌아가야 하지만, 서둘러야 할 정도로 급한 건 아니었다.
이백의 대답에 제갈윤호가 재차 설득했다.
“그럼 같이 가세. 내 무당 장문과 여러 명숙들을 소개해주겠네.”
“말씀은 감사하나…. 세간의 주목을 받는 건 원치 않습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싶어 한다.
혈기왕성한 젊은 사내라면 그 욕구가 더 큰데, 이백은 오히려 이를 거부했다.
속내를 속인 위선일 수 있으나 제갈세가주로서 단련된 눈은 이백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리게 해주었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면 천문산장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는데 지장이 간다.
그렇기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흑백쌍괴의 일이 알려지면, 자네가 원치 않아도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네.”
“그건…….”
흑백쌍괴는 촌구석의 왈패가 아니다.
악명으로 중원을 뒤흔들었던 전설적인 마두다,
그런 흑백쌍괴가 쓰러졌다?
그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달려들 게 뻔하다.
그럼 원치 않아도 이백의 존재가 드러나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이백은 고민 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갈세가에서 쓰러트린 걸로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어찌 자네의 공을 본가가 가져갈 수 있겠는가. 아니 될 말일세.”
제갈세가는 남의 공을 탐할 정도로 가벼운 가문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뒤늦게 전말이 알려졌을 때, 우스워지는 건 제갈세가다.
그러니 눈앞의 이익만 보고 이백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백은 제갈윤호의 뒤에 있는 사내를 힐끔거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소요자 호법님과 금검 대협께서 노물들을 쓰러트린 게, 제가 해낸 것보다는 설득력 있지 않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호법께서 부상을 입으신 거라면 다들 납득하실 겁니다.”
“으음…….”
제갈윤호는 고민에 빠졌다.
제갈세가의 격을 높일 기회였지만, 동시에 먹칠할 위험부담이 있다.
가주로서 눈앞의 달콤함 때문에 이어질 독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이백은 그가 결론을 짓기 전에 선수를 쳤다.
“제가 남입니까. 형님의 가문이라면 저의 가문이기도 하지요. 제가 쓰러트렸다고 한들, 제갈세가에서 쓰러트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허… 자네의 혀가 이리도 달콤하다니, 내 오늘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구만.”
이백의 말솜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애초 이 상황은 반쯤 제갈윤호가 유도했다.
물론 그가 유도한 건 흑백쌍괴에 대한 공이 아니다.
제갈윤호가 유도한 건 이백의 입에서 ‘남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원하는 대답을 얻었으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럼 무당에 함께 가세나. 날 호위해줘야지.”
“제가… 말입니까?”
제갈세가의 검이라는 금검(金劍). 그리고 휘하 고수들이 이리도 많은데, 왜 자신이 호위해야 한단 말인가?
이백의 표정을 읽은 제갈윤호가 피식거렸다.
“소요자께서 부상을 입었는데, 금검만 멀쩡하면 다들 어찌 생각하겠는가?”
“아, 그럼 금검 대협 대신 제가…….”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뜻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흑백쌍괴를 상대로 소요자가 큰 부상을 입었기에 동행하기 어렵다.
헌데 초절정지경이라도 초입에 불과한 금검은 멀쩡하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을 일부러 부상 입힐 수는 없다.
결국 금검은 동행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그가 없다고 해도 금검대와 천성당 고수들이 있으니 호위에는 지장이 없다.
허나 제갈세가를 바람막이로 사용하면서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으려 한다면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는가.
“이해되는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백 역시 무당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직 용무가 끝나지 않았다.
웃음이 사라진 제갈윤호가 나직하게 물었다.
“헌데 노물들을 어찌할 겐가?”
“안 그래도 가주님께 부탁드릴까 했습니다. 제갈세가에서 맡아주실 수 없습니까?”
이백의 청에 제갈윤호는 고갤 저었다.
제갈세가라도 흑백쌍괴를 가두는 건 부담이 되었다.
허나 제갈윤호는 천기수사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럼 그들을 무당에 인계하는 게 어떤가?”
“저는 좋은 것 같습니다.”
무당은 소림과 함께 정파무림의 양대산맥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성한 문파다.
게다가 십왕의 수위를 차지한 검선의 사문이기도 하다.
그런 무당이라면 흑백쌍괴를 감당할 수 있다.
‘무당이라…….’
* * *
“누가 붙잡혀?”
8, 9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귀여운 소년답지 않은 거만하면서도 짜증 묻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앞에 꼽추 노인이 부복했다.
“흑백 호법께서… 큭!”
“등신 같은 것들! 호법이라는 게, 그깟 애송이 하나 처리 못 하고 붙잡혀!”
소년의 호통에 대전이 흔들렸다.
결코 평범한 소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부복하던 노인은 괴로워하며 말을 이었다.
“구, 군사께서… 나, 난감하다… 큭!”
“난감해? 어린놈의 쉐끼가 감히 노부에게 난감하단 말을 해!!”
소년의 호통에 대전이 더욱 강하게 흔들렸다.
부복했던 노인은 결국 피를 통하고 말았다.
“우웩!!”
“지랄한다, 지랄해. 아직 고희밖에 안 된 새끼가 그리 허약해서 어따 써?”
칠십 세면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소년은 오히려 어리다 칭하니 어이없는 상황이다.
허나 소년의 정체를 안다면 누구도 감히 어이없어 할 수 없다.
마동(魔童). 이갑자의 생을 잇고 있는 괴물 중에 괴물이다.
“죄…송합… 쿨럭…….”
“그 머저리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 그 어린놈에겐 이죽거리지 말라고 전해. 꺼져.”
마동의 으르렁거림에 노인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비록 내상을 입고 피를 토했으나 꼽추 노인도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마동의 무형지기에 목숨을 잃지 않은 게 그 증거다.
군사의 심복이며, 대막에선 공포의 대명사인 혈타(血駝).
허나 마동의 앞에선 미비한 존재일 뿐이었다.
“등신들, 존야의 명만 아니었어도…….”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