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융중혈사(隆中血史) (2)
“카~ 퉤! 어디로 도망친 거야!”
풍성한 흑발과 달리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피가 섞인 침을 거칠게 뱉었다.
반대로 새하얀 백발의 노인이 그를 진정시켰다.
“그 몸으로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테니, 진정해. 흑괴.”
“그깟 애송이 때문에 피를 봤는데, 진정하게 생겼어! 백괴!”
흑괴와 백괴. 무림인이 그 별호를 들었다면 심장이 쪼그라들었을지 모른다.
흑백쌍괴(黑白雙怪).
반갑자(30년) 전까지 악명으로 자자했던 거마들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명 한명이 초절정고수이며, 그들은 합공은 무림십왕도 긴장한다고 알려졌다.
그런 그들이 무림에서 사라진 게 무림십왕 중 수위를 차지한 무당검선의 손에 징치당했기 때문이라 풍문이 있었다.
이리 버젓이 살아있는 걸 보면 헛소문이었나 보다.
“그러게 함께 죽이자니까, 기어이 혼자 설치니 이런 불상사가 벌어진 게 아닌가.”
“그럼! 고작 지천명밖에 안 된 핏덩이를 상대로 합공하리!”
지천명을 핏덩이로 지칭하는 건 어울리지 않으나 팔순을 넘긴 그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었다.
흑괴의 호통에도 백괴는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그 핏덩이에게 내상을 입었나? 마지막에 노부가 돕지 않았으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닥쳐! 방심해서 그렇지! 그깟 놈을 못 죽일까!”
백괴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찔리는 게 있는지 흑괴는 버럭 화를 냈다.
그런 그를 보며 백괴는 차가운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자존심을 세우는 건 상관없지만, 존야께서 내리신 명을 망치지 마라.”
“쳇!”
존야(尊爺)의 명이 언급되자 흑괴도 더 이상 발끈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천하의 흑백쌍괴에게 명을 내리는 존재가 있던 것이다.
무림십왕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그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빨리 쫓자고. 제갈세가에 도착하면 귀찮아지니.”
“신산(神算)이 없는 제갈세가 따위가 문젠가, 말코가 문제지.”
흑괴는 오대세가의 제갈세가조차 우습게 봤다.
제갈세가의 진정한 무서움은 진법과 기관토목술이다.
날아가는 새조차 가둔다고 알려졌으니,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허나 천하의 제갈세가의 진법과 기관토목도 한계가 있는 법.
그 이상의 힘과 충돌한다면 버텨내지 못하고 파괴된다.
흑백쌍괴에게는 무림십왕도 긴장하게 만드는 비장의 한 수가 있다.
그렇기에 제갈세가의 진법과 기관토목조차 우습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제갈세가에는 진법과 기관토목만 있는 게 아니다.
신산(神算) 제갈중경.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거인.
무림십왕에 가장 근접한 기인 중 한 명이다.
허나 제갈중경은 무림맹의 총군사이기에 현재 제갈세가 본가에 있지 않았다.
즉, 그들에게 제갈세가는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그렇지. 그러니 무당에 가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설사 제갈세가를 뒤집더라도…….”
흑백쌍괴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들이 무림을 떠난 게 무당검선과 아예 무관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무당과 얽히는 건 꺼려졌다.
허나 제갈세가는 다르다.
융중혈사. 그 서막이 시작되려 한다.
* * *
‘젠장! 젠장! 젠장!’
범달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습관이란 무서운 법이다.
고수로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보상을 찾듯 쾌락 역시 즐겼다.
그런 삶이 반복되고,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구화당주의 의제로서 원 없이 술과 색을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상행을 떠나고 열흘이 지나도록 술과 색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금단현상이 스멀스멀 일어나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냥 죽여? 새끼가 아무리 강해도 목을 따 버리면 뒈지겠지!’
무림고수라도 인간인지라 목이 베이면 죽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건 목이 베였을 때 이야기다.
그에게 쉬이 목을 내어줄 이백이 아니다. 설사 목에 칼을 댄다고 한들 과연 벨 수 있을까?
절정고수 영의 검조차 맨손으로 부순 이가 이백인데 말이다.
허나 치밀어오르는 색욕에 이성이 점점 흐려진 탓에 냉철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래. 죽여. 죽여버리자.’
범달의 눈빛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의 눈과 마주쳤다.
그제야 범달은 아차 싶었다.
“범 수석, 괜찮소? 피곤해 보이오만.”
“아…닙니다. 호법님. 괜찮습니다.”
경험 많은 이류무사도 살기(殺氣)에 반응한다.
하물며 상행을 위해 일류급 이상의 고수도 몇몇 있었다.
일행 중 최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이백이 살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오. 범 수석만 아니라 다들 지친 거 같소. 현 행수께 이야기해 오늘은 조금 일찍 노숙 준비를 하는 게 낫겠소.”
“…감사합니다.”
범달은 그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고마운 마음을 가진 건 아니다.
‘그래, 밤에…. 놈이 잠이 들었을 때…….’
흐려졌던 이성이 다시 또렷해졌다.
허나 이백을 죽이겠단 결심이 바뀌지 않은 걸 보면 완전히 냉철해지지는 못한 듯싶다.
비록 상행에 권한을 가지지 못한 이백이지만, 호법인 만큼 그의 제안을 현욱이 받아들였는지 이동 중인 수레와 마차 등이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린 현욱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다들 너무 지친 거 같으니 오늘은 술을 내드리겠습니다. 각자 한잔 씩 만입니다.”
“와~!!”
“걱정 마십시오! 그 이상 바라면 도둑놈이지요!”
상행 중에 음주는 절대 금지된 행위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는 허락되지 않았다.
허나 호위단원도, 짐꾼도 결국 인간이다.
무조건 제한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불만이 폭발할 수 있다.
술 한잔으로 그들의 불만을 완전히 해소해줄 수는 없지만, 당장의 불만은 해소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고기도 굽죠! 저희가 사슴 몇 마리 잡아 오겠습니다!”
“하하! 좋습니다. 허나 한잔이라는 건 지켜야 합니다. 안 그러면 상행이 끝날 때까지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현욱의 용단에 다들 신이 났다.
상행의 안위를 담당하는 연자광의 얼굴은 굳어졌으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취할 정도의 음주라면 절대 안 되지만, 딱 한 잔으로 정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거 하늘이 도와주는데?’
호위단원과 짐꾼이라면 몰라도 호법인 이백이 굳이 한잔이라는 제한을 지킬 필요가 없다.
만약 그가 취한다면?
일이 매우 쉽게 해결될 것이다.
그는 몰랐다.
현욱이 한 잔의 술을 왜 허락한 건지를 말이다.
* * *
술 한잔이라는 아쉬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불침번을 제외하곤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다들 지치기도 했거니와, 한잔이라도 술을 마신 덕분인지 쉬이 잠에 들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지니 불침번을 제외하고 아니, 불침번조차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잠자리에서 은밀하게 빠져나온 자가 있었다.
그는 마차로 향했다.
현욱과 상인들에겐 따로 천막을 내어준 탓에 빈 마차는 이백의 차지가 되었다.
즉, 그는 홀로 잠을 자고 있으니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범달은 조심스럽게 마차의 문을 열었다.
‘제 놈이 뒈질지도 모르고, 잘도 자는구나.’
죽은 듯 잠이 든 이백을 본 범달은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그는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적운투귀(赤雲鬪鬼)라 불릴 정도로 권각술의 대가였지만, 단숨에 이백의 목을 베기 위해선 비수를 쥐었다.
내공을 일으켰다가 그가 잠이라도 깨면 일이 틀어지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그만, 뒈져라!’
범달은 흥분한 채 비수를 내리 찔렀다.
이백을 죽인 후 수레에 불만 지르면 모든 게 끝난다.
비수는 이백의 목에 닿았다. 정확히는 닿기 직전에 비수를 쥔 범달의 손이 멈추었다.
“뭐, 뭐야… 헉!”
비수를 쥔 손을 범달의 의지로 멈춘 게 아니다.
이백의 그의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그 순간 이백의 눈이 떠졌다.
“신중한 건지, 겁이 많은 건지…. 기다리다 진짜 잠들 뻔했네.”
암살을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으로 부족해 애초 함정이었다는 걸 깨달은 범달은 머리카락이 삐죽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고… 있었나. 아니, 언제 들킨 거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지.”
이백의 대답은 너무도 뜬금없었다.
허나 지금은 궁금증을 해소할 상황이 아니다.
범달은 붙잡히지 않은 왼손에 내공을 담아 이백을 향해 내리쳤다.
바위도 부술 수 있는 일격이다.
허나 이백은 바위가 아니다.
“윽! 아아악!!”
“게으른 악어(慢鰐)는 한번 물면 결코 놔주지 않지.”
비명이 들려왔다.
기대했던 이백의 입이 아닌 범달의 입에서 나온 비명이었다.
그는 왼손을 내려칠 수 없었다.
이백에게 붙잡힌 오른 손목이 그대로 으깨졌고, 그 순간 온몸의 힘이 빠질 정도로 강한 고통이 휘몰아친 탓이다.
범달의 주먹이 바위를 부순다면, 만악(慢鰐)은 단단한 바위조차 으깰 정도로 강력한 악력(握力)을 발휘한다.
검기가 실린 검조차 부수었는데, 사람의 손목쯤은 너무도 쉽다.
푹! 푸푹! 푹!
이백은 몸을 일으키며 범달의 단전을 봉했다.
배후를 알아내야 하기에 이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크윽! 제, 젠장!”
“누가 보냈는지 알려주면, 목숨만은…….”
범달의 배후를 알아내려고 할 때, 밖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낮새와 밤쥐로 감시했을 때, 간자는 범달 한 명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외부의 조력자를 불러들였단 말인가.
퍽! 퍼퍽! 퍽!
“으아악!”
“누굴 불러들였는지 모르지만, 어림없지.”
오른 손목과 단전을 봉한 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된 이백은 범달은 나머지 팔과 다리를 부러트렸다.
잔인하다 할 수 있지만, 외부조력자를 상대하는 사이 도망치기라도 치면 곤란한 탓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마차 밖으로 나가자 다들 마차와 수레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아… 호법님, 놈은 잡으셨습니까?”
“팔다리를 부러트리고, 단전을 막아놨으니 잘 감시하시오. 무슨 일이오?”
범달은 다들 잠이 들었다 생각했겠지만, 이백은 이미 연자광을 비롯해 몇몇에게 언질해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범달의 비명이 들리자마자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깨웠다.
허나 잠이든 모두를 깨운 건, 또 다른 소란 덕분이다.
콰쾅!!
강력한 굉음과 함께 느껴지는 기파.
웬만한 고수는 일으킬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설마, 초절정고수!’
범달이 기운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이백에게까지 속일 순 없었다.
그 경지는 절정지경이었으니까.
헌데 외부조력자는 그보다 강한 초절정고수로 추정되었다.
형주는 고사하고 호북 중부를 통틀어 초절정지경에 오른 고수는 단 한 명. 이백뿐이다.
허나 호북 전역으로 범위를 넓히면 말이 다르다.
무당이나 제갈세가의 고수라 생각하기에 기운이 거칠고 음험했다.
그때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쿨럭… 날… 두고… 쿨럭…….”
흑의흑발(黑衣黑髮), 백의백발(白衣白髮)의 노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궁지에 몰린 두 사내.
초로의 사내의 말에 이립에 가까워 보이는 장한이 이를 악물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두 번…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뭔 개소린지 모르지만! 그만 뒈져라!”
흑의흑발 노인의 장심(掌心)에 칠흑같이 어두운 불꽃이 피어났다.
그건 장강(掌罡)이었다.
어두운 기운의 정체가 정말 장강이라면 두 사내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강기(罡氣)는 오직 강기만이 감당할 수 있는 가공한 힘이다.
기(氣)와는 그 응집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흑의흑발 노인의 강기가 두 사내를 덮쳤다.
검은 불꽃을 보며 장한은 검을 쥔 채 이를 악물었다.
‘아우를 버린 벌…인가.’
그는 중년 사내를 버리고 혼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강기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죽음을 직감한 순간.
서걱!
“형님,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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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