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융중혈사(隆中血史) (1)
푹!
“컥!”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복면인이 쓰러졌다.
그만이 아니다. 주변에는 십여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후우… 소군사, 괜찮은가?”
“예, 저는 괜찮습니다.”
소요자의 물음에 제갈천기는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형산을 떠나 호북성으로 향했다.
검각의 무리로부터 축융봉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듣기 위함도 있으나 무엇보다 총군사의 명으로 무당파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산을 떠나고 며칠이 지난 후부터 감시의 눈을 느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불청객을 맞이하게 되었다.
허나 무림맹 호법 소요자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그 이후로 몇 번이나 새로운 불청객을 맞이했고, 조금 전이 다섯 번째였다.
“이곳만 넘으면 호북일세. 무당과 제갈세가 때문이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걸세.”
“그럴까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에서도 무당파와 제갈세가는 점잖은 편이다.
그렇기에 힘자랑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들의 힘은 호북 전역에 미친다.
특히 무당파는 소림과 함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문파다.
호북성이라도 사파나 흑도세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당과 제갈세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을 노리는 불청객들의 정체와 목적은 알 수 없다.
허나 호북에서까지 설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제갈천기는 소요자와 생각이 달랐다.
“자네 생각은 다른가?”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다섯 번째 습격입니다. 저만이라면 몰라도 호법님이 계심을 모르지 않을 텐데, 고작 일류고수들만 움직인다는 게 이상합니다. 흡사 시간을 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말에 소요자의 눈이 커졌다.
들어보니 타당했다.
절정고수 서넛도 너끈히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초절정고수다.
진짜 죽일 작정이었다면 그 두 배는 준비해야 한다.
그것도 초절정 초입 고수의 경우다.
소요자가 호위하고 있음에서 고작 일류고수 십여 명 정도가 습격해왔다.
제갈천기는 몰라도 소요자는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전력이다.
그러한 습격을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다섯 번째?
두 사람을 해하겠다는 목적이 아닌 시간을 벌기 위함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대체 누가 움직이기에 일류고수들을 시간 벌이용으로 소모한단 말인가.”
“누구일지 모르지만, 저희가 버거울 자이겠지요.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저들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려면 말입니다.”
소요자 역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제갈세가의 핏줄만큼은 아니지만, 도가경전보다 난해한 소요파의 절학을 익힌 그다.
우둔할 리가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리는 와중 제갈천기는 품 안에 있는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조부께선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계셨던 것인가.’
* * *
“현 행수, 객잔 전체를 빌렸으니 표물은 걱정 말고 푹 쉬시오. 그리고 예정대로 익일 일찍 출발합시다.”
3대째 이어온 표국답게 형운표국의 일 처리는 매끄러웠다.
덕분에 형주상회 일행은 수월하게 상행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국주님.”
형운표국주가 직접 일정을 전달한 자는 상행의 대표인 형주상회의 행수 현욱이었다.
이번 상행의 책임자로, 형주상회주의 아들이기도 했다.
형주상회의 사활이 걸린 만큼 후계자인 형욱이 상행 총책이 되었다.
유경표가 제형안찰사사로 압송되면서 형주유가는 혼란에 빠져서 형주상회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형주상회는 예정대로 섬서로 상행을 떠나게 되었다.
현욱은 검을 쥔 중년인에게 고갤 돌렸다.
“매제… 아니, 단장님. 호위단과 짐꾼들을 쉬게 하되, 표국에만 전적으로 맡기진 말아 주십시오.”
“조치하겠습니다. 행수님.”
사적으로 매제와 처남 사이지만, 공적으로 행수와 호위단장이었다.
서로의 위치는 존중하듯 공대했다.
연자광에게 지시를 내린 현욱은 곁에 있는 젊은 사내에게 공손히 말했다.
“호법님. 방을 따로 준비해둘 테니, 쉬십시오.”
“배려는 감사하나, 홀로 호사를 부리면 다른 분들이 그만큼 피해가 가겠지요. 저를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주상회에 있어야 할 이백이 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는 상회주에게 특별히 부탁했고, 상회주 역시 이백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형주상회의 안위가 걱정될 수 있으나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
유경표가 제형안찰사에 잡혀가면서 유씨상단의 신용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의 눈치를 보던 형주의 상단과 상회들이 이를 놓치지 않고, 유씨상단의 상권을 야금야금 잡아먹기 시작했다.
기겁한 유씨상단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탓에 형주상회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이백도 무리임을 알면서도 청을 할 수 있던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허나 나중에 상회주께 제가 혼이 납니다. 그러니 마음만 받겠습니다.”
“행수님의 입장이 그러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백의 힘. 그 가치를 노련한 상인인 상회주가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손자뻘의 젊은 청년임에도 극진하게 대했다.
아들인 현욱에게까지 신신당부할 정도이니,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백은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거절할 수 없었다.
애초 이럴 걸 알면서도 무리하게 동행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융중혈사는 막아야 해. 형님을 위해서라도…….’
융중혈사(隆中血史). [영웅 : 무림전설]의 에피소드 ‘암류의 준동’의 예하 퀘스트다.
에피소드 ‘암류의 준동’은 그가 스토리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예하 퀘스트 ‘융중혈사’의 정확한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융중은 제갈세가의 본산이 있는 지역이니, 연관이 있을 거라고만 예상하고 있다.
게다가 ‘혈사’가 붙는다면 가볍게 볼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제갈천기와의 연을 생각해서라도 이백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유기 부단장이 형님의 육촌일 줄이야.’
호위단의 부단장 유기의 정체는 제갈유기였다.
형주유가를 위시한 호북 서남 지역 세력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가 정체를 숨기고 잠입하게 된 것이다.
제형안찰사사를 움직인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제갈세가의 직계라도 제형안찰사사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허나 그의 아비라면 말이 다르다.
‘대총관이시라면 어느 정도는 대비하시겠지.’
제갈유기의 아비는 무려 제갈세가의 대총관이다.
게다가 가주의 오른팔이라고 불리는 사촌이다.
그의 이름을 판 덕분에 제형안찰사사의 첨사를 움직일 수 있던 것이다.
물론 사전에 허락이 있었으니 가능했다.
‘형님이 안 계신 게 다행일지도…….’
제갈유기를 통해 제갈천기가 가내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혈사라고 불릴 정도면 아무리 대비해도 적지 않은 피를 볼 수밖에 없다.
그 피가 제갈천기의 것이 아니란 것에 안도했다.
그의 혈족의 것일 테니,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이백이 안으로 들어가자, 현욱은 자신의 곁을 지키는 중년 무사에게 말했다.
“범 수석님, 이곳은 안전하니 그만 쉬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단장님의 명입니다.”
중년 무사는 의창상단 출신인 범양이었다.
일류고수인 그를 다른 무사들과 같은 지위로 둘 수 없기에 수석이란 직위를 주었다.
연자광은 그에게 상행 간 특별 임무를 부여했다.
그건 바로 형욱의 호위였다.
상행 물자가 중요도 1순위지만, 행수이자 차기 상단주인 형욱의 안위도 그 못지않게 중요했기에 수고스럽지만 범양을 호위로 붙인 것이다.
“단장께는 제가 말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행수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한 번 거절했던 범양도 두 번 권하니, 받아들였다.
그는 현욱에게 정중히 고갤 숙였다.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부터 다시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행수님.”
덕망 높은 현유의 아들답게 현욱 역시 어진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상인으로서 계산이 약한 것도 아니다.
충분히 손익을 따지는 편이었으니, 아비 이상의 상인이 될 재목이었다.
결코 호구는 아니었다.
같은 방을 사용할 예정인 양진은 짐꾼들 관리하느냐 아직 들어오지 않은 덕분에 범양은 혼자가 되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짜증이 어려 있었다.
“젠장, 의창 애들을 불러들여서 들이박아?”
범양은 의창상단 출신이다.
허나 그가 언급한 ‘애들’이란 의창상단의 일원이 아니었다.
애초 의창상단 출신 범양은 위장 신분에 불과했다.
“대형의 명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그는 누군가의 명을 받고 호위단의 일원이 되었다.
제갈유기와 같으나 목적이 달랐다.
적운투귀(赤雲鬪鬼) 범달.
구화당주의 네 명의 의제 중 한 명이다.
원래는 의창을 맡고 있었으나 혈당랑이 죽으면서 형주에 공백이 생겨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를 움직인 것이다.
범달은 의형제 중 막내다. 그럼에도 구화당주 다음으로 강하다.
고작 형주상회만 손보기 위해 움직인 게 아니다.
형주상회만이 아니라 형주유가마저 흔들기 위함이었다.
헌데 형주유가는 제풀에 꺾였다.
그럼 형주상회만 손보면 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우습게 봤던 형주상회 안에 용이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 달 넘게 손을 놓고만 있어야 했다.
긴 인내의 시간을 보상하듯 기회가 왔다.
“그 애송이만 없어도 바로 처리하는 건데!”
형주상회의 사활이 걸린 상행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의창의 수하들로 눈을 돌린 사이, 상행 물자만 망가트리면 끝이다.
헌데 상행을 떠나기 직전,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호법인 백수(이백)가 동행한다는 것이다.
유경표의 숨겨진 칼조차 부러트리지 않았던가.
숨기고 있는 무위를 드러낸다고 해도 자신이 없었다.
“보름, 보름만 참자. 그 후에 손을 쓰면 돼.”
상행의 속도면 보름이면 보강에 당도할 수 있다.
그곳에서 헤어진다는 걸 들었기에 범달은 조바심이 났으나 꾹 참았다.
“쉬파, 언제까지 참아야 하냐.”
구화당주 대신 의창 일대의 어둠을 지배하던 범달답게 방탕하기 그지없었다.
형주에 있을 땐 주변의 눈을 피해서 욕구를 해소했지만, 상행을 시작한 이레 동안은 전혀 풀지 못했다.
그러니 스멀스멀 욕구가 끓어오르는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가면을 쓰고 연기하고 있으나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범달이 비수를 던졌다.
푹!
“뭐야? 쥐새끼였어? 객잔 수준하고는.”
이 시대는 위생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쥐를 발견하는 게 너무도 흔했다.
허나 구화당주의 의제답게 범달은 고급기루 등을 다니니, 쥐를 볼 일은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 이곳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현의 일개 객잔이다.
많은 걸 바랄 수 없다.
그렇게 범달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허나 그는 몰랐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진짜라는 걸.
그리고 객잔의 위생 상태가 좋지 못해 쥐가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쥐와 새를 이용해 객잔 내외를 감시하던 이백.
예상치 못한 정보에 눈빛이 차가워졌다.
“간자가 하나가 아니었구나.”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