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유경표의 몰락 (2)
“그간 수고 많으셨소, 호위장.”
유씨상단주의 부름을 받고 형주제일루에 온 형문심권(荊門心拳) 원굉은 흥분했다.
형주에서 몇몇만 허락된 형주제일루 칠층에 발을 디뎠다.
이는 드디어 형주유가에 입성하게 되었단 의미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상단… 가주님. 앞으로 본가를 위해서 더욱 성심성의껏 하겠습니다.”
“…….”
원굉은 상단주가 아닌 가주라 칭했다.
자신은 이제 유씨상단의 호위장이 아닌 형주유가의 일원이란 확고한 심증을 가진 탓이다.
그런 그를 보며 유경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평소에도 그리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그이기에 원굉은 그 의미는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쯤 자리를 옮기면 되겠… 컥!”
푸욱!
원굉은 자신의 가슴에 꽂힌 검을 보며 믿을 수 없단 표정이었다.
상단주가 친히 술자리를 마련했기에 형주유가에 자신의 자리가 마련되었나 기대했던 그에겐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 그를 유씨상단주 유경표가 차가운 얼굴로 바라봤다.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고 살길 바랬나.”
“쿨럭… 이 개, 같은…….”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원굉은 무려 절정고수다.
형주 내에선 손에 꼽히는 강자인 그가 너무도 쉽게 가슴을 내어주었다.
원굉의 가슴에 검을 꽂은 자는 유경표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진짜 호위장이었다.
향락에 빠져 몸이 둔해진 윈굉과 달리 여전히 날이 선 자였다.
원굉은 저항하려 했으나 두고 보지 않고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을 그대로 그어졌다.
결국 원굉은 절명하고 말았다.
허나 유경표는 죽은 원굉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흑천회가 움직인 후에 처리하려 했건만, 망할…….”
형주상회에 엄백을 심은 건 원굉이었지만, 이를 지시한 건 이백의 확신처럼 유경표였다.
흑천회의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만약을 대비한 수였다.
그런데 써먹기도 전에 날려 먹었을 뿐만 아니라 상황만 난처하게 되었다.
결국 엄백과 연결고리인 원굉을 죽이는 걸로 수습해야만 했다.
절정고수인 그를 이대로 버리는 게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더 큰 걸 잃을 수는 없었다.
유경표는 죽은 원굉으로 이번 일을 덮으라 지시를 내렸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유경표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놈으로 덮…….”
“아, 안 됩니… 큭!”
형주제일루는 유경표의 소유였고, 특히 이곳 7층이 허락된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만약을 대비해 7층만이 아니라 통째로 비워두었다.
그의 미간을 찌푸리는 게 당연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존명!”
호위장이 명을 받고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연 순간, 무장한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호위장은 뒤로 물러나 유경표를 보호했다.
무장한 군사들 사이로 관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관은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의 첨사(僉司) 황승이라 한다. 죄인 유경표는 오라는 받아라!”
“죄인이라…. 황 첨사께선 이 유모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오라를 받으라는 것이오.”
첨사는 호북성의 형옥을 관할하는 제형안찰사사에 속한 정5품의 관리다.
고관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낮은 관직이 아니다.
허나 형주를 다스리는 지주(知州)가 종5품이니, 오히려 품계가 더 높다.
게다가 제형안찰사사의 임무 특성상 품계 한두 위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유경표가 아무리 형주를 꽉 잡고 있는 지방호족이라도 이리 당당하게 대하는 건 어렵다.
그럼에도 여유를 부리는 그를 보며 황승은 피식거렸다.
“형주상회에 끼친 인적, 물적 피해는 물론! 살인죄까지 물 생각이네.”
“…….”
황승의 시선에 죽은 원굉에게 향했다.
그걸 깨달은 유경표의 표정이 굳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원굉을 잊은 것이다.
호위장은 검을 꽉 쥐었다.
그 모습에 긴장한 황승은 언성을 높였다.
“저항한다면 죄목이 늘어날 것임을 잊지 마라, 유경표!”
“…협상은 안찰사와 하지, 열어라. 영아.”
유경표는 순순히 따르는 선택지를 버렸다.
이대로 잡혀가는 수모를 감수할 수 없었다.
재산의 반을 날리더라도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의 수장 안찰사(按察司)와 따로 협상할 생각이었다.
“존…명.”
“마, 막아!!”
유경표의 명이 떨어지자 호위장 영의 눈빛이 바뀌었다.
황승이 동원한 군사들은 아문의 포쾌들이 아니다.
인근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에 협조를 받아 차출한 정예병들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무림고수를 막아내는 건 어렵다.
무엇보다 이곳은 다수가 힘을 발휘하기에는 좁았다는 문제다.
서걱! 서석!
영의 검이 닿을 때마다 군사들의 창칼이 베였다.
“으아아악!”
“제, 젠장!!”
정예병이라도 압도적인 무력(武力)의 차이에 사기가 급격하게 꺾이고 말았다.
나름 잘 훈련된 군사들이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 무력(無力)하기만 했다.
첨사 황승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경표의 저항을 예상치 못한 건 아니다.
그렇기에 위지휘사사의 협조를 받은 것이다.
급습하기 위해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의 무관들을 동원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그만 돌아가게는 어떻소? 안찰사께 따로 인사드리겠소.”
“가, 감히 본관을 협박하는 겐가!”
공권력을 가지고도 지방호족의 힘에 두려워 물러나는 건, 황승에게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가 버럭 화를 냄에도 유경표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칫 안찰사와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지만, 돈이면 귀신도 부르는 법.
이번 일로 제법 많은 재산을 손해 봐야겠지만, 돈이야 자신만 건재하면 언제든 메울 수 있다.
허나 권세를 잃으면 쉬이 복구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던 것이다.
“영. 황 첨사의 체면을 세워 드려라.”
“존명.”
언제 움직였는지, 영의 검이 황승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의 목을 벨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황승은 사색이 되었고, 군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유경표는 황승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이제, 체면이 서셨소?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이딴 게 체면을 세우는 거라면, 그대의 체면도 세워주지.”
쑤욱!
황승의 뒤에서 누군가 손을 뻗었다.
그 손은 황승의 목을 겨누고 있는 영의 검을 덥석 잡았다.
날카로운 검을 피륙으로 이루어진 손으로 잡다니, 손가락이 잘리고 싶어 환장했단 말인가?
“네놈은…. 영.”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유경표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영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검을 움직였다.
이대로 손가락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허나 놀랍게도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체면을 세워주겠다 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꽈직.
검날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부러진 검날은 허공을 갈랐다.
쑤~웅!
어느새 유경표의 뺨에 혈선이 그어졌다.
“이제… 체면이 세워졌나.”
“여~영!!”
유경표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찼다.
그의 호통에 영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비록 검날이 부러진 반검(半劍)이지만, 강렬한 빛이 부족함을 채워버렸다.
절정지경. 그것도 완숙, 어쩌면 끝자락에 닿았을지 모른다.
이러한 고수를 숨기고 있다니, 형주유가의 저력이 허세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절정의 검기는 허공을 갈랐다.
그 검 아래, 그 누구라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 같았다.
척!
“아직, 체면이 덜 세워졌나 보군.”
“……!!”
영의 눈이 커졌다.
절정의 검기가 담긴 자신의 반검을 그가 잡아버린 탓이다.
도검불침의 경지에 오른 외공고수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허나 눈앞에 벌어졌으니 부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오히려 그의 심기가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내가 움직였다.
검날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영의 틈을 파고들었다.
퍼어억!
“우직한 소(愚牛)의 주먹질을 감당할 수 있겠나.”
“크…윽! 으아아악!!”
영은 나머지 팔로 막으려 했으나 우우(愚牛)의 권격은 막으려 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의 팔은 그대로 으스러졌는지 비명과 함께 팔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영을 저항불능의 상태로 만든 사내, 이백은 그를 뒤로한 채 유경표에게 다가갔다.
이백의 차가운 눈빛, 압도적인 위엄은 유경표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오, 오해 있나 본데… 대, 대화로 해결하…….”
“두 번이나 개수작을 부려? 우리 형주상회를 호구로 봤나 보군.”
“큭! 아악!!”
이백은 수작 따윈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유경표의 어깨를 으스러트렸다.
형주유가의 직계로 언제 이런 고통을 느껴봤겠는가.
유경표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그가 아닌 누구라도 참지 못했을 고통이었다.
유경표의 비명에 나가떨어졌던 영은 이를 악물고 다시 이백에게 달려들었다.
“죽…으윽! 어?”
“귀찮게 하네.”
이백을 베려는 영의 반검이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영의 반검은 어느새 이백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백수군림의 교후(狡猴)를 펼쳐 오히려 그의 반검을 낚아챈 것이다.
그것으로 부족해 영을 점혈했다.
푹! 푸푹!
영은 부친이 자신에게 물려준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 유경표다.
그조차 애들 손목 비틀 듯 가볍게 쓰러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유경표는 더욱 공포에 휩싸여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 오지 마. 오, 오지 마!”
“…….”
유경표는 소리를 질렀으나 이백은 입을 다문 채 다가갔다.
형주유가라는 단단한 갑주 속에 살아왔던 그가 언제 이런 공포를 느껴봤겠는가.
공포감을 견뎌내기에 유경표의 맷집(?)이 너무 약했는지, 하의가 축축해졌다.
그걸 본 이백은 헛웃음이 나왔다.
두려움에 이성을 잃은 유경표는 수치감도 느낄 정신이 없었다.
이백은 고갤 절레절레 젓더니, 첨사 황승에게 말했다.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혀, 협조해주셔서 고, 고맙습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봤기 때문인지 황승은 아들뻘인 이백에게 절로 존댓말로 대답했다.
제형안찰사사 내에 많은 무관이 속했지만, 절정급은 교두 몇몇에 불과하다.
그런 그들도 저 영이란 자를 제압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헌데 눈앞의 청년은 가볍게 제압했다.
그런 자를 눈앞의 청년은 너무도 가볍게 제압했다.
첨사의 지위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아닙니다. 헌데…….”
“하,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유경표를 넘겨주려던 이백이 슬쩍 말끝을 흘렸다.
황승은 살짝 당황했다.
그런 그를 향해 이백이 나직하게 말했다.
“며칠 지나 무죄방면 되는 건 아니겠지요.”
“본관이 받은 명은 죄인 유경표의 압송입니다. 그 이후는 안찰사 대인께서 판단하실 일이라…….”
황승은 섣부른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
아무리 유경표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돈은 귀신도 부리는 법.
유경표가 얼마를 내놓느냐에 따라 안찰사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
이백은 나직하게 말했다.
“돈을 잃으면 작은 걸로 잃고, 명예를 잃으면 큰 걸 잃는다고 합니다.”
“예? 예…….”
그의 뜬금없는 말에 황승은 어리둥절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이백이 말을 이었다.
“헌데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고 합니다. 건강이 참 중요하지요?”
“…….”
황승은 사색이 되었다.
대놓고 하는 협박이었다.
평소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이백의 얼굴에는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흡사 사람 목숨쯤은 파리목숨과 다를 바 없는 살인마와 같았다.
이백은 황승과 군사들을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털이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들… 건강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