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유경표의 몰락 (1)
“하~아…….”
중년 무사가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곁에 있던 동배의 무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호법님이 불시 점검하는 거 몰라? 괜히 나까지 상여금 까이게 하지 말고 정신 차려.”
“아차! 그랬지?”
동료의 말에 하품하던 중년 무사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창고 중 하나를 경비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두 명만 지키던 걸 지금은 창고 뒤쪽에 두 명의 동료가 더 배치되었다.
상행을 앞두고 귀한 물자들이 대량 입고된 탓이다.
“게다가 상여금도 상여금이지만, 잘못되면 우린 뼈도 못 추려.”
“알아, 안다고. 1절만 해라잉.”
하품 한 번 했다고 연이어 잔소리하니, 살짝 짜증이 났으나 동료의 마음을 이해했다.
물자에 이상이 생기면 상행이 지장이 생긴다.
그 책임은 자신들이 무보수로 십 년 노예 생활을 해도 갚지 못한다.
매우 부담이 되지만, 반대로 두둑이 상여금을 보장해주었기에 불안을 누를 수 있었다.
게다가 평소의 배나 되는 병력이 투입되지 않았는가.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다.
허나 창고를 몰래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는데…….’
검은 복면에 야행복을 입은 게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싶었다.
그때 창고와는 정반대 쪽에서 불이 밝혀지고 소란스러웠다.
반대편에 있는 창고까지 그 소리가 들릴 정도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싶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신경 꺼, 문제가 있어도 윗전들이 처리하겠지. 그보다 이 창고에 문제 생기면 우리가 뒤집어쓴다고.”
당황할 만도 한데 의외로 침착했다.
고참급 무사들의 경험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결코 근무지를 이탈하지 말라는 이백의 지시가 떨어졌다.
괜히 호들갑 떨다가 창고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궁금증을 잠시 눌렀다.
무사들은 오히려 주변을 더 경계했다.
‘젠장, 뜻대로 되는 게 없네!’
그는 상회에서 소란이 일어날 걸 알고 있었다.
소란으로 인해 창고 경비를 맡고 있는 무사들이 당황해 경계가 느슨해지길 기대했다.
허나 결과는 반대였으니 복면인으로서는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계획을 변경할 수는 없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걸 알기에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결국 복면인은 기척을 죽이고 은밀하게 창고로 다가갔다.
다행히 경비 무사들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숨에 베어주마.’
복면인의 눈빛에 살광이 번들거렸다.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주저함 따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칼이 달빛에 반사되지 않게 조치한 치밀함까지 보였다.
한 번에 넷을 베는 건 어렵다.
하나 입구에 배치된 무사 둘만 베어도, 창고 뒤에 있는 나머지 무사 둘을 베는 건 복면인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칼을 휘두를 틈을 보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 부스럭.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쥔 채, 그 방향을 바라봤다.
“헉! 누구냐!”
“젠장!”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복면인의 존재가 드러나고 말았다.
복면인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의 실수로 발각된 게 아니다.
그럼 자신 이외에 또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허나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무사들이 도검을 쥔 채,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던 탓이다.
“무슨 일이야!”
창고 뒤쪽에 있던 무사들이 동료의 놀란 목소리에 달려왔다.
이로써 4 대 1이 되었다.
그럼에도 복면인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역시 달려들었다.
복면인은 자신이 불리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칼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본 무사들은 헛바람이 나왔다.
“헉! 도, 도기(刀氣)!”
“빌어먹을!”
검기성형(劍氣成形)의 경지. 이는 복면인이 일류고수란 뜻이었다.
일류고수는 능히 이류무사 열을 감당할 수 있다.
괜히 일류지경부터 고수(高手)라 칭호가 붙는 게 아니다.
무사 넷이서 복면인 한 명을 감당할 수 없단 뜻이다.
삐익! 삐익!
무사들은 지체없이 호각을 불었다.
“버텨! 버티면…….”
“그때까지 놔둘까 싶더냐!”
창고와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 때문에 동료들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무조건 버텨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복면인 역시 그걸 알기에 서둘렀다.
은은한 빛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크윽!”
“오가야!”
검과 함께 오씨 성을 가진 무사가 베였다.
절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고작 일도(一刀)조차 감당치 못하고 재기불능이 되었다.
나머지 셋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만… 뒤져라.”
“지, 지랄!”
복면인은 다시 칼을 휘둘렀다.
그 역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다.
상행에 사용될 물자를 부수거나 불태운다고 해도 호위단의 고수들이 도착하면 도주 못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서걱!
“으아악!”
비명과 함께 피가 비산했다.
허나 비명을 지른 자는 호위단 무사들이 아니었다.
복면인이 베어진 손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상황에 호위단 무사들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어? 저, 저 고양이… 호법님의 고양이 아니야?”
“무, 무슨 고양이가 저리 무서워? 고양이가 맞긴 해?”
복면인의 손목을 베어 버린 존재는 바로 설군이었다.
복면인은 재수가 없다. 3대 신투 비천편복조차 손목을 앗아간 설군을 만났으니.
“이, 괴물 고양이가!!”
복면인은 아직 성한 왼손으로 떨어진 칼을 다시 들었다.
비록 왼손으로 칼을 쥐는 게 어색하지만, 그럴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설군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우~웅!
“젠장! 젠장! 젠장!!”
복면인의 칼질 따위에게 당할 설군이 아니었다.
청랑보를 10성까지 익힌 이백조차 설군을 잡아 본 적이 없다.
복면인의 칼질은 설군에게 장난밖에 안 되었다.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이 복면인의 속을 뒤집어 버렸다.
“한낱 미물 따위가 날 가지고 놀아!”
복면인의 칼이 강하게 빛났다.
이성을 잃은 복면인이 전력을 다한 탓이다.
아무리 강해도 미물이다.
저리 강한 도기라면 설군이라도 위험해 보였는지, 호위단 무사들이 당황했다.
“호, 호법님의 고양이가…….”
“이런 젠장!”
한낱 고양이에게 보호받는 것도 자존심 상하지만, 그 고양이가 죽을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들의 무력함에 허탈하기만 했다.
서걱!
무언가 베이는 소리와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윽! 아아악!!”
호위단 무사들은 눈이 커졌다.
베인 건 설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설군이 도기(刀氣)가 실린 칼을 베어 버리고, 그것으로 부족해 복면인의 왼손까지 베었다.
이로써 복면인은 양손을 모두 잃게 되었다.
“크아앙!!”
설군의 포효에 복면인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전의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복면인은 살고 싶다는 본능이 강했는지, 발로 땅을 밀며 추하게 도망치려 했다.
허나 이를 두고 볼 설군이 아니었다.
“크아앙!”
설군이 도망치려는 복면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가슴에 올라탄 설군이, 복면인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그만! 설군아, 이리 와.”
사나운 맹수였던 설군이 어느새 온순한 고양이가 되어 누군가의 품에 폴짝 안겼다.
“호, 호법님 오셨습니까!”
“제가 늦었습니다. 설군이 녀석에게 맡겨놨기에 별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요 녀석아, 오 무사가 다치기 전에 구했어야지.”
이백의 질책에 설군은 억울하다는 듯 구슬픈 울음을 냈다.
영물이 아니라 요물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영악한 모습이었다.
이백은 설군을 더 질책하기보다 오 무사의 상처를 살폈다.
절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출혈이 적지 않았다.
이백의 손가락이 빛나기 시작했다.
푹! 푸푹!
이백의 손가락이 순식간에 오 무사의 상처 인근의 혈도들을 점혈했다.
그제야 출혈이 멈추기 시작했다.
허나 이미 흘린 피가 적지 않아,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이백은 품에서 환단을 꺼내 오 무사의 입에 넣었다.
“보혈단(補血丹)을 복용시키긴 했지만, 의원께 치료를 받아야 할 거 같소. 정 무사께서 오 무사를 업고 의원으로 가시오.”
“가, 감사합니다!”
정 무사는 동료인 오 무사를 등에 업은 채 달려갔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이백의 눈빛이 어느새 차갑게 변했다.
“우릴 너무 쉽게 봤어. …엄백.”
이백은 복면인의 복면을 벗겼다.
저항 따윈 하지 못했다.
복면 속에 숨겨진 얼굴이 드러나자 이백의 곁에 있던 호위단의 두 무사는 경악했다.
“어, 엄 수석님!”
“미친, 이게 무슨 일이야!”
이백의 말처럼 복면인은 엄백이었다.
애초 설군은 창고를 지키고 있던 게 아니었다.
엄백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 설군이 복면인을 제압했으니,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한들 모를 수 없었다.
엄백을 내려보는 그의 눈빛은 명부(冥府)의 염마(閻魔)를 연상케 했다.
“누구의 사주인지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곱게 죽고 싶다면…….”
* * *
“상회주님, 이대로 둬선 안 됩니다!”
연자광은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
이번 일로 부상자가 열이 넘고, 그중 두 명은 호위단원이었다.
게다가 물적 피해 역시 가볍지 않았으니, 경비책임자인 연자광으로서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상회주는 흥분한 그를 대신해 이백을 바라봤다.
“배후는 형주유가…겠지요.”
“연결고리는 유씨상단의 호위장입니다만, 배후는 유경표입니다.”
이백은 가능성이 아닌 확답을 했다.
이미 예상했음에도 상회주는 신음을 흘렸다.
배후를 안다고 해도 이를 걸고 넘어서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해도 꼬리를 끊는다는 뜻이군요.”
“그러기 위해서 대리자는 내세운 것일 테니까요.”
두 사람은 너무도 차분했다.
허나 곁에 있던 연자광은 분이 터진 듯 언성을 높였다.
“그럼 두고만 봐야 합니까! 그리고 유씨상단의 호위장이라면 형문심권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유경표라면 그를 꼬리 자르듯 버릴 수 없을 겁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이상 지부 대인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르니까요.”
유경표라면 절정고수인 원굉이다. 그를 제물로 삼기는 어렵다는 게 연자광의 생각이었다.
허나 이백의 생각은 달랐다. 설사 맞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유경종의 경우는 당랑파에서 얻은 장부가 있지만, 이번에는 엄백의 입밖에 없다.
형주를 다스리는 지부 대인도, 형주의 주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유경표에게까지 오라를 건넬 수 없다.
“그럼 어쩝니까!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야 합니까! 이래선 우리 상회를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원굉부터 확보하겠습니다. 지부 대인보다 더 힘을 가진 자를 움직이실 수 있겠습니까. 상회주님.”
꼬리를 자르기 전에 그 꼬리부터 확보할 생각이었다.
이백의 말에 연자광의 눈이 커졌다.
절정고수인 원굉을 확보하겠다니, 이백이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으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달리 상회주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지부 대인보다라면 포정사나 안찰사 정도인데…….”
지주 대인이 고작 형주를 다스린다면, 호북성을 다스리는 건 포정사와 안찰사다.
물론 군권을 쥔 도지휘사도 있으나 그는 출정권까지 보유한 게 아니기에 이번 일에는 적합하지 않다.
줄이 안 닿는 건 아니지만,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