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부관(副官)의 품격(品格)
후우~욱!
한 자루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비록 내공이 담기지 않은 일창(一槍)이었으나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멋진 창격입니다, 부관님.”
“아닐세, 많이 부족하지.”
호위단 무사의 치켜세워주는 말에도 양진은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부관으로서 연자광을 보좌하면서도, 자신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내공과 달리 외공은 조금만 소홀해도 빠르게 퇴화한다.
내공을 잃은 양진으로서는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렇긴 합니다. 듣기로 질풍창이라 불리셨다던데 이건 질풍이라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 같지 않은지.”
양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사내는 형주상회 호위단에 새롭게 입단한 자였다.
그의 언사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양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쉬이 감정을 드러내기에 그의 연륜이 가볍지 않았다.
사내는 목적이 있어서 시비를 건 자였다.
이대로 물러날 리 없다.
“예전 같지 않다라…. 그저 이곳에 오래 몸담았다는 이유로 단장님의 부관이 된 게 좀 그렇지 않습니까?”
“자격이 없으니, 물러나라는 말인가.”
양진의 대답이 맞다는 듯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놓고 시비를 거는 사내의 태도에도 양진은 담담함을 잃지 않았다.
아니, 그가 발끈할 필요가 없었다.
주변에서 수련 중이었던 또 다른 무사들이 대신 발끈했으니까.
“저 새끼 뭐야! 감히 무사장… 아니, 부관님께!”
“건방진 새끼, 이래서 신입은 제대로 교육시켜야 한다니까!”
발끈한 자들은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십 년 넘게 형주상회에 몸담았던 무사들이다.
허나 그들의 거친 언사는 또 다른 무사들을 발끈하게 만들었다.
최근 새롭게 고용된 무사들이었다.
“뭐라는 거야? 고만고만 새끼들이, 어쩌구 저째!”
“틀린 말도 아니지, 다 같은 입장에서 무슨 텃세야! 텃세는!”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져 갔다.
자칫 호위단이 두 쪽으로 나뉠 판이었다.
사내는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어떻습니까? 실력을 증명해 보십시오. 제가 상대해드리겠습니다.”
“…….”
그는 자신의 창을 슬쩍 보였다.
양진과 마찬가지로 창수(槍手)였다.
아직 이류에 불과하지만, 언제 일류고수가 되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호위단에서 상위에 속할 정도였다.
물론 일류고수들을 제외한 이류급 무사들 중에서 말이다.
양진은 그의 너머에 있는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엄백… 역시 네놈 짓이었구나.’
양진이 부관이 된 이후 당장이라고 난리 칠 줄 알았던 엄백은 의외로 잠잠했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했던 차에 결국 일이 터졌다.
양진은 이 일이 그의 사주란 걸 눈치챘다.
양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증명 못 하면 부관 자리에서 물러나겠네. 대신…….”
“무슨 소란이오.”
양진을 승낙하며 조건을 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다들 수준이 높지 못해 눈치채지 못했으나 웬만한 고수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고도의 수법이다.
이게 가능한 건 형주상회에서 오직 한 명뿐이다.
“호, 호법님 나오셨습니까.”
“무슨 소란이냐 물었소만?”
호위단 무사들보다 최소 열 살 이상 어린 이백이지만, 그의 나직하면서 위엄 있는 목소리는 모두를 움찔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록 평소 자신들을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지만, 이백은 상회의 호법이며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다.
이 상황에 중심에 있는 두 사람은 물론 방관한 주변 무사들 역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양진이 입을 열었다.
“저 친구가 가르침을 청해와서 비무를 할까 했습니다.”
“…….”
이백이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초절정고수의 청력은 범인이 듣지 못하는 거리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하물며 이백은 백수통령술(百獸統領術)을 통해 상회 곳곳에 귀를 두었다.
알면서 묻는 것인데, 양진은 오히려 무례한 사내를 두둔했다.
이백이 그를 향해 물었다.
“악 무사. 사실이오? 양 부관님의 말이.”
“예? 예… 마, 맞습니다.”
악추는 아니라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하극상을 범한 상황이다.
양진이야 부관이지만, 권한이 크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백은 다르다.
사실대로 실토했다간 어떤 징계를 받을지 모른다.
그러니 양진의 답변에 동의했다.
“비무를 그냥 하는 건 재미없고…. 이긴 자에겐 이걸 드리겠소.”
“헉! 여, 열 냥짜리 전표 아닙니까!”
무려 금 열 냥짜리 전표였다.
은자로는 무려 이백 냥이나 된다.
이류무사의 녹봉 수준을 생각하면 수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이다.
덕분에 악추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백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는 자는 이긴 자의 말에 복종하는 걸로 합시다.”
“예? 그건…….”
악추는 당황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백은 그의 반응 따윈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뭐, 죽으라고 명령한다고 죽는 것까진 아니고… 죽는시늉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두 분이 수락한다면 말입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선택권을 주었지만, 이백의 눈빛은 반강요였다.
몰라서 넘어가 준 게 아니란 의미였다.
이백은 양진을 아꼈다. 그런데 내공을 잃었음에도 불리한 비무를 강요하고 있었다.
한 번은 겪을 일이기 때문이다.
‘믿겠습니다, 부관님.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십시오.’
* * *
챙! 채챙!
순식간에 십여 합을 나누었다.
기고만장했던 처음과 달리 합을 나눌수록 악추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망할 썩어도 준치다, 이거야?’
양진이 창을 쥔 세월만 사십여 년이다.
창의 깊이가 다르다.
합을 나눌수록 그 노련함이 창을 통해 느껴졌다.
그것으로 부족해, 귀를 거슬리게 하는 환호와 비난이 악추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감히 부관님을 무시하던 그 자신감은 어디 갔나?”
“애송아, 이제 주제를 알았느냐!”
형주상회에서 수년 이상 몸담았던 무사들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양진이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이다.
반대로 새롭게 들어온 무사들은 짜증이 났다.
“젠장, 괜히 깝죽거려서 상황만 복잡하게 만들어!”
“에이잉!”
이제 절대 지면 안 된다.
자칫 형주상회를 떠날 때까지 머저리 취급받을 수 있다.
초조해질 대로 초조해진 악추는 전력을 다해 창을 휘둘렀다.
“청룡출해(靑龍出海)!”
용이 바다를 건넌다는 초식명과 달리 그리 대단한 절초는 아니다.
허나 창력(槍力)이 담긴 찌르기로, 무시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뒤로 물러나거나 막으려 한다면 피를 볼 수 있다.
옆으로 피하는 방법뿐이다.
허나 그건 양진만이 아니라 청룡출해를 펼친 악추 역시 예견하고 있다.
그럼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없어야 하는데, 양진의 결정은 너무도 의외였다.
훅!
양진의 결정은 맞대응.
그 역시 창을 움직여 찔렀다.
악추는 살짝 놀랐지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공도 없는 주제에…….’
이 상황에서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
양진의 창이 부서지거나 튕겨날 것이다.
창력이 담기고 안 담긴 건 그만큼 중요하다.
끼이익~!
양진의 창이 박살 날 걸 예상했는데,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의 창날이 악추의 창날과 창대를 긁으며 더욱 빠르게 찔러왔다.
흡사 발검술(拔劍術)을 펼치는 것처럼.
“헉!”
이미 목표물을 잃은 악추의 창과 달리 양진의 창은 목표를 정확히 향했다.
악추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국 그는 주저앉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언제 찔리는 거야.’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악추는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놀랍게도 양진의 창이 자신의 코 반치(半寸:1.5cm) 앞에 멈춰 있었다.
말 그대로 코앞인 셈이다.
창은 중병(重兵)에 속한다.
그렇기에 휘두르는 것보다 멈추는 게 배는 힘든 법이다.
비록 창날부터 창대까지 모두 철로 만든 게 아니라도 결코 가벼운 무게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게 가능하다니, 악추는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이백이 나직하게 말했다.
“승패는 난 거 같소만?”
“져, 졌습니다. 부관님.”
이백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든 악추가 패배를 선언했다.
그제야 양진도 창을 거두었다. 그리곤 악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양진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어느새 악추의 당황스런 표정이 사라지자 진지하게 말했다.
“이 악추, 부관님께 견마지로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악추의 너무도 빠른 태도 변환에 오히려 양진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허나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악추의 눈빛에서 마지못한 감정이 아닌 진심임을 엿봤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악추만이 아니었다.
그를 비난하던 이들도, 양진의 마지막 창격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런 창술이라니, 웬만한 고수도 어려울 거 같은데?”
“단장이 괜히 부관으로 뽑은 게 아니네.”
기존 무사들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들까지 양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만큼 양진의 창술은 인정해줄 만큼 훌륭했다.
게다가 양진은 부관이지, 호위단장이 아니다.
이 정도 창술이라면 인정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충분하다 판단한 이백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돈은 약조한 대로 양 부관께 드리겠습니다.”
“이러실 필요는…….”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냥 받기에는 적은 돈이 아니다.
게다가 이백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써주는지 아는 양진으로서는 전표를 받을 수 없어 사양했다.
허나 이백은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럼 제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전 드렸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하지만… 알겠습니다.”
이백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대신 자신의 주머니에 넣을 수 없었다.
“이 돈으로 모두에게 한잔 돌리겠네. 시간 되는 친구들은 모두 가세나. 이 자리에 없는 친구들 중에서도 시간 되는 자들은 불러도 좋네.”
“오! 부관님께서 세게 나오시네!!”
“캬! 안 그래도 못 구멍에 기름칠할 때가 되었다 했는데!”
양진의 선언에 무사들은 환호했다.
공짜술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양진의 성격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을 테고, 금 열 냥이라면 평소 엄두도 못 내던 요리도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환호하는 게 당연했다.
다들 기뻐하자 양진은 그들의 눈을 피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걸 눈치챈 건 이백이 유일했다.
‘역시 무리하셨군.’
양진의 창이 악추의 얼굴로 향할 때, 이백은 놀라 달려 나갈 뻔했다.
양진. 나아가 호위단의 미래에 영향을 줄 중요한 비무였지만, 그렇다고 사람 목숨보다 귀하다 할 수는 없으니까.
다행히 양진은 이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결국 분열을 막고 하나가 되어가다.
허나 이 상황에 끼지 못한 채 뿔이 난 자가 있었다.
‘머저리 새끼, 내공도 못 쓰는 병신한테도 지냐!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두들겨 패고 싶지만…….’
일류도객인 자신이 내공을 잃은 양진을 직접 상대하면 처음부터 야유를 받을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리면서도 실력이 좋은 악추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양진을 묵사발로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기만 살려주었다.
이 일을 연출한 엄백으로서는 속만 부글부글 끓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아야 할 게야.’
홀로 자리를 떠나는 엄백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이백의 차가운 눈빛이 엄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두면 무슨 사달을 낼 자야, 그렇다고 무작정 내쫓을 수 없으니…….’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