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상단호위단(商團護衛團) (3)
엄백은 괴로워하는 양진을 보며 조소를 지었다.
“고작 이 정도 살기도 못 견디다니, 질풍창(疾風槍)도 다 됐군. 크크…….”
질풍창(疾風槍) 양진.
거세고 빠른 창술이 흡사 질풍과 같아 붙여진 별호다.
이렇다고 할 배경이 없던 탓에 양진은 상승무리가 담긴 창술을 익히지 못했다.
대신 단순하지만 위력적인 창술을 익힌 덕분에 동료들이 지어준 것이다.
그 별호가 양진에게 썩 잘 어울렸다.
허나 그것도 옛일에 불과하다.
지금은 살기조차 감당 못 하는 이빨 빠진 승냥이에 불과하니 말이다.
엄백은 양진의 멱살을 잡았다.
“큭!”
“별것도 아닌 게, 자존심은… 큭!”
퍽!
엄백에게 멱살을 붙잡힌 양진은 이를 악물고 발로 찼다.
말이 뒷발질 치듯 힘껏 밀어 찬다고 해서 마왕각(馬王脚)이라고 불리는 각법이다.
대단한 절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맞으면 흉골도 함몰시킬 정도다.
방심하던 엄백도 충격을 받은 듯싶으나 그의 흉골은 무사했다.
내공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병신 취급하던 양진에게 당하자, 자존심이 상한 엄백의 눈이 뒤집혔다.
“병신 새끼가! 죽여 버리겠…….”
“거기 누구냐!”
이성을 살짝 놓은 엄백이 칼을 뽑으려 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소란을 아무도 듣지 못할 리가 없다.
사람이 적을 뿐이지, 숙소를 사용하는 상회무사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결국 칼자루(刀把)를 쥐었던 엄백은 손을 놓았다.
돌아가는 그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리고 주둥아리 잘못 놀리면 그땐… 진짜 죽여 주마.”
“…….”
경고하는 엄백의 눈빛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피에 굶주린 맹수의 것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양진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양진을 상회무사들이 발견했다.
“무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상회무사들은 걱정 어린 얼굴하곤 물었다.
양진인 상회무사들 사이에 제법 인망이 있는 듯했다.
괜히 저 때문에 저들까지 엄백과 얽혀 좋을 게 없으니, 쓴웃음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별거 아니네. 조금 어지러워서… 하하 늙어선 그런가 보네.”
“정말, 그것뿐입니까?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보약 한첩 드셔야겠습니다.”
그렇게 양진은 적당히 둘러댔다.
상회무사들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럭저럭 넘어갔다.
‘하아… 떠날 때가, 된 건가…….’
* * *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연자광의 부름을 받은 양진이 그의 집무실에 방문했다.
양진의 눈에는 탁자에 쌓인 서류와 초췌해진 연자광이 들어왔다.
천생 무인이 행정업무를 보려니, 쉬이 처리되지 않은 탓에 고생을 하고 있던 것이다.
“나 좀 살려주십시오, 무사장.”
“예? 무슨 말씀이신지…….”
너무도 뜬금없는 연자광의 말에 양진은 당황스러웠다.
그런 그를 향해 연자광이 하소연 아닌 하소연했다.
“산적 백 명을 상대하는 게 낫지, 이건… 하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양진은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양진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연자광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는 서류 한 뭉치를 건넸다.
양진은 얼떨결에 받았다.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호위단 지급 물품에 대한 서류, 본부 증축에 관련…….”
양진은 연자광이 건네 서류를 빠르게 파악했다.
그런 그를 보며 연자광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변했다.
다만 양진은 그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겠소?”
“예, 예전에… 비슷한 업무를 처리할 적이… 왜 그러십니까?”
양진은 과거 무한표국의 수석표사로서, 직속상관인 당주를 보좌해 비슷한 업무를 처리한 적이 있었다.
십여 년 전이긴 하지만 대략적으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긍정적인 대답을 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연자광의 심상치 않은 표정이 움찔했다.
“내 부관이 되어 업무를 도와주실 수 있겠소? 대우는 으음… 부단장급으로 해드리겠소.”
“예? 그게 저는…….”
연자광의 예상치 제안에 양진은 당혹스러웠다.
부관이라는 지위도 부담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오늘 그만둔다고 말하려고 했던 차였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을 받았으니, 곤란해진 것이다.
서류 지옥에 빠졌던 연자광으로서는 눈앞의 인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양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
연자광의 돌발행동에 양진은 움찔했다.
“부탁드리겠소, 무사장. 날 도와줄 사람은 무사장밖에 없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단장님.”
“그럽시다. 대신 오래는 아니 되오.”
“알, 겠습니다.”
양진은 복잡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 직후, 누군가 연자광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연자광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크게 반겼다.
“오셨습니다, 호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를 찾아온 자는 이백이었다.
연자광의 얼굴에 부담감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이는 이백의 조언 덕분이었다.
“다만 양 무사장이 부담되는 거 같더군요.”
“책임감 있는 분이니, 거절치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단장님께서 조금 더 신경 써주시면 좋겠지요. 아무래도 옛일로 불편해 보이시니까요.”
행정업무로 골치 썩던 연자광에게 양진을 추천한 자가 바로 이백이었다.
연자광은 긴가민가하는 마음에 그를 호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양진은 그의 짐을 나눠줄 만한 인재였다.
다만 대답을 유보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이백의 말에 그의 눈이 떠졌다.
“옛일이라면… 엄 무사 말입니까?”
“듣자 하니, 무사장께서 내공을 잃은 것도 연관이 있는 거 같더군요.”
이백의 대답에 연자광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인에게 내공은 목숨보다 중요하다.
양진이 내공을 잃은 게 엄백 때문이라면 두 사람의 관계가 쉬이 회복되긴 어려운 게 자명하다.
자신이었다면 보는 순간, 눈이 뒤집혀 칼부림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허나 엄백은 일류도객에 표두 경험까지 있는 인물이다.
양진과의 악연 때문에 내보내기에 너무도 아까웠다.
“그럼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우선 지켜보시지요. 기다리다 보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백으로서는 엄백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어찌 좋아하는 사람만 곁에 둘 수 있겠나?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모두 아우르는 게 윗사람의 덕목이다.
무엇보다 그건 자신의 몫이 아닌 눈앞에 있는 연자광의 몫 아닌가.
그렇기에 이백은 과도하게 나서지 않고, 약간의 조언만 해줄 뿐이었다.
괴짜들이 모여 있는 게임회사에서 다년간 버텨내며 터득한 깨달음이 이런 곳에서 써먹게 될 줄은 이백도 몰랐다.
‘게다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입단한 거 같지 않으니, 두고 보면 반응이 있겠지.’
* * *
탁!
엄백은 술잔을 거친 게 내려놓았다.
그런 그를 보며 초로의 사내가 핀잔을 놓았다.
“엄 사제, 이 사형 앞에서 뿔 내는 겐가?”
“죄송합니다, 원 사형.”
한 성질 하는 엄백도 초로의 사내에겐 한 수 접는 듯 곧바로 사과했다.
그는 엄백의 사형(師兄)으로, 형문심권이라고 불리는 권객이었다.
형문심권(荊門心拳) 원굉.
유씨상단의 호위장이기도 하다.
사형제 간의 만남이 이상한 건 아니지만, 엄백이 형주상회에 적(籍)을 두게 된 이상 두 사람은 그리 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어야 했다.
“알면 됐네. 자네가 부단장이 못 된 건 아쉽지만, 어차피 일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그야 그렇지만… 유기라는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에 이어… 빠드득!”
엄백이 뿔이 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형주상회의 호위단 모집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직위까지 결정되었다.
기대했던 부단장의 자리를 빼앗긴 것도 열불이 아는데, 그 자리를 맡은 게 복룡표국 출신의 유기였다.
그는 부단장 후보 셋 중에서 가장 어린 서른 중반의 사내였다.
어이없는 건 그만이 아니었는지, 불만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직접 불만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엄백이 부단장이 될 줄 알고, 그에게 줄을 섰던 자였다.
그를 이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이에 동조하는 이들까지 생겨 분위기 조성은 쉬웠다.
하지만 어이없게 해결되었다.
“양진, 그 병신새끼까지 제 위에 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연자광이 양진을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것도 부단장급 대우로.
유기의 일로 언짢아하던 이들은 양진이 부관이 되었단 말에 반응을 달리했다.
양진이라면 어린 유기를 잡아줄 거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상회무사들 사이에서 양진의 인망이 예상을 훌쩍 넘어, 다들 그를 두둔한 탓이다.
“그만! 정신 차리게. 고작 이런 일로 흥분하지 말게. 자네가 정말 형주상회의 사람이 된 게 아님을 잊지 말라고.”
“무, 물론입니다. 일 처리는 확실하게 할 테니, 제 자리는…….”
그제야 진정한 엄백이 넌지시 말했다.
그러자 원굉이 고갤 끄덕였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상단주… 아니, 가주께서 본가에 자리를 내어주신다 하셨네. 그럼 내 자리는 누가 맡겠나?”
“흐흐… 걱정 마십시오. 이 사제가 사형을 위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이 사제 좀 잘 이끌어주십시오.”
“하하하! 역시 엄 사제야! 이래서 내 자넬 부른 것일세!”
두 사람의 눈빛에는 탐욕이 번들거렸다.
그 탐욕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허나 불나방이 불을 보면 그 속에 뛰어들 듯, 탐욕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
자신이 불타 사라진다는 걸 모른 채.
원굉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
그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강한 권풍이 일어 창(窓)을 박살 냈다.
원굉의 돌발행동에 동석하고 있던 엄백은 흠칫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사형.”
“새…였나.”
푸득 푸드득!
그때 새 한 마리 놀라 급히 날개깃을 하며 날아갔다.
그제야 원굉은 자신이 예민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찝찝함이 엿보였다.
놀란 엄백은 살짝 짜증이 묻은 얼굴로 말했다.
“설마, 누가 엿듣고 있다 생각하셨습니까? 여기 6층입니다, 원 사형.”
“으음… 그럴 리 없지. 나도 참, 무슨 생각을…….”
그들이 밀회를 가진 곳은 형주제일루로 형주유가의 소유인 기루로, 7층의 고루거각이다.
그중에서 6층이면 상당히 높은 높이다.
누군가 엿듣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소심한 원굉의 행동에 엄백은 어이가 없어 하는 게 당연했다.
“이 사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알겠네.”
엄백은 원굉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건 사형지간의 즐거운 술자리 때문이 아니다.
‘병신, 이리도 간땡이가 작아선…. 유씨상단의 호위장이 되면 흐흐흐… 그다음은 네 차례다.’
자신을 끌어주는 원굉조차 그에겐 언젠가 밟고 올라간 자리에 불과했다.
아니, 원굉 역시 부릴 장기말이 필요해 엄백을 끌어들인 것이니 결국 똑같은 것들이다.
두 사람은 몰랐다.
고층이라고 엿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절정고수라더니, 감이 좋군.”
이백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형주제일루의 창가에 새가 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엄백을 감시하기 위해 백수통령술로 붙여둔 새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배후는 형주유가였어.”
예상 못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어쩌면 형주상회에서 무사를 추가 고용할 걸 예상하고 미리 준비했을지 모른다.
“형주유가, 유경표… 만만치 않아. 하지만…….”
위기를 미리 알면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다.
그리고 위기는 곧 기회라는 걸 알려줄 생각이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