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37화 (37/200)

37화. 형주유가(荊州劉家)

“잘 있었나.”

“…….”

이백의 물음에 독안귀는 침묵했다.

양손에 붕대를 감고 있지만, 그 외에 운신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단전을 잠시 막아두었기에 결박까지는 해두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유가 최대한 안 좋은 인상은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였다.

“들었는지 모르지만, 당랑파는 사라졌다.”

“…….”

예상했는지 크게 놀란 기색이 없었다.

자신을 쉽게 제압한 고수라면 당랑파 역시 버틸 재간이 없음을 모를 수 없었다.

목숨 빚을 진 혈당랑이 신경 쓰였지만,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빚은 모두 탕감했다.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

“…날, 놔줄… 생각이오?”

자신은 죄를 짓고 붙잡힌 상황이다.

관아로 넘기지 않은 게 이상하지만, 관(官)과 흑도(黑道) 역시 뒷거래를 하는 사이다.

그걸 형주상회가 모를 리 없으니, 살아 있는 증거인 자신을 놔주지 않은 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허나 미래에 대해 묻는 게 흡사 자신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거라 생각해?”

“…….”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놔줄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일하는 거 어때?”

“……!”

독안귀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아니, 아예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상회주를 암살하려고 했던 살수의 처우치곤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으니, 의도가 있을 거란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혹시’였을 뿐이다.

정말 이런 제의는 의외이지 않을 수 없다.

“실력이 괜찮더군. 그걸 상회주께서 높이 평가하셨다. 다시 묻지. 상회무사, 정확히는 상회주님의 그림자가 될 생각이 있어?”

“날… 뭘, 믿고… 그런 제안을 하는 거요. 나는 노야(老爺)를…….”

상상도 못 한 경악스러운 제안이었다.

상회주의 목숨을 노렸던 자를 일개 상회무사로 받아들이는 것도 주변의 반감을 살 수 있을 텐데, 하물며 상회주의 그림자라니.

형주상회주의 그릇이 알려진 것보다 더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고 있다, 상회주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걸, 허나 자의가 아니지 않아?”

“…….”

마음이 복잡하다는 게 얼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감정을 속일 줄 모른다기보다는 그만큼 독안귀에게도 충격적인 상황이란 뜻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이백이 나직이 말했다.

“시간이 필요하다면 주지. 허나 길게는 못 줘.”

“…날, 믿을 수 있소? 물론 귀하가 대단하다는 걸 알고 있소. 언제든 날 제압할 수 있다는 걸…. 허나 노야의 곁에 있다가 언제 나쁜 마음을 먹을지 모르는데, 계속 날 감시할 수 있겠소?”

맞는 말이다.

계속 그를 감시할 거라면 차라리 이백이 직접 상회주를 지키는 게 더 효율적이다.

온종일 그를 감시하는 게 심력 소모가 더 클 테니까.

하지만 그 정도 대비도 없이 이러한 제안을 할 리가 없다.

아무리 상회주의 제안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상회주를 암살하려던 흑도인이다.

당장 신용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금제해둘 거야. 허튼수작을 벌일 수 없게.”

“내가 복수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릴 수 있다 생각하지는 않소?”

금제라하면 독약 내지는 고독일 가능성이 높다.

독안귀의 생사여탈을 직접적으로 쥘 수 있으니까.

그에 말에 이백은 피식거렸다.

흑도인에게 그런 충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백이 피식거린 건 다른 이유였다.

“누굴 위한 복수지? 널 이렇게 만든 그 흑도 우두머리에게 그 정도 충심이 있다는 건가?”

“…….”

독안귀를 대답하지 못했다.

혈당랑의 명령을 따른 건, 그가 두려워서 혹은 보상 때문이 아니었다.

목숨 빚 때문이다.

이미 목숨 빚은 모두 탕감했다.

그렇기에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이상 그를 위해 더러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없나 보지? 상회주께서 널 원한다고 해서 착각하지 마. 널 신용하는 게 아니니까. 의심스럽다면 언제든 죽일 수 있어.”

“…….”

그를 죽인다는 말은 거짓이지만,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다.

독안귀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이백은 돌아갔다.

홀로 남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 더럽혀진 몸뚱이를 아직 원하는 자가 있는 건가.”

*  *  *

“호법이라…. 자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은가.”

형주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불리는 형주유가의 유경표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러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도 쓰레기지만, 철갑공과 당랑쌍겸술은 마냥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쓰러트렸다면 그자는 절정고수라고 봐야 합니다.”

“허어… 절정고수라고? 이립도 안 된 애송이라 들었는데, 대단하군.”

이립 이전에 절정지경에 오른 자는 중원무림에서도 흔치 않다.

대단하다는 말로 표현이 다 되지 않을 정도다.

허나 유경표의 표정은 담담했다.

대단한 재능이고, 이후 얼마나 더 강해질지 모른다.

다르게 말하면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란 뜻이다.

모습을 드러낸 자의 눈빛에 살짝 질투심이 묻어났다.

그런 그를 향해 유경표가 물었다.

“처리할 수 있겠나.”

“명하신다면…….”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

허나 두려운 기색이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경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살인충동을 느끼고 있음을.

유경표는 피식거렸다.

“아니, 아직은 되었다. 당장 처리하면 괜히 시선만 끌겠지. 그리고 대신 나서줄 자들도 있고.”

“…자칫, 놈들에게 형주의 한쪽을 내어줄지 모릅니다.”

피의 대가는 피로 갚아야 하는 법.

비록 부족한 아우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우였다.

현유 그리고 이백을 가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아니라도 그들을 노릴 자가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뒤처리해줄 녀석들은 필요해. 그게 흑천회라고 안 될 건 없지.”

“…주군의 뜻이 그러시다면…….”

흑도의 하늘이라는 흑천회(黑天會).

호북성 역시 그들의 활동 무대였다.

당랑파가 흑천회 소속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상납하니 휘하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 당랑파가 괴멸했으니 흑천회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어차피 그들이 움직인다면 결국 형주상회에게 보복할 것이니, 유씨상단으로서는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형주 뒷골목쯤은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지. 허나 그 이상 원한다면…. 본가가 왜 형주의 주인이라고 불리는지 알려주면 된다.”

형주유가.

중원 전체에서 본다면 흔하고 흔한 가문 중 하나일 뿐이다.

허나 형주에서만큼은 그 의미가 다르다.

흑천회가 악랄하다고 해도, 형주에서만큼은 유가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게 유경표의 생각이다.

실제로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다만 흑천회 역시 괜히 흑도의 하늘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남을 경시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유경표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잠시의 기쁨을 누려라. 곧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  *  *

“꼬박꼬박 상납을 잘하기에 잘하는 줄 알았는데, 에잉!”

이순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짜증을 냈다.

형주 당랑파의 일이 귀에 들어간 탓이다.

혈당랑의 뒷배라고 할 수 있는 구화당주였다.

구화당은 백 년째, 호북 암흑가를 평정한 흑도집단이다.

허나 십여 년 전, 흑천회주에게 굴복해 흡수당했다.

현재에는 흑천회의 다섯 기둥(黑天五柱)으로, 여전히 호북의 암흑가를 담당하고 있다.

구화마검(九禍魔劍), 바로 구화당주의 별호였다.

“이 일로 정산이 늦어지면 곤란한데…. 누구 소행이더냐.”

“표면적으로는 형주상회주의 목을 노렸다가 되려 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구화마검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표면적이라…. 실제로는 어찌 된 게지.”

“유씨상단이 개입되었습니다.”

구화마검은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유씨상단에 대해 떠오른 것이다.

“형주유씨, 그 뭐냐… 유 머시기? 그놈의 짓이렸다?”

“예, 당주님.”

무한과 더불어 호북 전역의 흑도를 지배하는 구화당이다.

허나 몇몇 지역은 구화당의 영향력이 약했다.

무당의 앞마당이라는 균현을 중심으로 운현, 십언, 방현, 보강 일대.

제갈세가의 융중과 근접한 양양, 양번, 로하구 일대 역시 구화당의 영향력이 약했다.

아무리 구화당이 호북 흑도를 평정했다고 한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앞마당까지 얼쩡거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몇몇 지역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형주다.

수백 년간, 형주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형주유가 때문이다.

오랫동안 쌓은 부(富)를 이용해 형주의 관리는 물론 상계, 무림방파 등 각 유지들을 쥐었다.

구화당은 호북 흑도를 평정하면서 형주 역시 노렸으나 형주유씨가 구축한 체제를 뚫지 못했다.

“이참에 형주를 뒤집어 버려?”

구화마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구화당이 힘에 부쳐서 형주를 차지 못한 게 아니다.

형주를 장악하기 위해선 구화당의 힘을 필요 이상으로 투입해야 하고, 뒤탈 없이 무마하기 위해선 많은 뇌물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얻을 만큼 형주는 매력적인 땅은 아니다.

흑천회 그리고 구화당의 깃발을 꽂지 않은 대신 형주의 흑도에게 상납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지난 수년간, 구화당에 상납한 곳이 당랑파의 혈당랑이었다.

“의창에 있는 막내에게 찔러보라고 해.”

“그리 전하겠습니다. 당주님.”

흑천회가 오주(五柱)를 통해 각 성(省)을 지배하듯 구화당 역시 중요한 지역에 의제들을 심어두었다.

의창을 맡고 있는 의제는 나이는 어리지만, 실력은 막내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솜씨 좀 보자꾸나.”

*  *  *

“이제 결심이 섰나.”

이백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에 반응하듯 가부좌를 튼 채 명상을 하던 독안귀의 눈이 떠졌다.

“노야의… 그림자가 되겠소.”

결국 독안귀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에게 선택권 따윈 없었다.

강요에 따라 받아들일지, 자의로 받아들일지 차이일 뿐이다.

물론 그 자의조차 반쯤 강요에 의한 것이지만.

결심이 선 그에게 이백이 무언가를 건넸다.

“좋아, 이걸 삼킨 후 복용해라.”

“…….”

하나의 단환과 하나의 약병이었다.

이백이 건넨 게 무엇인지 인지하면서도 독안귀는 단환을 주저하지 않고 삼켰다.

그 후 약병의 뚜껑을 열고 마셨다.

그건 독과 지연제였다.

독을 복용시킨 건, 독안귀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다.

지연제를 통해 독의 활성화를 지연시킴으로써 독안귀의 생사여탈을 쥐려는 의도다.

그걸 독안귀 본인이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백일에 한 번씩 약이 지급될 거야. 물론 해약(解藥)은 아니고.”

“지금부터 노야의 그림자가 되면 되는 거요?”

이제 생사여탈은 넘어갔다.

아니, 결심했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이백은 독안귀의 손목을 가리켰다.

“부상이 회복할 때까진, 내가 상회주님을 지키지.”

말을 끝낸 이백이 손가락을 튕겼다.

푹! 푸푹!

그 순간 막혔던 단전에서 내공이 반응하는 걸 느꼈다.

탄지(彈指)를 통한 해혈법(解穴法).

독안귀는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은 곳에 닿은 고수란 걸 깨달았다.

허나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의 적이 아니니까.

예상 이상의 고수란 점이 두려울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든든한 게 맞다.

이백은 밖으로 나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빨리 회복하라고, 임무는 내게 오래 맡겨두지 말고.”

홀로 남겨진 독안귀는 붕대를 감고 있는 자신의 양 손목을 바라봤다.

치료를 잘 받았다지만, 으스러진 손목이 쉽게 회복하는 건 아니었다.

“한 달, 한 달 안에 회복해 보겠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