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꼬리 자르기 (2)
“지주(知州) 대인과 미리 술자리를 마련해둬야겠군.”
형주상회와 당랑파의 전쟁이 끝나면 그들의 이권을 먹어 치울 예정이다.
몇몇 상단과 상회 그리고 흑도 조직에서 그 이권을 노리겠지만, 유씨상단은 그들과 나눠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 일을 위해 공식적으로 사용된 금액만 금 사백 냥이다.
여기저기 기름칠한다면 더 많은 지출이 이어질 것이다.
나눠 먹는다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
형주 제일이라는 유씨상단이라면 독식이 가능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잡음이 발생할 테니, 공권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형주의 권력자 지주 대인이라면 만사 해결이다.
“아깝지만, 백 냥 정도는…….”
“크, 큰일 났습니다! 큰일!”
지주 대인을 구워삶을 방법을 간구하던 유 총관은 허락도 없이 불쑥 들어온 서기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
아무리 처조카라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야, 이 새…….”
“과, 관병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버럭 소리를 지르던 유 총관은 서기의 말에 멈칫했다.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유씨상단은 원활한 활동을 위해 관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위로는 지주 대인, 아래로는 이목(吏目)까지 뒷돈을 쥐여주니 관병들이 유씨상단의 문턱을 넘을 리 없다.
“관병들이 왜?”
“그게 총관님을…….”
유 총관의 물음에 서기는 난처하며 말을 이었다.
허나 그의 말을 끊듯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죄인 유경종은 오라를 받아라!”
“이게 무슨 개소리야?!”
자신을 언급하며 죄인이라 칭하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유씨상단의 이인자 총관 유경종.
형주 땅에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그런 자신을 죄인 취급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유 총관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하, 이게 누구요. 지 포두 아니시오. 뭔가 착오가 있나 본…….”
“죄인이 말이 많구나! 저항한다면 엄히 다스려도 된다는 지주 대인의 명이 있으셨다! 그러니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중년의 포두(捕頭)는 칼집을 슬쩍 보이며 단호히 말했다.
포쾌들의 우두머리라고 해봤자, 대단한 고수는 아니다.
유씨상단의 무사 중에도 그를 제압할 고수가 여럿 있으니 말이다.
허나 상대는 관아의 녹을 먹는 포두다.
자칫 지주 대인과 마찰이 생길 수 있다.
‘미친, 포두 나부랭이가! 하아… 우선 지주 대인의 면을 살려주지.’
저들을 막으려고 한다면 막지 못할 리 없다.
허나 관리들은 체면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긴다.
지주 대인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으나 우선 그의 체면을 생각에 따라줄 생각이다.
“착오가 있는 것이겠지만, 지주 대인께서 명을 내리셨다면 따라…….”
“잠시, 아우와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는가.”
무게감이 있는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살집이 있으나 둔하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건강하다는 느낌을 주는 중년 사내였다.
게다가 눈빛 역시 상당히 강렬했다.
그 눈빛에 지 포두는 포권을 취했다.
“포두 지악천이 유 대인을 뵙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고맙네, 지 포두.”
유 총관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두 사람 모두 형주유가의 직계였으나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형주유가의 이름을 빌려 영향력을 끼치는 유경종과 달리, 유 대인이라고 불린 유경표는 그 자체가 형주유가였다.
형주 최고의 권력자 지주 대인조차 유경표를 조심한다고 할 정도였다.
포두라도 감히 심기를 건드릴 수 없던 것이다.
유씨 형제가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지 포두는 대동한 포쾌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났다.
“네 선에서 끝내라.”
“혀,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무도 차가운 유경표의 말에 유 총관은 당황했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유경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삼백 냥을 챙겼으면 일 처리라도 깨끗하게 했어야지, 이 무능한 놈아.”
“……!!”
혈당랑에게 잔금으로 보내지 않고, 따로 챙긴 삼백 냥의 존재를 유경표가 알고 있었다.
알고도 모른 척했다.
삼백 냥 정도는 묵과해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시험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을 그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며칠 쉬고 있으면 알아서 처리해준다고 하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아서 처리해준다니요! 혹시 지주 대인에게 연락을 받으신 게 있으십니까!”
“…….”
유경표는 대답을 아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야기가 오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유 총관으로서는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제 선에서 끝내라고…….”
“네가 거래한 흑도 놈이 잡혀갔다. 장부와 전표까지 모조리 증거로 제시되었다고 하더구나.”
혈당랑이 잡혀갔다는 말에 유 총관은 심장이 철렁했다.
형주상회에서 그를 제압할 고수가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기에 그 충격은 더 컸다.
“즈, 증거라니요! 장부는 놈들이 조작한 거로 처리하면 되고, 전표는 무기명이니…….”
“현유, 그 늙은이가 무기명 전표라고 해서 추적을 못 할 거라 생각하느냐. 이 좁아터진 형주 바닥에서.”
유경표의 경멸 어린 눈빛에 유 총관은 심장이 조여왔다.
형주는 작은 도시가 아니고, 무기명 전표는 쉬이 추적하지 못한다.
허나 상대는 유경표만큼이나 형주의 상계에서 영향력 있는 형주상회주다.
형주 내에서 발급된 무기명 전표라면 그의 눈을 완전히 피하는 건 어렵다.
어중간하게 대응한다면 오히려 목을 물려고 할 수 있다.
그럴 바에는 팔 하나를 내어주는 게 낫다.
당장은 내어진 상처가 욱신거리겠지만, 팔을 대신할 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유경표의 능력이라면 말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형님! 혀, 형님의 아우이지 않겠습니까! 제발…….”
“가주라 칭해라. 그리고 살려준다 하지 않았느냐. 잠잠해질 때까지만 있다가 나와라.”
가주(家主).
유경표는 형제의 선을 긋고, 가문의 수장으로 명령을 내렸다.
더 이상 재고는 없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된 이상 유 총관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십 년은 늙어진 듯 보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가주님.”
“…….”
그렇게 그는 유씨상단의 총관에서 죄인 유경종으로 전락했다.
포두는 유씨상단의 체면을 생각해 포박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유경표가 나직하게 말했다.
“본가에 피해가 생기지 않게 정리하게.”
―존명!
유경표가 내린 명령 정리에는 유경종의 입도 있었다.
그가 다 떠안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형주유가까지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殺人滅口).
그보다 더 확실한 입막음은 없었다.
피를 나눈 형제이건만, 유경표는 너무도 차가운 결정을 내렸다.
그게 형주유가의 가주 자리고, 유경표라는 사내였다.
“모자라도 유가의 핏줄이다. 피는 피로 그 값을 지불해야 할 게야.”
유경표의 눈빛이 살광으로 번들거렸다.
* * *
“부르셨습니까, 상회주님.”
현유는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그런 와중에 이백을 부른 것이라면, 가벼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오셨습니까, 백 호법님. 앉으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현유는 이백을 백 호법이라 칭했다.
형주상회에는 없는 지위였다.
그럼에도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상회 내에는 수십의 경비무사와 여덟 명의 호위무사가 있었다.
허나 이백이 보여준 신위는 그들이 혼이 나갈 정도였다.
일류고수들인 호위무사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으니, 다시 한번 이백의 존재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그를 상회무사들과 같은 취급을 할 수 없어, 호법이라는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그것에 불만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만큼 이백은 독보적이다.
애초 검모궁과의 연이 아니라면 결코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강자였다.
현유는 자리에 앉은 이백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받으십시오.”
“이걸 왜…….”
금 열 냥짜리 전표 열 장이었다.
즉, 백 냥이었다.
은자로 치면 이천 냥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그런 큰돈을 건넸으니 의아한 게 당연했다.
“호법께서 잡아다 주신 자들과 증거들 덕분에 유경종의 형(刑)이 내려졌다 합니다. 게다가 제 목숨까지 구해주셨는데, 어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경종이라면 유씨상단의 총관 아닙니까? 그자만으로 그친 겁니까?”
이백의 물음에 현유는 씁쓸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비록 유경종이 총관으로서 유씨상단의 고위급 인사지만, 그의 독단으로 보긴 어렵다.
게다가 상대는 형주상회주다.
이리 간단히 끝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속전속결로 처리된 건 뒷거래가 없이 일어날 수 없다.
“지난밤, 유서와 함께 유경종이 자결을 했다 합니다.”
“설마…….”
이백은 소름이 돋았다.
정말 자결(自決)일 리가 없다. 자결로 위장된 타살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유경표. 유씨상단주가 있다는 걸 예상 못 할 게 아니다.
소름이 돋는 이유는 그가 유경종의 친형이라는 점이다.
피해가 커지지 않게 아우를 처리하는 독심.
범부는 할 수 없는 결단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 유씨상단의 신임 총관이란 분이 찾아왔습니다. 전임 총관의 독단이라지만, 대신 사과하겠다고 하더군요. 본 상회가 상단으로 자리잡는 데 도움을 주겠다며 그걸 준 겁니다. 제가 받긴 뭐하고…. 수고하신 백 호법께 드리는 게 낫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유씨상단의 대응은 참으로 빨랐다.
유경종으로 꼬리를 자르고, 신임 총관의 임명과 전임 총관의 단독 소행에 대한 보상까지.
완벽한 방어였다.
형주상회가 문제 삼지도 못하게 말이다.
상대는 형주의 터줏대감, 형주유가.
현유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지만, 노련한 상인인 그가 감정대로 들이박을 리 없다.
감정보다는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쪽을 택했다.
그게 바로 상인다운 방식이다.
이백은 전표를 챙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참, 그자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관아로 넘기지 않으신 거 같던데…….”
“독안귀 말입니까. 예, 지주 대인께서 양해해주셨습니다.”
원래라면 실행범인 독안귀 역시 관아로 넘어가야 했다.
헌데 독안귀는 여전히 형주상회 내에 있었다.
유경표와 뒷거래가 있던 지주 대인으로서도 현유의 눈치가 보였는지, 그의 청을 들어준 듯싶다.
중요한 건 현유가 독안귀를 왜 두었느냐이다.
“경 무사와 유 무사가 손도 못 쓰고, 쓰러졌다 들었습니다. 두 분은 상회무사 중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지요. 그런 분들이 손도 못쓰게 만든 자를 그냥 보내는 건 아깝지 않습니까.”
“허나 상회주님의 목숨을 노린 잡니다.”
두 사람은 무당파 속가제자들로, 현유의 소개장 덕분에 속가제자 시험을 볼 수 있었다.
형주상회주의 보증과 약간의 기부 덕분에 아무런 배경 없는 그들이 무당파 속가제자가 될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러니 피땀을 흘려가며 수련했고, 당당히 시험에 합격했다.
하산 후에 은혜를 갚기 위해 상회주의 호위무사가 된 것이다.
속가제자라도 무당파의 제자답게 실력이 상당했다.
그런 두 사람을 쓰러트린 자가 독안귀다.
그 수법이 일반적인 무공과 다르다고 하지만, 현유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긴 하나, 살업을 걷는 살수들과는 좀 다른 거 같더군요. 냉혈하지도 않은 거 같고…. 무엇보다 백 호법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독안귀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한들, 이백 앞에서는 무용하다.
무위도 무위지만, 그에겐 혜안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한들, 흑도 출신에 현유의 목숨까지 노렸던 독안귀를 거두는 게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늙은이가 보기에 백 호법께선 이곳에 오래 계실 분이 아닙니다. 나중을 위해 이 늙은이도 방책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 호법께서 계시는 동안, 그를 ‘교화’시켜주실 수 없겠습니까?”
“으음… 장담할 수 없습니다. 허나, 상회주께서 원하시니, ‘교화’할 수 있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교화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 결국 독안귀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달라는 뜻이다.
독안귀를 감시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그를 현유의 사람으로 만드는 건, 다른 문제다.
이백에겐 그러한 재주는 없었다.
허나 이백의 애매한 대답에도 현유는 웃는 얼굴로 끄덕였다.
“그거면 됩니다. 그거면…….”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