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꼬리 자르기 (1)
“죄, 죄송합니다. 상회주님.”
동이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주상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간밤에 벌어진 일이 알려진 탓이다.
상회의 외곽과 전각 외부 경비를 맡고 있는 상회무사들도 놀랐지만, 상회주의 근접호위를 맡고 있는 호위무사들이 느낀 죄책감은 너무도 컸다.
“백 대협께 이미 들었습니다. 두 분의 잘못이라 할 수 없으니 고갤 드세요.”
“고맙습니다. 백 대협이 아니셨다면…….”
결과적으로 호위임무를 실패한 것이니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상회주는 무작정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만큼 독안귀의 실력과 준비가 철저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일류고수들로, 어디를 가든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그들을 책망하기보다는 마음의 빚을 지우는 게 오히려 득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큰 죄책감을 느끼며, 동시에 이백에 대한 감사함을 가졌다.
그가 아니었다면 상회주는 죽었을 것이고, 이 정도의 죄책감으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들이 상회주의 호위를 맡은 건, 현유에게 진 빚 때문이다.
빚을 갚긴커녕 그 빚이 더 커졌다.
“저 역시 상회주님을 지키기 위해 온 겁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 제가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짜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다.
이백은 전날, 빈객으로 형주상회에 왔다.
정체 알 수 없는 어린 애송이가 빈객이 된 게 어이없었다.
허나 그런 마음은 더 이상 가지지 않았다.
이백은 그들이 아닌 상단주를 바라봤다.
“그보다 상회주님.”
“말씀하십시오, 백 대협.”
“이 일을 본보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 말씀은…….”
이백은 단호히 말했다.
자세한 설명이 없음에도 상회주는 그 뜻을 알아차린 듯싶었다.
“당랑파. 지우시지요.”
“가능하겠습니까.”
독안귀가 혈당랑의 오른팔이란 걸 모르는 형주 사람이 없다.
배후에 당랑파가 있단 걸 들을 수 있었다.
상회주는 놀라기보다는 가부를 물었다.
이백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지난밤 독안귀를 제압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정을 내리기에 당랑파의 악명이 너무 컸다.
그럼에도 현유는 결단을 내렸다.
수많은 군상을 겪어본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주 대인 쪽은 제가 손을 쓰지요.”
* * *
“지금쯤 연락이 와야 할 텐데, 좀 늦군.”
유씨상단의 이인자 유 총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눈엣가시 같던 현유의 죽음을 시작으로, 거머리 같은 당랑파까지 싸그리 정리할 예정이다.
그런데 정작 현유가 죽었단 연락이 여전히 없었다.
“설마… 실패한 건 아니겠지?”
천박한 인간 백정이지만, 형주 암흑가를 장악한 건 우연이 아니다.
사람 목 베는 솜씨는 무림고수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실제로 혈당랑의 겸(鎌)에 목이 달아난 무림고수도 있다.
형주에 자리 잡고 있는 중소문파조차 피할 정도라고 하니 말 다 했다.
그러니 실패는 염두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지. 그 거머리가 직접 움직였을 리 없고, 독안귀를 보냈을 텐데…. 살수보다 더 실력 좋다던데, 늙은이 목 하나 따는 걸 실패했을 리 없지.”
쉬쉬하지만 다들 혈당랑보다 독안귀를 더 두려워했다.
부호들이 고용한 고수들도 그를 보며 고갤 저을 정도였으니 당연하다.
허나 모두가 독안귀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유씨상단의 호위장은 형문심권(荊門心拳)이라는 권법의 대가다.
형주제일상단답게 거금을 주고 영입한 절정권객이니, 유씨상단만큼은 독안귀가 두렵지 않다.
그렇다고 혈당랑이나 독안귀를 정리하자고 형문심권을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러니 번거롭지만, 이러한 계책을 낸 것이다.
“총관님!”
‘됐구나!’
총관을 보좌하는 서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급함에서 자신이 원하는 소식을 가져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문이 열리며 이립은 훌쩍 지났을 법한 장한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경거망동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유 총관의 질책에 서기는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하며 고갤 숙였다.
청년은 처가 쪽의 조카로, 부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자신의 서기로 들였으나 능력은 그저 그랬다.
다만 큰 실수를 해야 해고하는데, 자잘한 실수만 하니 아직 곁에 두고 있었다.
“되었다. 무슨 일이더냐.”
“혀, 형주상회의 노회주께서!”
유 총관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는 어쩔 수 없었다.
허나 서기의 이어진 말은 유 총관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암살당할 뻔했다 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암살당한 게 아니라 당할 뻔하다니.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유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허나 서기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한 채 물음에 대답했다.
“지난밤에 노회주님을 암살하려고 살수가 들어왔다가 붙잡혔다고 합니다! 놀라운 건 살수가 독안귀라고 합니다!”
“뭐, 라고!”
암살에 실패한 것으로 부족해, 붙잡혀 신분까지 노출되고 말았다.
독안귀가 혈당랑의 오른팔임이란 걸 모르면 형주 사람이 아니다.
즉, 혈당랑이 형주상회주의 목숨을 노렸다는 걸 바로 안다는 뜻이다.
혈당랑과 형주상회주 사이에 목숨을 노려야 할 정도의 악연이 있나? 그것도 아니다.
그가 무슨 득이 있다고 형주상회주를 노리겠는가.
허나 누군가 혈당랑에게 이득을 안겨준다면? 말이 다르다.
그럼 누가 혈당랑에게 이득을 안겨줄까?
형주상회주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존재.
형주의 상계.
몇몇이 거론될 수 있지만, 가장 유력한 곳은 바로 유씨상단이다.
머리를 좀 쓴다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유추일 뿐, 증거는 없으니 지레 당황할 필요는 없다.
“해서 형주상회주의 고수들이 당랑파(螳螂派)로 향했다고 합니다!”
“미, 미친! 그게 사실이냐!”
형주상회의 경비무사들은 대부분 고용된 자들이다. 고작 이류 혹은 삼류에 불과하다.
허나 모두가 그러한 건 아니다.
현유는 친구가 많고, 그에게 신세를 진 자도 많다.
그렇다 보니 자청해서 노회주의 호위가 된 일류고수도 여럿 있었다.
현유의 침소를 지키던 일류고수들도 그런 이들이었다.
‘자, 잠깐? 일이 좀 꼬였지만, 계획대로 되었잖아?’
현유가 죽지 않은 게 아쉽지만, 형주상회와 당랑파의 공멸(共滅).
최소한 양패구상(兩敗俱傷) 시킬 수 있는 상황이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계획대로 되었으니 당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이게 생각지 못하게 삼백 냥이나 굳었네.’
유 총관의 눈에 욕심이 번들거렸다.
그에게도 금 삼백 냥은 적은 돈이 아니다.
선금으로 준 백 냥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삼백 냥은 자신의 수중에 있다.
원래라면 잔금 삼백 냥을 전해주고 혈당랑이 방심하고 있을 때, 형주상회에 정보를 흘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아서 싸우니 굳이 삼백 냥을 줄 필요 없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혈당랑이 유일하다. 허나 형주상회의 피 튀기게 싸우는 와중에 삼백 냥을 챙길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유 총관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공돈이 생긴 셈이다.
‘이거 오늘 운수가 좋은데?’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놓친 게 있었다.
살수보다 솜씨 좋다던 독안귀를 붙잡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고수가 당랑파로 향했다는 사실 역시 염두하지 못했다.
* * *
“커억!”
혈당랑의 왼팔이라는 광우가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흔치 않은 광경이지만, 의외로 다들 크게 놀라지 않았다.
타고난 힘과 외문무공 철갑공(鐵甲功)을 익힌 덕분에 아무리 맞아도 불사신처럼 일어나는 자가 바로 미친 소 광우(狂牛)이기 때문이다.
“동작 그만! 모두 협조하면 더 이상 거친 행동은 하지 않겠다.”
“건방진 놈! 그 정도로 광우 형님이 쓰러질 리가 없… 으음?”
수십이나 되는 장한들은 광우가 곧 일어나 저 건방진 놈을 피떡으로 만들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다.
헌데 평소와 달리 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쓰러진 거 같은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혀, 형님께서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철갑공은 흔히 구할 수 있는 외문무공이 아니다.
철포삼(鐵布衫)의 단점을 보완해 도검(鐵布衫)도 두렵지 않게 만든다.
광우를 당랑파 삼인자로 만들어진 힘이다.
하물며 맨손으로 철갑공을 익힌 광우를 때려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무기를 내려놓고 협조해. 아니면 모두 저 꼴로…….”
후우~욱!
섬뜩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허나 목표를 베지 못한 채, 사내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척!
그건 겸(鎌)이었다.
“광우 녀석이 어제 과음 좀 했다고 상태가 안 좋은가 본데, 어린 녀석이 방자하구나.”
“네가 사마귀란 놈이겠구나.”
사내의 말에 혈당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록 흑도 바닥에 살고 있지만, 거칠 것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이런 무시를 당하니 참기 어려웠다.
“아들뻘밖에 안 되는 어린 새끼가 혓바닥이 반 토막 났나!”
“난 사람에게만 존대한다. 하지만 넌 사마귀잖아?”
고작 약관이나 지났을 법한 어린 청년이 하대에 이어 무시까지 하니 결국 혈당랑이 눈이 뒤집혔다.
그는 두 자루의 겸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마구잡이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정교한 초식으로 이루어진 겸술이었다.
게다가 쌍겸이 빛나는 게 상대가 어리다고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보이는 것만큼이나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허나 그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어쩌지, 내 눈에는 다 보이는데…….”
청년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했다.
[혜안이 발동됩니다.]
[당랑쌍겸술의 겸로를 예측합니다.]
[예측을 성공합니다.]
복잡해 보이는 겸의 움직임이 이백의 눈에는 너무도 단순하게 보였다.
움직임을 간파한 이상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교활한 원숭이(狡猴)의 손은 피할 수 없지.”
이백이 허공을 갈기갈기 베고 있는 쌍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오히려 쌍겸이 그의 손을 피해 빗겨 갔다.
실제로 쌍겸이 빗겨 나간 게 아니라 이백의 수법이 그리 보이게 만들었다.
백수군림의 교후(狡猴)였다.
청랑조법이 백수군림으로 진화하면서 조법(爪法)의 탈을 벗어나 권장지수각퇴를 넘나들게 되었다.
교후(狡猴)는 금나수(擒拿手)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백수군림의 특성상 권장술이나 조법으로도 변형이 가능하다.
“어? 어? 어!”
“피할 수 없다 했잖아.”
결국 쌍겸은 이백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너무도 쉽게 무력화되었다.
혈당랑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도망치려고 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도망칠 생각을 다 하고…. 우직한 소(愚牛)의 주먹질은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컥!”
후우~욱! 퍽!
이백은 붙잡은 쌍겸을 놓고, 주먹을 휘둘렀다.
어리석은 소가 아닌 우직한 소. 우우(愚牛).
철갑공을 익힌 광우도 견뎌내지 못한 권격이다.
혈당랑이 견뎌낼 리가 없다.
그는 일권(一拳)에 피떡이 되었다.
광우에 이어 혈당랑까지 쓰러졌다.
아직 수십여 명이 남긴 했으나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백이 나직하게 말했다.
“뭐합니까? 정리 안 합니까?”
“조, 존명!”
이백과 동행한 형주상회의 무사는 스물에 불과했고, 그중에 일류고수는 다섯 명도 안 되었다.
만약을 대비해 형주상회에도 일부 남겨 둬야 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당랑파 흑도들은 누구도 저항하지 못한 채 제압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형주 암흑가를 장악한 혈당랑과 광우가 눈앞에서 어찌 되는 걸 봤는데 저항할 배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증거를 찾아볼까.”
당랑파의 다른 이들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이백을 말리지 못했다.
‘도대체 저런 인간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거기다 이백 뿐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저 고양이는 도대체 뭐냐고!’
당랑파 흑도들은 이백의 어깨 위에 있는 새하얀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지금이야 이백의 어깨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동료들은 몇이나 때려눕혔다는 것을.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