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형주(荊州)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남악(南岳)에 나타났다라…….”
학사의를 입은 노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남악은 형산파의 영역이다.
구파일방에는 못 미치지만, 오악검파는 충분히 거파(巨派)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남악에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나타났다는 건, 무시하기 어려운 일이다.
“알아낸 건 무엇 있느냐.”
“열한 명으로, 도망친 1인을 제외하곤 전원 절정고수로 판명되었습니다. 총군사님.”
장한은 노인을 향해 총군사라 칭했다.
무인들의 세계인 무림에서 군사(軍師)의 지위를 가진 자가 의외로 많다.
그중에서 총군사라 불릴 만한 사람은 흔치 않다.
신산(神算) 제갈중경.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현(現) 무림맹 총군사다.
“절정고수 열을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은 의외로 많지.”
“허나 도주한 자는 초절정고수로 추정됩니다.”
장한의 말에 제갈중경의 눈이 커졌다.
절정고수를 열 이상 보유한 집단은 정파무림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 대문파와 무림세가 중에서도 제법 있었다.
중원 전체로 넓히면 그런 세력은 족히 백이 넘는다.
절정고수 열 명에 초절정고수까지 포함된다면?
대문파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전력을 쏟아낸 것이다.
그 배 이상의 전력이 없다면 결코 내릴 수 없는 명령이다.
“사도련? 아니야. 사존(邪尊)이 이리 허투루 움직일 리가 없다.”
“사도련이 아니라면 설마…….”
무림맹과 함께 무림을 양분했다는 사파무림의 사도련(邪道聯).
그런 사도련이라면 절정고수 열은 물론 초절정고수도 쉬이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뱀 같은 사존의 수작으로 보기에는 뭔가 어설펐다.
“마교? 마교가 왜 남악을? 뭐가 있기에…….”
사도련보다 더 두려운 세력은 분명 존재한다.
천마신교(天魔神敎).
하나의 세력임에도 그 힘이 중원무림을 위협한 정도다.
수십의 초절정고수와 수백의 절정고수를 보유한 그들이라면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어렵지 않다.
문제가 정말 그들이라면 왜 하필 남악에 침입했냐는 것이다.
형산파의 협조하에 여러 정보를 얻었지만, 아직 모든 걸 알아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들을 막은 자들이 검각이라 했던가.”
“정확히는 소검후 일행입니다. 설마 소검후를 노렸다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한 예상은 아니다.
소검후는 무림십왕 중 검후의 후계자.
미래의 십왕을 제거하기 위함이라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제갈중경은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개운치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네가 직접 다녀오거라. 소요자(逍遙子)께 동행을 부탁해두마.”
“안 그래도 나가고 싶어 하시던데, 좋아하시겠네요.”
무림맹의 호법으로, 일인전승의 문파인 소요파의 당대 계승자다.
소요파의 계승자는 대대로 이름을 버리고 소요자라는 별호를 잇게 된다.
당대 소요자는 지천명이 지난 몇 해되지 않았으나 초절정지경에 오른 강자다.
젊기 때문인지 방랑벽이 있어서 한곳에 진득하게 못 있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무림맹의 호법이 된 건, 선대의 약조 때문이다.
아니었다면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그가 무림맹 호법의 자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임무를 핑계로 맹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소요자가 거절할 리가 없다.
“그리고 곧장 맹으로 돌아오지 말고, 이걸 검선(劍仙)께 전해드리거라.”
“무당검선께 말입니까?”
제갈중경이 내민 건 하나의 서신이었다.
무림맹 총군사가 무림십왕에게 전하는 서신이다.
그것도 무림십왕 중 수위를 차지한 무당검선에게.
그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초절정고수인 소요자를 붙여주는 이유가 남악 때문만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검선께서 예전에 부탁하셨던 것이다. 이 서신의 존재는 아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쉽지 않군요. 다만, 몇 달 후에 장문인의 생신이니, 무당까지는 의심 없이 방문 가능할 거 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림과 함께 태산북두라고 불리는 무당파의 장문인이다.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무당산을 오를 것이다.
자신이 그중 한 명이 된다고 해서 의심스럽지 않다.
“장문인께 전할 선물은 네 아비에게 받거라.”
“예, 조부님.”
장한은 제갈중경을 보좌하는 소군사의 한 명이자 그의 손자였다.
옥면기협(玉面奇俠) 제갈천기.
제갈세가 소가주의 후보들은 현재 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그중 많은 이들이 무림맹에서 임무를 빙자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원하는 부서에 들어가 공적을 쌓는 중이었다.
사신당의 하나인 백호당이나 감찰단. 무려 맹주전에서 활동하는 혈족도 있었다.
원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부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가능한 건, 전대 가주 제갈중경이 총군사인 덕분이다.
무림맹 역시 좋은 인재들을 부릴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제갈천기가 지원한 부서는 바로 군사부.
소군사(小軍師)로서 공적을 쌓는 중이었다.
대공자답게 다른 혈족들을 제치고, 가장 높은 공적을 쌓았다.
그런 제갈천기가 떠나자 홀로 남은 천하의 제갈중경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그들은 아니겠지. 차라리 마교가 움직인 거야 할 텐데…….”
* * *
“이곳만 넘으면 호북입니다, 백 공자.”
중년 무사의 친절한 설명에 이백은 고갤 끄덕였다.
중년 무사는 길잡이로 고용된 보표(保鏢)였다.
“그럼 형주는 언제쯤 도착하겠습니까?”
“별일 없다면 닷새면 도착할 겁니다.”
이백은 장사부(長沙府)도 그렇다고 장가계도 아닌 호북성의 형주로 향하고 있었다.
형산을 떠난 이백과 두 사제는 장사부가 아닌 장가계로 향했다.
장사부에 남았던 인원은 이미 검모궁에 먼저 돌아갔기 때문이다.
귀환 중인 이백 일행들이 상덕부에 도착했을 때, 한 사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이백과 동행 중인 중년 보표였다.
그는 삼선자에게 두 개의 서신을 전했다.
하나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소개장이었고, 또 다른 서신은 이백에게 형주로 가달라는 검모궁의 청이 적혀 있었다.
정확히는 무너진 동정상단을 대신 형주의 상회를 상단으로 키울 예정으로, 기존 상단과의 마찰을 대비해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지켜달라는 내용이었다.
‘형주상회라…….’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선 살인도 불사하는 게 바로 상인이다.
새로운 상단의 등장은 기존 상권을 쥐고 있는 자들의 이권이 줄어들게 하는 행위다.
원만한 타협과 협조가 가능하다면 적게 먹더라도 평화롭게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물론 검모궁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그건 위험하다.
형주의 상계만이 아니라 호북의 문파들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 얻은 힘을 숙달시킬 시간이 필요한데, 흑천회 놈들 때문에… 하아…….’
검모궁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본궁의 고수를 파견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백을 보낸 건 흑천회다.
검모궁은 흑도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가진 흑천회와 척을 진 상황이다.
집요한 그들은 검모궁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꼬리를 잡히면 무자비한 보복이 시작할 게 뻔하다.
형주의 상단은 동정상단과 같은 꼴을 당하게 두고 볼 수 없다.
여차하면 선자급을 급파하면 되지만, 최선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다.
사실상 무림초출이며, 선자급의 강자.
이백만한 적임자가 없다. 그건 본인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백은 축융봉에서 얻은 힘을 숙련시킬 시간도 없이 형주로 향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도 왕 보표님이 계셔서 다행이지, 혼자였다면 고생 좀 했겠어.’
장사부에서 형산까지는 관로만 따라가면 되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허나 형주는 달랐다. 초행이기도 하니 초출인 이백에게는 많은 게 부담이 되었다.
이를 예상하고 노련한 왕 보표를 고용해준 검모궁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적당히 해결되었으면 좋겠는데…….’
* * *
“하하 역시 유씨상단입니다! 예의가 뭔지 안다니까요!”
소도 한 손으로 때려잡을 거 같은 거구가 얼큰하게 취한 채, 즐거워했다.
한 손에는 미주(美酒)가 다른 손에는 미녀를 쥐고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만이 아니라 다들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 명만은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왼쪽 눈꺼풀부터 뺨까지 이어진 칼자국이 위협적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야, 독안귀(獨眼鬼)! 왜 죽상이야? 대형께서 계신 자리에서 분위기 깨고 싶어! 술맛 떨어지게 말이야.”
“됐다, 광우(狂牛)야.”
거구의 사내가 독안의 사내에게 언성을 높이자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내들에게 술을 따르는 여인들이 움찔하자, 상석의 사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두 사내는 그를 향해 고갤 숙였다.
“아, 예 대형.”
“…죄송합니다.”
대형 다음으로 영향력을 가진 두 사람이 고갤 숙이니, 나머지 사내들 역시 고갤 숙였다.
대형은 독안귀를 향해 말했다.
“되었다. 총관은 나만 만나면 되니, 불편하면 먼저 돌아가라.”
“…죄송합니다.”
결국 독안귀는 대형에게 사과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우는 밖으로 나간 독안귀를 떠올리며 화를 냈다.
“제깟 게 뭐라고 감히…….”
“되었다. 저런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마라.”
대형의 얼굴에도 살짝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라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광우는 대형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형, 제가 담가버릴까요.”
“됐다. 일 잘하는 놈인데, 건드릴 필요 없다.”
대형은 광우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독안귀의 실력이 상당해 그를 제거하면 공백이 제법 크다.
무엇보다 광우가 그를 제거할 수 있단 보장이 없다.
‘광우의 힘도 보통이 아니지만, 독안귀의 칼 솜씨만 못하니…. 저놈을 믿고 일을 맡겼다가 그르치면 귀찮아져.’
자신들이 형주의 암흑가를 장악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게 바로 독안귀다.
혈당랑(血螳螂)이라고 불릴 정도로 겸술(鎌術)이 뛰어난 자신도, 독안귀만큼은 자신할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놔두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굳이 가를 필요는 없으니까.
그때 문이 열리며 여우처럼 생긴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독안귀가 나가던데, 대접이 시원찮았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그럴 리 있겠소? 유 총관님.”
그는 유씨상단의 이인자라고 불리는 총관이었다.
동시에 이들을 주루로 초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외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사이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공생하는 관계라는 것을 말이다.
유 총관이 자리에 앉아 눈짓하자 여인들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이들의 대형 혈당랑 역시 수하들을 내보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찾아뵙습니다.”
“말씀하시오, 총관님.”
언제나 비슷한 방식이니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유 총관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평범한 종이가 아니었다.
혈당랑은 입꼬리를 올린 채 종이를 들었다.
“백 냥? 대체 누굴 죽여달라고 백 냥씩이나 준비하셨소?”
“현유.”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