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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32화 (32/200)

32화. 백전비무행(百戰比武行) (4)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달려들었다.

이백은 피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적의를 품지 않았으며, 아는 여인인 탓이다.

교정정은 그대로 이백에게 안겼다.

그때 방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정아, 정숙하지 못하구나.”

“죄, 죄송해요. 사부님.”

삼선자의 말에 교정정은 얼굴을 붉히며 그제야 이백에서 떨어졌다.

삼선자는 이백을 향해 물었다.

“…몸은 어떻소.”

“괜찮습니다. 삼…….”

이백의 말을 끊고 삼선자가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말했다.

―호칭은 생략합시다. 본궁에 대해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자신을 안내해준 한상이 검모궁이 아닌 검각이라 칭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모궁이 사파는 아니지만, 정파라 칭하긴 애매했다.

그녀들에게 정의는 여인들의 안위다.

그러다 보니 정사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다.

세상에 드러난 강한 힘보다 숨겨진 비밀이 더 무서운 법.

검모궁이 신비주의를 택한 이유다.

그렇기에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물론 검각이 신분을 보증했으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허나 검각이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게다가 주변에는 검각의 제자 이외에 없으나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

전각에서 나온 이들은 검모궁의 사제만이 아니다.

“아미타불…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사태님.”

검각의 제자들도 형산파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 이유가 이백 때문만이 아닌 듯 정원사태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성화수호대 부대주를 상대로 그녀 역시 내상을 입은 걸 알 수 있었다.

그녀 이외에 검각(보타암)의 제자들 역시 심각하진 않으나 내상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정원사태는 이백을 향해 합장했다.

“아미타불. 깨달음을 얻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초절정고수답게 정원사태는 이백의 변화를 눈치챘다.

정확히 할 수 없기에 깨달음이라 뭉뚱그렸다.

이백은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다.

특별 퀘스트 ‘축융의 숨결’이 무의식에서 진행되었지만,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모르지 않았다.

덕분에 초절정지경에 오른 사실과 혜안을 얻은 것 그리고 부가적으로 얻은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얻을 걸 체득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니, 숙달시키려면 한동안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때 또 다른 젊은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깨어나셨으니 곧 떠나실 걸로 압니다. 그전에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옥환아!”

다짜고짜 비무를 청한 소검후 이옥환의 말에 곁에 있던 정원사태가 깜짝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숙의 질책에도 이옥환은 뜻을 굽히지 않고, 이백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혜안을 대신 얻은 것도 있으니…….’

원래라면 그녀가 얻어야 했을 혜안이었다.

아니, 이옥환이었다면 신안을 얻었을지 모른다.

물론 성화수호대에게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니 꼭 이백이 마음의 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가 아니었다면 성화일위에게 이옥환이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지만 이백이 대신 얻은 건 사실이다.

비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다.

정원사태가 이백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대협, 거절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사태님. 비무… 하죠.”

“감사합니다!”

이백의 승낙에 이옥환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백에게 질투를 품고 있었다.

백전비무행 동안 모든 비무를 승리한 게 아니다.

분명 패배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분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다.

허나 왠지 이백에게 만큼은 질투를 품게 되었다.

나이가 배나 나는 명숙이 아닌 연하의 사내가 자신보다 강한 힘을 보였기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자신이 얻을 무언가를 빼앗겼단 걸 느꼈을지 모른다.

이옥환은 남에게 이런 감정을 가진 적이 없기에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다.

그렇기에 더욱 이백과 비무를 통해 알아내려고 한다.

자신이 분함을 가진 이유를.

[퀘스트 ‘백전비무행’을 수락하셨습니다.]

단순한 비무가 아닌 퀘스트 ‘백전비무행’로 선정되었다.

‘그럼 손해 볼 게 없지.’

‘백전비무행’ 역시 퀘스트다.

즉, 특별 퀘스트 ‘축융의 숨결’만큼 대단한 보상은 아니지만,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이 되든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형산의 협조를 구한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  *  *

“후우… 갑니다!”

호흡을 가다듬은 이옥환이 먼저 움직였다.

이백을 상대로 선수를 양보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이옥환에게서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진지, 그 자체였다.

그녀는 한 호흡에 수십의 검격을 날렸다.

번뇌백팔검(煩惱百八劍).

대성한다면 일검에 백팔 번의 변화를 담는다고 알려진 검법이다.

일검에 수십의 변화를 담았다는 건, 그녀가 번뇌백팔검의 성취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게다가 잔상을 이용한 환검(幻劍)과는 다르다.

일검(一劍) 일검(一劍)이 실검이다.

즉, 산검(散劍)이란 뜻이다.

지금까지의 백전비무행과 달리 이옥환은 처음부터 절학을 꺼냈다.

‘위력이 분산되지만,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지. 허나…….’

아무리 위력이 분산되었다고 해도 금강불괴가 아닌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에겐 위협이 된다.

게다가 검각의 검법이니, 그 위력이 가벼울 리 없다.

그럼에도 이백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했다.

[혜안이 발동됩니다.]

[번뇌팔백검의 약점을 발견했습니다.]

신안은 모든 걸 꿰뚫어 본다.

비록 그보다 못한 혜안이지만, 진위를 밝혀내는 힘이 있다.

번뇌백팔검은 착시를 이용한 환검이 아니지만, 분명 약점이 존재했다.

정확히는 이옥환이 펼친 번뇌백팔검의 약점이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수십의 검격을 모두 고르게 힘을 분산시키지 못한다.

어떤 검격에는 더 강한 힘이, 어떤 검격에는 힘이 덜 실리게 된다.

이백은 혜안을 통해 그중에서 가장 힘이 가장 덜 실린 검격을 파악했다.

‘저기군.’

이백은 수십의 검격 중 하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혜안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일견 무모해 보였다.

실제로 참관한 교정정과 검각의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당사자인 이옥환의 놀람은 그 이상이었다.

허나 삼선자와 정원사태만은 차분히 지켜봤다.

이백의 뜻에 따라 이번 백전비무행은 비공개로 진행되는 만큼 양측 이외에는 참관이 거부되었다.

불만을 가진 자가 없지 않았으나 이는 검각이 허락한 일이다.

불만을 드러낸 구경꾼은 더 이상 따라다니는 걸 금한다.

그러니 불만스러워도 참아야 했다.

착~!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수십의 검격이 사라지고, 이옥환의 검이 이백의 손에 붙잡혔다.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이라니…….”

정원사태는 놀라워했다.

이옥환의 번뇌백팔검이 파훼되는 건 예상했다.

그녀의 번뇌백팔검이 뛰어나지만, 이백의 경지를 어렴풋이 엿봤으니까.

허나 아예 맨손으로 이옥환의 검을 낚아챌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녀만이 아니다.

누구도 진지하게 비무에 임한 소검후의 검이 잡힐 거라 생각했겠는가.

이백은 잡은 그녀의 검을 놔주었다.

“윽!”

“이게 전부라면 이만하시지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이백의 도발 아닌 도발에 이옥환이 발끈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숨길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정원사태는 고갤 저었다.

‘아미타불…….’

이옥환답지 않았다.

허나 이 역시 성장을 위한 성장통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불호를 읊을 뿐이었다.

이옥환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감정을 추슬렸다.

“후우…….”

그러자 그녀에게 맑고 깊은 기운을 뿜어져 왔다.

검각의 비전인 청명연화진기(淸明蓮花眞氣)였다.

맑고 기운은 그녀의 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운은 점점 강해지며 밝아져 갔다.

기운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옥환이 움직였다.

검각의 자랑인 수미관음보(須彌觀音步)를 밟으며 검을 휘둘렀다.

‘수미관음검(須彌觀音劍)인가.’

이백은 그녀가 펼치는 검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미 교정정과의 비무에서 보여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검후의 이대검학 중 하나 수미관음검.

그 성취가 높지 않다고 해도 검후의 검학이다.

번뇌백팔검과 똑같은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

애초 번뇌백팔검을 잡아낸 건, 그녈 모욕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 없이 제압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무시무시한 기세로 쇄도하는 이옥환의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 역시 자신의 검을 잡아채려고 한다 생각했는지,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혜안이 발동합니다.]

[수미관음검의 검로를 예측합니다.]

[예측을 실패합니다.]

[수미관음검의 검로를 예측합니다.]

[예측을 실패합니다.]

[수미관음검의 검로를 예측합니다.]

[예측을 실패합니다.]

[수미관음검의 검로를 예측합니다.]

[예측을 성공합니다.]

수미관음검과 같은 절세검학은 혜안만으로 파악하기에 이백의 완숙도가 낮았다.

다만 완숙하지 못한 건 이백의 혜안만이 아니다.

이옥환 역시 수미관음검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즉, 그녀가 틈이란 의미다.

물론 이백의 혜안 역시 아직 성취가 늦은 탓에 한 번에 꿰뚫어 보지 못하고 몇 번이나 실패 끝에 간신히 성공한 것이다.

검후가 수미관음검을 펼쳤다면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백은 백수행공을 펼쳐 예측된 수미관음검의 검로(劍路)를 피했다.

백수행공(百獸行空)은 보법이자 신법이자 경공이다.

능히 십대보법에 들만하다.

검로를 예측한 상태에서 백수행공을 펼쳐 파고들었으니, 이옥환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는 어떡하든 저항하기 위해 움직임에 변화를 주었다.

허나 이백이 더 빨랐다.

검을 쥔 이옥환의 손목을 잡았다.

맥문이 제압되었는지, 잡고 있던 검을 놓치고 말았다.

패배. 그것도 완벽한 패배였다.

이백은 그녀의 손목을 놔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

패배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허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그것도 완벽하게 패배할 줄 몰랐던 이옥환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퀘스트 ‘백전비무행’을 완수했습니다.]

[보상: ‘혜안’의 성취가 소폭 상승합니다.]

[추가 보상: ‘번뇌백팔검’의 형을 습득하셨습니다.]

‘번뇌백팔검의 형?’

[번뇌백팔검형]

검각의 검법, 번뇌백팔검의 형(形)이다.

산검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예상치 못한 부수입인 셈이다.

검후가 된 이옥환이 그 어떤 상대로 파훼할 수 있던 건, 바로 신안 덕분이다.

혜안으로는 그 정도 효과는 어렵다.

대신 퀘스트의 힘이 맞물리면서 부수입이 생긴 셈이다.

‘수미관음검의 형은 아니지만, 괜찮은 보상이네.’

번뇌백팔검형(煩惱百八劍形). 정확히는 산검의 무리(武理)는 써먹을 기회가 많다.

그렇다고 번뇌백팔검형을 그대로 사용하는 건 위험하다.

자칫 검각의 검법을 훔쳤다는 누명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얻은 게 있는 건 이백만이 아니었다.

“사저…….”

―입 다물거라.

검각의 제자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 이옥환에게 말을 걸려 했다.

그때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원사태가 그녀들을 저지했다.

그 순간 이옥환은 가부좌를 틀었다.

그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걸 알아차린 검각의 제자들이 주변을 경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백은 쓴웃음을 지었다.

‘천재는 천재란 말인가.’

신안이란 기연을 얻지 못했다고 해도 소검후는 소검후였다.

이 와중에도 얻어가는 게 있으니 말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그 기회를 알아차리고 잡는 건 사람의 몫이다.

‘기연을 뺏은 건 미안하지만, 서운해하지 마시오. 이번에는 그대에게 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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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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