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백전비무행(百戰比武行) (1)
마차 한 대가 관도를 지나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자는 일개 마부로 보이기에 귀태가 흘렀다.
그는 마차를 모는 와중에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고 있었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이라…….’
마부의 정체는 바로 이백이었다.
그가 자청해 마부가 된 건, 형산에 가기 위함이다.
하연주의 부상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그들은 검모궁으로 환궁할 예정이었다.
그러던 중 검모궁으로부터 서신이 전해졌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 검모궁의 상대로 팔검향이 지목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중제일고수라 불리는 검후의 후계자가 바로 소검후(小劍后)다.
검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들, 실전 경험이 없다면 검을 완성할 수 없는 법.
그렇기에 대대로 소검후는 백전비무행이라는 이름의 시험을 받았다.
백전비무행(百戰比武行).
말 그대로 백 번의 비무를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맞는 건가.’
과거 독보강호를 꿈꾸던 시절에는 비무행을 통해 무(武)를 완성하려는 자들이 많았다.
허나 이기면 다행이지만, 패배하면 명성이 떨어지니 비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비무행이란 건 무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유일하게 그 전통이 이어지는 게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이다.
대대로 검후는 무림 최고수의 한 명으로 꼽혔고, 당대 십왕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런 검후의 후계자에게 비무 상대로 지목당했다는 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
설사 소검후에게 패배한다고 해도.
검모(劍母)는 검후와 함께 여고수 중 최고로 꼽혔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에 검모궁의 고수가 지목되는 건 당연하다.
‘청랑왕의 유산도 그렇고…….’
두 사제는 소검후와의 비무를 위해 형산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백이 동행하게 되었다.
비무 장소가 형산인 이유는 소검후의 다음 비무 상대가 형산일검이기 때문이다.
형산일검(衡山一劍)은 형산파의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된 인물로, 현 장문인 남악검옹이 고령에 몸이 불편한 상황이기에 그를 지목하게 되었다.
오악검파의 장문인에 대한 예우이기도 했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을 구경하기 위해 구경꾼들이 따라다닐 가능성이 있다.
위치를 숨기고 있는 검모궁으로서는 소검후를 본궁에 초대할 수 없으니, 그녀들이 형산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백이 마부를 자처하면서 이들 사제와 동행한 건, 한 가지 확실 때문이다.
‘정말 영웅(英雄) 속이라면…….’
그가 현대에서 개발에 참여한 게임 [영웅 : 무림전설].
이백이 무림에 발을 디딘 순간 얻은 기연은 ‘청랑왕의 유산’.
그건 [영웅 : 무림전설]의 에피소드3에 해당하는 스토리다.
큼직한 떡밥을 통해 신규 유저의 유입을 늘리겠단 의욕에 찬 에피소드인 셈이다.
그렇다면 기회가 왔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이 바로 그의 기회다.
[영웅 : 무림전설]의 에피소드 중에는 ‘신(新) 검후의 탄생’도 있다.
그리고 ‘신(新) 검후의 탄생’에는 연계 퀘스트 ‘백전비무행’, ‘괴한들의 습격’이 존재한다.
퀘스트인 ‘백전비무행’의 참여자는 근력이나 체력, 민첩성, 숙련도, 명성 등 능력치 중 일부가 임의로 소폭 상승하게 된다.
만약 소검후를 상대로 이긴다면 상승률이 달라지게 되는 퀘스트다.
중요한 건 그다음에 연계된 퀘스트 ‘괴한들의 습격’이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을 무찌른다면 특별 퀘스트 ‘축융의 숨결’을 진행할 수 있다.
허나 실패한다면 에피소드 ‘신(新) 검후의 탄생’는 ‘검후의 분노’로 바뀌며, 검후의 복수행이 진행된다.
‘내 예상대로 영웅 속이라면… 소검후에겐 미안하지만…….’
이백은 소검후를 구하기 위해 퀘스트 ‘괴한들의 습격’에 참여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그녈 죽게 만들 생각도 없다.
그가 원하는 건 바로 특별 퀘스트 ‘축융의 숨결’이다.
화신(火神) 축융. 그의 숨결이란 오랜 시간 축적된 극양지기로, 그 기운을 흡수한다면 모든 상처가 회복되고 엄청난 내공을 얻게 된다.
이를 통해 소검후가 새로운 검후로 거듭나는 에피소드다.
물론 소검후가 괴한들의 습격을 막아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이백의 약점은 바로 내공.
축융의 숨결은 그런 그의 약점을 단번에 해결해줄 수 있으니, 마부를 자처하면서까지 동행한 것이다.
‘축융의 숨결은… 내가 가져야겠어.’
* * *
“본파에 방문해주어 영광입니다, 소검후.”
형산파는 수십여 명의 객(客)을 맞이했다.
그들 전원이 소검후의 일행은 아니다.
몇몇을 제외하곤 전부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구경꾼들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형산의 제자들이 그들을 물릴 수는 없었다.
구경꾼이라 칭했지만, 그들 역시 무공을 익힌 무공 고수들이다.
게다가 형산파의 입장에선 소검후의 지목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서 나쁠 게 없으니 오히려 배려해주었다.
형산일검이 형산파 차기 장문으로 내정되었다고 하지만, 무림의 인지도는 낮으니 이 기회에 확실하게 이름을 떨칠 생각이었다.
“부족한 본녀를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시지요, 소검후와 검각의 여러분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두었습니다.”
형산일검의 말에 소검후와 검각의 제자들은 합장(合掌)했다.
검각(劍閣)의 또 다른 이름은 보타암(寶陀庵)이다.
주산군도에 위치한 보타암은 사천의 아미파, 산서의 항산파와 마찬가지로 비구니의 사찰이다.
군도(群島)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크고 작은 섬들이 무리를 짓고 있다.
대부분이 무인도이지만, 개중에는 사람들이 거하기도 한다.
문제는 해안가 민초들을 약탈하려는 해적 무리들이 주산군도를 전초기지로 삼으려 한다는 점이다.
보타암의 비구니들은 민초들을 위해 검을 들었다.
그런 그녀들을 비웃던 해적들은 물고기밥이 되어 천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후 보타암은 검각이라 불리게 되었다.
“아미타불… 대협의 배려에 감사하나 수행자의 몸으로 안락함을 탐할 수는 없지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하, 하하 과연 소검후이시외다.”
형산일검은 일순간 당황했지만,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된 인물답게 빠르게 신색을 회복하며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내색하기에는 상대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
소검후… 아니, 그 뒤에 존재한 검후를 염두에 둔다면 형산일검이 아니라 누구라도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운기행공 후에 비무를 했으면 합니다.”
“…소검후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소.”
형산일검은 불편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행자의 몸이니 연회를 거부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허나 이곳 형산까지 오는 동안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다.
비록 운기행공 후라고 하지만, 형산파에 방문한 당일 백전비무행의 비무를 진행하자고 하니 자신을 무시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오냐, 네년을 꺾고 형산의 검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두에게 알리겠다!’
* * *
“크윽!”
비무가 시작된 지 고작 이다경(二茶頃: 30분)도 채 지나기 전에 형산일검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이다경도 채 지나기 전부터 형산일검이 밀리고 있었다.
상대가 비록 소검후라 할지라도 고작 이립(而立)도 안 된 계집이다.
그렇기에 형산일검은 자신이 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반전의 기회를 노렸다.
형산일검의 검이 은은하게 빛났다.
“백변천환운… 헉!”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협.”
형산일검이 반전을 위해 준비한 검법은 백변천환운무십삼식(百變千幻雲霧十三式).
형산 장문인에게 전수되는 절세검법이다.
그는 고령인 남악검옹을 대신해 형산파를 이끌고 있으니, 백변천환운무십삼식을 익힌 게 이상한 게 아니다.
허나 백변천환운무십삼식을 펼치기도 전에 그의 목에 소검후의 검이 닿았다.
형산일검의 완벽한 패배다.
“어, 어떻게…….”
“형산의 검은 훌륭했습니다. 다만… 대협께선 익숙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다.”
형산일검은 그녀의 말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절정 초입도 아니고 완숙에 오른 자신이 패배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결과이지만, 소검후의 말처럼 아직 숙련되지 않은 백변천환운무십삼식을 무리하게 펼친 게 패배의 요인인 걸 깨달았다.
백변천환운무십삼식은 절세검법답게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고 숙련되지 않은 상태로 임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패배…했소. 내 패배요, 소검후.”
“패배라니요. 본녀가 많이 배웠습니다. 대협.”
승패는 확연했으나 소검후는 승리에 고취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새로운 가르침을 받았다 말했다.
소검후, 다음 대 무림을 이끌 여인다운 모습이었다.
‘회풍낙안검(廻風落雁劍)을 펼쳤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회풍낙안검은 백변천환운무십삼식보다는 못하지만, 형산파의 상승검법이다.
그는 회풍낙안검으로 형산일검의 칭호를 얻었을 정도로 숙련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승패를 바꾸는 건 어렵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이리 후회만 남기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많이 부족하구나. 나…….’
고집 가득했던 형산일검의 눈빛이 맑고 깊어졌다.
아집을 내려놓는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그의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가장 먼저 깨달은 자는 바로 소검후였다.
―모두, 말씀을 자제해주세요. 대협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거 같습니다.
소검후는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형산파와 구경꾼들에게 상황을 전했다.
이에 형산파 고수들은 자연스럽게 형산일검을 포위하며 호법에 섰다.
그 모습을 본 구경꾼들의 눈에 놀라움과 질투 그리고 경이로움이 어렸다.
‘또야? 젠장! 나도 소검후의 검을 받아보고 싶다!’
‘역시 소검후시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 상대가 된 자들은 비무 후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움직임이 더 자연스러워졌거나 기세가 바뀌었거나. 이렇게 깨달음을 얻거나 했다.
이러한 경우를 몇 번이나 봐왔던 구경꾼들은 부러울 수밖에 없다.
애초 그들이 소검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 어쩌면 자신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탓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들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소검후의 백전비무행은 명성을 얻기 위한 의식이 아니라 검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다.
탐욕을 이기지 못한 자들과 어울리기에 그녀는 너무 고귀했다.
검만 뛰어난 게 아니라 기품 있는 몸가짐과 흔히 볼 수 없는 미모.
검후의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청혼을 하자는 자들이 줄을 섰을 것이다.
실제로 구경꾼들 중 일부는 그런 미련을 품고 있을 정도다.
물론 소검후의 곁에는 그녈 지키는 검각의 사저와 사숙이 있는 만큼 허튼수작은 불가능했다.
소검후는 깨달음을 수습하고 있는 형산일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백전비무행을 마쳤을 때, 나도 저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감히 검각의 전통에 의문을 품은 건 아니다.
실제로 무위고하를 떠나 여러 고수, 기인들을 상대하며 공부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다.
그녀를 이긴 상대조차.
‘검모궁이라면 이 갈증을 해소해주려나…….’
소검후는 그 누구와의 비무보다 검모궁과의 비무를 기대하고 있었다.
추구하는 길은 다르지만, 검각과 마찬가지로 검의 길을 걷는 여인들의 집단.
사부인 검후조차 칭찬을 한 검모궁이기에, 소검후는 기대를 품었다.
‘빨리 검을 나눠보고 싶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