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가르침
“우웩!”
치열한 공방이 이어진 후 먼저 쓰러진 인물은 비천편복이었다.
그가 토해낸 검붉은 피 웅덩이에 정체불명의 고깃덩이 조각이 보였다.
비천편복의 내장 기관이 찢기면서 일부가 피와 함께 토해지고 만 것이다.
“회주님을 배신했을 때, 이런 최후를 예상치 못한 게냐.”
“날, 배신한 건 너희이지… 쿨럭… 않…더냐!”
암영의 말에 비천편복은 피 섞인 기침을 하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미 죽어가는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은 전혀 위협되지 않았다.
허나 그의 말을 그냥 무시하기엔 걸리는 점이 있었다.
“무슨 개소리더냐! 본회가 먼저 배신하다니.”
“함, 정을 파지 않았더… 우웩!”
비천편복은 또다시 피를 쏟아냈다.
그의 의미 모를 말에 암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없으나 죽어가는 그가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었다.
“함정이라니? 본회가 너 따위를 위해 함정씩이나 판단 말이더냐.”
“이런 개… 으윽…! 하아… 흑혈도. 모른 척할 생각이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흑혈도와 함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회주님의 지시도 완수하지 못한 주제에 어디서 말도 안 되는 핑계더냐!”
“그럼! 아니란 말이더냐! 그곳에 괴물이 있단 말은… 으윽!”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낸 탓에 부상이 더욱 심각해진 비천편복은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암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다.
“괴물? 대체 무슨 말이냐. 괴물이라니.”
“무슨 괴물이라니 서, 설마 너희도 몰… 커억!”
암영의 되물음에 비천편복은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회광반조(回光返照)로 간신히 유지하던 생명의 불꽃이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죽은 비천편복을 보며 암영은 짜증이 났다.
“괴물이라니… 내가 알아내지 못한 뭔가 있는 건가.”
흑천회주의 눈과 귀라고 불리는 자신이다.
자신이 모르는 게 있어선 아니 된다.
암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죽어가는 와중에 거짓을 말할 리가 없지. 그럼… 괴물이라는 게 있단 뜻이겠지.”
새로운 목적이 생겨난 암영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인적인 드문 산에는 한 구의 시체가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삼대신투에 어울리지 않는 처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 * *
“후우…….”
병석에서 털고 나온 이백은 오랜만에 격렬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온몸이 비명을 질렀으나 그걸 넘어서니 몸이 뜨거워지고, 기운이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굳었던 몸을 완전히 푸니, 이백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몸은 다 풀었소?”
“나오셨습니까, 삼선자님.”
상쾌해진 이백의 귓가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삼선자가 눈에 들어왔다.
허나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육선자와 칠, 팔, 십삼검향 그리고 엽사가 보였다.
약조했던 열흘이 지났다.
검모궁 최고수 중 한 명인 삼선자와 신성(新星)의 수준을 넘어선 이백.
두 사람의 비무는 놓칠 수 없는 일이다.
“다들 궁금해하는 거 같아 함께 왔소. 불편하다면 돌려보내겠소.”
“저는 괜찮습니다.”
천문산장의 식구인 엽사는 자신의 절기를 여러 번 봤다.
나머지 여인들은 검모궁의 제자인 만큼 숨길 필요까지 없다 판단했다.
이백의 대답에 삼선자는 고갤 끄덕였다.
“다들 십장(十丈:30m) 물러나 주게.”
“내상이 진정되었다지만, 봉공께선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삼선자님.”
육선자의 말에 삼선자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녀는 이백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내공은 3성 공력으로 제한하는 게 어떻소?”
“알겠습니다.”
삼선자의 제안을 이백이 받아들였다.
3성 공력으로 진짜 무위를 보일 순 없지만, 어차피 원수를 앞둔 생사결이 아니다.
비무라면 3성 공력으로도 충분하다.
내상을 염두에 뒀을 때, 가장 적절한 수준을 제한한 것이다.
합의가 끝나자 육선자 등이 물러났다.
삼선자는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았다.
허나 이백은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절정의 끝자락과 초절정은 한 걸음 차이지만, 그 한 걸음을 넘어서는 자가 백(百)에 한둘이다.
아무리 대단한 잠재력을 보인 이백이라 하더라도 이 차이를 평생 넘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절정과 초절정의 간극은 컸다.
“오게.”
“갑니다!”
삼선자는 선수를 양보했다.
무림 선배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백은 사양하지 않았다.
10성에 오른 청랑보는 과연 빨랐다.
무림 십대보법에 버금간다는 평이 무색하지 않았다.
단순히 빠르게 다가오는 게 아니었다.
이백의 손은 허공을 찢을 듯 삼선자에게 쇄도했다.
청랑조법의 청랑아(靑狼牙)였다.
그에 삼선자는 한 걸음 물러나며 검집을 휘둘렀다.
퍽!
그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큭!”
“빠름이 전부가 아니오.”
단순한 만큼 빠르고 강력한 청랑아였지만, 삼선자의 단순한 휘두름에 막히고 말았다.
물론 이 정도로 물러날 이백이 아니다.
삼선자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그 순간 이백의 잔영이 둘로, 다시 넷으로, 그리고 열여섯으로 늘어났다.
청랑군운(靑狼群雲).
늑대 떼가 몰아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저돌적인 청랑보법과 다른 움직임이었다.
삼선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퍽! 퍼퍽! 퍽! 퍽!
그녀의 검집이 움직이는 순간, 다수로 늘어난 이백의 잔영이 한둘씩 사라졌다.
이형환위와 같은 고차원적인 무리(武理)가 담긴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하찮은 수법도 아니다.
그저 상대가 삼선자. 초절정의 검객이라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눈속임은 하수에게나 통…….”
“청랑촌열(靑狼寸裂)!”
삼선자는 청랑군운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이백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청랑군운에서 이어진 청랑촌열.
이백의 손이 삼선자를 마구 갈겼다.
방심했다간 갈기갈기 찢겼을지 모를 잔혹한 수법이었다.
허나 삼선자는 방심하지 않은 채 검집을 휘둘렀다.
퍽! 퍼퍽! 퍽!
삼선자는 청랑촌열을 상쇄했다.
청랑군운에 이은 청랑촌열은 결코 가벼운 수법이 아니건만, 삼선자에겐 통하지 않았다.
초절정지경.
평범한 인간은 닿을 수 없는 경지다웠다.
허나 삼선자의 목소리에 허탈함이 역력했다.
“검집이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구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검집에 향했다.
검집에 금이 가 있었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검집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혹은 철로 만든다.
단단하기는 철이 제일이지만, 그 무게 때문에 대부분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다.
삼선자의 경우 검집을 나무로 만들었다.
허나 평범한 나무가 아니다.
철기를 흡수해 강도가 철에 근접한다는 철목(鐵木)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철로 만든 검집보다 훨씬 가볍다.
그런 삼선자의 검집이 부서지기 직전이다.
“이제 본녀도 본격적으로 임해야겠구려.”
검을 뽑자 삼선자의 검집이 부서졌다.
그 순간 강렬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검을 쥔 삼선자의 기세가 달라졌다.
이를 본 이백의 눈빛 역시 바뀌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쿨럭… 쿨럭…….”
이백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연신 나왔다.
게다가 서 있기 힘든지, 몸을 휘청거렸다.
삼선자는 검을 거두며 나직하게 말했다.
“실전 경험이 적다 들었는데, 초식 운영이 능숙하구려.”
의외로 그녀의 입에선 호의적인 말이 나왔다.
그렇다고 한들, 일방적으로 깨진 이백으로선 착잡하기만 했다.
지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한 그를 향해 삼선자가 말을 이었다.
“허나 무위를 내공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게 아깝소.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도 대단하지만…….”
이백의 최대 단점은 바로 내공 수위였다.
만수통령지체 덕분에 나이에 비해 내공이 깊지만, 비슷한 경지에 오른 명숙들에 비해 얕은 게 사실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영약 등의 편법이 아닌 이상 결국 내공심법을 오래 수련한 자가 더 심후한 쌓을 수 있기 마련이니.
“그렇다고 마지막 그 수법. 위험한 순간 구명지초(救命之招)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제 살을 깎을 뿐이오. 그 수법의 수련보다는 내공 수련에 힘을 쓰는 게 좋을 거 같소.”
이백이 이리 엉망이 된 건, 궁지에 몰린 순간 위험한 역혈(逆血)의 수법 혈랑기(血狼氣)를 운용한 탓이다.
공력 제한을 3성으로 두었기에 내상이 도지지는 않았지만, 역혈 자체가 위험한 수법이다.
게다가 체력 역시 상당히 까먹었다.
부족한 내공을 대신하기 위함이었으나 혈랑기(血狼氣)의 운용은 언젠가 이백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그걸 알기에 삼선자는 충고를 해주었다.
애초 혈랑기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청랑왕을 사파(邪派)로 분류하게 만든 힘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아야 한다.
자칫 검모궁에 폐를 끼칠 수 있으니까.
“수고하셨소.”
“…수고, 하셨습니다.”
비무에 이은 조언까지 마친 삼선자는 물러났다.
그러자 이백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는지, 그대로 쓰러졌다.
이에 놀란 교정정이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사부님.”
“나는 되었으니, 봉공을 살펴보거라.”
삼선자는 제자의 얼굴에 깃든 걱정이 누굴 향하는지 알았다.
그렇다고 서운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자리를 떠나자, 교정정은 이백을 살폈다.
“괘, 괜찮으… 괜찮으실 리 없겠죠.”
“걱, 정하실 정도는, 후우… 아닙니다.”
혈랑기를 운용한 탓인지, 이백은 들끓는 내공을 진정시키느라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얼굴 역시 살짝 창백했으나 심각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삼선자가 손속에 사정을 둔 덕분에 겉보기와 달리 이백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육선자 등이 다가왔다.
“봉공, 진맥하겠어요.”
“…부탁, 드리겠습니다.”
육선자의 말에 교정정은 그의 곁을 양보했다.
그녀는 진맥하는 육선자의 표정을 살폈다.
이백을 진맥하는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진맥을 마친 육선자가 입을 열었다.
“내상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내기의 흐름이 안정적이지 않아요. 삼선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지막 수법이 문제인 거 같아요.”
“…….”
이백 역시 예상하던 일이기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혈랑기가 위험하다는 건, 몸으로 직접 겪어봤으니 모를 수 없다.
다만 위험한 만큼 위력적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니, 포기하지 못했을 뿐이다.
“탕약을 복용하시면 진정될 거예요. 그렇다고 탕약만 믿고 그 기운을 남용하시면 안 돼요. 탕약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명심, 하겠습니다.”
약도 자주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 언젠가 통하지 않게 될 수 있다.
그러니 육선자의 탕약만 믿고 방심하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엽사가 끼어들었다.
“백수 아우는 제가 업겠소.”
“그리하시지요.”
이백은 지칠 대로 지쳐 당장 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백은 엽사의 등에 업혔다.
‘혈랑기를 봉인하면, 내공을 증진하는 방법뿐인데…….’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