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재회(再會) (2)
“이제 무리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 같네요.”
“감사합니다. 육선자님.”
육선자의 탕약 덕분인지, 이백의 내상은 빠르게 진정되었다.
칠검향의 의술도 뛰어나지만, 아직 육선자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의각주답게 상질의 환단도 사용할 수 있었다.
흔한 약초의 배합을 통해 효율적인 약효를 내는 초의맥이라고 상질의 약초를 다루지 않는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육선자는 상위의 환단도 여럿 보유하고 있었다.
“5년 만인가요. 많이 강해지셨군요.”
“아직… 멀었습니다. 육선자님.”
고작 5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백은 몰라보게 강해졌다.
검모궁의 중진인 육선자를 넘어섰을 정도다.
비록 내상을 입었다고 하지만, 의원답게 이백의 경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허나 정작 이백은 만족스럽지 않은 듯싶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소협 아니, 봉공의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자는 무림에도 없을 겁니다.”
“…약조를 지키기에는 아직, 부족한 거 같습니다.”
이백이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 건 그리고 천문산장의 일원이 된 건 5년 전의 목숨 빚을 갚기 위함이다.
그런데 목숨 빚을 갚긴커녕 또다시 빚을 지게 되었으니, 이백으로서는 면목이 없는지 고갤 들지 못했다.
“부족하다니요. 본궁의 제자들이 들으면 창피해서 고갤 들지 못할 겁니다. 안 그러느냐, 효령아.”
“사, 사부님!”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칠검향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검향임에도 무공 욕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사부인 육선자의 말에 오히려 민망해졌기 때문이다.
5년이 지났음에도 육선자의 장난기는 여전한 듯했다.
“네가 내 제자이지만, 차기 선자이기도 하다. 최소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있어야 해. 그러니 검술 수련도 소홀하지 말거라.”
“예… 사부님.”
칠검향은 검술보다 의술에 힘쓰는 편이었다.
차기 의각주인 만큼 그녀가 의술에 집중하는 게 흠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검모궁의 차기 선자(仙子)인 만큼 검술도 소홀해선 안 된다.
외부의 제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하산하거나 약초 채집을 위해 궁을 벗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녀가 해를 입는다면 체면도 체면이지만, 검모궁의 의맥(醫脈)이 흔들리게 된다.
그건 칠검향 역시 알고 있었다.
“참, 봉공님. 정정이도 왔어요.”
“팔검향께서 말입니까.”
이백과 연을 맺은 사람은 육선자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 직접적인 연을 맺은 인물은 팔검향 교정정이다.
그녀가 위험에 빠졌다고 오해해서 나섰다가 되려 이백이 죽을 뻔했으니 말이다.
“깜짝 놀라실 거예요. 정정이도 많이 성장했으니까요.”
“축하드릴 일이군요.”
성장이라는 말에 이백은 순수하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허나 정작 말한 육선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특히 입꼬리가 올라간 게 장난기가 다분해 보였다.
그녀가 언급한 성장에는 무공의 성취만이 아니었다.
다만 이백은 육선자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예, 팔검향께도 인사를 드려야지요.”
당연하다는 이백의 반응에 육선자는 제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칠검향이 밖으로 나갔다.
곧 다시 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은 낯익었다.
“오, 랜만에 뵙네요. 봉공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팔검향님.”
과거 임무를 위해 간판 기녀 월향을 연기할 정도로 팔검향은 미색이 뛰어났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사내라면 그녀의 미색에 멍해질 정도다.
그 사내가 이백이 아니라면 말이다.
현재 그의 머릿속에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차 그 외의 것은 들어오지 못한 탓이다.
“예… 저는… 어, 잘 지냈어요.”
“다행입니다.”
교정정은 그녀답지 않게 당황했다.
그녈 잘 아는 검모궁의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특히 삼선자는 제자의 색다른 반응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답지 않게 먼저 말을 걸었다.
“삼선자라 하오. 산장의 봉공이시오?”
“처음 뵙겠습니다. 백수라 합니다.”
이백은 그녈 본 순간 예리한 한 자루의 검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느낌은 다르지만, 이런 기분이 든 게 처음은 아니다.
‘총관 어른과 숙수님도 그랬지. 그럼 역시… 이분도…….’
천문산장의 일원이 된 이후 이백은 무위만이 아니라 무학의 이치 역시 깊어졌다.
그럴 때마다 그의 눈이 달라졌다.
그러다 수개월 전, 절정의 끝자락에 닿았을 때 이백은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다.
고풍적이지만 강인한 검과 혈향 자욱한 칼이었다.
두 사람과 다른 천문산장 식구들의 차이는 바로 경지.
천문산장에서 가장 강하다는 두 사람은 무려 초절정지경에 오른 강자들이다.
즉, 눈앞의 여인. 삼선자 역시 그들 못지않은 경지에 올랐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놀랍소. 정정이의 재능이라면 삼신룡(三神龍)과 비견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하다니, 역시 천하는 넓구려.”
“과찬이십니다.”
정파무림의 미래라는 후기지수 중에서도 격이 다른 재능을 드러내며 신성(新星)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구룡삼봉(九龍三鳳).
이립(而立) 이전에 절정지경에 오른 그들이야말로 다음 대 정파무림을 이끌 재목들이다.
그런 구룡삼봉 중에서도 수위에 있는 자들이 바로 삼신룡이다.
소림의 태룡(太龍), 무당의 신룡(神龍) 그리고 남궁세가의 천룡(天龍).
무려 이십 대 중반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당대 무림을 영도하는 무림십왕과 비교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남궁세가는 수십 년 전, 천하제일가의 칭호를 사천당가에게 뺏겼다.
그들의 자존심을 되찾아줄 인재가 바로 천룡이다.
그런 삼신룡의 재능에 비견된다니, 차기 검모(劍母) 후보다웠다.
허나 삼선자는 그런 교정정보다 이백이 더하다 단언했다.
“겸손이 과하면 오히려 욕이 될 수 있소.”
“…….”
겸손이 미덕이라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삼신룡조차 넘어선 재능이라면 겸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십 대 중반에 절정에 오른 교정정만 해도 검모궁의 역대급 재능이다.
그보다 어린 나이로 절정만이 아니라 이미 끝자락에 닿았다면 말을 다 했다.
“그럼에도 조급함을 버리지 못하는 거 같소.”
“…천하는 후기지수만 존재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백은 한 세대 위인 무림 명숙들을 자신의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오만하다 생각할 수 있으나 절정의 끝자락에 닿은 그라면 자격이 충분하다.
삼선자는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오. …그럼 나와 겨뤄보지 않겠소?”
“사부님!”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교정정이 자신도 모르게 사부를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럼에도 삼선자는 이백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교정정이 육선자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육선자 역시 삼선자의 발언이 과하다 여겼는지 끼어들었다.
“삼선자님, 봉공께서 아직 완쾌된 게 아닙니다.”
“난 당장이라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하 부인이 거동할 수 있을 때까지 시일이 필요하다 들었소. 그러니 시간은 충분하오.”
삼선자의 설명에 육선자는 입을 다물었다.
삼선자는 이백을 바라봤다.
“그리고 난 그대에게 제안을 한 것이오. 거절해도 상관없소.”
“오히려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강자와의 비무.
이백이 목말라하던 일이다.
오히려 삼선자가 먼저 제안해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육선자를 바라봤다.
“육선자, 얼마나 걸릴 거 같소?”
“…열흘 정도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할 거 같습니다.”
심각한 내상은 아닐지라도, 기혈이 틀어질 정도라면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고작 열흘 만에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육선자의 의술도 평범치 않다는 뜻이다.
물론 상질의 내상약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열흘. 기대되는구려.”
* * *
“제, 젠장!”
누군가 허공을 갈랐다.
그 모습이 한 마리의 새를 연상케 하는 빠름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선 연신 거친 욕설이 나왔다.
그때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 쇄도했다.
훅! 후훅!
그는 한 번에 십장(十丈: 30m)씩 뛰어넘을 정도로 경공이 뛰어났다.
허나 곤륜의 운룡대팔식이나 전설의 허공답보, 천상제처럼 허공에서 방향을 마음대로 바꿀 정도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아직 땅에 착지하지 못한 상황.
쇄도하는 것들을 피하긴 불가능했다.
그때였다.
비수들이 사내를 뚫고 지나갔다.
이를 본 복면인은 기뻐하긴커녕 이를 악물었다.
“발보…등공(拔步登空)이라.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 비천편복이지.”
도망치는 인물은 편복당주 비천편복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방향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초상승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제 발등을 밟고 더 높이 뛰쳐 오르는 발보등공을 익혔다.
삼대신투에 이름을 걸 정도의 초상승 경공이었다.
“허나 이 암영에게서 도망칠 수 없지!”
그를 쫓는 복면인은 흑천회 암귀의 한 명인 암영이었다.
흑천회주의 눈과 귀라 불리는 자로, 은신과 비수를 잘 다루며 무엇보다 경공이 뛰어났다.
그러니 비천편복조차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다.
암영이 움직였다는 건, 비천편복의 소행이 흑천회주의 귀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암영과 비천편복, 두 사람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암영이 새로운 비수를 쥐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느려졌지만, 쥐고 있는 비수는 흐릿해졌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거리는 더 벌어졌다.
그럼에도 암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갔다.
푹!
“큭!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어느새…….”
비천편복의 옆구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부상에 그의 움직임에 둔해졌다.
그러는 사이 암영이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심장을 노렸는데, 피하다니 과연 비천복편답군.”
“젠장! 귀신 새끼…….”
비천편복은 암영을 보곤 얼굴을 구겼다.
치명상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 암영을 상대로 도망치는 건 무리였다.
결국 생각을 바꾸었는지 주먹을 쥐었다.
그걸 본 암영이 히죽거렸다.
“비천신권(飛天神拳)을 보여줄 생각인가?”
“염병… 알고 있었군.”
암영은 비천편복의 기수식만 보고 그 정체를 알아봤다.
애초 비천편복의 비밀을 알기에 기수식을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암영은 나직하게 말했다.
“모를 수가 있나. 비천문(飛天門)의 마지막 후예인데…….”
“그럼 네놈이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것 역시 알겠군.”
신투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중후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비천문의 비천신공이었다.
무림에서 그 흔적이 사라진 지 수십 년이 되었으나 노강호들은 기억하고 있다.
비천신군(飛天神君)의 전설을 말이다.
그런 비천신군도 수십 년 전, 비명횡사(非命橫死)하게 되었다.
그 후 비천문 역시 불의의 사고로 무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비천신군의 신공을 익혔다면 비천편복의 자신감도 허세가 아닐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비천편복이 주먹을 뻗는 순간, 강렬한 권기가 날아갔다.
쾅!!
비천신권의 권기가 폭발했다.
“신권(神拳)이라 칭하긴 부족하지 않겠나?”
“어, 어떻게…….”
비천신권의 권기에 적중했음에도 암영은 멀쩡했다.
오히려 그의 손이 흐릿한 걸 본 비천편복이 말을 더듬었다.
“애초 비천신군의 신공이 완벽하게 전해졌다면, 도둑질 따위나 하고 있지 않겠지.”
“설마… 네놈 유령…….”
비천편복의 말이 끝나기 전에 암영이 움직였다.
움찔한 비천편복은 피하긴 늦었다 판단했는지 다시 비천신권을 펼쳤다.
쾅!!
비천편복은 폭발과 함께 충격에 의해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의 반대편에 암영이 서 있었다.
“누가 유산을 더 많이 얻었는지 보자고…….”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