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재회(再會) (1)
후욱!
검붉은 핏빛이 허공을 베었다.
혈랑인(血狼刃).
역혈(逆血)을 통해 청랑조법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수법이다.
대신 살기 역시 강해져 냉철함을 잃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창시자인 청랑왕조차 웬만해서 펼치지 않았던 수법이었다.
이백은 혈랑인을 펼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손을 휘둘렀다.
후욱~! 훅! 훅!
한 걸음 나서자 혈광(血光)이 허공을 할퀴었다.
두 걸음을 나섰을 때, 혈광이 허공을 두 번 할퀴었다.
세 걸음, 네 걸음… 허공을 할퀴는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마지막 일곱 걸음을 나섰을 때, 무수히 많은 조영(爪影)이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칠보만륙(七步萬戮).
청랑조법의 초식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수법이다.
혈랑인, 칠보만륙.
그간 이백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에 갖던 수법들이었음에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수,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그는 엽사였다.
목소리만 아니라 표정 역시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런 것이 최근 이백이 초췌해 보였다.
잠도 줄여가며 수련에 몰두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무엇보다 역혈이라는 위험한 수법을 수련하니. 심신이 피폐해지는 게 당연했다.
엽사의 걱정 어린 말에 이백에게서 혈광과 함께 섬뜩했던 살기가 사그라졌다.
위험한 수법을 수련했으나 다행히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 생각하면 좀 쉬게. 그러다 쓰러지겠네.”
엽사의 말에 이백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백이 이렇게까지 수련에 몰두하는 이유가 있다.
천문산장의 일원이 되고 5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백은 강해질 수 있었다.
생명의 은인인 검모궁의 육선자와 팔검향에게 목숨 빚을 갚기 위해 피나는 노력한 덕분이다.
그렇기에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흑천회의 암도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엽사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그날 목숨을 잃었을지 모른다.
물론 암도는 그만한 강자였다. 흑혈도를 쥔 암도는 초절정고수조차 꺼릴 상대였으니까.
하지만 이백은 그걸 핑계 삼아 위안 삼고 싶지 않았다.
암도에 밀린 것으로 부족해, 며칠 전에는 무방비하게 당할 뻔하기까지 했다.
흑천회의 고수로 추정되는 인물.
흑혈도의 회수가 목적이라 생각하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잃을 수 있던 상황이다.
설군이 아니었다면… 정말 아찔하다.
그러한 상황을 연이어 겪은 이백으로서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책만 생겨났다.
‘너무 자만했어.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고수가 얼마든지 있는데…….’
천문산장만 해도 자신보다 강한 고수가 있다.
하물며 중원 천하에는 강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럼에도 자만한 자신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러한 생각이 이백을 채찍질했다.
잠을 줄여가며, 평소 꺼리던 수법까지 익히는 이유였다.
그때 이백에게서 진한 혈광이 흘러나왔다.
“혈랑… 윽!”
“배, 백수! 자네 괜찮나!”
혈광이 사그라지며 이백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돌아가려던 엽사는 그의 신음에 깜짝 놀라 달려왔다.
혈랑겁(血狼劫).
순혈과 역혈을 충돌시켜 위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수법이다.
역혈만으로도 위험한데, 순혈(順血)과 충돌시키니 위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하지만 그만큼 기운을 제어하기 어렵다.
자칫 통제를 벗어나 혈맥을 망가뜨려 내상으로 번지게 만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수법이다.
“괜…찮… 우웩!”
“젠장! 괜찮긴 뭐가 괜찮나!!”
결국 내상을 입었는지, 이백이 토혈(吐血)하고 말았다.
애초 혈랑겁은 동귀어진(同歸於盡) 내지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러니 펼치지 않는 게 최선이라 할 수 있다.
엽사는 호통을 치곤 그를 들쳐 안았다.
치료의 때를 놓치면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칠검향에게 향했다.
‘아직 젊은 녀석이 뭐가 그리도 급하다고!’
엽사는 몹시 짜증이 났다.
그에게, 천문산장 식구들에게 이백은 막내일 뿐만 아니라 조카이자 손자였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수련하는 이백이 대견스러웠다.
허나 몸까지 상해가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이건 고생이 아니라 학대였다.
‘하… 미안하구나. 널 도와줄 힘이 없어서…….’
이백의 전신에 수십 개의 침이 꽂혔다.
칠검향의 솜씨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제 할 일을 마친 칠검향이 밖으로 나오자 엽사가 물었다.
“녀석은 어떻소, 칠검향.”
“뒤틀린 혈맥은 간신히 잡았어요. 다만 완전히 회복하려면 며칠 걸릴 거 같아요. 대체 어찌 된 거죠?”
칠검향은 본초학만이 아니라 침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가 이은 초의맥(草醫脈)은 본초학이 주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침술이 어설픈 건 아니다.
오히려 약효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침술 역시 발달 돼 있었다.
평소 소심한 성격이지만, 침을 쥐었을 때는 그 누구보다 냉철하고 과감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침술은 웬만한 의원보다 낫다는 평을 받고 있다.
10년 안에 의각을 맡아도 될 거란 평가를 괜히 받는 게 아니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소. 다만 좀 위험한 수법을 수련하는 거 같구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수련하시기에 몸까지 상해가며 수련을 하시는 건가요!”
무인이기 앞서 의원으로서 칠검향은 제 몸을 아끼지 않는 이백에게 화가 났다.
엽사는 제 잘못이 아니었으나 반박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가 한 명이 아닌가 보구나. 효령아.”
“어? 사, 사부님!”
칠검향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중년 미부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런 칠검향을 토닥이며 중년 미부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 큰 처자가 이리도 눈물이 많아 어쩌누?”
“헤헤~ 사부님!”
중년 미부의 정체는 검모궁의 육선자였다.
고작 두어 달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허나 그녀들의 관계는 단순히 사제지간으로만 볼 수 없다.
검모궁의 선자(仙子)로 혼례를 치르지 않은 육선자.
어려서 부모를 잃은 채, 검모궁에 입궁한 칠검향.
피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녀들은 모녀와 같다.
이리도 애틋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효령아, 인사드리거라. 삼선자께서 함께 오셨다.”
“헉! 치, 칠검향이 사, 삼선자께 인사드립니다.”
삼선자는 칠검향에게 사고(師姑)다.
허나 이리도 당황하는 건 삼선자가 사고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는 여덟 명의 선자 중에서도 가장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다.
열세 명의 검향은 여덟 선자의 직계인 만큼 제법 왕래가 있는 편이다.
다만 유일한 예외가 바로 삼선자다.
검모궁주의 부름이 아니라면 궁내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니,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가뜩이나 소심한 칠검향에겐 어려운 존재인 게 당연하다.
“예가 과하구나.”
“죄, 죄송합니다!”
주눅이 든 칠검향을 봤으나 삼선자는 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제자를 보며 육선자는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엽사에게 인사를 했다.
“봉공님, 오랜만에 뵙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육선자님.”
천문산장의 재정을 담당하는 엽사이다 보니 선자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육선자와 초면인 건 아니었다.
물론 모든 선자들과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엽사는 삼선자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삼선자이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엽사라 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본궁의 삼선자를 맡고 있습니다.”
궁내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삼선자이니, 천문산장의 봉공인 엽사조차 초면이었다.
초면이지만, 그녀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기에 이런 반응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다시 어색해지지 않게 육선자가 끼어들었다.
“이곳의 주인께 인사드려야 할 거 같은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대인께서 등청하셔서 안 계세요. 사부님. 대신 부인께 안내할게요.”
칠검향을 따라 육선자와 삼선자가 움직였다.
그 뒤를 5년 사이에 미모가 더욱 물오른 팔검향 교정정이 따랐다.
발은 칠검향의 뒤를 따랐으나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곳에 이 소협께서 계신다고 했지?’
* * *
“커억!”
한 자루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핏방울이 비산했다.
그는 변명도 못 한 채 절명하고 말았다.
검객은 그런 그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 앞에 한 사내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내의 귓가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치는.”
“…….”
눈앞에서 상관의 죽음을 본 사내는 검객의 싸늘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검객이 검을 늘어트렸다.
“조치는.”
“헉! 차, 참의(參議)를 자살로 위장한 후, 모든 것을 그의 소행으로 마, 맞춰놨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내는 급히 보고했다.
강소성 병조의 이인자 참의.
중앙의 병부상서에게 가짜 의천검을 바치고 승승장구했던 인물이다.
허나 모든 게 들통나자 병부상서의 분노가 두려워 자살하고 말았다.
…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사주했던 흑천회의 꼬리 자르기에 불과했다.
흑천회 강소 지부의 조치가 나쁘지 않았는지 검객이 검을 거두었다.
허나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원인은.”
“화, 확실하진 않으나…….”
사내의 말에 검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사내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벼, 병부상서의 저(邸)에 방문했던 인물이 의, 의천검을 보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벌어진 일이라 합니다!”
“그자의 신상은.”
하필이면 천 년 전에 존재했던 의천검의 진위 여부를 알아본 자가 병부상서를 찾아갔다니.
재수가 없어도 너무 재수가 없다.
단순히 재수가 없었다고 단정을 짓기에 검객은 의심이 많은 자였다.
허나 이곳은 강소성.
황도의 일을 빠르게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거리를 생각했을 때, 여기까지 알아낸 것도 대단한 일이다.
문제는 검객이 만족하냐는 점이다.
“거,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검객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사내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런 걱정과 달리 검객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거두었다.
“마음 같아선 모두 죽이고 싶지만… 암상(暗商)의 당부가 있으니 살려주마. 빠르게 정상화시켜라.”
“가, 감사합니다!”
암귀의 일원이자 비밀 상단 등을 관리하는 암상을 언급한 검객.
그 역시 암귀의 일원인 암검(暗劍)이었다.
보통 이런 임무는 암상이 직접 움직인다.
허나 하필이면 여러 지부에서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암상을 대신해 다른 암귀들이 움직이게 된 것이다.
단호한 손속으로 아랫것들을 관리하는 흑천회이지만, 관리자급을 모두 죽이면 예하 지부들의 관리가 힘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책임자인 지부장만 정리하고, 대신할 자는 살려두라는 암상의 당부를 따라 주었다.
덕분에 강소 총지부를 맡고 있는 적사회(赤蛇會)의 이인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누군지 재수 없군. 암상 놈을 빡치게 했으니, 쉽게 뒈지지는 못할 거야.”
우연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노린 것인지, 암상의 관할에서만 문제가 터졌다.
이번 일로 흑천회주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했다.
흑천회주가 아끼는 암상이기에 즉결 처분을 받지 않았으나 그로서는 속이 뒤집혔다.
눈이 뒤집힌 채로 황도로 간 상황이다.
결코 쉽게 넘어갈 리 없다.
이러한 혼란 덕분에 흑천회의 눈이 호남에서 잠시 멀어지게 되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