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악연(惡緣) (3)
‘숨길 생각이 없군.’
이백 일행은 옥사에 숨겨진 통로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통로의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동정상단을 잿더미로 만들고 검모궁의 제자를 납치한 자는, 이미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싶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는 듯 자신의 존재감을 마구 드러내고 있었다.
후우욱!
이백이 통로를 벗어나기 무섭게 무언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뒤에는 엽사와 삼검향이 있기에 피할 수 없었다.
이백은 오히려 파공음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공을 가르는 칼날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이백은 오히려 손을 뻗었다.
손과 칼이 충돌했으나 예상치 못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챙~!
“으음…….”
“괜찮나, 백수!”
이백의 입에서 신음이 나온 걸 들은 엽사가 다급히 되물었다.
그의 물음에 이백은 괜찮다는 듯 고갤 끄떡였다.
허나 사내, 암도는 오히려 흥미로워했다.
“그 와중에 도면(刀面)을 밀쳐낼 생각을 하다니, 애송이가 제법이야.”
아무리 동료들 때문이라지만, 날아오는 칼을 피하지 않고 쳐낸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배짱 역시 두둑해야 가능한 일이다.
찰나의 멈칫거림으로 자칫 손이 베일 수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이백은 손이 베이지 않았다.
허나 도면을 밀치는 순간, 예상치 못한 반탄력에 이백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그저 빠르기만 한 도격이 아니었단 걸 의미한다.
삼검향은 암도 너머에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하 부인! …윽!”
“어이, 내가 보이지 않나?”
삼검향은 하연주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암도의 칼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삼인을 앞두고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듯 보였다.
실제로 단순한 칼질이었음에도 절정고수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잠깐 주춤했다고 하지만 쉽게 기가 꺾일 삼검향이 아니었다.
“왜 이리도 잔혹한 짓을 벌인 것이더냐!”
“흥! 본회를 건드렸을 때, 이 정도도 예상치 못했나. 검모궁의 잡년들아.”
“……!!”
암도의 말에 삼검향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암도의 입에서 본회(本會)라 칭했다.
무림에는 수없이 많은 집단이 존재했고, 그중 회(會)의 형태를 띤 집단 역시 많았다.
허나 이 순간 떠오르는 곳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삼검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외쳤다.
“흑…천회!”
“…같은 암귀(暗鬼)라는 게 수치스럽지만, 암권 그놈의 복수는 해줘야 하지 않겠나.”
암권(暗拳). 5년 전, 이백을 죽음의 문턱까지 보냈던 흑천회의 고수다.
동시에 하연주 모녀의 원수이기도 하다.
당시 검모궁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건만, 흑천회는 결국 범인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복수를 준비했다니, 그 집요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암귀 중 도객은 단 한 명.
그의 정체를 깨달은 엽사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암도(暗刀)겠군.”
“그럼 이곳이 너희의 무덤이란 것도 알겠군.”
암도는 생사여탈을 쥔 것마냥 자신했다.
흑천회주의 직속으로, 그의 비밀스러운 명령을 수행하는 어둠의 귀신들(暗鬼).
암도는 오만할 정도의 힘을 가진 자다.
그때 이백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자의 동료란 말이지…. 삼검향. 가십시오. 이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이, 이보게, 백수…….”
자주 산장을 비웠다고 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시간을 이백과 함께 지낸 엽사였다.
그가 아는 이백은 결코 자만하는 성격이 아니다.
암도는 흑천회의 암귀 중에서도 두 번째로 강자로 알려졌다.
그런 그를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천문산장에서도 몇 되지 않는다.
이백이 천문산장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으나 암도를 홀로 상대하는 건 무리다.
엽사는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그 전에 암도의 칼이 움직였다.
“어차피 죽을 걸, 객기라도 부리겠단 말이지!”
후웅!
조금 전까지와는 격이 다른 섬뜩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그의 칼은 어두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백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 손을 뻗었다.
쾅!
강력한 도기가 어린 암도의 칼과 충돌했음에도 이백의 손은 의외로 멀쩡했다.
그의 손에 암도의 어두운 도기(刀氣)와 상반된 새하얀 빛이 어려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밀리지도 않았다.
“네 상대는 바로 나라고 했다.”
“이익! 애송이 놈이!”
이백의 도발 아닌 도발에 암도는 발끈하고 말았다.
애초 암도는 이백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저들 전원을 모두 상대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허나 정작 이백 한 명에게 자신의 도격이 막히자,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엽사는 놀란 듯 말했다.
“상대가 되잖아?”
“…….”
우려와 달리 이백은 허세가 아니라 정말 암도를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
지난 5년간 천문산장 식구들을 상대로 실전에 버금가는 비무를 해왔다.
그의 빠른 성장을 직접 봤다.
허나 비무는 결국 비무.
실전은 이번에 처음이다.
그럼에도 이백은 침착하게 암도를 상대하고 있었다.
엽사는 암도를 상대로 잘 버텨내는 이백을 보며 고갤 가볍게 끄덕였다.
“그를 믿어 봅시다, 삼검향. 여차하면 내가 도울 테니…….”
엽사는 궁객(弓客)이기에 먼 거리서 저격하거나 후방 지원에 적합하지, 접근전에는 불리하다.
그러니 암도를 직접 상대하는 건 버겁지만, 유사시 이백을 보조하는 건 오히려 그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는 일이다.
삼검향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으나 엽사의 제안에 반박하지 않았다.
허나 그녀는 이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팔사매의 재능이 제일인 줄 알았는데… 저자는 정말…….’
강한 것만 본다면 열셋의 검향 중에서도 일이검향이 더 낫지만, 재능만 본다면 팔검향 교정정이 제일이다.
검 이외에는 관심이 없던 삼선자가 그녈 제자로 삼았다는 게 증거다.
실제로 이십 대 중반에 불과함에도 이미 절정의 문을 두들기고 있다.
이번 임무에 제외된 이유도,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인 탓이었다.
그런데 이백은 그런 교정정의 재능조차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녀보다 더 어림에도 절정지경.
초입도 아니고 최소 완숙의 경지로 보였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검모(劍母)를 꿈꾸는 삼검향으로서는 그의 재능에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삼검향은 질투를 뒤로하고 하연주를 구하러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이백은 암도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쾅! 콰쾅!
손과 칼이 충돌할 때마다 폭음과 함께 강렬한 충격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지하 옥사가 흔들리고, 천장에서 가루가 떨어졌다.
이곳은 지하였다.
자칫 무너질지 모른다는 의미다.
정작 이백과 암도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차 하는 사이 당할 수 있으니,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애송아!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
이백이 암도의 발을 묶고 있지만, 싸움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공격하는 암도의 도격을 상대로 이백은 막거나 피하기만 한 탓이다.
그렇다고 이백이 겁을 먹은 건 아니다.
적의 강함을 인정하기에 오히려 냉정히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암도의 칼에서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흑무광풍(黑霧狂風)!”
흑혈도에서 흘러나온 어두운 안개가 이백을 향해 몰아쳤다.
이백은 본능적으로 흑무에 닿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마냥 피하기엔 흑무의 범위가 넓었다.
이백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내공을 담아 외쳤다.
“산(散)!”
“큭!”
그 순간, 누군가의 신음과 함께 흑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호통이 아니다.
청랑후(靑狼吼).
늑대 군단을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위한 공부로, 백수조련술이 6성에 올랐을 때 익힐 수 있었다.
음공(音功)의 일종이기에 적을 일시적으로 흔들 수 있다.
다만 소림의 사자후처럼 복마의 효용이 있거나 적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의 힘은 없다.
그래서인지 암도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이 개 같은 새…….”
“청랑아(靑狼牙)!”
이백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이 흡사 먹잇감을 발견한 늑대가 목을 물어뜯듯 빠르면서 강렬하게 움직였다.
다만 이백이 익힌 내공심법이 청랑신공이 아닌 만수통령신공이기에 새하얀 늑대(白狼)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암도도 당할 수밖에 없다.
콰아앙~!
이백의 손은 암도의 몸에 닿지 못했다.
직전에 암도가 흑혈도를 들어서 막은 탓이다.
명도(名刀)라도 청랑아의 위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텐데, 흑혈도는 멀쩡했다.
“뒈질 뻔했네.”
“현철(玄鐵)?”
흑색의 철은 몇몇 존재하지만, 그중 가장 단단하다고 알려진 건 바로 현철이다.
단단하면서도 무거워, 주로 칼이나 도끼를 만들 때 사용한다.
다만 워낙 귀한 철이기에 쉽게 구할 수 없고, 제련할 수 있는 대장장이도 흔치 않다.
대신 현철이 소량만 섞어도 명도(名刀)나 보도(寶刀)가 탄생시키는 희귀한 금속이다.
“흐흐흐… 오철이지, 대신 통째로 제련했지.”
“…….”
암도의 말에 이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철(烏鐵)은 현철보다 단단함이 약간 떨어지지만 대신 가볍다.
그렇기에 도객 중에는 현철보다 오철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오철 역시 구하기 쉽지 않은 만큼 칼 한 자루를 통째로 오철로 제련했다는 건 어렵다.
그 어려운 일임에도 탄생한 게 흑혈도다.
보도(寶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뜩이나 강한 암도가 흑혈이라는 보도를 쥐고 있으니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
찌릿!
[내공이 미량 감소했습니다.]
“음? 내공이…….”
“그걸 느껴? 새끼, 예민한 놈이군.”
암도는 이백을 보며 히죽거렸다.
반투명한 창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그러니 지장은 없으나 피해가 누적된다면 말이 다르다.
“사술(邪術)?”
“흐흐… 곧 죽을 놈이 알아서 뭐하게!”
암도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어떤 수법으로 내공을 감소시켰는지 모르는 탓에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
이백은 어쩔 수 없이 피할 수밖에 없었다.
“흐흐… 피하시겠다? 언제까지 가능할 거 같아!”
흑혈도가 이백을 향해 쇄도했다.
후욱! 후욱! 후우욱!
찌르고 베며 이백을 압박했다.
이백은 10성의 청랑보만으로 암도의 공격을 피했다.
일절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청랑보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암도의 보법도 마냥 떨어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보법 고수도 상대한 경험이 많은지, 이백의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압박해갔다.
“잡았다!”
“젠장!”
어느새 이백은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피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흑무를 뿜어내는 암도의 칼이 이백에게 쇄도했다.
피융~!
챙!
무언가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이백을 향하던 칼이 도로(刀路)를 벗어나 무언가를 베었다.
서걱!
“화살?”
“아우만 괴롭히지 말라고.”
화살을 쏜 자는 엽사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화살 몇 발이 암도에게 향했다.
암도는 짜증을 내며 칼을 휘둘렀다.
서걱! 서석! 서석!
화살을 베는 건 어렵지 않으나 매우 성가신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었다.
“젠장!”
이백은 엽사가 벌어준 시간을 놓치지 않고, 궁지에서 벗어났다.
그가 벗어나는 걸 본 엽사가 화살 세 개를 한 번에 시위에 걸었다.
“이거나 먹어라!”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