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악연(惡緣) (2)
“오랜만구나, 설하야.”
이마에 주름이 진 초로의 사내는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설하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윤 대인님.”
“대인은 무슨, 예전처럼 숙부라 부르거라. 5년 만인가?”
“6년입니다. 숙부님.”
“허허… 그리되었나. 그 친구가 먼저 간 지가…….”
그의 눈빛에 그리움이 묻어났다.
윤 대인, 윤겸은 설하의 선친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던 인물로, 어린 시절에는 양가의 왕래가 잦았다.
허나 설 대인이 죽은 이후 그녀가 검모궁의 제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왕래가 끊기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6년만인 셈이다.
“…….”
“제수씨는 잘 계시느냐. …상단에 계신다는 이야기는 들은 거 같구나.”
그들 모녀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닌 듯 윤겸은 하연주의 근황을 알고 있었다.
직접 나서지 못했을 뿐, 관심마저 거둔 건 아닌 듯싶었다.
어미에 대해 묻는 그를 보며 설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그녈 보며 윤겸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는지,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동정상단이 잿더미가 된 걸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
말하는 설하는 담담했지만, 그걸 들은 윤겸은 아니었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전혀 몰랐는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제수씨는, 제수씨는 무사하시더냐!”
“…행방불명입니다.”
“그, 그런…….”
설하의 말에 윤겸은 망연자실했다.
그간 공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게 이리도 천추의 한으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한 탓이다.
그런 그를 향해 설하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머니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그 흔적이 관아로 연결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마… 관(官)에서 벌인 짓이라 생각하더냐! 그럴 리가 없다! 어찌 관에서 그런 짓을 벌인단 말이더냐!”
윤겸은 부정했다.
그도 그런 것이 그 역시 관리였다. 무엇보다 호남의 형옥을 총괄하는 제형안찰사사 소속이다.
상단을 상대로 관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자신이 모를 수가 없다.
“흔적이 관아로 연결되었다 했지, 관이 개입했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숙부님.”
“그게 무슨 말이더냐. 자세히 말해 보거라.”
윤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제형안찰사사의 하위 부서인 안찰분사도(按察分司道)의 안찰첨사(按察僉司)다.
정5품에 해당되는데, 업무 특성상 한두 품계 이상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
다만 그의 감찰 구역이 장사가 아닌 탓에 동정상단의 일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윤겸은 본능적으로 범상치 않은 일이란 걸 직감했다.
“장사부 관아의 옥사 지하에 비밀 옥사가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옥사 지하에? 그럼 제수씨께서… 그게 사실이더냐.”
설하는 대답 대신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
윤겸의 눈빛 역시 차가워졌다.
관아 옥사에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단 것 자체가 너무도 수상했다.
“관의 개입까지는 아니지만, 아예 무관하지 않을 수 있어서 숙부님을 찾아왔습니다. …도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장사부는 내 관할이 아니나, 그 정도 재량이 있다.”
윤겸이 장사부의 관아를 감찰하는 건 월권에 해당한다.
게다가 마땅한 증거도 없다.
허나 그 정도는 감당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먼저 간 친우를 볼 면목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그들은 안찰첨사 윤겸을 앞세워 장사부의 관아로 향했다.
* * *
“이렇게 꾸물대다니, 아무래도 네년을 포기했나 보구나.”
지금쯤이라면 검모궁에서 하연주를 구하러 왔어야 하는데, 예상이 훌쩍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관과의 충돌 때문에 주저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그들의 피를 자신의 칼에 적시고 싶은 암도로서는 짜증이 났다.
“…….”
“네년도 포기했단 말이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연주의 눈에는 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허나 지금 그녀의 눈빛은 초연했다.
그런 눈빛이 암도에게 포기로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암도가 그녈 발로 찼다.
“큭!”
“애원하란 말이야! 살려달라고!”
살고 싶어 발악하는 자를 죽이는 것만큼 통쾌한 게 없다.
허나 이미 삶을 포기한 여인을 베는 건, 암도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발로 차였음에도 하연주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암도의 심기를 자극하고 말았다.
“이런 썅, 그냥 네년을 죽이고 그년들을 찾아 죽여야겠다!”
암도의 외침에 하연주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스르릉.
결국 암도는 칼집(刀匣)에서 칼을 뽑았다.
얼마나 많은 피를 맛보았는지, 칼에서 혈향이 풍기는 듯했다.
암도는 흑혈도를 들어 올렸다.
“이제 뒈져…….”
암혈도를 휘두르려던 암도는 멈칫했다.
소란스러워지는 걸 느낀 탓이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왔군. 킥, 운이 좋아… 네년의 피는 나중에 맛보지.”
“주…겨… 날, 죽이고…….”
하연주는 짐이 되기 싫은지, 차라리 죽고 싶었다.
자신의 존재가 여식, 설하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검모궁에서도 미래가 보장된 십삼검향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일로 설하에게 피해가 가게 할 수 없었다.
모정(母情). 그건 목숨조차 버릴 수 있게 만드는 위대한 힘이었다.
허나 암도는 그녀의 말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검모궁 계집들의 피를 흑혈도에게 먹일 생각에 흥분한 탓이다.
‘미안…하구나, 설…하야. 이 어미가… 미…안…해…….’
그 시각, 위에선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거 월권이네, 윤 첨사!”
지천명을 지났을 법한 초로의 사내가 관아를 들이닥친 윤겸을 보며 호통을 쳤다.
임무의 특성상 고관급 이하 관리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은 안찰첨사다.
허나 초로의 사내 역시 만만치 않았다.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부(知府) 대인.”
“협조? 부사(副司) 대인의 공문을 내놓게! 아니면 협조 따윈 없네!”
초로의 사내는 장사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지부였다.
정4품의 관리로, 고관급이라 할 수 없으나 고관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직위다.
아무리 안찰첨사의 입김이 세다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지부 대인의 감찰은 안찰첨사가 아닌 같은 품계인 안찰분사(按察分司)의 수장인 안찰부사의 몫이다.
윤겸은 호남의 안찰첨사 중에서도 그 능력이 출중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동시에 고지식해 상관인 안찰부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그가 윤겸에게 공문을 써주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공문, 여기 있습니다. 지부 대인.”
“그, 그럴 리가 없… 헙!”
믿기지 않으나 윤겸의 손에는 협조 공문이 들려 있었다.
그럼 사이가 좋지 않던 안찰부사가 도와줬다? 그건 아니었다.
협조 공문에 결재해준 자는 안찰부사가 아닌 안찰사였다.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의 수장이자 호남성의 삼권(三權) 중 하나를 쥔 거인.
그런 안찰사가 허락한 일이라면 감히 지부라고 막아낼 명분 아니, 힘이 없다.
‘안찰사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곤란할 뻔했어.’
일인자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자는 바로 이인자다.
안찰부사는 안찰사를 보좌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를 견제하는 직위이기도 하다.
윤겸을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안찰사를 찾아간 것이다.
안찰사의 입장에선 굳이 그를 도와 안찰부사를 자극할 이유는 없다.
허나 윤겸에게 빚을 지워, 그라는 명검을 한 번 사용할 기회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정식으로 장사부 관아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저희가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숙부님.”
“그렇게 해라.”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는지, 관과의 마찰이 해소되자 검모궁의 일행은 곧바로 옥사로 향했다.
옥사에는 많은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아리따운 여인들의 등장에 눈이 커졌다.
“오~! 웬 계집들이야! 이리 온, 이 오라비가 이뻐해 주마!”
“킥! 에라이, 주제를 알아라! 네 오라비가 여기 있단다!”
죄수들의 추잡한 언사가 몹시 거슬렸다.
허나 검향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비교적 소심한 칠검향조차 말이다.
동정상단을 잿더미로 만든 고수를 만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찮은 죄수들의 저급한 언사 따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뭐야? 기둥서방도 함께… 큭!”
“너희가 함부로 입에 담을 분들이 아니다.”
조롱하던 죄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이백의 섬뜩한 살기를 일개 죄수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육선자와 팔검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는 이백은 검향들이 저급하게 조롱당하는 걸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백과 그 일행이 평범한 자들이 아님을 깨달은 죄수들은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거품을 물고 쓰러진 죄수와 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백수 봉공, 통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삼검향.”
이백은 옥사 끝에 있는 철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몇몇 죄수들이 앉아 있었다.
철창은 잠겨 있었다.
“여긴가? 비켜보게.”
자물쇠를 부수는 건 가능했지만, 굳이 쓸데없이 힘을 쓸 필요는 없었다.
엽사는 여러 잡기를 알고 있었고, 자물쇠를 푸는 잡기도 알고 있었다.
딸칵.
철창을 열고 그들이 들어오자 죄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우습게…….”
죄수들은 험상궂은 외모로 검모궁 일행을 위협했다.
허나 이백과 엽사는 자연스럽게 검향들을 가로막았다.
그때였다.
“죽어… 큭!”
“우릴 우습게 봤군.”
죄수들은 몸놀림은 보통이 아니었다.
허나 이백은 그보다 더 평범하지 않다.
이백은 한 호흡에 그들을 모두 제압했다.
10성에 오른 청랑보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엽사가 중얼거렸다.
“평범한 죄수들이 아니었군.”
“무공을 익힌 고수가 관아의 옥사에 갇혀 있을 리가 없겠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죄수들의 움직임에서 무공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 수상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 그들은 지하 옥사의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일반 죄수나 옥사를 관리하는 포쾌에 의해 입구가 발각되어서 좋을 게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이 지키고 있던 것이다.
경험이나 무공 수위가 낮은 칠검향과 십삼검향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절정고수들의 기감을 속일 순 없었다.
엽사는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군.”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가 발견되자, 십삼검향의 눈빛이 바뀌었다.
침착한 척해도 그녀 역시 여식이었다.
저 너머에 자신의 어미가 잡혀 있을지 모른다는 걸 아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차갑게 만드는 말이 들려왔다.
“사매들은 이곳은 지키고 있어.”
“삼사저, 저도 함께…….”
“십삼사매, 본녀의 말이 들리지 않나.”
“하지만…….”
삼검향은 설하의 말을 끊었다.
허나 그녀답지 않게, 명을 거부했다.
그런 설하를 향해 삼검향이 단호히 말했다.
“사매의 마음을 알겠지만, 그렇기에 하는 말이야. 상대는 동정상단과 본궁의 제자들을 해한 악적이다. 자네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어.”
“…….”
잔인하지만 삼검향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설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부정할 수 없다.
피나는 노력으로 검향(劍香)의 지위를 얻었으나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본인 스스로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저. …어머니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본궁은 제자를 버리지 않는다. 하 부인은 우리에게 맡겨.”
결국 비밀 통로를 지나는 건, 두 봉공과 삼검향의 몫이 되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설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부족함에 분하고 아쉬웠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칠검향이 토닥였다.
“어머니는 사저와 봉공들께서 구해주실 거야. 그러니 우린 믿고 기다리자.”
“예… 사저.”
소심하고 유약해 보이는 칠검향이지만, 이 순간만큼 오히려 힘이 되어주었다.
‘어머니… 무사하셔야 해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