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악연(惡緣) (1)
“으… 으윽…….”
산발된 머리에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척 봐도 고초를 겪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다.
‘본…궁에서 날… 구하러… 올 거야. 그러니… 버텨야 해…….’
그녀는 검모궁의 제자였다.
비록 일반 제자이긴 하지만 나름 비중 있는 제자였다.
하연주. 승선포정사사(丞宣布正使司) 예하 이조(戶曹)의 관리였던 설 대인의 부인이자, 이후 검모궁에 입궁한 여인이다.
과거부터 이어온 인맥과 재능 덕분에 검모궁의 어용상단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납치되고 말았다.
검모궁은 일반 제자라고 한들,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 덕분에 검모궁은 끈끈한 유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애초 검모궁은 한이 많은 여인들의 방파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익!
불쾌한 마찰음과 함께 차가운 표정의 사내가 들어왔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눈빛이군.”
“…….”
“이상하단 생각, 해보지 않았나? 네년이 아직까지 목숨줄을 붙잡고 있는 이유가?”
“…….”
사내의 말에 하연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를 향해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년 하나로 성이 차지 않아서 말이야.”
“……!”
하연주는 사내의 속셈을 깨달았다.
자신은 미끼였다.
검모궁 본궁의 고수를 끌어낼 미끼.
“감히 본회를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아, 안… 흐윽!”
짜악!
소리치려던 하연주의 얼굴을 사내의 손바닥이 훑고 지났다.
그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팅팅 붓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사내는 하연주를 내려보며 오만하게 말했다.
“흑혈이 오랜만에 계집의 피로 포식하겠어.”
흑혈도(黑血刀).
수백의 피를 머금은 마물이다.
흑천회주의 직속인 암귀들의 무위는 천차만별이다.
흑혈도의 주인은 암귀 중에서도 두 번째로 강하다는 암도(暗刀).
5년 전, 죽은 암권과는 격이 다른 강자다.
흑천회주는 암권의 죽음을 잊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자를 잊지 않았다.
허나 옥면기협의 의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암권에게 죽은 설 대인의 부인과 여식이 가산을 정리하고 사라진 걸 알아냈다.
암권의 죽음에 그들 모녀가 연관되었을지 모른다는 심증이 생겼다.
허나 그들 모녀가 검모궁의 제자가 된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흑천회는 끈질겼고, 결국 하연주를 찾아냈다.
그 덕분에 배후 세력인 검모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암도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빨리 오라고. 이년이 흑혈에게 먹어 치워지기 전에 말이야.”
* * *
“이, 이건… 아니잖아…….”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은 폐허를 보며 슬픔에 잠겼다.
단순히 장원이 황폐해졌단 사실 때문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수백의 인명이 사라졌단 사실에 슬퍼하는 것이다.
그녀만이 아니다.
곁에 있는 여인들과 사내들 역시 이를 악물었다.
“거, 거기 뭐 하는 자들이냐!”
“이, 이곳은 관아(官衙)에서 통제하고 있다!”
감색 옷을 입은 자들, 관아의 포쾌(捕快)들이 이남삼녀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폐허가 된 장원에 낯선 자들이 나타났으니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다.
그때 가장 어린 여인이 한걸음 나왔다.
그 모습에 포쾌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머, 멈춰!”
“실례했습니다. 소녀는 설하라고 합니다. 어머니께서 동정상단의 총관이십니다.”
여인의 말에 포쾌들은 움찔했다.
허나 곧 아는 척을 했다.
“그, 그럼 작고하신 설 대인께서…….”
“…선친이십니다.”
그녀의 말에 포쾌들은 창을 거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설 아가씨셨군요. …대인에 이어 마님까지…….”
“이곳을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커험… 원래는 안 되지만… 최대한 빨리 보시고 나가주십시오. 포두님께서 아시면 저희가 혼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의외로 포쾌들이 선선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녀에게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여인이 다가와 위로해주었다.
“사매, 괜찮…아?”
“칠사저, 괜찮습니다. 아직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게 확인된 건 아닙니다.”
설하. 그녀는 검모궁 십삼검향이자 하연주의 여식이었다.
가장 슬퍼해야 할 그녀이지만, 감정을 잘 추스르고 있었다.
아니, 유일한 혈육인 어미가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 삼검향이 칠검향에게 단호히 말했다.
“막내 사매 말대로다. 하 부인께서 돌아가셨다고 단정 짓지 말자. …봉공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하겠소.”
삼검향은 천문산장의 봉공. 특히 엽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번 임무에 검교가 아닌 그를 요청한 건 바로 엽사의 능력 때문이다.
엽사는 궁사로서도 뛰어나지만, 그의 진정한 특기는 바로 추종술(追蹤術)이다.
그는 목표로 삼은 범죄자를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추종술의 대가다.
동정상단을 무너트린 무리를 쫓기 위해선 엽사의 추종술이 필요했다.
엽사는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엽사의 눈이 커졌다.
“…한 명?”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 명이라니요. 설마… 단 한 명이 저지른 짓이란 말입니까!”
엽사의 중얼거림에 놀랐는지, 삼검향이 언성을 높였다.
여타 상단과 마찬가지로 동정상단 역시 무사들을 고용해 상단을 보호했다.
허나 동정상단은 검모궁의 어용상단이다.
하연주를 포함해 요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검모궁의 제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비록 일반 제자들이지만, 하나같이 일류급의 고수들이다.
그녀들의 연락이 끊겼다는 건, 모두 죽거나 잡혀갔다는 의미다.
“아마 포위한 자들이 있겠으나… 이 일을 저지른 자는 한 명이오. 삼검향.”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각개 격파를 당한 게 아니라면 그 한 명은 최소 절정급 고수란 걸 의미했다.
물론 이쪽에도 절정고수가 있다.
그것도 무려 셋이나 된다.
괴한들 중 절정고수가 있다고 한들, 두려워할 필요 없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 역시 절정고수가 한 명이란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물론이오.”
엽사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허나 느낌이 좋지 않았다.
비록 동정상단이 검모궁의 어용상단이란 사실이 알려진 게 아니라도, 이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를 침묵한 채 따르는 이백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고수… 절정도객이라…….’
이백 역시 적이 도객(刀客)이란 사실을 간파했다.
허나 어떤 도법을 익혔는지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도흔(刀痕)에서 특별한 특징이 발견되지 않은 탓이다.
즉, 특정 도법이 아닌 기본적인 칼질만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는 뜻이다.
이백의 눈빛이 깊어졌다.
‘만만치 않은 자겠어.’
* * *
“저, 정말… 여기가 맞아요?”
당황했는지, 칠검향이 말을 더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의 흔적을 추적한 엽사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믿기지 않으나 장사부(長沙府)의 관아였다.
호남의 성도(省都) 장사의 관아인 만큼 현(縣)급 지역의 관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아니, 규모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동정상단의 사건이 관아에 얽혀 있다는 점이다.
“내 이름을 걸 수 있소.”
“허, 허나…….”
엽사 역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으나 부정할 수 없었다.
추종술만큼은 자신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곳도 아닌 관아를 무작정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관(官)과 무림(武林)이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고 한들, 관아에서 분란을 일으킨다면 황실에서 좌시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이백이 입을 열었다.
“확인부터 해야겠군요.”
“허, 허나 함부로 잠입할 수는…….”
칠검향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의 실력이라면 포쾌 따위에게 걸리지 않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자칫 그들만이 아니라 검모궁까지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그녀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때 엽사가 그녈 안심시켰다.
“걱정 마시오. 저 친구의 능력이 제법 신통하니.”
“예? 그게 무슨…….”
칠검향만이 아니라 다른 검향들 역시 엽사의 말에 갸웃했다.
그녀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이백이 휘파람을 불었다.
허나 정작 그의 입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이백에게 칠검향이 말을 걸었다.
“무엇을 하시려…….”
삐이~익!
새의 울음소리에 칠검향은 당황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새는 관아의 위를 몇 번이나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사라졌다.
그러자 엽사가 물었다.
“찾았는가?”
“겉으로 볼 때, 수상한 점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안까지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세 여인은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너무 진지했기에 끼어들 수 없었다.
엽사는 나직하게 말했다.
“부탁하네.”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이백은 다시 한번 귀에 들리지 않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이번에는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엽사는 이백을 지키듯 주변을 경계했다.
이다경쯤 지난 후 이백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윽…….”
“백수, 괜찮은가!”
엽사의 물음에 이백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갤 끄덕였다.
수확이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세 여인 역시 기대 어린 표정이었다.
“옥사 지하에 비밀 옥사가 하나 더 있더군요.”
“역시 내 추종술이 틀렸을 리가 없지.”
이백의 말에 엽사는 안도했다.
그도 내심 자신이 실수했나 걱정 아닌 걱정을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삼검향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통감술(通感術)이라 합니다.”
“통…감술이 뭔가요.”
“쉽게 말하면 금수(禽獸)의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지요. 정확히는 금수의 시야를 엿본다는 게 더 적합할 겁니다.”
이백의 말에 세 여인은 입을 쩍 벌렸다.
듣도 보도 못한 괴공인 탓이다.
허나 무림은 모래알만큼 기인이 많다.
이런 기이한 괴공이 있다는 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지난 5년간 이백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백수조련술 역시 능숙해졌다.
통감술은 백수조련술이 8성에 올랐을 때 얻게 된 기술이었다.
전투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정찰에는 매우 유용하다.
엽사가 물었다.
“괴한은 확인했는가?”
“확인하려던 차에 쥐가 죽고 말았습니다. 우연인지… 눈치챈 건지 알 수 없지만요.”
“쥐, 쥐요?”
“통감술을 펼친 대상이 쥐였습니다.”
쥐라는 말에 여인들은 움찔했다.
아무래도 여인들로서는 쥐가 혐오스러운 탓이다.
날짐승으로 관아 전각 내부까지 들어가긴 어렵기에 길짐승인 쥐를 이용한 것이다.
작고 재빠른 쥐야말로 옥사를 살피기에 적합했다.
“장소는 찾았으나 무작정 들어갈 수 없고…….”
“…그건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다들 난감해할 때, 십삼검향 설하가 입을 열었다.
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분이 도와주실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