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5년 후(午年 後)
“얘들아, 씨를 뿌려주렴.”
청년의 말에 한 무리의 새들이 땅에 떨어진 무언가를 물더니 날갯짓을 했다.
날아오른 새들은 저공비행을 하며 물고 있던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수십 마리의 새들은 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수고들 했다. 그만 돌아가 봐.”
삐이~익!
수십 마리의 새들은 청년의 말에 대답하듯 울부짖더니 하늘을 향해 힘껏 날갯짓했다.
그렇게 새들이 사라지자 촌부들이 다가왔다.
“아이쿠~! 백수 공자님 감사합니다!”
“공자님 덕분에 이번 농사도 편하게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촌부들은 청년에게 너무도 고마워했다.
그들을 향해 청년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자님! 살펴 가십시오!”
청년은 촌부들에게 인사를 한 후 떠났다.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청년이지만, 그를 바라보는 촌부들의 얼굴에 존경심이 묻어나왔다.
그는 새를 부려 씨를 밭에 뿌리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신기는 그뿐만 아니다.
멧돼지를 부려서 밭을 갈아주었고, 두더지를 부려 수로를 만들어주어 쌀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척박한 장가계 촌민들의 삶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이런 이적을 평범한 존재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촌부들의 눈에 청년은 신선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자~ 다들 일합시다! 백수 공자님께 가장 좋은 걸 드려야 하지 않겠소!”
“맞습니다! 일합시다!”
굶주림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니 다들 마음속에 희망을 품게 되었다.
희망을 품게 해둔 청년에게 가장 귀한 걸 드려야 한다는 마음에 촌부들은 오늘도 고된 노동에 즐겁게 임할 수 있었다.
촌락을 떠난 청년은 바람처럼 빠르게 협곡을 넘어갔다.
그렇게 몇 개의 협곡과 계곡을 지나자 촌락에서 볼 수 없는 멋스러운 장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원의 입구에는 천문산장이란 현판이 적혀 있었다.
청년은 천문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를 활(弓)을 쥔 중년인이 반겼다.
“왔는가, 백수(百獸).”
새를 부려 촌부들의 농사를 도운 자는 5년 전, 천문산장의 일원이 된 이백이었다.
십 대 후반이었던 그는 어느새 이십 대 초중반의 장한이 되었다.
아직도 어린다면 어리지만, 과거의 어리숙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5년이라는 시간은 이백을 많은 면에서 성장시켜주었다.
“엽사(獵師) 형님, 의뢰 있으십니까? 이번에는 검교 형님도 함께 가십니까?”
아버지뻘로 보이는 사내였건만, 이백은 넉살 좋게 형님이라고 칭했다.
엽사는 사냥꾼이란 뜻이다.
허나 그는 짐승을 사냥하는 그런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다.
그의 사냥감은 사람이다.
정확히는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들이다. 즉, 현상금 사냥꾼인 셈이다.
천문산장의 재정은 상당 부분이 그의 활약으로 충당되고 있었다.
물론 교수가 제련한 도검과 산인이 캔 약초를 파는 것도 제법 짭짤했다.
엽사는 주로 홀로 의뢰를 나서지만, 조력이 필요할 땐 송안이 동행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엽사의 곁에 검교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와 동행한다고 유추한 것이다.
허나 엽사는 고갤 저었다.
“아니, 검모궁에서 연락이 왔네.”
“…검모궁입니까.”
검모궁이라는 말이 이백은 자연스럽게 검교를 바라봤다.
검모궁에서 요청이 왔을 땐 주로 그가 나가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교수와 산인도 무위가 낮지 않으나 전투에 적합한 이들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숙수와 어옹은 상당히 고수이지만, 무림에 나서는 걸 꺼리는 편이었다.
총관 역시 산장의 업무 때문에 다른 일에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
즉, 무림으로 나가는 인원은 반쯤 정해진 셈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번에는 검모궁의 요청에 검교가 아닌 엽사가 다녀온다니, 이백은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어진 그의 말에 이백의 눈이 커졌다.
“자네도 함께 가세.”
“저도… 말입니까?”
엽사는 이백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천문산장의 일원이 된 지 5년.
이백은 장가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누군가 그의 외유를 막은 게 아니다.
그저 무림에 나갈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이백은 주로 수련을 했고, 간혹 장가계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도움을 줄 뿐이었다.
실전 경험이 일천하지만, 하나같이 고수인 천문산장의 일원들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비무를 한 덕분에 경험과 무위가 상당한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검모궁에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자네 도움이 필요하다 하더군.”
“…그렇군요.”
두근. 두근.
이백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천문산장의 일원이 된 이유는 생명의 은인인 교정정과 육선자에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그 기회가 없었다.
아직 어린 이백까지 내세워야 할 정도로 천문산장에 고수가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기회가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총관 어른과 형님들께 인사를…….”
“되었다. 다들 바쁘시니 서둘러 다녀와라.”
검교는 자신이 아닌 이백이 검모궁의 요청을 받은 게 불만스러운지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그런 그의 태도에 이백은 당혹스럽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지난 5년간 이백은 천문산장의 일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단 한 명. 검교만은 깊은 교감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이백과 거리를 둔 탓이다.
이백은 나름 노력을 했으나 검교가 계속 벽을 세우니, 노력한다고 한들 소용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적대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으니, 그 이상의 관계 개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 늙어서 질투하긴…….”
“뭐라고 했나.”
엽사의 중얼거림을 못 들을 검교가 아니었다.
물론 엽사 역시 그가 못 들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송안 다음으로 넉살 좋은 엽사답게, 검교의 굳은 목소리에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이크~! 들었나? 백수 아우, 빨리 가세나!”
“예? 예.”
엽사가 밖으로 달려 나가자 이백은 검교의 눈치를 살피다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검교는 혀를 찼다.
“가벼운 것들…….”
그런데 의외로 눈빛은 따스했다.
벽을 세우긴 했으나 이벽이 마냥 싫은 건 아니었다.
“…무사히 다녀와라.”
* * *
“삼사저, 사숙님들 없이 괜찮을까요?”
이십 대 중반쯤 되는 여인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그녈 보며 삼십 대 초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이런 일로 사숙들께서 나서야 하겠느냐. 게다가 천문산장의 봉공들께서 오시니, 그런 걱정하지 말거라.”
“하, 하지만…….”
여인들은 검모궁의 제자들이었다.
그것도 일반 제자가 아닌 무려 십이검향 중 셋이었다.
십이검향(十二劍香)이란 검모궁의 수백 제자들 중에서도 그 재능을 인정받은 이들이다.
동시에 다음 대 선자로서, 검모궁을 이끄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당연히 그녀들의 무위는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근심 어렸단 건, 이번 출타가 쉽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그만! 본궁의 검향으로서 어찌 이리도 약한 모습을 보이더냐! 십삼검향으로 임명된 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막내 보기에 부끄럽지 않더냐!”
“죄, 죄송합니다. 삼사저…….”
검향의 인원이 열두 명으로 정해진 건 아니다.
그저 궁주와 선자들이 지명한 제자들이 열두 명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1년 전, 수년 만에 새로운 검향이 탄생했다.
대부분 십 대 혹은 그 이전에 선발된 여타 검향들과 달리 방년의 나이로 검향에 임명된 것이다.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지만, 상부에서 결정한 일을 제자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다.
“음? 봉공들께서 오시나 보구나. 그만 감정을 추스르거라. 칠사매.”
“예? 예. 삼사저.”
5년 전만 해도 십이검향 중 절정지경에 오른 여인은 둘 뿐이었다.
그러나 5년이란 시간은 이백만 성장시킨 게 아니다.
십삼검향 대부분 크고 작은 성취가 있었고, 특히 삼검향은 절정지경에 오르게 되었다.
다만 칠검향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해 못 할 게 아니었다.
그녀는 검재보다 의재(醫材)로, 검향에 뽑히게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독선자라고 불리는 육선자의 제자로 말이다.
이번 임무의 특성상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주로 궁내에 지낸 칠검향과 근래 선별된 십삼검향이 투입되게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남(二男)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모궁의 삼검향이 봉공님들을 뵙습니다.”
“십삼검향이 봉공님들을 뵙습니다.”
천문산장의 봉공들은 검모궁주와 팔선자들이 인정한 인물들로, 선자들과 동급 대우를 받는다.
그러니 검향들이 윗사람 대하듯 행동하는 게 당연했다.
다만 칠검향만이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과 또래의 봉공은 예상치 못한 탓이다.
허나 삼검향의 싸늘한 시선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 아! 치, 칠검향이 보, 봉공님들을 뵈어요.”
“만나서 반갑소. 삼검향과 칠검향은 오랜만이오. 7년 말인가?”
“8년 만입니다. 봉공님.”
엽사가 천문산장의 일원이 된 지 제법 되었기에 삼검향, 칠검향과 안면이 있었다.
깊은 교감을 이룬 건 아니다.
검모궁과 동행하는 건 대부분 검교가 맡았으니 말이다.
“이 친구는 백수(百獸)라 하오. 검향들도 본 적은 없을 게요.”
“백수라 합니다.”
이백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에 대해 들은 게 있는지 검향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특히 삼검향은 이백의 수위를 파악하지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고수는 하수의 기운만으로 대략적이나마 무공 수위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삼검향은 그의 수위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는 이백이 그녀보다 강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특수한 기공을 익힌 게 아니라면 말이다.
허나 이백은 천문산장의 봉공.
자신보다 어림에도 봉공의 지위를 얻었다는 그만한 실력이 있단 뜻이다.
‘팔사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가.’
무위만 본다면 일검향과 이검향이 더 뛰어나다.
허나 재능만 본다면 팔검향이 제일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제자를 두지 않았던 삼선자가 유일하게 거둔 이가 바로 팔검향 교정정이니 말이다.
눈앞의 청년은 재능만이 아니라 무위조차 높다.
삼검향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상황이다.
허나 그녀도 검향에 임명된 지 약 이십 년이다.
쉬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입을 열었다.
“사, 사부님께 들었어요.”
“백수 아우, 칠검향은 육선자의 제자일세.”
육선자는 팔검향과 함께 그의 은공이었다.
그런 육선자의 제자라는 말이 이백의 눈빛이 바뀌었다.
“은공의 제자를 뵙습니다.”
“아, 아니에요. 저, 저는…….”
짓궂은 육선자의 제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칠검향은 소심한 성격이었다.
대신 의재만은 육선자 이상이었다.
지금은 의생(醫生) 수준이지만, 그녀가 선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검모궁은 대단한 의원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은공께선 잘 지내십니까.”
“예? 예… 사부님께서 잘 지내세요.”
은공인 육선자가 잘 지낸다는 말에 이백은 고갤 가볍게 끄덕였다.
칠검향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팔사매는 폐관…….”
“칠사매, 본궁 내부의 일을 설명할 필요는 없네.”
“아, 알겠습니다. 삼사저.”
비록 검모궁과 천문산장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들, 결국 서로 다른 집단이다.
궁내의 일을 그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이백은 선을 긋는 삼검향을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허나 마음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게 아니고, 검교를 오래 겪은 터라 제법 내성이 생긴 덕분이다.
“그보다, 서둘렀으면 합니다. 본궁의 제자가 위험하니까요.”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