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천문산장(天門山莊) (2)
누군가 구슬땀을 흘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평범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낸 움직임은 결코 평범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가 팔이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과연 애기씨이십니다. 가르쳐 드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영사보법(靈蛇步法)을 이리도 능숙하게 사용하시니 말입니다.”
“헤헤… 아직 멀었어요, 혼 아저씨.”
영사보법은 사천당가에서도 직계혈족만 익힐 수 있는 비전이다.
그런 영사보법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허나 외팔이 중년 사내가 당 가주의 심복 암비(暗秘) 당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록 직계혈족이 아님에도 당 가주의 ‘허락’을 받은 존재이니까.
그런 그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며, 영사보법을 전수받은 소녀는 당 가주의 손녀, 당령이었다.
당혼을 위시한 당외삼비는 당 가주의 명에 따라 북천표국으로 왔다.
당령의 외숙인 적무산은 그들을 경계했지만, 목적이 당령을 데려가기 위함이 아닌 호위라는 당 가주의 서신을 받고 거부하지 않았다.
이들마저 거부한다면 그땐 누가 움직일지 뻔하기 때문이다.
장철우는 그들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당외삼비가 그를 당령의 의부(義父)로 대우하니 이젠 거부감이 상당히 덜어졌다.
당령은 그간 사천당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친부의 가문이자 만나보지 못한 조부에 대한 호감 때문에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멀었다니요, 영사보법은 본가의 비전 중 하나입니다. 고작 한 달 만에 이 정도면 대단한 겁니다. 소가주… 애기씨의 친부께서도 이 정도 성취는 아니셨습니다.”
“아… 네…….”
사천당가의 현(現) 소가주는 당자명이다.
허나 당혼이 칭한 이는 전(前) 소가주인 당자성이다.
당령의 친부이며, 당 가주가 가장 아끼던 아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당자명은 결코 소가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당자성의 재능과 인망은 역대급이었다.
허나 사천당가의 미래라던 당자성은 죽었다.
십여 년 전에…….
그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듯 당령 역시 대단한 무재(武才)를 보여주었다.
열셋이라는 늦은 나이에 무공을 접하고도 이만큼의 성취를 보여준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친부가 거론되자 당령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십여 년간 장철우를 아비로 생각해 왔으니 친부의 존재가 아직 어색한 건 당연했다.
그런 당령의 반응에 당혼은 자신이 성급했단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당혼은 화제를 바꾸었다.
“아, 그리고 부탁하신 일을 알아봤습니다.”
“백이 삼촌은 잘 있나요!”
당혼의 말에 당령의 얼굴이 밝아졌다.
함께 지낸 시간이 그리 길다 할 수 없지만, 깊은 정이 든 삼촌. 이백.
대설산을 떠날 당시에는 그를 두고 온 게 안타까웠다.
그렇기에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당령의 부탁을 받은 당혼은 하오문 지부로 향했다.
당가의 고수를 파견하면 너무 오래 걸리기에 정보 집단인 하오문에 의뢰하기 위함이었다.
하오문와 함께 삼대 정보 집단인 개방이 있으나 그들은 사적으로 움직이긴 어렵다.
하오문의 입을 믿을 수 없지만, 감히 사천당가의 일을 함부로 누설할 리 없다.
그 명성답게 하오문은 빠르게 의뢰를 완수했다.
“그게… 이백이란 청년은 사라졌다 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백이 삼촌이 사라지다니요!”
당혼의 대답에 당령이 눈에 보일 정도로 동요했다.
그만큼 이백은 당령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당혼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애기씨는 모르시겠지만, 당시 대설산에서 청랑동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무림 고수들이 몰려…….”
그의 설명을 들은 당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백이 무림 고수들의 싸움에 휘말렸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지, 진정하십시오, 애기씨! 그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어딘가 살아 있을 겁니다!”
“그 말! 믿어도 되죠!”
고작 열세 살짜리 소녀의 단호한 표정이건만, 당혼은 긴장하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당 가주의 얼굴을 엿봤기 때문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하오문에 추가 의뢰를 했으니, 분명 그를 찾아낼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애기씨.”
“백이 삼촌을 꼭! 찾아주세요. 아저씨. 부탁이에요.”
그제야 당령은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에 당혼은 고갤 끄덕였다.
‘후우… 애기씨를 실망시킬 순 없어.’
* * *
서걱! 서걱! 서걱!
빛이 번쩍일 때마다 고기며 야채가 썰렸다.
천문산장의 주방을 맡은 숙수의 솜씨였다.
‘굉장하다!’
아직 무학의 식견이 넓지 못한 이백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숙수의 칼질은 도법(刀法)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도법이다.
상승도법으로 식자재를 다듬고 있는 걸, 다른 도객(刀客)들이 본다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이다.
괜히 천문산장에서 총관 다음으로 강하다는 평을 받는 게 아니었다.
“뭐해! 할 일 없으면 그릇이나 꺼내놔!”
“아, 예…….”
숙수의 호통에 이백이 움직였다.
이백은 잘 모르지만, 이건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숙수는 자신의 영역인 주방에 타인이 침범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데 산양을 옮기는 건 물론, 비록 그릇을 꺼내는 것이지만 이백에게 시켰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에게 가진 호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이백은 그릇을 꺼내 천으로 한번 닦은 후 펼쳐놨다.
그걸 본 숙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사라졌다.
“숙수, 버섯 따왔소.”
“어딜 들어와! 버섯은 저놈에게 줘!”
산발의 사내가 주방 안에 들어오려고 하자 숙수가 호통을 쳤다.
옷의 곳곳에 흙이 묻은 게 위생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청결해야 하는 주방과는 어울리지 않은 자였다.
그는 산인(山人). 천문산장의 일원이다.
이백은 그가 누군지 눈치채곤 먼저 인사를 했다.
“이백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난 산인이라고 부르게. 그리고 이거…….”
지저분한 외형과 달리 매우 순박해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이백은 그가 건넨 버섯을 받았다.
오늘 사용될 식재료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었다.
“뭐 해! 흙 털어내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
이백은 숙수의 호통에 건네받은 버섯을 갖고 한쪽으로 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버섯에 묻은 흙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자신의 입에 들어갈 버섯이니, 정성껏 흙을 털어냈다.
산장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물이 귀하기도 했으나 버섯을 물로 씻으면 물을 흡수해서 맛이 떨어지는 탓이다.
그렇게 이백은 숙수의 보조 아닌 보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요리가 하나둘씩 완성되어 갔다.
“이백이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새 식구가 된 이백을 환영할 겸 식사 자리에 모두 모였다.
식재료를 구하러 갔던 산인과 어옹은 짧게나마 인사를 나누었었기에 완전 초면은 근육질의 노인뿐이었다.
“노부가 제련한 검을 망가트린 놈이 누군가 했는데, 자네였군.”
“죄,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
근육질의 노인은 대장장이 교수(巧手)였다.
이백이 금 가게 만든 송안의 검을 제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 어옹과 산인은 살짝 놀랐다.
교수가 제련한 무기 중 명검 아닌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교수는 사과하는 이백의 말을 끊었다.
“딱히 자넬 타박하는 건 아닐세. 그보다 재밌군. 비록 백련정강(百鍊精鋼)이라지만, 쉽게 금이 갈 리가 없는데 말이야.”
한철이나 현철처럼 특수한 금속으로 만든 무기는 명검을 넘어 보검이 된다.
허나 그런 금속이 흔할 리가 없다.
이를 대체하기 위해 수많은 대장장이들이 노력한 덕분에 탄생한 제련기법이 바로 백련정강이다.
일련일천타(一鍊一千打). 일천 번의 망치질을 거처야 일련(一鍊)을 이룬다.
그걸 일백 번 반복함으로써 평범한 철을 최상의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그렇게 탄생한 철이 바로 백련정강(百鍊精鋼)이다.
백련정강은 아무나 만들어낼 수도, 다룰 수 없다.
대신 백련정강으로 제련한 무기는 특수한 금속을 미량 섞은 무기 못지않은 명검이 된다.
그런 백련정강의 검을 금가게 만들었단 건 놀라운 일이다.
“청랑조법(靑狼爪法)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오. 교수.”
“청랑조법! 설마 저 친구가!”
총관의 설명에 어옹이 깜짝 놀라며 언성을 높였다.
언성을 높인 건 아니지만, 산인과 교수 역시 놀랐다.
특히 교수는 그제야 고갤 끄덕였다.
“허… 청랑왕의 후예라면 가능하겠지.”
“청랑왕의 후예가 있을 줄이야…….”
놀라는 게 당연했다.
전대라고 하지만 무려 십왕(十王) 아닌가.
천문산장을 대표하는 인물답게 총관이 알고 있단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청랑왕의 절학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가치가 있단 점이다.
그 때문에 이백은 긴장했다.
그런데 의외로 천문산장의 식구 중에는 탐욕을 드러내는 자가 없었다.
“허허! 이거 걸물이 들어왔군! 걸물이.”
“이보게, 나중에 노부랑 한번 붙어보세!”
호감을 드러내는 그들을 보며 이백은 당황했다.
제갈천기에 들은 게 있던 그로서는 이들의 반응이 너무도 의외인 탓이다.
그런 이백의 생각을 눈치챈 총관이 미소를 지었다.
“청랑왕의 절학만 못하지만, 다들 뛰어난 절학은 익히고 있네. 그러니 굳이 청랑왕의 절학에 욕심을 가질 이유가 없네.”
“청랑왕의 절학만 못하다니요. 총관께선…….”
“커험…….”
교수의 헛기침에 송안을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과거를 언급하지 않는 게 천문산장의 불문율이다.
총관 역시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는 게 불편했다.
허나 언급하지 않을 뿐, 서로의 과거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총관이 입을 열었다.
“되었네. 노부는 종남파 출신일세. 한때 종남마검(終南魔劍)이라고 불렸지. 허나 옛일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게.”
“아, 예…….”
무림사에 대해 제갈천기에게 배운 게 전부인 이백이기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허나 무림사에 정통한 자라면 기겁했을 것이다.
종남파는 화산파와 함께 섬서성을 대표하는 도문(道門)이자, 구파일방의 한 곳이다.
정파무림의 기둥인 구파일방의 종남파.
그런 종남파의 고수에게 마검(魔劍)이란 불길한 별호가 붙은 건 불쾌한 일이다.
그럼에도 종남마검이란 별호로 불리게 된 건, 총관의 과거가 평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걸 의미했다.
총관만이 아니다. 천문산장의 일원들은 모두 아픔을 갖고 무림을 떠난 자들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별호를 버리고, 별명으로 서로를 부리는 것이다.
눈치를 살피던 송안을 입을 열었다.
“커험… 그런데 자넬 뭐라고 부르지?”
“그렇군. 자네만 이름을 부르긴 뭐하니…….”
이백은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만 본명을 부르면 거리감을 느끼게 될 수 있다.
그러니 그 역시 별명을 짓는 게 좋겠다는 분위기였다.
이백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송안을 제안했다.
“청랑(靑狼)? 청랑 어떤가?”
“그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천문산장의 일원은 대부분 산장 내에서 지내지만, 검모궁의 요청에 따라 무림에 나가곤 한다.
그런 상황에서 청랑이라고 부르는 건 쓸데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청랑은 쉽게 청랑왕을 연상시키니까.
“그럼 뭐가 좋겠습니까?”
“저어… 저는 백수(百獸). 백수가 좋을 거 같습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