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천문산장(天門山莊) (1)
“윽! 으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는 사지가 묶여 있었고,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런 그를 향해 누군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
“크윽! 으…으… 죽여…라…….”
사내는 고문에도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충심인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사내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말해.”
“킥! 죽여라!”
그는 이미 죽어가는 와중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단 의지를 드러냈다.
부지직!
그 순간, 그의 머리가 으깨졌다.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던 사내가 힘을 준 것이다.
죽은 그를 보며 사내는 차가운 눈빛을 빛냈다.
“역시 제갈세가의 무영대란 말이지…….”
죽은 사내의 정체는 놀랍게도 제갈세가의 눈과 귀라는 무영대원이었다.
개개인 모두 일류급의 무위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창의 요원 못지않은 첩보력을 가진 이들이다.
그런 무영대원이 정체불명 사내의 손에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옥협의 의제가 실종되었다라… 우연인가.”
안타깝게도 이백의 존재가 드러나고 말았다.
갖은 고문에도 무영대원은 입을 열지 않았다.
즉, 그가 발설한 건 아니다.
허나 감숙 대설산에서 섬서 석천현까지 오는 동안 제갈세가 일행과 동행한 이백을 본 자가 하나도 없을 리가 없다.
하다못해 그들이 묵은 객잔에도 이백을 목격한 자가 여럿 있을 테니, 언젠가 드러날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정리해라.”
“명!”
사내의 싸늘한 명령에 어디선가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죽어버린 무영대원은 물론, 그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죽은 무영대원은 한 명이 아니었다.
무영의 명을 받고 석천현에 잔류한 무영대원들이 전부 당한 것이다.
비록 제갈세가가 오대세가 중 무력이 가장 떨어진다고 한들, 그 기준은 오대세가다.
그런 제갈세가의 무영대원들을 처참하게 죽였다.
제갈세가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연관이 있든 없든, 우선 잡아서 족치면 뭐가 나오겠지.’
암영(暗影). 흑천회주의 그림자.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 * *
“소협. 저흰, 여기서…….”
팔검향(八劍香) 교정정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짧지만은 않았는지, 제법 정이 든 것이었다.
곁에 있던 육선자가 피식거렸다.
“낭군과 헤어지는 거니? 뭐가 그렇게 애절해?”
“유, 육사숙!”
육선자의 농에 교정정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그런 사질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육선자는 키득거렸다.
검모궁이 여인들만의 문파이며 사내를 멀리한다고 한들, 이성에 눈을 뜨는 건 자연의 섭리다.
그러다 보니 내색하지 않으나 사내에게 호기심을 가진 제자들이 적지 않았다.
허나 교정정은 달랐다.
방년의 꽃다운 나이지만, 제 사부를 닮아 검(劍)만 쫓았다.
그녀가 십이검향의 일원이 된 건, 삼선자의 제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성품 덕분이다.
그걸 아는 육선자로서는 이런 교정정의 반응이 어찌 놀랍고 재미있지 않겠는가.
이백이 그녀들을 향해 진중하게 말했다.
“빚을 다 갚는다면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
이백의 말에 교정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검모궁은 금남(禁男)의 땅이다.
궁주의 특별한 허락이 떨어졌을 때만 입궁이 가능하다.
천문산장의 봉공이라면 입궁이 허락될 가능성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백에게는 비밀이었다.
검모궁과 천문산장의 관계를 발설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이 하달된 탓이다.
교정정은 그의 성품을 믿으나 그럼에도 그녀 역시 검모궁의 제자다.
상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이백은 검모궁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를 다시 만나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육선자는 송안과 홍규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소협을 잘 부탁드릴게요, 봉공님들.”
“하하, 이 송안만 믿으시오. 선자.”
송안의 넉살에 육선자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일부러 가볍게 행동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육선자와 교정정은 먼저 떠났다.
이 이상 검모궁의 위치를 드러낼 수 없는 탓이다.
그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송안이 말했다.
“우리도 가자고. 천문산장에…….”
* * *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산단 말이야?’
이백은 송안, 홍규를 따라 장가계(張家界)로 들어갔다.
장가계는 수많은 봉우리와 협곡 등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게다가 얼마나 넓은지 몇 날 며칠을 돌아다닌다고 한들, 장가계 전역을 보지 못할 정도다.
몇 개의 봉우리와 협곡을 지나는 동안 여러 촌락을 지나왔다.
허나 그런 촌락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다다닥! 다다닥!
그때 이백의 귀에 무언가 빠르게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험로를 저리도 빠르게 달린다는 건, 무공을 익혔다고 한들 쉬운 일이 아니다.
발걸음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었다.
“염소? 아… 산양(山羊)이구나.”
얼핏 보면 염소와 닮았다.
허나 염소라기에 산을 타는 움직임이 범상치 않았다.
이백은 저 짐승이 산양이란 걸 깨달았다.
미래의 대한민국에서야 보기 어렵지만, 자연이 파괴되지 않은 이 시대에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짐승이다.
초식동물이라고 해서 만만히 봐선 안 된다.
산양이 뿔로 들이박으면 맹수조차 성치 못한다.
초식동물 중에서도 강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산양이 겁을 먹고 달리는 걸 봐선 호랑이라도 나타난 건 아닌가 싶었다.
퍼억~! 풀썩.
묵직한 소리와 함께 도망치던 산양이 쓰러졌다.
맹수의 소행은 아니었다.
그때 송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쓰러진 산양의 곁에 나타났다.
배가 볼록하게 나온 초로의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짤막한 칼이 쥐어져 있었다.
무기로 사용하기에 효율적인 칼은 아니었다.
“중식도(中食刀)?”
“이거 오늘은 산양 요리를 먹을 수 있겠는데?”
배불뚝이 사내가 쥐고 있던 칼은 중식당의 요리사들이 사용하는 중식용 칼이었다.
그를 아는지, 송안이 입맛을 다셨다.
배불뚝이 사내의 시선이 이백에게 향했다.
“오늘쯤 새 식구가 온다고 총관께서 말씀하시던데… 너냐?”
“이백이라 합…….”
그는 이백의 대답을 끊고는 산양을 던졌다.
이백은 얼떨결에 산양을 받았다.
상당한 무게였으나 절정지경에 오른 이백이 힘들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배불뚝이 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됐고, 이거나 짊어지고 와.”
“예? 예…….”
배불뚝이 사내는 이백의 대답도 듣지 않고 사라졌다.
큰 체구와 달리 경공 실력이 상당했다.
살짝 놀란 이백에게 송안이 말했다.
“숙수(熟手)라고 산장의 음식을 책임지는 양반이야. 저리 보여도 산장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라고.”
“고검(古劍) 어른이 물러나셨으니… 총관 어른 다음이지.”
송안은 가볍게 말했지만, 의외로 말투에서 존경심이 묻어났다.
그의 말을 침묵하고 있던 홍규가 정정해주었다.
두 사람도 상당히 실력자인데, 위에 둔다는 건 그가 이백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고수라는 뜻이었다.
이런 척박한 곳에 이리도 많은 기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했다.
‘내가 대단한 곳에 오게 된 건가?’
이백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천문산장(天門山莊)에 온 걸 환영하네.”
산장에 도착하자 반백의 노인이 이백을 반겨주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깊은 눈빛은 속세와 어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곳과 참 잘 어울렸다.
“이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총관 어른, 저희도 왔습니다.”
천문산장에는 장주(莊主)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총관이 안살림만이 아니라 검모궁과의 연락 등 산장의 내외 업무를 총괄했다.
눈앞의 노인이 바로 천문산장의 ‘총관’이었다.
“수고들 했네.”
“다들 어디 갔습니까?”
송안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산장이 그리 크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들만 살고 있는 건 또 아니었다.
그런데 산장이 너무 휑하니 묻는 말이었다.
송안의 물음에 총관이 대답했다.
“숙수(熟手)의 닦달에 어옹(漁翁)께선 낚시하러 갔고, 산인(山人)은 버섯 캐러 갔지. 엽사(獵師)는 돈 벌러 갔으니 당분간 안 들어올 게야. 교수(巧手)야, 아마 대장간에 있을 테지…….”
“엽사 빼곤 다들 돌아오겠군요?”
송안의 물음에 총관이 고갤 끄덕였다.
숙수(熟手), 어옹(漁翁), 산인(山人), 엽사(獵師), 교수(巧手).
송안(松安), 검교(劍敎)와 마찬가지로 천문산장 식구들의 별칭인 듯싶다.
“저는 교수께 다녀오겠습니다. 저 친구 때문에 검을 바꿔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호오?”
송안의 말에 총관의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천문산장 식구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모두 교수의 손을 거쳤다.
송안의 검 역시 교수의 작품이다.
대단한 장인답게 교수의 손을 거친 무기는 어느 하나 명검 아닌 게 없었다.
그런 검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은, 저 젊은 청년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이백이 총관의 시선에 부담을 느낄 때였다.
“뭐해! 고길 가져오지 않고!”
“아, 갑니다!”
산양을 이백에게 넘겨준 배불뚝이 사내, 바로 숙수였다.
그의 호통에 이백은 내려놓은 산양을 다시 짊어진 채 주방으로 향했다.
이백이 사라지자 총관의 눈빛이 바뀌었다.
“고검(古劍) 어른의 빈자리가 이리도 빨리 채워질 줄은 몰랐군.”
“그 어른의 빈자리를 채우긴 어렵습니다.”
검교(劍敎) 홍규가 단호하게 말했다.
고검은 천문산장의 제일고수였을 뿐만 아니라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검호(劍豪)다.
그의 빈자리를 이백이 채워주긴 어렵다.
허나 고검은 팔순(八旬: 80세)이 넘은 고령이다.
고작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이백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아닌가.”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고검과 달리 이백에겐 젊음이 있다.
성장의 잠재력이 있다는 뜻이다.
총관은 그 점을 주고 한 말이다.
허나 홍규는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잠재력은 어디까지나 잠재력일 뿐, 긁지 않은 복권과 같다.
막상 긁었을 때, 당첨이 아닌 꽝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재능을 가진 많은 인재들이 화경은커녕 초절정지경에도 오르지 못하고 좌절했다.
재능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탓이다.
물론 절정지경만도 대단하다.
거대 세력에서나 다수 보유했을 뿐, 작은 지역에선 패자(霸者) 대우를 받을 정도다.
실제로 대부분의 중소 방파의 주인은 절정급 고수들이었다.
그런 경지를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청년에 올랐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많은 지원을 받은 명문의 후기지수들조차 삼십 대에 절정지경에 올랐고, 그중에서도 최고라는 신성(新星) 몇몇만이 이십 대 중후반에 절정지경에 올랐다.
이백은 그런 신성조차 넘어선 성장력을 보여주었으니 총관이 고평가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자네답지 않군. 자네가 고검 어른을 존경하는 건 알고 있네. 허나 그것 때문이 아닌 거 같군.”
“…….”
평소 과묵한 홍규가 그답지 않게 타인을 저평가했다.
총관은 그가 왜 이백에게 이런 저평가를 하는지 눈치챘다.
단순히 그가 존경하는 고검을 비교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다.
총관은 그 이유를 눈치챘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정정이가 호감을 보인다던데… 그 때문인가 보군. 허… 사람도 참.’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