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시험(試驗) (2)
“상황은 모두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의견을 말씀해주세요.”
상석에 앉은 초로의 여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품과 자애로움은 인세의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 오십 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손을 살짝 들고 입을 열었다.
“고검(古劍)께서 물러나신 후 천문산장의 전력이 급감한 건 사실이라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받아들이는 건 위험합니다.”
“저 역시 이선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게다가 산장의 모든 봉공들께선 본궁과 특별한 연을 맺으신 분들이시니 믿을 수 있으나 그런 어린 사내를 쉬이 받아들이는 건…….”
두 여인이 연이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허나 모두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 듯 불혹은 되어 보이는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육선자께 목숨 빚을 지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칠선자, 만약 그게 의도된 거라면 어쩔게요?”
그들은 검모궁을 이끄는 궁주 검모와 일곱 선자였다.
자리를 비운 몇몇을 제외하고 중요한 안건을 위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바로 검모궁을 수호하는 천문산장의 새로운 봉공이 추천되었기 때문이다.
검모궁과 천문산장은 별개의 집단이지만, 한 식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선자와 삼선자께서 어찌 생각하십니까?”
“검증만 된다면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일선자의 말에 희비가 갈렸다.
일곱 선자 중에서도 가장 발언권이 강한 일선자였다.
결정에 있어서 기울 수밖에 없다.
반대의 뜻을 밝혔던 이선자와 오선자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일선자님,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평소 외인을 들이는 걸 가장 꺼리시는 분께서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외인을 받아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선자. …팔검향과 홍 봉공께서 잘 처리했다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흑천회가 본궁의 존재를 눈치채면 한 명의 고수가 아쉬울 수 있지요.”
일선자의 말에 이선자는 입을 다물었다.
설연장의 하 부인과 그녀의 여식을 검모궁의 제자로 추천한 것도, 복수를 추진한 것도 이선자였다.
그 덕분에 검모궁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 부인이 쌓은 관가(官家)의 인맥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 모녀 역시 인재였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一石三鳥)였다.
허나 흑천회와 척을 지는 너무도 큰 폭탄을 안았다.
명분에서야 문제 될 게 없으나 이선자로서는 반박하긴 어려웠다.
“삼선자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미 받아들이는 분위기 같습니다. 다만 본궁과 산장의 관계가 드러난 게 아니라면 숨기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삼선자의 의견에 다들 눈빛이 바뀌었다.
검모의 명령이 아니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궁 내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그녀였다.
오늘 역시 자리만 차지하다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의견을 내놓을 줄 예상치 못했으니 다들 놀라는 게 당연했다.
“삼선자께서 내신 의견이 좋은 거 같은데, 여러분의 뜻은 어떻습니까?”
“본 선자는 동의합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동의…….”
의외로 순순히 통과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삼선자인 탓이다.
전대 검모(劍母)가 그녀의 검재(劍才)를 인정했으며, 생전에 직접 검술을 사사할 정도로 총애했다.
그럼에도 다른 선자들이 그녈 경계하지 않는 건, 삼선자가 검(劍) 이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전대 검모는 그녈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사양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그러니 일선자와 이선자도 굳이 삼선자를 견제해서 그녈 적으로 삼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사선자께서 자릴 비우셨으니, 칠선자께서 육선자께 서신을 보내세요.”
* * *
“아무래도 노숙해야 할 것 같소.”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건 아니나 해가 진 후에 노숙을 준비하는 건 위험하다.
그렇기에 경험이 많은 자라면 미리 대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시죠, 홍 봉공님.”
육선자가 동의하자 홍규는 마차를 평평한 곳에 멈추어 세웠다.
마차가 멈추자 마차에서 두 여인이 내렸다.
그제야 홍규는 마차에서 말을 풀렸다.
“난 말들에게 풀 좀 먹이고, 땔감을 구해오겠네. 자넨, 먹을거리를 구해오게나.”
“알겠습니다. 봉공님.”
“저는… 물을 떠 올게요, 육사숙.”
그간 객잔을 이용하긴 했으나 여의치 않을 땐, 노숙도 간혹 했기에 제 역할을 알아서 해냈다.
이백은 사냥을 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먹거리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짐승만이 아니라 버섯이나 나물 등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굶주릴 필요가 없다.
대설산 밑에서 살 적에 장철우에게 배운 지식을 이리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음? 뭐라도 한 마리가 보일 법한데…….”
평소라면 일부러 찾지 않아도 동물들이 다가왔다.
그런데 벌써 이다경(二茶頃: 30분)쯤 지났음에도 아무 동물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멈칫.
무의식중에 걷던 이백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유는 없다. 그저 멈춰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착…각인가?’
느낌이 좋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굶길 수는 없으니, 하다못해 산 과일이라도 따와야 한다.
결국 이백은 다시 한 걸음을 디뎠다.
훅!
무언가 허공을 갈랐다.
더 놀라운 건 소리보다 허공을 가르는 검이 더 빠르다는 점이다.
“누구…시오.”
“허… 놀랍군. 내 일검(一劍)을 피할 줄이야.”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생긴 미중년이 검을 쥔 채,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배우를 했다면 국내가 아니라 한류를 들썩일 거라 확신이 들 정도로 꽃중년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소리보다 더 빠른 그의 극쾌검이었다.
그러한 꽃중년의 검이건만, 이백을 찌르지 못했다.
7성의 청랑보가 그걸 가능하게 만든 덕분이다.
“이번에도 피할 수 있나 보지.”
눈앞에 있던 미중년이 사라졌다.
기척을 숨기는 게 무척이나 능숙했다.
그의 존재를 몰랐을 때조차 불길함을 느꼈다.
하물며 알면서 당할 수는 없었다.
서걱!
또다시 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도 이백을 찌르지 못했으나 그의 옷자락이 베였다.
조금 전보다 더 빠르고, 더 은밀하다는 증거다.
연이어 암습을 실패하고 말았다.
꽃중년은 어이없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또? 오늘 제대로 망신을 당하겠군.”
말과 달리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이백은 지금까지 미중년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찌릿찌릿.
그의 살기에 이백은 살갗이 따가웠다.
그 순간, 미중년이 사라졌다.
‘은신? 아니야!’
미중년이 암습을 위해 은신한 게 아니다.
너무도 빠르게 움직인 탓에 사라진 것처럼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청랑보를 전력을 다해 펼친다면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만큼 7성의 청랑보는 빠르다.
하지만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미중년 역시 은밀하면서도 빨랐다.
이백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그 방향에서 검날이 날아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것이다.
허나 피육(皮肉)으로 검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그때 이백의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청랑조’에 입문하셨습니다.]
[‘청랑조’ 1성에 올랐습니다.]
[‘청랑조’ 2성에 올랐…….]
[‘청랑조’ 3성에…….]
[‘청랑조’…….]
컁!
불쾌한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 나갔다.
그에 비해 이백의 손은 멀쩡했다.
그가 펼친 건 청랑조(靑狼爪)라는 조법이었다.
청랑보와 함께 청랑왕의 대표적인 절기다.
경지에 오른 청랑조는 거암조차 으깨고, 철판도 찢어버린다고 알려졌다.
비록 이백은 그 정도 경지에 오르지 못했으나 꽃중년의 검을 튕겨낼 수 있었다.
물러났던 미중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백은 다시 경계심을 드러내며, 반격할 자세를 취했다.
더 이상 피하지만은 않겠다는 의미였다.
“보검까지는 아니지만, 교수(巧手) 노인네가 만든 검에 금이 갈 줄이야. 하긴, 청랑조법이라면 노친네도 이해하겠지.”
이백은 미중년의 말에 놀랐다.
자신도 방금 익힌 절기를 그가 알아본 탓이다.
그런 이백을 보며 사내는 피식거렸다.
“뭘 놀라? 청랑보법에 그런 무시무시한 조법을 펼쳤으면 당연히 청랑조법이겠지. 자네, 청랑왕의 후예인가?”
“…….”
이백은 쉬이 입을 뗄 수 없었다.
제갈천기에게 청랑왕의 위치와 그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의미가 어떤 건지 들은 탓이다.
청랑왕의 유산을 노리는 자라면 위험하다.
비록 그의 검격을 튕겨냈다고 해도 그게 전력이라 확신할 수 없으니까.
실제로 꽃중년의 얼굴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이백이 경계심을 드러낼 때, 미중년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경계하는 건 이해하네. …그만 나오지? 내 입장이 곤란하지 않은가, 검교(劍敎).”
“그따위로 부르지 마라. 십보필살(十步必殺).”
꽃중년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홍규였다.
두 사람은 아는 사이인 듯싶어 이백으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그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은 채 꽃중년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거의 별호를 언급하지 않는 게, 산장(山莊)의 규칙임을 잊었나, 검교.”
“…….”
홍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규칙은 어긴 건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만 검교라는 별명은 내키지 않는지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가 수긍한 듯하자 꽃중년은 이백을 향해 멋진 미소를 날렸다.
“방금 대화는 잊게. 본명은… 뭐 중요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날 송안(松安)이라고 부르게. 송옥과 반안을 섞으면 내 얼굴이 나올 거 같다며 다들 그리 부르더군. 하하하!”
“…….”
중국 전설의 미남을 꼽는다면 항상 언급되는 이들이다.
재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옥면기협(玉面奇俠)이라고 불리는 제갈천기보다 더 잘생겼으니 말은 다 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섬뜩한 검격의 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유쾌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백은 더욱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이 부족한 거 같으니 알려줌세. 자네에 대해서 조사했네. 호북 조양현 출신이고, 19세이며 고아라고 나오더군. 한데… 말이야. 우리의 결론은 위장이었네.”
제갈세가의 무영이 손을 썼는데 허투루 처리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조사에서 이상이 나올 리가 없다.
그럼에도 위장이란 결론이 나왔다는 건, 그들이 상당한 분석 능력을 가졌다는 걸 의미했다.
“해서 내가 왔네. 극한의 상황에서까지 절기를 숨길 수는 없을 테니까. 결론은 자네가 청랑왕의 후신이라는 걸세. 틀리는가?”
“…맞습니다.”
여기까지 드러난 이상 숨기는 건 오히려 오해만 살 뿐이다.
그렇기에 이백은 인정했다.
그가 인정하자 두 사람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내심 놀랐다.
말이 청랑왕이지, 전대 십왕(十王)이다.
결코 가볍게 볼 사항이 아니다.
“자네가 목숨 빚을 갚기 위해선 우리의 일원이 되어야 하네. 그리고 우리의 일원이 되려면 자넬 믿을 수 있게 해야 하고. 신분이 위장된 자넬 어찌 믿을 수 있겠나.”
“…….”
송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옳다.
그들로서는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결국 이백은 침묵을 깼다.
“…제가 깨어난 곳은 어느 동굴이었습니다.”
이백은 자신이 미래의 대한민국에서 왔다는 점 이외에는 모든 걸 밝혔다.
숨기는 점이 없어야 그들의 의심을 해소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 말해봤자 정신 이상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역시 제갈세가였군. 어찌 청랑동에서 깨어났는지는 알려줄 수 없는가?”
“죄송합니다. …믿으실 수 없다면 은혜를 갚을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을 들을 수 없었다.
바로 진짜 출신지다.
허나 세상에 사연 없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애초 천문산장은 사연 있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송안과 형공이 눈을 마주쳤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