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신비지문(神祕之門) (2)
“흐흐… 새끼, 주제도 모르고 까부니 이렇게! 되는! 거야!”
퍽! 퍽! 퍽!
막여는 쓰러진 채 괴로워하는 이백을 발로 차고 또 찼다.
흑살기로 인해 고통이 너무 강해 막여의 발길질은 느껴지지 않았다.
의외로 막여는 이백을 죽이지 않았다.
일말의 자비가 아니다.
“으으…윽! 으…….”
“킥! 벌레처럼 몸부림치다가 뒈지라고, 새끼야.”
흑살기는 심후한 내공을 밀어내거나 무공에 정통한 의원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는 지독한 기운이다.
이곳에는 흑살기를 밀어내줄 심후한 내공의 소유자도, 무공에 정통한 의원도 없다.
힘도 없는 주제에 남의 일에 참견한 어리석음의 대가로 이백은 처참하게 죽어갔다.
그에게 조소를 짓던 막여는 다시 월향에게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향해 이백은 손을 뻗었다.
“으윽…! 이, 렇게… 포, 기할… 수 없…윽!”
허나 그가 뻗은 손이 이미 사라진 막여에게 닿을 리 없다.
그저 괴로움에 몸부림을 칠 뿐이었다.
사삭 사삭 사삭.
무언가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다가왔다.
허나 주변에는 그들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삭 사삭 사삭!
새하얀 무언가가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더니, 괴로워하는 이백의 품속에 들어갔다.
사라졌던 설군이었다.
설군은 이백에게서 떠난 게 아니다.
다른 용무가 있었기에 잠시 자릴 비웠던 것이다.
[‘ 설군의 계약자’의 권능이 발휘되었습니다.]
[‘ 설군’과 계약자가 공명(共命)합니다.]
우~웅~!
이백의 품 안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에서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러는 사이 막여는 월향에게 다가갔다.
* * *
“그만 물러나들 있어.”
막여의 명령에 수하들은 아쉬운 얼굴이었으나 감히 불복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들이 물러나자 월향은 사색이 된 채 뒷걸음질 쳤다.
“그, 그분은 어찌… 되었나요.”
“흐흐… 당연한 걸 물어? 뒤졌지.”
자신을 앞에 두고 딴 사내에 대해 묻는 월향이 못마땅했으나 막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의 대답에 월향의 눈빛이 흔들렸다.
막여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렇군요.”
무슨 생각인지 월향은 더 이상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막여는 그런 그녈 밀쳤다.
월향은 너무도 쉽게 뒤로 넘어졌다.
막여는 그녀의 옷을 강제로 벗기며 입술까지 훔쳤다.
월향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으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월향의 입술이 오히려 그의 입술을 벌렸다.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에 막여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꿀떡.
그때 막여의 목구멍으로 무언가 넘어갔다.
그걸 느낀 월향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연약하기 그지없던 월향이 막여를 강하게 밀쳤다.
그는 무방비하게 밀쳐졌다.
“뭐…야? 앙탈 부리지 말고…….”
“흑천회(黑天會) 회주 직속 암귀(暗鬼). 그중 암권(暗拳).”
월향의 말에 막여가 흠칫 놀랐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신분은 호걸당주도 모르는 사실이다.
알아서도 안 되는 정보다.
막여. 암권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네년… 누구냐.”
“설연장의 설 대인을 죽였지.”
월향의 말에 암권은 누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지 깨달았다.
암권은 조소를 지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년이군. 임무 때문에 맛보지 못한 게 아까운 년이었지. 그보다 어찌 알았지? 부검했다고 해도 심장마비로 결론이 났을 텐데 말이야.”
“암상(暗商)의 제안을 거절한 후 돌아가셨으니, 하 부인께서 의심하시는 게 당연하지.”
“킥! 그래서 그년이 이 몸을 청부했단 말이지?”
설 대인은 승선포정사사(丞宣布正使司) 예하 육조(六曹) 중 호구, 전토, 식량 등 재정을 담당하는 이조(戶曹)의 관리였다.
그것도 관납(官納)할 상단을 결정하는 심사관 중 한 명이었다.
관납은 무척이나 큰 거래다.
그만큼 이문도 많이 남기에 거대 상단들 역시 너 나 할 것 없이 참여한다.
물론 관에서도 하나의 상단에 모든 물자를 맡기지 않고, 심사를 통해 여러 상단에 나누어 맡긴다.
허나 큰 이문이 남는 거래가 어찌 정당한 방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흑천회의 암상은 설 대인에게 뒷거래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조의 관리답지 않게 청렴한 설 대인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 대가로 싸늘한 시체가 되었지만 말이다.
암귀 중 한 명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를 처리했으나 상대는 관리.
만약을 대비해, 그는 암천회에 복귀하지 않고 호걸당이라는 촌구석 흑도 조직에 의탁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것이다.
“하 부인께서 본궁의 제자가 되면서 청한 부탁이 바로 네놈의 목이지.”
“본…궁?”
암권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림에서는 문(門)이나 방(幇), 회(會)는 널렸지만, 궁(宮)이라고 칭하는 곳은 흔치 않았다.
궁이라고 칭할 정도라면 그 세력이 상당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떠오른 게 있는지 암권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년! 검모궁의 계집이었구나!”
“팔검향(八劍香), 정리했네.”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월향. 아니, 팔검향만 두고 도망쳤던 호위무사 홍씨였다.
그의 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막여는 누구의 피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이 물린 수하들의 피란 걸 말이다.
“수고하셨어요, 홍 숙.”
검모궁은 여인들만의 신비지문이다. 그런데 사내가 합류했으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면 죽여야 한다.
“오냐, 너희 연놈들 모두 죽여주마.”
“늦었어. 눈치채는 게…….”
내공을 끌어올리려던 암권은 이상함을 느꼈다.
단전이 요지부동이었던 탓이다.
그제야 조금 전 자신이 삼킨 게 문제를 일으켰다는 걸 깨달았다.
암권은 팔검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네년… 무슨 짓을 벌인 거지.”
“별거 아니야. 폐혈단(閉丹丸)이니까.”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한 암권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산공독(散功毒)이 내공을 흐트러트려 놓는다면, 폐혈단은 단전을 굳게 만드는 독이다.
배합에 따라 그 효과가 천차만별이다.
최소한 지금 당장 해소할 수는 없다.
내공을 운용할 수 없다면 암권은 더 이상 암귀가 아니다. 그냥 흑도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암권으로서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날 죽이면 회주께서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 마, 널 죽인 게 본궁인지 아무도 모를 테니까.”
검모궁이 신비지문이지만, 흑천회는 거대사파도 손을 못 대는 세력이다.
뒤탈이 생기면 곤란하다.
그렇기에 검모궁은 이리도 번거로운 짓을 벌인 것이다.
검모궁의 신진 고수를 대표하는 십이검향 중 한 명인 팔검향을 기녀로 위장시켜 암권의 주변에 포진시킨 후, 기회를 엿보다가 외진 곳으로 유인했다.
이 모든 과정이 검모궁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다.
“지랄! 이대로 뒤질 수… 컥!”
퍽!
그 순간, 막여의 가슴에서 누군가의 손이 튀어나왔다.
팔검향은 움찔해 물러났고, 홍 숙이라고 불린 호위무사는 그녈 보호했다.
“미, 미친……….”
막여는 마지막 말을 끝나지 못한 채, 둘로 쪼개졌다. 정확히는 찢어졌다.
그리곤 혈인(血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상처 입고 분노에 찬 맹수처럼 보였다.
팔검향은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소, 소협은!”
“포기…하지… 않…….”
섬뜩한 살기를 품어내던 혈인은 그대로 쓰러졌다.
혈인의 정체는 막여의 흑살기에 죽어가던 이백이었다.
설군이 선천진기를 공명해준 덕분에 깨어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의식이 아닌 무의식 상태로.
이백의 무의식에는 막여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의지만 남아 있던 것이다.
그렇게 이백은 막여를 죽여, 위험에 처한 그녈 구한다는 목적을 이룬 순간 무의식조차 놓았다.
“소협, 괜찮…….”
“위험하네.”
이백에게 다가가려는 팔검향을 홍 숙이 가로막았다.
허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이백의 곁으로 갔다.
조금 전의 짐승과 같은 모습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어요. 홍 숙, 뒤를 부탁해요.”
“…….”
“홍 숙!”
“…알겠소. 그리하리다.”
홍 숙은 거절하려 했으나 팔검향의 간곡한 부탁을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백을 안은 채, 빠르게 사라졌다.
팔검향이 더 이상 안 보이자, 홍 숙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이 너무 꼬여 버렸어.”
* * *
“무영 님, 아직 못 찾았습니까!”
제갈천기는 다급하게 물었다.
무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대체 어딜 간 건지… 하…….”
하필이면 석천현 지현(知縣)의 초대를 받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백이 사라진 것이다.
객잔 별채에는 금검대 고수들이 있으니, 이백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자신들의 죄를 아는지, 금검대는 밤새 주변 일대를 살폈지만 이백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직후, 무영이 입을 열었다.
“이 일대를 장악한 흑도 세력인 호걸당이 초빙한 고수의 반란에 의해 상잔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제갈천기의 입에서 짜증이 나왔다.
금검과 마찬가지로 숙부로 대하는 무영이지만, 이 순간만큼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개 지방 흑도 세력 따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의제의 행방불명으로 예민한 그로서는 화제를 바꾼 무명이 못마땅했다.
허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다들 멈칫했다.
“초빙된 고수가 흑살권(黑殺拳) 막여. 흑천회 소속으로 의심되는 자입니다.”
“흑…천회입니까?”
뜬금없이 등장한 흑천회.
그들은 일개 지방 흑도 조직과는 격이 다르다.
강남 일대를 지배하는 거대 흑도 세력이다.
그 힘은 오대세가인 제갈세가조차 무시할 수 없다.
“지난밤, 이 공자가 사라지고… 흑천회 고수가 죽었습니다.”
“설마… 무영 님의 말씀은 백 아우가 사라진 게 그 일과 연관이 있단 뜻이십니까?”
얼굴이 굳어진 제갈천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나 무영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을 이었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곳 석천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만은 사실인 거 같습니다.”
“그럼 당장 본가에 지원을 요청해야겠군요.”
금검(金劍)과 무영(無影).
제갈세가의 검(劍)과 귀(耳)다.
상대가 정말 흑천회라면 이들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때 무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오히려 조용히 물러나야 합니다.”
“무영님!”
무영의 말에 제갈천기는 언성을 높였다.
그럼에도 무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갈천기는 곁에 있는 금검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힘을 실어달라는 뜻이었다.
“무영의 말대로 우린 물러나야 하오, 대공자.”
“금검 숙부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백 아우는!”
제갈천기의 바람과 달리 금검은 오히려 무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랑왕의 후신.
분명 제갈세가로서는 포기하기 힘든 선택이다.
하지만 흑천회까지 언급된 이상 휘말려서 득 될 게 없다.
흑도 나부랭이 주제에 제갈세가의 비선 무영조차 그 힘을 파악하지 못한 거대세력이다.
이백이 살아 있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움직이는 건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제갈천기는 제갈세가의 대공자.
소가주는 아니지만, 다음 대에 주인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가문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영들이 움직일 테니… 대공자께서는 이만 떠나셔야 합니다.”
“하아… 그리, 하겠습니다.”
제갈천기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의 어깨에 걸린 책임이 적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젠장, 미안하네. 백 아우. 우(愚) 형을 용서하지 말게.’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