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도주(逃走)
‘젠장,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내색하지 않았으나 제갈천기는 불안했다.
제갈세가의 대공자와 금검이라도 감숙성에서 공동파의 장로와 맞서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말석이라도 구파일방은 구파일방이다.
사천당가라면 몰라도 오대세가 중에서도 무력이 가장 떨어지는 제갈세가가 감당하긴 어렵다.
하지만 공동파라도 감히 제갈세가를 무작정 핍박할 수 없다.
무림원로이며 무림맹 총군사가 바로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다.
그의 입김은 공동파라도 무시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자전도군은 제갈천기가 민감하게 반응하니, 오히려 뭔가 있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뭘 그렇게 민감하게 구는가. 무림의 웃어른으로서, 후학에게 출신을 묻는 게 죄라도 되는가? 혹 말할 수 없는 곳에서라도 왔단 말인가?”
“그건…….”
자전도군의 행동이 무례하긴 하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숨긴다면 그게 더 수상하게 보일 뿐이다.
이런 상황이니 이백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야, 야래향이 나타났다! 야래향이 나타났다!”
“뭐! 야래향!! 어디! 어디야!!”
누군가의 외침에 객잔 안에 있던 무림인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야래향(夜來香).
무림 삼대신투 중 한 명으로, 황실 보고도 들어가 본 적이 있을 거란 소문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도둑이다.
청랑왕의 유산이 사라졌다고 알려진 지금 감숙성에 그런 야래향이 나타났다?
모두의 머릿속에 그가 빼돌렸을 거란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자전도군은 이백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말이지 집요한 인물이었다.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가? 아니면 말하지 못할 이유라도…….”
“…조양현이라고, 호북성에 있는 촌구석이라 잘 모르실 겁니다. 그리고 이백이라 합니다.”
안절부절못하던 이백의 입에서 대답이 술술 나오자 자전도군은 흠칫했다.
곁에 있던 제갈천기와 금검도 살짝 당황하긴 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백의 대답에도 자전도군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확실한가? 본 장로를 기만하는…….”
자전도군으로 인해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제갈세가 고수들은 긴장했다.
이에 공동파 제자들 역시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했다.
그때 이백의 품에서 설군이 고갤 빼꼼히 내밀더니 바닥으로 내려왔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시선이 설군에게 향했다.
당황한 이백은 설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설군아, 이리 온.”
그의 말에 설군은 다시 이백의 품으로 들어왔다.
이백은 설군을 자신 어깨에 올리곤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나뭇조각이었다.
“이거라면 증명이 될까요.”
“으음…….”
그건 바로 호패였다.
이를 본 자전도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리도 예상이 벗어날 줄은 모른 탓이 기분이 찜찜한 탓이다.
허나 호패까지 나온 마당에 더 이상 자전도군도 마냥 그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자전도군이 수긍하자 이백은 내밀었던 호패를 다시 품에 넣었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실례했네.”
더 이상 그를 붙잡아둘 명분이 없는지 자전도군은 물러났다.
그와 공동파 제자들이 떠났음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전도군이 물러났음에도 아직 인근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일다경쯤 지나서야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후우… 듣던 것보다 더 지독하군. …백 아우, 어찌 된 건가?”
“그게…….”
이백이 호북성 출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호패까지 나왔으니 제갈천기가 의아한 건 당연했다.
허나 곁에 있던 금검은 그 이유를 눈치챈 듯싶었다.
“무영, 자넨가?”
“무영이, 대공자를 뵙습니다.”
허공에서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제갈천기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제야 제갈천기도 어찌 된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금검이 제갈세가의 검이라면, 무영(無影)은 눈과 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뒷공작은 그의 전문 분야였으니 자전도군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던 것이다.
“무영 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사히 복귀할 수 있게 지원하라는 가주님의 명이셨습니다.”
금검이 제갈세가의 호법이라면, 무영은 오직 가주만의 비선이다.
그런 그가 움직였다는 것부터가 가주의 지시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는 가주께서도 이백의 존재를 신경 쓰시고 있단 반증이다.
“새 마차를 준비해뒀으니, 옮겨 타시지요.”
장거리 이동을 위해 그간 힘 좋은 사두마차를 타고 왔으나 주변의 눈에 뛸 수밖에 없다.
사두마차를 탈 정도의 인물은 흔하다고 할 수 없으니까.
그걸 염두해 무영은 평범한 마차를 준비했다.
제갈세가주의 눈과 귀라는 무영다운 처절함이었다.
그로인해 말을 자주 교체해줘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금검대원들이 타고 있는 말과 자주 교체하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렇게 그들은 빠르게 감숙을 벗어났다.
* * *
그 시각, 사천의 모처에서 중년 사내가 버럭 화를 냈다.
“뭐? 그 아이가 오고 있단 걸 왜 이제야 말해!”
당황할 만도 하건만, 비슷한 외모와 연배의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자명 형님, 뭘 그리 열을 내시오? 고작 계집아이 아니오? 그깟 게 온다고 형님의 위치에 아무런 영향도…….”
“당연한 소리!”
자명이라고 불린 중년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살기 어린 눈빛에 또 다른 중년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자명은 그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자원아, 네 말대로 그깟 계집아이가 뭘 할 수 있겠느냐. 허나 아버님이 뒤에 계신다면… 말이 다르다.”
“형님,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니오? 아버님께서 뭐가 아쉬워서 사내도 아니고 계집아이를 신경 쓰신단 말이오?”
자원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그를 자명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 자명의 시선에 자원은 불쾌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속내를 쉬이 드러내기에 그의 연륜이 보통이 아니었다.
“네 입으로 암비(暗秘), 그놈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야… 커험, 자성 형님의 핏줄이니 아버님께서 아예 신경 쓰지 않으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작 그 정도 일로 흥분하시다니, 형님답지 않소.”
자원은 다시 한번 자명의 속을 긁었다.
여전히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원을 보자 자명은 속이 터지는 듯 얼굴에 짜증이 그대로 드러났다.
자명은 화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성… 그놈의 핏줄이지. 아버님께서 물고 빨고 하던! 그놈의 핏줄!”
“…….”
자명의 눈빛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지금 입을 잘못 놀리면,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아는지 자원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어린 시절,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차별을 당해왔다.
장남이기 때문이 아니다.
타고난 재능이 너무 뛰어나 부친은 물론, 당가의 모든 어른에게 사랑을 받았다.
당자성. 그는 모든 당가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자 질투의 대상이었다.
허나 그런 그도 불귀(不歸)하고 말았다.
그 소식이 알려졌을 때, 가주는 식음을 전폐했고 사천당가는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정작 당자성과 같은 항렬에겐 기회였다.
포기해야 했던 걸, 손에 넣을 기회 말이다.
당자명의 눈빛에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절대… 곱게 본가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게야. 절대…….”
당자성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는 그를 보며 당자원은 득의했다.
애초 이런 반응을 보기 위해 당자명을 자극한 게 바로 그였다.
당자명은 그의 형이자 소가주이지만, 동시에 가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다.
소가주라고 해서 가주의 자리를 무조건 물려받는 게 아니다.
그가 무너진다면 기회를 다시 생긴다.
그 기회는 당자성의 여식이 만들어 줄 것이다.
‘역시… 이성을 잃을 줄 알았어. 부디 내 생각대로, 자멸해다오.’
* * *
“큭!”
“으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수십여 명이 목숨을 잃어 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야행복에 복면을 쓴 게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살수(殺手). 청부 의뢰를 받고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다.
허나 그들은 마차에 닿기 전에 사천당가의 고수들에 의해 제거당했다.
이번 임무를 위해 선별된 정예 고수들다웠다.
―정리했습니다. 호법님.
은신한 또 다른 사천당가 고수의 보고가 이어졌다.
허나 암비의 입에선 전혀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전원! 마차를 보호하라!”
살수들을 전멸시켜 마음이 느슨해진 사천당가 고수들은, 암비의 말에 마차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암비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그는 다짜고짜 암기부터 날렸다.
챙! 채채챙!
당외삼비의 암비가 던진 암기이건만, 상대는 너무도 쉽게 막아냈다.
그때 쇠 긁는 듯한 듣기 불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흘흘… 노부의 존재를 눈치챘다니… 노독물이 아끼는 개답구나.”
이순(耳順: 60세), 어쩌면 종심(從心: 70세)쯤 되었을 노인이었다.
그를 본 암비의 눈이 커졌다.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흑…야(黑夜)…….”
“맞다. 노부가 바로 흑야이니라.”
흑야의 대답에 암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노인의 정체가 정말 흑야가 맞다면 자신들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당령을 가주께 모셔다드리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 없다.
“아무리 그대가 흑야라고 해도 광오하외다. 감히 가주님의 분노를 감당하실 수 있겠소이까!”
“독선(毒仙). 노독물은 두렵지… 허나 백만 냥이라면… 포기했던… 본회를 다시 키워낼 수 있지. 자네가 노부라면 어찌하겠는가?”
흑야의 눈에선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는 한때 무림 십대살문의 하나인 흑야회의 주인이었다.
허나 살왕에 의해 사라진 망문(亡門)의 옛 주인일 뿐이다.
은혜는 열 배, 원한은 백 배로 갚기로 유명한 사천당가다.
그들에게 원한을 사는 건 너무도 두려운 일이지만, 흑야회를 재건해 살왕에게 복수하는 목표를 포기할 바에는 사천당가와 척을 지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죽는다면 복수라도 하고 죽겠다는 심산이었다.
백만 냥. 천문학적인 거금이다. 흑야회의 부활도 꿈이 아니니까.
암비는 양손에 각기 다른 암기를 쥔 채 수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흑야의 발을 붙잡고 있겠다. 북천(北川)으로 가라. 무조건 북천표국으로 가야 한다!
일개 표국 따위로 간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허나 암비가 지목한 북천표국은 결코 일개 표국이 아니다.
흑야의 발을 묶기 위해 암비가 움직였다.
“이대로 갈 수 없다!”
“어리석은 놈…….”
암비가 달려드는 사이, 당령을 태운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흑야는 이미 그들의 속셈을 눈치챘으나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암비만 제거하면 나머지는 있으나 마나 한 탓이다.
‘뒤를 부탁한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