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이별(離別)
―그 말을 믿으시는 것이오, 대공자.
금검의 전음에 제갈천기는 고갤 살짝 끄덕였다.
그리곤 그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상대는 청랑왕이십니다. 그런 기사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그가 펼친 보법, 분명 청랑보였습니다. 그러니 마냥 거짓이라 생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제갈세가 무리는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이백이 함께였다.
그는 살짝 주눅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분뢰도 방열에게 부상을 입힌 자가 맞나 싶은 모습이었다.
제갈세가의 대공자 제갈천기는 이백이 자신들이 찾는 청랑왕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백에게서 청랑왕의 흔적. 즉, 청랑보를 발견한 탓이다.
제갈천기의 물음에 이백은 사실대로 밝혔다.
그가 순진해서가 아니라 무서운 방열조차 제압한 제갈세가를 상대로 거짓말을 할 자신도, 뒷감당할 자신도 없던 탓이다.
물론 자신이 미래의 대한민국에서 왔다는 사실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어느 동굴에서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해서 깨우려고 했는데 그 노인이 가루가 되었고, 그 이후 청랑보를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에 제갈세가 고수들은 그를 의심을 눈초리로 바라봤으나 의외로 제갈천기는 인정해주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습니다. 두고 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으음…….
제갈천기의 말에 금검도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이백이 자신들과 동행하기로 동의한 이상 시간은 많다.
설사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한들, 더 이상은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제갈천기는 이백에게 동행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곳에는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들고 있고, 그들의 목적이 청랑왕의 유산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이 이백의 존재를 알게 되면 무사하긴 어려울 거라 말하며, 함께 가는 걸 권해주었다.
제갈천기의 제안이 마냥 선의라고 생각하긴 어렵지만, 더 나은 선택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모두 멈춰!”
“왜 그러십니까? 숙부님.”
갑자기 금검이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금검대 고수들 역시 검을 뽑아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 이백이 탄성을 질렀다.
“아~! 제 친구입니다. 설군아.”
“친구? 입니까?”
이백의 물음에 제갈천기가 되물었다.
그러자 작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고양이였다.
그제야 금검대는 검을 거두었다.
정작 금검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숙부님?”
“으음… 아니오.”
제갈천기의 물음에 그제야 금검도 검을 거두었다.
그는 뭔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고수답게 설군이 보통 고양이(?)가 아님을 어렴풋이 느낀 듯했다.
이백이 양팔을 벌리자 설군이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령이는 어쩌고 왔어?”
이백의 물음에 설군이 그의 품에서 뛰쳐나갔다.
설군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더니 달려가기 시작했다.
보통 고양이가 아니라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그 모습에 이백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머,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우리도 함께… 헐~”
이백이 설군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본능적으로 6성의 청랑보를 펼쳤다.
신법이나 경공이 아닌 오직 보법만으로 펼쳤을 뿐인데, 그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청랑왕의 보법다웠다.
그것을 본 제갈천기가 놀라고 말았다.
“우리도 따라가 보죠.”
“헉… 헉… 헉…….”
느낌이 좋지 않은 이백은 정신없이 산을 내려왔다.
청랑보는 평지만이 아니라 산에서도 그 위력이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다만 보법은 단거리에서 폭발적인 힘을 준다.
중거리는 신법, 장거리는 경공이 효율적이다.
허나 현재 이백이 익힌 건 청랑보라는 보법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갈세가 고수들이 하나둘씩 그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다만 그 수가 열이 넘지 못했다.
‘이것들이… 본가로 돌아가면 지옥 훈련이다!’
이런 상황에 금검은 이를 갈았다.
움찔.
열심히 달리던 금검대 고수들은 알 수 없는 한기에 움찔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산을 내려온 이들의 눈에 어느 오두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령아~! 형님~!”
이백의 외침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없는 건 대답만이 아니었다. 오두막 안에 있어야 할 장령 역시 없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누군가 나직하게 말했다.
“대공자님, 화골산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화골산…말입니까.”
금검대 고수의 말에 대공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화골산(化骨散)은 시체를 녹이는 독물이다.
다르게 말하면 누군가를 죽였다는 뜻이다.
이백이 동행하는 대신 내건 조건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부녀도 함께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들 부녀가 살고 있는 오두막이다.
그런데 그 근처에서 화골산의 흔적이 발견됐다.
화골산으로 시체를 녹였다면 그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현재 상황에서는 그들 부녀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타당하다.
장령의 정체가 사실 사천당가의 보옥이었단 사실을 어느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화…골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서, 설마… 아, 아니지요?”
“…….”
이백은 무협 게임의 스토리 작가였다.
그러다 보니 화골산의 존재 역시 알고 있었다.
저들의 반응을 본 이백은 맥이 풀렸는지, 주저앉고 말았다.
“려, 령아… 형님… 어찌… 이리 가실 수 있습니까! 이놈의 가족이 되어주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데 어찌 이리 가실 수 있습니까!”
울분을 터트리는 이백을 보며 제갈세가 고수들은 숙연해졌다.
그들은 이백과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알게 된 게 몇 시진도 채 되지 않으니,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무림인도 사람인지라 이백의 한스러운 울분이 그들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제갈세가 고수들은, 제갈천기는 이백이 감정을 털어낼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백의 두 눈에서 눈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제갈천기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족, 내가 되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걸리겠지만, 원수를 찾아주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그 감정은 잠시 가슴 속에 숨겨두십시오. 원수를 찾아낼 그 날을 위해.”
“…감사, 합니다.”
이백은 그가 자신에게 잘해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현대와 지금 무협 세상을 통틀어 처음 얻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제갈천기의 선의를 의심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멍할 뿐이다.
지자의 가문 제갈세가.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제갈세가의 대공자가 정이 이끌려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물론 아니다.
상대는 청랑왕의 유산을 이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
어떤 형태든 제갈세가에 득이 될 수 있기에 내린 결정이다.
어찌 보면 계산적일 수 있으나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제갈천기를 탓할 일은 아니다.
‘령아, 형님… 원수는 꼭 갚겠습니다. 그러니 지켜봐 주세요.’
* * *
대설산을 벗어난 이백은 제갈세가에서 준비한 마차를 탔다.
제갈천기의 가문, 호북 제갈세가로 가기 위함이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인 이백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청랑왕의 유산 때문이라는 거지…….’
제갈천기는 물론 대설산에 무림인들이 모여드는 건, 이곳이 청랑왕이 마지막 은거지란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연이라면 가족도 버릴 수 있는 족속이 바로 무림인이다.
전대 십왕(十王)인 청랑왕이 남겼을지 모를 유산을 두고 볼 리 없다.
‘그럼 령이와 아저씨는 죽인 자, 역시… 그들 중 한 명이겠지.’
이백은 이를 악물었다.
대단한 고수는 아니지만, 대설산 일대에서 손꼽히는 사냥꾼이 바로 장씨다.
평범한 사람이 그를 해쳤을 거라 생각하기 어렵다.
허나 맹수보다 빠르고, 바위조차 부순다는 무림인이라면 말이 다르다.
무엇보다 청랑왕의 유산을 손에 넣기 위해 수많은 무림인들이 대설산에 모여들었다.
대설산 아래 살고 있는 장씨 부녀를 의심해 해쳤을 가능성이 낮지 않다.
문제는 대설산에 모여든 무림인의 수가 수백이 넘는다고 한다.
그 중 누구 범인인지 알 수 없다.
차가운 이백의 눈빛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제갈천기가 나직하게 물었다.
“백 아우, 범인은 본가에서 꼭 찾아내겠네.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형님.”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유사가족이었던 장씨 부녀를 잃은 이백에게 제갈천기는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계산된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슬픔이 너무 큰 이백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의형제가 되었고, 그는 이백에게 유일한 가족이 되어주었다.
이백도 제갈세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오대세가는 물론 정파무림의 지낭 역할을 하는 가문이 바로 제갈세가다.
현 무림맹의 총군사 역시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일 정도다.
그런 제갈세가의 힘이라면 장씨 부녀를 해친 범인을 찾아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찾아내 줄 거라 믿고 싶었다.
“나만 믿게. 백 아우.”
“예 형님.”
제갈천기는 제갈세가주의 아들이지만, 아직 실권을 쥐지 못했다.
소가주가 아닌 대공자인 탓이다.
물론 대공자로서 어느 정도의 입김을 발휘할 수 있으나 후계자인 소가주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제갈세가는 가주의 아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소가주가 되고, 훗날 가주가 되는 게 아니다.
직계 혈족 중 그 뛰어남을 인정 받는 자가 소가주의 자리를 받게 된다.
제갈천기는 현재 사촌, 그리고 육촌들과 소가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자가 바로 제갈천기였다.
종손이면서 오성, 무재, 인망 등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 가장 소가주의 자리에 가까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촌, 육촌들이라고 무능한 게 아니다.
오히려 뛰어나다.
그러니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청랑왕의 유산이 정말 ‘그’ 청랑왕의 유산이 맞다는 건데…….’
이백은 현대에서 게임 스토리 작가였고, 그가 참여한 게임이 바로 [영웅 : 무림전설]이다.
스토리 작가라고 게임의 모든 스토리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에피소드 혹은 퀘스트 별로 구분해 담당하게 된다.
[영웅 : 무림전설]의 에피소드3 명칭이 바로 ‘청랑왕의 유산’이다.
원래는 이백의 담당이 아닌데, 담당 스토리 작가가 헤매고 있는 탓에 그가 합류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합류하기 전날, 이 세상에 오게 되어 실질적으로 참여까지는 못한 상황이다.
‘정말 그 청랑왕의 유산이 맞다면… 여긴 [영웅 : 무림전설] 속인 건가? 하지만… 너무 진짜 같잖아.’
게임 속이라고 생각하기에 너무 현실적이다.
비록 메시지창 때문에 게임 속이라는 가정이 높아지지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눈앞의 제갈천기만 해도 전혀 NPC라는 생각이 들지 않다.
만약 그런 거라면 장씨 부녀의 죽음조차 자신이 모르는 에피소드의 일부분일지 모르니, 가슴이 아려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니야. 게임 속이라면 청랑왕의 무공을 내가 익힌 게 말이 안 돼. 청랑왕의 무공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에피소드 ‘청랑왕의 유산’의 보상은 청랑왕의 원정만이다.
청랑왕은 늑대 이외에는 곁에 두지 않는 외로운 인물이다. 그렇기에 후신이 없고, 무공 역시 남기지 않는다는 설정이다.
원정은 죽은 청랑왕의 몸에 남았기에 보상으로 남을 수 있다고, 담당 작가에게 들었다.
‘혹시 [영웅 : 무림전설]과 유사한 평행세계는 아니겠지?’
전혀 근거 없는 가설은 아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드넓은 우주에는 수많은 평행세계가 존재하고 지구는 그 중 하나라는 이론도 존재하니까.
‘하아… 우선 강해지자. 강해져서 내 손으로 그들의 원한을 갚자. NPC든 아니든 상관없어. 그들이 내게 나눠준 따스한 온기는 진짜였으니까.’
이백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 시각, 대설산의 어느 동굴 앞에서 파안대소하는 자가 있었다.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