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부녀의 정체
“후후… 운이 좋았어. 령이와 백이 옷이나 한 벌씩 사줘야지.”
장씨는 오랜만에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열흘이나 보름에 한 번씩 방문해 그간 사냥한 짐승의 고기나 가죽 등을 판 돈으로, 곡식이나 필요한 물건을 사 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운 좋게 하수오 하나를 캐와서 주머니가 든든했다.
비단옷은 언감생심이지만, 그래도 두 사람에게 새 옷 정도를 사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장씨는 기분이 좋아졌다.
허나 그의 좋은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왕씨, 왕씨…….”
“장씨… 오셨소?”
왕씨는 포목점의 주인으로, 장씨가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구입해주는 인물이었다.
오래 거래한 덕분에 아랫마을 사람 중에선 나름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마을 분위기가 왜 이러오? 무사들은 또 뭐고?”
“아니, 산에 산다는 사람이 몰랐소?”
이곳은 백여 가구밖에 살지 않는 촌구석이다.
무사(武士)라곤 무관(武館)을 운영하는 관주 한 명과 그의 제자들뿐이다.
그들도 이삼류에 불과하니, 무사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그런 촌구석에 수십이나 될 법한 무사. 아니, 무림인들이 보이니 마을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은 당연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대설산에 대단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요 며칠간 저치들이 계속 마을에 오고 있소. 길잡이 찾는다고 하던데… 장씨는 관심 없소? 이씨랑 진씨, 황씨는 저치들 모시고 갔는데 말이오.”
“난… 관심 없소.”
보물(寶物). 무림인들을 이리 끌어들이는 보물이라면 분명 무공비급 내지는 영약, 신병이기 등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보물이라면 무림인들은 혈안이 될 테고,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를 부르게 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빠, 빨리 돌아가야 해!’
장씨의 본능이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라고. 그리고 멀리 도망치라고 말이다.
허나 본능이 보내는 경고는 단순히 저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령이를… 령이를……!’
장씨는 이를 악물고 달려갔다.
허나 그런 그의 행동은 안타깝게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건 누군가의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그런 장씨의 뒤를 은밀하게 쫓는 자들이 있었다.
“헉… 헉… 헉…….”
다행히 오두막은 멀쩡했다.
걱정과 달리 이곳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듯싶었다.
“려, 령아! 령아!”
“으응? 아빠? 아빠!”
설군과 놀고 있던 장령은 아비 장씨의 외침에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장씨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허나 너무도 다급한 장씨는 장령의 사랑스러움에 화답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리 오너라! 빨리!”
“예? 예!”
장령은 아비의 외침에 당황하면서 그의 곁으로 왔다.
장씨는 그런 장령을 들쳐 안았다.
아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장령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빠! 왜, 왜 그러세요?”
“령아, 아비를 꽉 잡거라! 지금부터 달려갈 거니!”
“사, 삼촌은! 백이 삼촌은요!”
장씨는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백을 잊고 만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이백은 그에게 또 다른 가족이었다.
허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자칫 장령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아빠!”
“…….”
장씨는 장령의 외침에도 입을 다문 채 움직이려고 했다.
이백을 포기하면서까지 내린 결단이건만, 그조차 늦고 말았다.
그들 부녀의 앞을 험상궂은 세 사내가 가로막고 있었다.
“수상한 놈이군.”
“혹시 청랑왕의 유산을 얻은 거 아니야?”
그들은 어디서나 볼 법한 동네 왈패가 아니다.
살인을 해본 적이 있는 무림인이다.
그들의 말에 장씨는 경악했다.
“처, 청랑왕! 시, 십왕(十王)의 청랑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오? 청랑왕을 알아? 그럼 촌부는 아니란 말이군.”
무림인의 말에 장씨는 아차 싶었다.
허나 그가 청랑왕이라는 말에 당황한 건 당연했다.
무림에는 고수들이 모래알처럼 많지만, 왕의 칭호를 받은 자는 어디 흔하겠는가.
십왕(十王).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와 그에 걸맞은 거대한 세력의 주인들.
청랑왕은 그런 십왕 중 한 명이다.
정확히는 전대(前代) 십왕이다.
장씨가 청랑왕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그가 평범한 촌부가 아니란 걸 의미했다.
“주, 주제를 알고 낙향한 퇴물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여식과 사, 사냥으로 입에 겨우 풀칠만 할 뿐입니다! 미, 믿어주십시오!”
“그런 양반이 왜? 도망을 치실까?”
“그, 그건…….”
장씨가 급히 떠나려는 건, 청랑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곳 대설산에 정말 청랑왕의 유물이 있다면, ‘그들’의 이목이 쏠려 ‘그들’ 역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러한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진실을 밝히면 그건 또 다른 위험을 불러일으킬 테니까.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장씨의 태도는 오해만 더 일으킬 뿐이었다.
“내놔. 주제를 안다면 내놔. 그럼 살려는 줄 테니까.”
“저, 정말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장령은 이 상황이 두려운지, 아비인 장씨를 더욱 꾹 안았다.
그걸 느낀 장씨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허나 시간이 지체되는 걸 우려하는 건, 사내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짜증 나게 하네. 그냥 죽이고 찾읍시다. 딴 새끼들이 냄새 맡으면 귀찮아지잖수?”
“그래, 막내. 네가 처리해라.”
세 사내 중 막내라는 자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날이 두툼한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장씨 부녀. 특히 장령을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야들야들한 애새끼를 베는 게 얼마 만인가?”
“다, 다가오지 마라!!”
하필이면 무림인 중에서도 사파(邪派) 쪽 고수인 듯싶었다.
장씨의 호통에 사내는 오히려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다가오면 어쩔 건…….”
그 순간, 한 자루의 비수가 사내를 향해 날아왔다.
상당히 빨랐으나 사내도 경험이 많았는지 도면(刀面)을 들어서 막아냈다.
챙!
“새끼, 깜짝이야!”
사내가 방심하고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안타깝게도 그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장씨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장씨는 사실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다.
허나 무림고수라곤 할 수 없다.
그저 이류 무공 몇 수를 배웠을 뿐이다.
그에 비해 눈앞의 사내는 나름 고수라 부를 수 있는 자다.
“병신… 비수를 던진다고 당할 줄 알았냐? 비수 따위… 컥!”
“마, 막내야!!”
“누구냐!!”
장씨를 농락한 도객의 미간에 한 자루의 비수가 꽂혔다.
장씨의 솜씨는 아니다.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격이 다른 비도술이었다.
찰나의 순간 의제를 잃은 두 사내는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자 수십여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척에 나타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자신들 이상의 고수란 의미였다.
두 사내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만이 아니다.
장씨마저 절망하고 말았다.
‘끝…이구나.’
그러는 사이 정체불명의 무리가 다가왔다.
“감히 귀한 분께, 이를 드러내고 살기를 바라더냐.”
“우린, 난주삼랑…….”
감숙성의 성도(省都) 난주에서 제법 이름을 알리고 있는 세 의형제, 난주삼랑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나같이 일류고수였으며, 눈치가 빨라서 감당이 안 될 자는 건드리지 않은 게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였다.
허나 그것도 오늘에서 끝나고 말았다.
“늑대인지, 쥐인지 상관없다. 대 당가의 보옥(寶玉)께 이를 드러낸 죄. 죽음으로 갚아라.”
“다, 당가! 그럼 저 애가…….”
“감히!”
그 순간 난주삼랑의 첫째와 둘째는 절명하고 말았다.
그들이 일류고수라고 하지만, 오대세가의 하나인 사천당가에서 차출된 고수들과 비교하는 건 모욕이었다.
중년 사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치워라. 애기씨께 보일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존명!”
중년 사내의 명이 떨어지자 몇몇이 난주삼랑의 곁으로 갔다.
그리곤 품에서 약병을 꺼내 뿌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이 녹기 시작했다.
약병에 든 물질은 화골산(化骨散)이었다.
장씨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 오해를 하신 거 같습니다. 이, 이 아이는 필부의 여식인 장령이라고…….”
“철위단(鐵衛團)의 장철우 협사.”
“……!!”
중년 사내의 말에 장씨. 아니 장철우의 눈을 질끈 감았다.
수년간 숨기고 있던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고 말았다.
장철우는 장령의 귀를 막았다.
“꼭, 이 아이를… 죽여야만, 하시겠습니까! 제발… 령이를… 살려주십시오. 제발…….”
장철우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어차피 무력한 자신이 발악해봤자 이자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장령만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은 이보다 더 비굴해질 수 있었다.
“아, 아빠! 아빠를… 용서해주세요!”
“장 협사, 오해하시는 같소. 우린 애기씨를 해하려는 게 아니오. 가주님의 명으로 오히려 보호하려는 것이오.”
중년 사내의 말에 장철우는 멈칫했다.
그는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그…게 사실이십니까?”
“소개가 늦었구려. 본인은 가주님의 명을 받고 온 당혼이오.”
“당외삼비(唐外三秘)!”
장철우는 경악했다.
평범한 고수가 아닐 거라 생각은 했지만, 무려 당외삼비의 당혼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사천당가의 가주는 소가주 시절 우연히 자질이 뛰어난 고아들을 거두었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구해준 주인에게 은혜를 갚겠단 일념으로 지옥과 같은 수련을 이겨냈고, 결국 엄청난 고수가 되었다.
소가주가 가주의 지위에 올랐을 때, 그들에게 당씨 성과 호법의 지위. 그리고 당외삼비라는 칭호를 내렸다.
당혼은 당외삼비 중 암비(暗秘)라고 불리는 암기술의 대가다.
그런 당혼을 보냈다는 건, 정말 가주의 명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당외삼비가 오직 가주의 명령만 받는다는 건, 너무도 유명한 일이니 말이다.
“맞소. 가주님께서 애기씨를 안전하게 본가로 모셔오라 명하셨소. 협조…해주시겠소?”
“…그리…하겠습니다.”
협조라고 칭했으나 강요와 마찬가지였다.
당 가주의 명령을 거절할 자가 천하에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은 저들로부터 장령. 아니, 당령을 지켜낼 힘도 없다.
당령은 장씨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아빠,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응, 진짜 집에 가는 거야.”
감히 사천당가의 보옥에게 반말을 하는 건 무례이지만, 장철우는 양부와 같은 입장이니 그들이 지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모른 척했다.
“그럼 백이 삼촌은 어떻게요?”
“저… 당 대협, 식구가 한 명 더 있습니다. 함께 가면 안 되겠습니까?”
“미안하오. 가주께서 허락하신 건 장 협사까지요. 허나… 가주께 서신을 보내 여쭐 테니, 허락하시면 후일 데려오겠소. 본인이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요.”
가주의 심복인 그이니, 이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던 것이지. 다른 자였다면 이 정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만큼 사천당가는 폐쇄적이고, 가주의 권위는 지엄했다.
“백이 삼촌은 나중에 데려와 주신대.”
“아, 알겠어요. 아빠… 엇! 서, 설군아!”
당령은 떼를 쓰면 아비가 난처하다는 걸 알고 순응했다.
이백이 동행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당령의 품에서 그녈 지키던 설군이 뛰쳐나갔다.
영물(?)답게 당가의 고수들조차 반응하지 못하게 빠르게 사라졌다.
‘호오? 영물이었나? 아쉽군. 애기씨만 아니었다면 손에 넣었을 텐데…….’
게임 속 만수조종이 되었습니다
— 문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