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 무극신공(無極神功)
그제야 초비향은 조금 전 자신의 옆구리를 공격해 온 기세가 목우성승을 양단 한 후 자신의 몸마저 분리하려 했던 대전사의 도강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목우성승은 대전사의 단 일 도조차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당한 것이다. 그는 멍하니 대전사를 바라보았다.
'이건 인간의 강함이 아니다. 도저히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초비향은 고개를 흔들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대전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전사가 고요한 시선으로 초비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으로 자네에게 진 빛을 갚았다고 생각하겠네."
초비향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빚이라고?"
대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제자가 자네에게 빚을 진 것으로 아네, 그녀를 대신 했다고 생각하게."
이제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초비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 것도 서러운데. 이런 식으로 동정을 받는 것은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비참한 기분을 지을 수 없었다.
대전사는 그런 초비향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그 기분을 잘 기억해 두게. 하지만 경거망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살아 있어야 복수도 하겠지. 그렇지 않은가?"
"후후"
초비향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고마울 뿐입니다."
"지금 심정을 가슴에 담고 노력한다면 언제고 나에게 다시 도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네."
대전사는 초비향에게 그 말을 던진 후 쓰러져 있는 검혼에게 다가갔다.
그는 도로 검혼의 몸을 툭 치면서 말했다.
"아직도 이곳에 도전할 자가 남아 있는가?"
당연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십사 대 고수 중 둘이 덤벼서 무기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졌는데 누가 감히 그에게 도전할 수 있겠는가?
문득 거기까지 생각했던 야한이 흑칠랑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시선이었다.
흑칠랑은 의연한 시선으로 대전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정말 남의 일을 보고 있는 것처럼 태연했다.
조금도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역시 선배님은 정말 대단하구나.'
존경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선배님은 정말 대전사에게 도전하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한은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신이 났다.
천하에 모든 고수들이 보는 것만으로 공포심을 심어준 대전사에게 일개 살수가 도전을 한다.
얼마나 멋진 본보기가 되겠는가?
그 동안 정파의 협객이랍시고 으스대던 인간들에게 그야말로 일침을 가하는 일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나직하게 말했다.
"선배, 나는 선배를 믿소. 이럴 때 선배가 나서서 대 살수의 힘을 보여주시오."
똥배에 힘까지 줘가면서 말하는 야한의 눈은 정말 초롱초롱 빛이 나고 있었다.
한편 흑칠랑은.
'으으 저게 인간이냐? 인간이 어떻게 저리 강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런데 저런 인간과 권왕이 맞먹는단 말이지, 으이 씨 다 때려 치고 중이나 되던지 해야지. 이건 부처가 나를 미워하는 게 분명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고 용기가 수직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살수였다.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자신의 감정이 밖으로 새어 나오면 안 된다. 그는 손에서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훌륭하게 태연을 가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같은 삼 대 살수인 야한이 속을 정도이니 그는 과연 삼대 살수의 대형다웠다. 한데 그냥 주저앉고 싶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야한이 기가 막한 제의를 해 온다.
흑칠랑의 고개가 천천히 야한에게 돌아갔다.
'이 시키가 나를 여기서 죽이려고 하네. 이걸 콱.'
정말 야한을 죽이고 싶어서 고개를 돌린 흑칠랑은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저 순수한 야한의 눈빛.
그의 진실을 한 번에 읽을 수 있었다.
갑자기 대 살수로서의 자부심이 확 치밀어 오르면서 대전사와 결전을 불사하고 실은 생각이 들었지만. 흑칠랑이 누구인가? 그 정도 감정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최소한 지금 덤비면 죽는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야한의 사치스런 생각 때문에 죽고 싶진 않았다.
뿐이랴, 한상아 그녀를 두고 어찌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수 있겠는가?
"고수는 아무데서나 검을 뽑지 않는 것일세. 내가 능히 저자를 상대할 수 있지만, 이는 정파의 수많은 무인들에게 기회를 빼앗아 가는 파렴치한 일일세. 그리고 우린 살수, 청부 받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은 진정한 살수의 도가 아닐세. 자네도 이 점을 절대 잊지 말도록."
야한은 다시 한 번 존경스런 시선으로 흑칠랑을 보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 살수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한데 결국 못 싸우겠다는 말이 아닌가?
야한은 흑칠랑의 진심을 이해하느라 모자라는 머리를 죽어라 돌려야 했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아니 더 생각 할 여유가 없었다. 돌연 무림맹 쪽의 선승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소림의 선승들 중 일부가 결연한 의지로 목우성승의 복수를 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때 서문정이 나저며 말했다.
"모두 멈추세요. 목우성승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모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날카롭게 호통을 친 서문정이 선승들 중 수좌라 할 수 있는 목영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지금 나서면 모두 덧없이 죽을 뿐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행히 목영대사는 지혜로운 자였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사제들을 보며 말했다.
"군사의 말이 맞네. 사제들은 모두 자리로 돌아가게, 지금 덤비는 것은 모두 개죽음일 뿐이네."
선승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사형인 목영대사의 말을 거역할 순 없었다. 목영은 두 명의 사제와 함께 앞으로 나와 목우성승의 사체를 거두었다.
그는 목우성승의 사체를 거두는 내내 단 한 번도 대전사를 바라보지 않았다. 참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고, 눈에 맺힌 물기가 들킬까봐 싫었다. 십팔 나한 중 한 명인 목번은 결국 흐느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대전사는 그런 선승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초비향과 서문정을 보고 말했다.
"더 이상 도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군."
서문정이 얼른 나섰다.
이제 더 이상 여기서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덤비든 결과는 마찬가지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이는 군사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이라면 대전사도 다른 무인들에겐 별다른 흥미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지금 누가 감히 대전사님께 도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저희가 패했음을 시인합니다."
대전사가 서문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인가?"
"서문정이라 합니다. 부족하지만 지금 무림맹에서의 직책이 그렇습니다."
"영리한 아이구나. 어차피 나도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녀는 대전사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대전사는 검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아이는 내가 데려 가겠다."
그 말을 듣고 서문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분은 무림맹의 호법으로 이미 결전에서 패한 무인입니다. 갑자기 그 분을 데려 가시겠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는 나와 같은 철씨일세 모르겠는가?"
서문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제야 대전사가 검혼과 손속을 나누기 전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는?
'설마 검혼이 대전사의 후예 중 한 명으로 간세였단 말인가?'
대전사는 서문정의 생각을 읽은 듯 조금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말게. 이 아이는 현제 원의 하나 남은 왕자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 아이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네."
대전사의 말에 초비향과 서문정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제야 검혼의 이름이 철씨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하던 마음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모두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자신을 보자 대전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간단한 일이네. 이 아이의 조부는 나의 친동생이었고, 한족의 여자와 결혼을 하였지. 원나라가 패망 할 때 원나라의 황권에 기대어 부귀영화를 누리던 몇몇 한족 가문이 배신을 하였네, 후에 나는 그 가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그 가문 중 한 곳이 검혼의 조모집안이었을 뿐이네, 그렇게 돼서 지금까지 인과 관계가 이어져 내려오게 된 것일세, 이 아이의 아비가 나에게 아내의 복수를 하려 하였던 것일세. 덕분에 중원에 대한 나의 꿈을 지금까지 숨기고 살아야 했지. 당시 나에게도 동생의 도전은 충격이었었고, 사실 조금 두려운 부분도 있었네, 왜냐하면 내 동생의 자질은 나에게 뒤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일세. 지금까지 직책감과 그와의 결전이 두려워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결국 이렇게 마무리 되는군."
대전사의 이야기를 들은 모두는 침통한 모습으로 대전사를 바라본다. 몽혼지약의 숨은 이면에 그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만, 그들을 놀라고 가슴 떨리게 만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십사 대 고수에 버금가는 검혼이 몽고의 왕자란 사실이었다.
두 명의 고수가 쓰러지고, 믿었던 한 명은 적이 되었으니 그들이 받은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서문정은 얼른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권왕에 의해 철씨 가문의 모든 혈족이 죽었다. 결국 대전사는 검혼을 데려다 몽고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건 좋지 않다. 검혼의 자질은 조천왕 따위와 비교할 상대가 아니다. 다시 제 이의 대전사가 나을 수도 있다.'
서문정은 마음이 다급했지만, 대전사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검혼을 바라보았다.
검혼의 몸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더니 대전사의 가슴 높이에서 멈추었다.
대전사가 천천히 돌아서서 죽림장을 나가자 검혼은 허공에 뜬 채 대전사의 뒤를 따라간다. 두 사람이 그렇게 사라질 때까지 모든 시선은 그 두 사람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권왕이 대전사를 이길 수 있을까?
서문정은 가슴이 더욱 답답해진다.
싫던 좋던 이제 대전사를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은 권왕밖에 없다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무인들이 깨우치고 있었다.
아운은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무극신공이 그의 미세혈관까지 흘러들어가면서 더 없이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아마도 이번에 깨우친 것은 후에 광풍전사단을 상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대전사다. 과연 지금 내가 대전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특히 이제 마음 먹은 대로 사용하게 된 삼절황을 조금 더 연구하고 싶었다. 연구할수록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운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먼저 광풍전사단을 상대할까? 그들을 상대하면서 내 무공을 점검한 다음 대전사를 상대하면 더 유리하지 않을까?'
아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전사가 아무리 강해도 삼백의 광풍전사단보다는 못하다. 실제 그들의 뭉친 힘은 강호 무림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 혼자서 광풍전사단을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운은 광풍전사단을 상대하고 싶은 호승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우선 광풍전사단 자체는 몇 명의 대전사가 합한 것만큼이나 강하지만, 그들 개개인이 자신보다 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삼절황과 암혼살문의 모든 비기를 연구하면 광풍전사단을 상대할 수 방법은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현재로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대전사와의 결전은 한 번의 고비만 넘겨 이기면 된다. 하지만 광풍전사단과의 대전은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하고 그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방법이 있을 것도 같다.'
아운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 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 중 어느 쪽을 먼저 상대할지 모르지만 항상 그에 대한 준비는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당장 이곳을 나가자마자 둘 중 하나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아주 재수가 없으면 둘 다 한꺼번에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아운은 고개를 흔들며 천천히 마음을 안정시켰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 온지도 어연 보름 정도는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정확하지는 않았다.
최소 그 정도일 것이다.
일단 이 곳을 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그 동안 강호 무림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자칫하면 나를 끌어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
아운의 눈이 밝게 빛났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운은 심호흡을 한 후 비밀통로를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가려 하였지만, 건물이 무너지면서 밀실 밖의 통로들이 전부 주저앉아 막혔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밀실 천정으로 조그마한 바람구멍만 남아 있었는데, 그 바람구멍으로는 사람이 빠져 나갈 수 없었다.
다행히 바람구멍은 쇠로 만들어져 있고, 비밀통로가 있던 건물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곳과 통해 있어서 아운이 보름 동안 그 안에 있을 때 밖의 신성한 공기를 유통시켜 주었었다.
아운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막혔으면 부수고 나가면 그만이다.
그것이 아운의 생각이었다.
아운의 주먹에서 밝은 광체가 뿜어지더니 천정의 돌 벽에 닿았다. 그리고 광체는 그 벽을 그대로 뚫고 올라갔다. 청강석과 흙들이 수증기로 변하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진정한 위력의 태양무극섬이 펼쳐진 것이다.
'후후 삼절황은 무극신공의 구 단계가 완전해져야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온다. 특히 태양무극섬은 더더욱 그렇다는 사실은 나에게 다행이다. 내가 구 단계를 완성한 만큼 가장 강력한 무기를 지니게 되었으니.'
구 단계의 완성은 그의 무공을 완성시켜 준 것 보다도 태양무극섬의 진정한 위력을 마음껏 쓸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아운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사제, 권왕이 혈사곡 안에 숨어 있는 것이 확실한 것인가?"
능유환의 물음에 야율초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시 권왕은 쉽게 움직이기도 힘들 만킁 중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무려 열흘 동안이나 비밀 통로는 물론이고 그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의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가 혈궁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권왕이라고 해도 그런 부상으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흠. 그렇다면 혈궁 내에 또 다른 비밀 통로가 있고, 그 비밀 통로는 어디든 밀실과 통해 있을 거란 뜻이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땅까지 전부 파헤쳐서 확인을 했지 않은가?"
"건물 지하 통로는 미로처럼 얽혀 있습니다. 그 중 한 두개 정도가 또 다른 밀실과 연결되어 있고, 건물이 무너질 때 자동으로 차단되게끔 만들어 졌다면 저희들이 못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몇 개의 미로가 바닥과 함께 무너져 있었던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듣고 있던 능유환과 사마정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곳은 만들어진지 수백 년이나 된 혈궁이다.
지하에 어떤 비밀 통로가 있고 밀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권왕이 이곳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능유환은 무링맹에서 당한 한을 이곳에서 풀 생각이었다.
그의 말대로 아운이 이곳에 있다면 그의 생각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사마정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능사형의 말에 동의합니다. 대전사님인 사부님도 와 계시고, 엄사형을 비롯하여 광풍전사단 전부가 준비를 하고 대기 중입니다. 권왕이 아무리 강해도 이번만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야율초가 약간 굳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능유환과 사마정이 야율초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구중혈이라 불리는 혈사곡입니다. 혈사곡의 넓이가 생각보다 넓은데다가 모두 아홉 곳으로 나누어진 곳입니다. 또한 그 한 곳 한 곳이 각 대문파 하나의 크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기도 쉽지 않고 어디로 빠져 나갈지 알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엄사형과 광풍전사단을 요소요소에 나누어 흩어 놓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미 보름이 지났으니 그는 내외상을 거의 치유했을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그가 싸우지 않고 도망치려 한다면 우린 지금까지 기다린 공이 허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본 권왕의 신법은 대전사님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으음, 결국 광풍전사단이 그의 진로를 막고 그 사이에 사부님이 그를 처리한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단지 걱정이라면 권왕이 숨어 있는 밀실에 또 다른 지하통로가 있어 혈사곡 밖으로 연결되어 있을 경우입니다."
능유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야율초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사마 아우가 삼백의 광풍사와 함께 잠시 외곽을 돌아보겠네."
"그래 주시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일세."
"그렇다면 제가 지적하는 곳만 중점적으로 돌아봐 주십시오. 비밀통로가 연결되어 있을만한 곳을 추측해 본 곳입니다. 그리고 혹여 권왕을 만난다면 겨루지 말고 그저 시간만 끌어 주십시오."
"알았네."
구중혈.
혈사곡 내의 혈궁을 따로 부르는 말이었다.
아홉 개로 나누어진 구역은 혈궁의 궁주인 초비향과 중립지역이 있고 이외의 일곱 구역은 칠사가 각 한 구역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홉 개의 구역 중 한 곳.
"퍽"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땅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누군가 보았으면 기겁을 했으리라.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한 명의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바로 아운이었다.
아운은 고개를 밖으로 내미는 순간 한 명의 여인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쳐야 했다.
참으로 고아한 미모를 지닌 중년의 여인.
아운의 표정이 조금 딱딱하게 굳어졌다.
땅속을 뚫고 올라을 때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중년의 여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여자의 눈동자는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이미 누군가가 땅속에서 올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전혀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운은 피식 웃었다.
"내가 이곳으로 나올지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당신은 누구요?"
여자는 잠시 아운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이 권왕인가요?"
아운은 땅에서 올라온 후 손으로 옷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 낸 후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아운이 능유화 선배님을 뵙습니다."
능유화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제가 능유화인지 어찌 알았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혈궁에 지금 능선배님과 같은 극강한 무공을 지닌 중년의 여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칠사 중 또 한 명의 여고수라 할 수 있는 요가람은 제 손에 이미 죽은 다음입니다. 그리고 제가 숨어 있었던 밀실은 초비향선배님이 무공을 수련하던 곳. 당연히 그밀실과 연결된 곳에 계시니 제가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능유화는 요가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몹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요사저가 죽었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능유화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 었다.
칠사 중 자신과 더불어 단 두 명뿐이었던 여자였기에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군요, 언니가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군요, 내가 상처 받을까봐 아무도 언니의 죽음을 내게 알려주지 않은 것 같아요."
아운도 가슴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적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그 인과가 얽힐 수도 있고, 한 명의 죽음으로 인해 그와 얽힌 인연들이 이렇게 슬퍼하지 않는가? 하지만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으면 그녀로 인해 내 편의 사람들이 죽었을 것 아닌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구나.'
아운은 가볍게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제가 그녀를 죽였습니다."
능유화는 조용히 아운을 바라보았다.
슬픔이 가득했지만, 어떤 원망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다.
"죽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전쟁이에요. 그 쪽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저 역시 그 전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걸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저는 정말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능유화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보다니 듣던 대로 현명한 분이시군요."
"소문은 과장되게 마련입니다."
그녀는 입가에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아운을 바라보았다.
아운은 그녀의 미소 안에 감추어진 또 다른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사저인 요가람의 죽음과는 다른 아픔이었다.
그녀와 초비향의 관계를 잘 아는 아운으로서는 그녀의 아픔이 무엇인지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운은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다.
때로는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운이었다. 굳이 지금 말을 하여 그녀의 상처를 끄집어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능유화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부님과 광풍전사단 전부가 모여 있습니다."
아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들이 모두 있다면 아운으로서도 상당히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침상 밑에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그곳을 통해 혈사곡 밖으로 나가세요."
아운은 잠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가 다시 한 번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염치불구하고 그 도움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로 인해 선배님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능유화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조국과 동족을 위해 일했으니, 이제부터는 남편을 위해 조그마한 일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이 정도는 누구라도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 마음 제가 초비향 선배님께 반드시 전해 드리겠습니다."
능유화의 눈매가 슬며시 붉어진다.
당장이라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그분에겐, 그저 죄스러을 뿐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슬쩍 돌리면서 일어선다.
아운은 그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럴 땐 빨리 피해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아운은 능유화의 침상을 한쪽으로 민 다음 빠르게 그녀의 혈을 점해 침상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뒤에 편할 것입니다. 물으면 저에게 제압되었다고만 말씀하십시오. 여기 비밀통로는 제가 초비향선배님에게 들은 것으로 하면 될 것입니다. 점혈은 두시진 후 자연히 풀릴 것입니다."
능유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운은 그녀의 아혈마저 점해 놓고, 침상 밑의 비밀 통로로 사라졌다.
비밀통로는 혈사곡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또 다른 계곡으로 이어져 있었다. 통로를 막고 있는 바위를 밀치고 밖으로 나온 아운은 오래 동안 어둠에 익숙한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하였다.
상큼한 공기가 그의 폐부 깊숙이 들어오며 그의 기분을 정화시켜 주었고,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사방을 훑어 보았다.
이제 가을로 가득한 산과 산이 중첩되어 있는 계곡의 비경은 절로 감탄이 나을 만큼 아름다웠다. 단지 인적이 없으리라 생각 되었던 계곡에 능유환 일행이 있었다는 점이 예외라면 예외라 할 수 있었으리라.
그들을 바라보는 아운은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비밀통로를 나서기 전에 이미 이들의 기척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아운을 본 광풍사는 그럴 수 없었다.
"저기 누군가 있습니다."
능유환과 사마정을 비롯한 광풍사가 아운을 바라볼 때 아운의 신형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권왕이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릴 때 삼백의 광풍사들은 이미 광풍멸사진을 이루며 몰려들고 있었고, 능유환과 사마정은 나란히 선 채 아운을 맞이하였다.
두 사람은 막상 아운을 보자 긴장이 되는 듯 얼굴이 굳어졌다.
이미 아운의 무공수위가 십사대 고수 이상으로 강해진 것을 모르는 강호인은 없었다.
아운은 능유환과 사마정을 비롯해 삼백의 광풍사를 훑어보면서 말했다.
"그냥 물러서진 않겠군."
사마정이 자신의 무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곳을 빠져 나가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내 마음먹기 나름이고 무기를 뽑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뽑으면 피를 보게 될 것이오."
"오만하군, 어디 누구의 피를 보게 되는지 보자."
아운의 말을 듣고 사마정이 주춤할 때, 능유환이 화가 난 듯 말하며 자신의 검을 뽑으려 하였다. 그 순간 아운의 주
먹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허공을 질러갔고, 그 주먹에서 번쩍하는 빛이 쏟아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검을 뽑으며 손을 들어 올린 능유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손목부터 깨끗하게 잘려 있었고, 잘린 손은 이제 절반쯤 뽑은 검을 쥔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
손에서 핏줄기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능유환은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놀란 사마정이 얼른 그의 손을 지혈하고 나서야 능유환은 정신을 차렸다.
어디 능유환 뿐이겠는가? 지켜보던 광풍사와 사마정도 혼이 나가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얼마나 빠르기에 십사 대 고수 중 한 명인 능유환이 무기조차 뽑아 들지 못했단 말인가?
아운이 차가운 시선으로 사마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소. 대전사에게 권왕이 도전하겠다고 전해주시오. 사십 일 후 종남산 근방 군야평에서 만나자고. 단 그 한 달 간은 서로 피를 보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도 꼭 전해 주길 바라겠소."
사마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삼백의 광풍사로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상대란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운은 오연히 그들을 바라 본 후 신법을 펼쳐 그 자리를 떠났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사마정과 능유환, 그리고 삼백의 광풍사들은 모두 아운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이 고정된 채 돌로 만든 조각들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모두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어쩌면 사부님과 겨룰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사마정은 누군가를 사부인 대전사와 비슷한 경지에 놓고 저울질한 것이 언제 적 일인지 모른다. 오로지 유일하게 대전사와 견줄 수 있었던 인물은 대전사의 사제인 아무르칸뿐이었었다.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은 공허했다.
별은 총총하게 무리지어 떠 있었지만, 그녀는 그 별들 중 어느 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가슴이 점차 심한 파도를 타고 있었다.
아련하게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녀의 평정심을 한없이 흔들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미 임자가 있는 남자를 사랑해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녀의 이성을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말아야 될 사람을 사랑하게 된 여자의 아픔을 누가 쉽게 이해 할 수 있으랴! 옥룡 장무린은 아운을 생각하면서 아픈 가슴을 그렇게 보듬어야만 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닌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구나 차라리 흐르는 대로 두었다가 아픔이 닳고 닳아 잔잔해지면 그때 잊을 수 있으려나.'
옥룡은 살며시 땅에 앉았다.
사부이자 양부인 장우사가 죽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그녀는 근래 들어 무척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현재 그런 그녀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힘들여 앉아 있는 옥룡의 곁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다가서고 있었다.
"여기 있었는가?"
옥룡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그녀는 한 눈에 검왕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셨습니까?"
검왕은 잔잔한 표정으로 옥룡을 바라보았다.
친우의 제자였다.
이제 친우가 죽었으니 자신이 돌봐줘야 한다. 한데 몽골과의 결전이 겹치면서 그에게도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그녀를 보듬어 주어야만 한다.
"밤에 잠이 안와 산책을 하는 중이었네. 그런데 나처럼 잠이 안 오는 사람이 또 있어 보이기에 호기심으로 와 보았네."
장무린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흠, 친우가 죽은 후 제대로 찾아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무심했지?"
"그렇지 않사옵니다. 저는 나름대로 편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검왕은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친우가 제자 한 명은 참 잘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녀인 북궁연에게 뒤지지 않는 재녀였다.
"권왕 하 공자를 그리고 있었는가?"
검왕의 직접적인 물음에 옥룡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룡은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망설이며 말을 못하자 검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랑은 죄가 아닐세."
옥룡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 마음을 제가 잡을 수 없는지라."
"그게 죄송할 일인가? 나도 자네와 같은 시련을 겪은 적이 있었네. 참으로 좋아한 여자가 있었지, 그리고 우리 사이는 상당히 깊은 관계였었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지 못했지. 아주 오래 전 일일세. 결국 나의 고백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어."
옥룡은 뜻밖이란 표정으로 검왕 북궁손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네, 그녀는 몽고의 여자였지. 얼마 전에 그녀는 나의 손서에게 죽었네. 지금은 비록 잔영조차 남지 않은 감정이지만, 나는 그녀를 위해 명복을 빌어 주었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을 하진 못했지. 그러기엔 내 아들의 어미에게 미안했단 말일세. 난 그녀의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사랑을 잊을 수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할 것일세. 그녀가 어느 나라 여자이던, 어떤 의도로 내게 접근했던 중요한 것은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일세."
비록 검왕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옥룡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왕은 옥룡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랑은 역병과 아주 비슷한 면이 있지. 참으로 독하고 질긴 병이야, 자칫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 초기에 잘 다스려야 하지만, 때가 지나면 처방전이 없게 되네."
옥룡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 손녀는 그리 박하지 않은 아이라네. 자네가 노력하여
먼저 내 손녀의 허락을 얻게 그럼 내가 손서를 설득해 보지."
검왕의 갑작스런 말에 옥룡이 놀라서 검왕 북궁손우를 바라보았다. 검왕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요즘 삼처 사첩을 얻었다 하여 욕이 되지 않는 세상일세. 권왕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옥룡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검왕을 바라보던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검왕 북궁손우는 애처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큰 지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사는 동안만이라도 자신이 돌봐줘야 하는 것이다.
검왕 북궁손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밤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옥룡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검왕의 넓은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눈엔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운에게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운명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무림맹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의 조장인 백영은 점창파의 일대 제자로 대정회 소속의 무사였다.
그는 아직도 한 시진이나 남은 근무시간을 원망하며 지루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수하들에게 맡겨 놓고 조금 쉬기라도 할 텐데 지금처럼 몽골의 전사들과 전쟁일 경우엔 꿈같은 이야기였다.
하품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백영의 눈이 반짝였다.
멀리서 한 명의 무사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보아 어떤 결전에서 낙오되었던 무림맹의 무사 중 한명 같았다.
심심하던 차에 좋은 꺼리가 생겼다고 싱글벙글하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무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의 정체를 알았던 것이다.
백영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을 때, 그의 뒤에 나란히 서 있던 네 명의 무사들이 그제야 다가오고 있는 무사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해서 말했다.
"조... 조장님 저 남루한 차림의 무사가 맹주님과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백영은 정신이 후다닥 들었다.
"안에 맹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전하라!"
"명!"
수하 중 한 명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한 명은 비상종을 울려 맹주의 귀환을 알렸다. 백영은 얼른 차렷 자세를 하고 가까이 다가온 아운을 향해 예를 취하며 고함을 질렀다.
"충, 맹주님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아운은 다소 지친 목소리로 백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고하시네."
백영과 세 명의 수하들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한 채 아운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떠오른 경외감과 존경심은 아운의 얼굴을 조금 따뜻하게 만들었다.
아운이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아운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권왕의 명성은 무림의 상징적인 존재로 떠오른 지 오래였다.
이는 일반무사든 구파일방 오대세가를 비롯한 명문의 무사들이 든 상관없이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아운이 돌아온 무림맹은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운과 대전사의 대결이 알려지면서 무림맹 뿐 아니라 전 무림이 다시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강호 무림의 운명을 판가름할 결전이 결정된 것이다.
"능사형, 권왕의 무공이 그리 대단했습니까?"
야율초의 물음에 능유환과 사마정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능유환이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무서웠네, 지금이라면 사부님도 쉽게 이기시진 못할 것이라 생각하네. 물론 사부님이 지진 않겠지만 말일세."
야율초의 표정은 신중했다.
만에 하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권왕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이름이었다.
"사형이 생각하기에 대전사님에 비해서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능유환은 야율초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야율초의 말이 아니라도 그와 사마정은 아운의 무공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얼마 전까지의 사부님보단 약 한 수 정도 떨어지는 정도라 생각하네."
야율초의 표정이 더욱 심각하게 굳어졌다.
고수들에게 한 수의 차이는 크다. 그러나 극복할 수 없는 차이는 아니었다. 전혀 질 수 없는 상대와 질 수도 있는 상대는 다르다.
결전이란 어떤 변수가 튀어 나올지 모르는 일이고, 그 한번의 변수는 한 수 정도의 실력차이를 충분히 메울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사마대군사님이 남겨 두었던 비밀함을 열어 보아야겠습니다."
야율초의 말에 능유환과 사마정이 조긍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사마대군사란, 야율초 이전의 군사였던 와룡 사마무기의 부친인 사마중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마중인은 몽고의 대군사로서 지금 무림맹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무림맹을 이용해 현 무림을 파탄지경으로 끌고 간 것도 그의 머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제 아무리 광전사라도 고개를 숙였고, 광전사들의 대사형이었던 조진양과 같은 대우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비밀함을 남겼다는 말은 그들로서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야율초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군사인 저와 돌아가신 대사형, 그리고 와룡 사마무기 뿐이었습니다. 대군사님은 중원을 도모하며 혹시라도 대전사님에게 필적할 만한 자가 나타나면 열어 보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비밀함은 대사형이 은밀한 곳에 감추어 놓았었고, 사마군사가 실종되면서 대사형이 제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 동안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권왕이 사부님과 겨룰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열어볼 때가 되어가지 않나 생각한 것입니다."
사마정이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우리에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비밀함을 열 때가 되면 광전사들에게만 이 비밀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해도 좋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는 광전사들이 몽골의 충신들로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 내용을 볼 수도 있는가? 무척 궁금하군."
"죄송하지만 그 비밀함의 내용은 당분간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능유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그게 옳은 결정이었다.
사마정 역시 아쉽긴 했지만,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야율초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밀함을 가지러 가는 것이다.
능유환과 사마정의 시선이 야율초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밀실.
아운과 검왕, 그리고 초비향이 사각의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초비향이 자신의 손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장우사와 같은 상황이 될 줄은 몰랐군."
아운이 조금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래도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여자를 잘 얻어 덤으로 얻은 생명일세."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초선배님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기다리는 사람?"
"이 곳에 오기 전에 능유화 선배님을 만났습니다."
초비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남은 한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에 애증이 교차되고 있었다.
지독한 사랑과 서글픈 증오가 서로 등을 대고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선배님만은 그 분을 증오해서는 안 됩니다. 선배님 이상으로 상처를 받고 계십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이 선배님과 자신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운의 말을 들은 초비향은 얼굴이 굳어졌다가 펴지면서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아운은 담담하게 그녀를 만난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들으면서 초비향의 표정은 몇 번이나 변화하고 있었다.
옆에서 검왕 북궁손우는 조용히 듣고만 있다.
이윽고 아운의 이야기가 끝나자, 밀실안의 공기는 긴장으로 팽팽하게 이완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풀어져 갔다.
"나는......"
"지금도 능유화 선배님을 사랑하고 계시죠."
아운의 단정적인 말에 초비향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넓은 포용력을 지녔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끌어안아 주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검왕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초형, 나 역시 내 손서의 말에 동의하는 중이오, 초형도 잘 아시겠지만. 나도 자칫했으면 비슷한 상황에 놓일 뻔했지 않소. 비록 그녀의 품 안에서 빠져 나오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꼭 내가 잘 했다는 생각만 드는 것은 아니오, 사랑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를 바라겠소."
아운은 검왕이 말하는 것이 빙한천사 요가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득 요가람과 검왕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궁금해졌지만, 이 자리에서 묻기는 적절하지 않았기에 가슴에만 묻어 두었다.
검왕의 말을 들은 초비향이 말했다.
"북궁형의 말이 맞는 것 같소, 나는 이번 결전이 끝나면 제일 먼저 그녀를 만나봐야 할 것 같소, 내게 용기를 주어 감사하오,"
"허허, 나는 그저 초형이 부럽기만 하오."
검왕의 말에 초비향의 얼굴이 은근히 상기되었다.
듣고 있던 아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옳으신 결정입니다. 후에 두 분이 행복한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저의 결혼식엔 함께 참석해 주실 것을 지금 부탁드립니다."
아운의 말에 초비향과 겅왕이 그를 바라보았다.
"고맙네, 내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지 날짜가 정해지면 꼭 알려 주게."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오히려 내가 감사를 해야지. 자 이제 우리 본론으로 들어가세."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자네를 보자고 한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일세."
아운은 초비향과 검왕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같이 자신을 불렀다면 구천혈맹과 관련이 있는 일일 것이다. 초비향이 말했다.
"얼마 전 오호에게서 연락이 왔네."
"오호?"
아운도 오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혈궁내에 있는 또 한 명의 구천.
초비향조차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인물.
대략 칠사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 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오호였다.
"그래 오호지 , 그는 혈맹의 탈퇴를 선언하였네. 이제 자신은 할 만큼 했으니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겠다는 서신을 비밀리에 전해왔네."
결국 오호의 비밀은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
그가 말하지 않는 이상 누구인지 알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운은 초비향이 그의 정체를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모르는 척 하였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맹우 한 명을 그렇게 잃었군요."
초비향과 검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왕이 아운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팔호에게서 연락이 왔네."
"팔호?"
"그렇지 우리 구천혈맹이 만들어지고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팔호가 이번에 처음으로 연락이 온 것일세,"
아마도 그 일 때문에 자신을 보자고 했을 것이다
"무슨 소식입니까?"
"자네가 직접 보게."
서신을 읽어가는 아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이게 사실입니까?"
"사실인 모양일세."
권왕은 검왕 북궁손우를 보고 물었다.
"대체 팔호가 어떤 분이십니까?"
"자네는 우리 구천혈맹이 아홉 명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 중 자네가 아는 구천은 여기 초궁주와 장우사 그리고 나와 우문형, 서장의 대활불과 소달극정도인 것으로 아는데 그런가?"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그 정도가 다입니다."
"그 외에 혈궁의 또 한 명은 우리도 잘 모르니 제외하세. 그럼 자네가 모르는 구천의 맹우는 둘이 남는군,"
아운은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검왕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팔호이고 한 명은 구호일세, 이 두 사람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세."
아운은 그가 팔호의 정체를 말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검왕의 전음이 아운의 귓전에 들리는 순간 아운의 표정이 놀란 듯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야율초는 비밀함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비밀함 안에는 하나의 서신과 작은 주머니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야율초는 먼저 주머니를 꺼내 들고 안을 살펴보았다.
손톱의 절반만한 타원형의 구슬 세 개가 안에 들어 있었다.
'보석인가? 아니다. 이건 마치 벌레의 알 같은데? 서신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
야율초는 세 개의 구슬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다음 서신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나는 사마중인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이 서신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나의 아들 사마무기이거나 야율 군사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중원을 도모하면서 만에 하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서신을 남긴다.
내가 원하던 대로 이제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가고 있었으며 나의 계략으로 인해 중원은 스스로 무너져 가는 중이지만. 나는 아직도 완전히 안심할 순 없다.
특히 대전사닝의 몽혼지약은 나에겐 가장 큰 우환이었다.
나의 모든 계략이 성공한다고 하여도 대전사님이 몽혼지약에서 패하거나 혹여 중원에 대전사님을 상대할만한 고수가 나타나 대전사님을 이긴다면 지금까지 공들여 온 모든 것들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물론 나도 대전사님을 이길 수 있는 고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대전사님의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책사다.
대전사님이 전사로서 준비를 한다면 나는 책사로서 준비를 해야만 한다.
나는 그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고 작은 계획을 세워 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고독이란 것을 연구하여 왔다.
물론 이는 나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십여 명의 독 전문가들이 참여를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귀문의 고수들로 독공의 대가들이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연구 끝에 세 쌍의 특수한 고독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나는 이 세 쌍의 고독을 절대고독이라 불렀다.
절대고독은 그 이름만큼이나 대단한 독충이었다.
그 누구도 이 고독에 걸리면 시전자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이 고독을 이겨내려면 최소 대전사
님 이상의 능력을 가진 자라야만 할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힘과 시간을 들여야 가능한 일이다.
즉 대전사님이라 해도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 정도로는 대전사님의 상대를 완전히 중독 시킬 수 없기 때문에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전사님의 상대 또한 대전사님께 못지않을 것이고, 지금 이 서신을 볼 시기라면 내가 서신을 남긴 날로부터 최소 십여 년 이상을 흐른 다음일테니, 대전사님이나 대전사님의 상대는 지금의 대전사님보다 더욱 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부분은 조금도 걱정할 펄요가 없다.
이는 절대고독을 사용하기에 따라 그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 중략 ‥‥‥
절대고독이 다른 고독과 다른 점은 지독하게 강하다는 점외에도 하독하는 방법과 수컷 고독을 조종하는 암컷고독을 굳이 여자의 몸에 자생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암컷 고독의 알은 수컷보다 훨씬 큰데, 그 알 상태로 잠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알을 깬 자를 자신의 어미로 알고 따른다.
반대로 절대고독의 수컷 알은 좁쌀보다 적어 다루기가 무척 쉽다. 단지 수컷 고독을 하독하려면 반드시 여자의 몸을 통해서만이 가능하였고, 여자는 중독 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여자가 이 고독의 알을 먹고 남자와 방사를 치루면 그 고독은 남자의 몸 안에 옮겨져 암컷이 깰 때까지 자생을 한다.
고독에 중독된 남자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그 고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 것이다 남자를 중독 시키는 여자 또한 자신이 고독을 몸에 지니고 남자에게 하독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절대고독의 무서운점이다.
나는 먼저 이 절대고독을 하독할 남자들을 선택한 다음, 그 남자의 여자가 먹는 음식에 수컷 절대고독의 알을 풀었다. 물론 그들을 중독 시킨 여자들은 자신이 한 짓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 개의 절대 고독은 성공리에 하독 되었으며 그들은 지금까지도 자신이 그 고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미 누군가에게 잠복하고 있는 절대고독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그것은 이 글을 보는 본인의 마음이다.
절대고독의 효능은 고독에 중독된 자가 자신도 모르게 암컷 고독을 깨운 자의 명령을 듣는 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고수들의 경우 그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감안하고 사용하기 바란다. 끝으로 고독의 알을 깨는 방법과 고독에 중독된 자를 부리는 방법이다. 그리고 내가 중독시킨 자들의 이름이다.
-후략-
서신을 다 읽고 난 야율초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가 읽고 있는 뒷부분은 그로서도 경악스런 부분들이었다.
'왜 사마중인을 지옥의 군사라 불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야율초는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선물을 얻었지만, 기쁨에 앞서서 절대고독을 하독하기 위해 아군의 여자들을 이용한 사마중인에 대해선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들이 알았다면 사마중인을 찢어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더욱 야율초를 기겁하게 만든 것은 절대고독에 당한 세 번째 인물이었다.
이는 야율초로서도 너무 뜻밖이라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래 적어 놓은 이유를 읽고 어느 정도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픽 일은 벌어진 일 , 나는 이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야율초는 대군사 사마중인의 무서운 귀계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역시 사마중인과 같은 군사이기 때문이다.
주군이자 스승인 대전사가 대의명분을 중히 여기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선다면 누군가는 뒤에서 더러운 것을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조진양이 없는 지금 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자신뿐이라 생각한 야율초였다.
'사부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
대전사와 권왕의 대결로 가장 긴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군사인 야율초였다. 항상 만약의 수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군사의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몽골의 전사들은 대전사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야율초는 대전사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부인 대전사가 강하긴 하지만 아운 역시 만만치 않았고, 그의 발전 속도가 야율초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준비하고 가꾸어온 일들이다. 여기서 걸림돌이 있어서는 안된다.'
야율초의 눈에 차가운 한광이 어렸다.
이길 가능성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것이다.
맹주실
아운의 맞은편엔 하영영이 앉아 있었고, 옆에는 북궁연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운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하영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하영영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그동안 방안에 틀어 박혀 배운 고리타분한 학문을 실전에 써 본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보상을 받았답니다. 물론 사전에 오라버니의 도움이 컸지만요."
아운의 옆에 있던 북궁연이 하영영을 보며 말했다.
"아가씨답지 않게 겸손을, 세상에 아가씨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완벽한 맹주 대행을 할 수 있었겠어요, 제가 봐도 정말 대단했어요."
북궁연의 하영영에 대한 태도가 무척 정중했다.
그녀들은 이미 서로 언니 동생 하며 말을 놓는 사이로 발전하였지만, 아운 앞에서는 시누이올케로서 예의를 지키는 중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그리고 오라버니!"
"말해 봐라!"
"제가 작은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면 후에 제 부탁 하나면 들어 주세요."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부탁이면 들어 주마."
"지금 약속하신 것이죠?"
"물론이다."
"언니 앞에서 한 말이니 믿겠어요, 하긴 오라버니가 다른건 몰라도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긴 하죠."
그렇게까지 나오자 아운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부탁이냐?"
"그건 나중에 말할게요, 그건 그렇고 이제 어쩌실 것인가요? 대전사와의 결투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대전사와의 결투 이야기가 나오자 북궁연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녀는 얼굴에 표 나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내심을 전부 감출 순 없었다.
하영영 역시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운은 북궁연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무림맹의 일을 간단하게 처리한 후, 개인 수련을 가지려한다. 그리고 연누이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 꼭 이기고 돌아와 석 달 안에 우리 아이를 만들고 말 것이오."
북궁연의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가가, 그런 말씀 하시면 아가씨가 흉봅니다."
"흉, 아니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아기를 만드는 것도 흉인 거요?"
북궁연은 고개를 숙이고 어잴 줄 몰라 하고 있었으며, 하영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운은 태연하기만 했다.
야율초와 엄호 그리고 능유환과 사마정이 하나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능유환은 비록 팔 하나가 잘렸지만,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제, 대군사의 비밀함은 열어 보았나?"
"물론입니다."
엄호가 야율초를 바라보았다.
이미 야율초가 대군사의 유지를 확인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용을 묻진 않겠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던 자네가 잘 알아서 하리라 믿겠네."
"감사합니다. 사형."
"이제 광전사는 몇 남지 않았네. 그렇지만 우린 아직 충분한 힘이 남아 있으니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닐세."
"물론입니다. 하지만 만약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놈은 언제나 골칫거리입니다. 그래서 전 그 만약이란 것조차 없애려고 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야율초의 말에 엄호와 능유환 등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엄호가 물었다.
"대군사의 비밀함과 관련이 있는 말인가?"
"그것도 있지만 저 역시 따로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선 동심맹의 살아남은 자들과 손을 잡을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 동심맹은 완전히 와해가 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핵심 장로들은 모두 세 명에 불과 했다. 그들은 어차피 더 이상 무림에서 어떤 행세를 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운의 성격으로 보아 그들을 그냥 둘리도 없었다.
살아남은 동심맹의 장로들도 그것을 알 것이고, 동심맹의 회원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쪽과 손을 잡으려 할 것이다.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자들이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것이다.
사마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들과 손을 잡아서 무슨 도움이 되겠나, 어차피 권왕이 그들을 그냥 두고 보지도 않을 것이고, 현재 무림맹에서의 위치도 거의 없을 텐데."
"그들 중 천개 몽화는 다릅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그자만은 쉽게 처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 개방에서 몽화의 위치가 워낙 견고하고 개방의 정보조직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몽화를 함부로 건드리면 그 정보조직에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같은 전시에 그것은 아주 치명타가 될 것입니다. 권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몽화를 처리를 한다고 해도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일 것입니다. 제가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몽화입니다."
"그 자와 손을 잡으면 정보마저도 우리 손에 쥐겠군."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쯤 아운이 무서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유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좋은 방법이군. 언제쯤 그에게 접근할 셈인가?"
야율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를 보고 사마정이 놀라며 말했다.
"벌써?"
"동심맹의 세 장로들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들로
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린 그를 대우해 주고 중
원의 무사들에게 본보기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원인이라도 충성만 하면 우대한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어차피 살아남은 광전사들이 많지 않아 나중을 위해서도 그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엄호가 조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네. 그 부분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무척 못 마땅한 목소리였다.
배신자인 몽화를 우대한다는 것이 천생 무골인 엄호에게 있어서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야율초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에 마냥 반대만은 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사형. 사부님께 보고를 한 후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광풍사 한 조를 사막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사막?"
"사라신교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사라신교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권왕의 또 다른 세력이 사라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린 비록 휴전을 했지만, 그것은 중원과의 휴전일 뿐입니다. 사막의 사라신궁은 제외라 할 수 있습니다."
결전에 앞서 사라신교를 침으로 아운을 흔들려는 계략이었다.
능유환과 사마정은 충분히 이해를 하였고, 엄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아서들 하게, 나는 이만 가보겠네."
그는 내심 대전사와 아운의 정정당당한 대결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사들의 대결을 흐리는 야율초의 계략이 싫었다. 그렇지만 지금 같은 전시에 그것을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엄호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자 야율초는 묵묵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사형, 엄사형은 너무 강직하단 말이오. 전사인 것은 좋지만, 전시엔 이기는 것이 우선이란 것을 알아야 하오.'
엄호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자 야율초는 능유환을 보고 말했다.
"사라신교는 근래 쌍지도라는 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쌍지도?"
"도적 떼들이 있던 녹주라고 합니다. 제가 그 위치를 대략 알아 왔습니다."
"알았네, 이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우린 못들은 것으로 하겠네."
"감사합니다."
야율초는 아운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기로 이미 결심을 단단히 하였다.
'권왕, 생각할수록 불안하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인물이다.'
아운과 대전 사와의 결전을 앞 둔 무림맹은 분주했다.
새롭게 무림맹을 정비하였고, 동심맹의 인물들은 완전히 도태가 되었으며 동심맹의 핵심 전력이 사라진 문파들은 개혁이 한참이었다. 사실상 걸림돌이라 할 수 있었던 동심맹의 고수들이 사라지고 나자 그들의 개혁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청성과 사천당문만 미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정회와 일부 선은들이 힘을 합치고 무림맹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개혁파는 그들 문파들 안에서도 갈수록 힘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회오리 속에 소씨 가문만은 온전한 힘을 그대로 지닌 채 가문의 미래를 위해 힘을 모을 수 있었다.
맹주 집무실,
아운이 세 명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인과 장년인 그리고 한 명의 청년이었다.
노인이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하고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맹주님."
아운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소씨가문의 전대가주, 맹룡철각 소현.
그것이 노인의 이름이었다.
시실은 소현이 아니라 오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바로 아운의 이사부인 오칠의 후인이었다.
소씨세가의 인물들은 이미 아운으로부터 모든 사연을 들은 다음이었기에 아운을 웃어른으로서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이것을 주고자 불렀습니다. 이는 오사부님의 진전으로 소씨세가의 가문 비전으로 쓰십시오."
소현이 놀라서 아운이 준 두 개의 책자를 들어 보았다.
하나는 선풍팔비각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었고, 또 하나는 원래의 내공심법에 아운의 심득이 합해진 내공운기법, 그리고 연환금강룡의 권법등이 적인 비급이었다.
소현이 감격에 겨운 시선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소씨 세가가 이를 계기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는 이 사부님이 후인들에게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용서라는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아운은 짐 하나를 덜어 놓은 듯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번 몽골과의 결전에 살아남게 되면 제가 직접 시연을 보이고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천하제일고수가 가르침을 주겠다는데 싫다고 하는 무인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모두 일어서서 다시 한 번 아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아운은 사부에게 진 빛 일부를 갚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은 황룡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결국 오고 있는 것인가? 역시 대형의 에측은 대단하구나."
옆에 서 있던 벽룡이 그 말을 받았다.
"드디어 풍운십팔령이 세상에 이름을 걸 날이 왔군요."
"신중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쌍지도의 무서움엔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작전에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자만은 금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황룡과 벽룡의 뒤로 남은 풍운 십팔령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여유 있게 서 있었다. 건덕의 뒷골목 시절부터 싸움에는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 그 자체를 즐기는 자들이었다.
마침 무림맹에 갔던 풍운령들도 소설과 함께 돌아와 있는 중이었기에 그들의 사기는 하늘까지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수련만 해 왔다. 이제 그 수련의 대가를 확인할 시간이 온 것이다.
황룡이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일침을 가했다.
혹시라도 해이해진 마응으로 일을 그르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쌍지도라고 해도 신중해야 한다. 그들은 사막의 신이라는 광풍사라는 것을 명심하라!"
황룡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풍운십팔령의 형제들은 자세를 바로하고 일제히 복명을 하였다.
"명."
"모두 자신의 위치로."
풍운십팔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이미 아운으로부터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해들은 다음이었다.
쌍지유사도(雙池流砂島).
사막의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쌍지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쌍지호가 따로 섬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유는 쌍지도 주위 십리 밖을 흐르고 있는 유사 때문이었다. 폭 오십 장의 유사는 쌍지도 주변을 호위라도 하듯이 원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그걸 모르고 접근했다간 모두 모래 속으로 수장 되고 말것이다.
쌍지도로 들어가는 길은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바로 유사가 흘러와서 쌍지도를 돌아 나가는 곳.
즉 유사의 줄기가 쌍지도 근처로 와서 쌍지도를 돌아서 다시 나가는 사이로 폭 십장 정도 넓이의 입구뿐이었다.
원래 유사란 항상 그 흐름이 바뀌게 마련인데 쌍지도를 도는 유사만큼은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였다.
그 원인은 원래 이곳의 주인이었던 혈랑왕조차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그 입구만 지키고 있으면 쌍지도는 철옹성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런 쌍지도에 풍운 십팔령은 아운에게 배운 환혼진을 가미하였다.
암혼살문에서 안가를 지을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진법이지만, 그 진법이 유사와 만나면 그 위력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더군다나 유사 지역은 그게 아니어도 뿌연 모래먼지가 성벽처럼 둘러쳐진 곳이었다.
그 모래먼지는 환혼진을 더욱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사라신궁을 공격하는 광풍사의 대부령은 아르특이었다.
그는 이전에 사막에서 아운과 싸운 광풍사의 대부령인 타미르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아운에 대한 원한이 많은 자였고, 사막에서의 전투 수행도 상당히 능한 편이었다.
그는 쌍지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그 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보통 쌍지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대한 먼지 구름속에 약간의 물이 있는 녹지가 있고 두 개의 호수가 있으며 마적단의 총 본부라는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아르특은 먼지구름이 가득한 쌍지도를 보면서 대자연의 위대한 조화에 다시 한 번 놀라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라 그의 수하들 역시 몹시 놀란 표정들이었다.
무려 수십 장에 달하는 먼지로 이루어진 지대는 하나의 성곽처럼 쌍지도를 감싸 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바람이 회오리치면서 그 지대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생기는 현상인 것은 알겠는데, 어째서 바람이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지는 세상의 누구도 모르는 수수께끼였다.
"말은 들었지만 지금 보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아르특의 감탄어린 말에 그의 옆에 말을 타고 있던 대군령 오르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대부령. 저 안이 어떤 곳인지 빨리 보고 싶습니다."
"서두를 것 없네. 저 먼지 속에 적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 해야 할 것일세."
"명."
"그럼 일단 수색조를 먼저 보내게."
"명."
잠시 후 광풍사의 척후조가 앞장서고 그 뒤를 남은 광풍사들이 천천히 뒤따르며 쌍지도를 향했다.
황색의 모래 먼지 속으로 천천히 잠입해 들어가는 광풍사들은 두건으로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모래 먼지들이 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긴 어려웠다.
한참을 앞으로 걸어가던 선두의 수색조가 갑자기 자리에 멈추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고함을 질렀다.
"유사다."
수색조들이 얼른 뒤로 물러섰고, 그들 중 한 명이 줄을 던져 유사에 빠진 동료를 구해 내었다.
아르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황사 담벼락에 유사가 흐르는 지역이라, 숨어들기엔 최적의 장소구나. 이들이 이곳에 숨어든 연유를 알 것 같군.
하지만 광풍사는 사막의 전사들이다. 이 정도로 우릴 막을 순 없지, 길을 찾아라!"
아르특의 명령을 받은 십여 명의 척후조가 사막의 지형을 천천히 조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지구름 속에서도 유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진이 흐른 후 그들은 쌍지도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 낼 수 있었다.
멀리 어렴풋하게 쌍지도 내의 푸른 녹주가 보이고 있었다.
아르특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돌격."
대부령 아르특의 고함에 대군령을 비롯한 두 명의 소군령들이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녹주를 향해 달려갔다. 특히 두 명의 소군령들은 서로 공을 다투려는 듯 전력으로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속도에 비례해서 녹주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약 반각을 달려가던 선두의 소군령은 갑자기 자신의 말이 허우적 거리면서 밑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끼고 기겁을 하였다. 그는 얼른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자신이 유사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사다. 모두 뒤로 후퇴."
그러나 그의 외침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유사의 가운데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필사적으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다행히 말을 타고 있었기에 상당수의 광풍사들은 말을 발판으로 신법을 펼쳐 유사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삼백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유사 지역을 벗어나려고 난립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령 아르특은 살아남은 자신의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겨우 백오십여 명.
절반이 죽은 것이다. 특히 두 명의 소군령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이 타고 온 말은 전부 죽고 말았다.
유사에서 빠져 나오며 말까지 구할 순 없었던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대군령인 오르목이 다가와 보고를 하였다.
"진법입니다. 간단한 진법으로 우리를 함정에 빠트렸습니다."
아르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왜 당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유사와 모래먼지를 이용한 진법이라. 이들은 유사의 흐르는 경로까지 정확하게 알고 우리를 유사의 중앙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오르목이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유사라면 우리가 중앙에 도착하기 전에 알았어야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그 곳에 당도하자 갑자기 그 지역 전부가 유사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아르특은 겨우 빠져 나온 유사 지역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가 속은 것이다. 일단 우리가 전진했던 지역은 유사 지역이 아니었다. 선두가 갑자기 유사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당항 했고, 그 순간 진법이 바뀌면서 우린 모두 유사 지역에 빠진 듯한 착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면서 우리도 모르게 진짜 유사 지역으로 이동을 하며 전체가 전부 유사에 빠진 것이다."
오르목은 그제야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특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린 절반이 살았고, 정확하게 길을 찾아내었다.
이제부터 형제들의 복수를 하러간다."
"명."
남은 백오십의 광풍사들이 조심스럽게 쌍지도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사로 인해 혼줄이 난 다음이라 접근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약 반각 정도 앞으로 전진 하였을 때였다.
"크악!"
비명과 함께 선두의 광풍사들이 발목을 잡고 쓰러졌다.
광풍사들이 제자리에 멈추고 놀라서 선두를 바라볼 때, 갑자기 모래 속에서 풍운령과 사라신궁의 전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전혀 예측 못한 상황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상대를 공격하라!"
아르특의 고함이 아니더라도 광풍사의 전사들은 용감했다.
처음엔 당황한 듯하더니 곧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모래 속에서 나타난 풍운십팔령들과 사라신공의 전사들은 미리 만들어 놓았던 진법을 이용해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만들어진 진법에 풍운십팔령과 사라신교의 전사들이 미리 정해진 방위를 차지하면서 진법이 가동되었고, 사방은 깜깜한 어둠과 안개 속에 묻히고 말았다. 광풍사가 자랑하는 광풍멸사진을 발동조차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싸우다 불리하면 진속에 숨어 버리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법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서서 대항하라!"
아르특은 광풍사들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진법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풍운십팔령들이 그것을 두고만 보지 않았다.
황룡을 비롯한 몇 명의 풍운령들이 아르특과 오르목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혼전이 벌어졌는데, 아운의 특훈을 견디어낸 풍운령들의 공격은 무서웠다. 약 일각동안의 시간이 지나면서 광풍사들 오십여 명 이상이 죽어갔던 것이다.
대부령 아르특은 당장이라도 사라신궁의 고수들을 몰살시키고 싶었지만 그는 황룡을 비롯한 네 명이나 되는 풍운령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는 이 네 명을 상대로 충분히 이겼을 것이지만 풍운령들의 교묘한 절진과 협공은 그의 손발을 묶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광풍사들은 진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사라신궁의 무사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실력에서 차이가 많이 나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황룡은 대충 상황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모두 후퇴 하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라신궁의 무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아라!"
이미 절진은 거의 파괴된 상황이었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아르특은 이번만은 하는 생각에 자신 역시 신법을 펼쳐 앞장을 서며 겨우 유지되고 있는 진법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다행히 그 틈을 타 사라신궁의 전사들과 풍운령들은 어느 정도 뒤로 물러 설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 쌍지도로 들어선 백여 명의 광풍사들은 갑자기 펼쳐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하였다.
양쪽으로 제법 큰 호수가 있었고, 그 호수 중 큰 호수 하나엔 호수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다리 건너편에는 돌을 쌓아 올린 성이 있었는데, 사라신궁의 전사들은 모두 그 곳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르특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모두 잡아라!"
아르특은 명령을 내린 후 자신이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그의 수하들도 아르특의 뒤를 따른다.
호수의 다리를 향해 돌진한 광풍사들은 가장 뒤에서 후퇴하고 있는 풍운령들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도망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사라신궁의 무사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어느 덧 풍운령들이 호수의 맞은편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으며 광풍사들도 호수 깊숙한 곳까지 쫓아 와 있었다.
이제 거의 따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풍운령들이 갑자기 호수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사라신궁의 수하들 역시 호수 속으로 뛰어 들고 있었다. 다급해서 호수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역력했다.
"네 놈들이 그런다고 살아 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르특이 비웃으며 활로 풍운령들을 공격하려 할 때였다.
멀쩡하던 다리가 갑자기 무너졌다. 광풍사들 역시 호수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공이 강한 몇 명이 등평도수를 펼치며 멋지게 물위로 착지를 하였지만 물을 차고 뛰어오르려 할 때 그들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냥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이‥‥이게."
대부령 아르특은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물속에서 빠지고 나서야 호수가 다른 물하고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땐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풍운령과 사라신궁의 전사들이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쌍지도의 흡중수에서 훈련을 해온 전사들이었다.
호수 밖이라면 모르되, 흡중수 안에서는 제 아무리 광풍사라 해도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보통 물보다 몇 배나 밀도가 높아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려웠고, 요령을 모르면 물 위로 떠오르고 싶어도 떠오를 수가 없었다.
그들 중 가장 무공이 고강한 아르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한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황룡이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아르특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오르목은 벽룡을 비롯한 십여 명의 풍운령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건덕의 건달들.
뒷골목의 법칙대로 아주 확실하게 확인사살을 하였던 것이다.
다른 광풍사들은 돌아 볼 것도 없었다.
흡중수에서 물 위에 떠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잘 훈련된 사라신궁의 전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흡중수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풍운십팔령을 제외하면 겨우 흡중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정도만으로도 살아남는데 문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야율초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모‥‥몰살?"
"그렇습니다."
말을 전한 밀각의 각주도 전달하기 민망한 표정이었다.
이제 새롭게 밀각의 각주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좋은 소식을 전해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특히 이번일의 경우는 보고를 하면서도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사라신궁을 공격 하러 간 삼백의 광풍사들이 한명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그들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정도였다.
야율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쌍지도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인가? 결국 권왕은 내가 사라신궁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하고 함정을 파 놓았단 말이군."
중얼거리는 야율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권왕에 대한 자신의 대처 방안들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겹치면서 야율초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조금씩 틀어진 것이 합쳐지면 모든 상황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흐름이 바뀌고 있다. 성할 뻔 무엇이든 잘 되지만 그 흐름이 바뀌면 되던 일도 안 되게 마련이다. 이 흐름을 바꾸어야만 한다. 순리가 안 되면 강제로라도 바꾸어야 한다.'
야율초는 군사였다.
그는 세상을 읽는 눈을 가진 자다.
모두들 무공에서 위에 있는 대전사가 권왕을 이길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강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겨루는 결전에서 변수는 의외로 많다. 그리고 대전사에 비해서 권왕의 발전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냥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된다."
책사인 자신이 권왕과의 머리싸움에서도 졌다는 생각이 들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권왕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야율초였기에 사막의 패배는 더욱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린 그는 결국 자신이 대군사의 절대고독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사부님께는 죄송하지만, 결국 대군사님의 말이 옳다. 결국 그 분의 권고를 따를 수밖에 없다. 권왕 기다려라! 네놈은 상상도 못할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야율초의 눈동자에 한광이 어렸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나자 밀각의 각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자님은 어떠신가?"
"한동안 고민을 하시는 것 같더니 오늘 오전에 혈궁을 떠나셨습니다. 아무래도 혈궁을 떠나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전사님께서는 그 분이 어떤 행동을 하던지 일단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혼란스러우시겠지. 하지만 잘 이겨내시리라 믿는다."
야율초는 검혼을 생각하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싫던 좋던 그는 몽고의 하나 남은 후계자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족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많은 혼란과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야율초는 검혼에 대한 생각을 당분간 접기로 하였다. 우선 급한 것은 대전사인 사부의 결전이었던 것이다.
'이 일은 나 혼자 하기옌 벅찬 부분이 있다. 일단 능사형에게 부탁을 하자.'
야율초는 결심을 굳히자, 밀각의 각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나와 능사형이 혈궁을 떠날 채비를 하라! 그리고 너와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 몇 명만 추려 우리 뒤를 따르라. 따로 할 일이 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무림맹으로 간다."
밀각의 각주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준비된 것이 있어 수확을 걷으러 가는 것뿐이다.
너는 그리 알고 준비하되 혈궁 내의 다른 누구도 모르게 은밀해야 할 것이다."
"명."
밀각의 각주가 고개를 숙였다.
대전사와 아운의 결전이 임박하면서 강호의 전 무림인들이 종남산의 군야평을 향해 대 이동을 시작하였다.
군야평은 한순간에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변하였고, 강호 무림은 두 사람만 모이면 권왕과 대전사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군야평으로 온 무인들 중 상당수는 실망을 해야만 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무림맹은 군야평으로 올라가는 무인들을 스스로 정한 기준에 맞추어 제한하였기 때문이었다. 결전의 결과에 따라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몽골의 전사들과 대 혈전을 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무인들이 내심 불만은 가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군야평을 올라가는 대신 군야평 아래서 권왕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아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미세혈관까지 흐르는 무극신공의 기운이 그의 기분을 더 없이 상쾌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아운이 수련장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북궁연이 비단천을 들고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소. 연매."
북궁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의 기다림은 행복이랍니다."
아운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떠나야 하오."
"반드시 돌아 올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걱정 마시오."
아운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북궁연은 더욱 믿음이 갔다.
반드시 이기고 돌아 올 것이라 그렇게 믿었다.
둘은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밀각의 각주가 바람처럼 날아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권왕이 금룡단 전원과 함께 출발했다 합니다."
야율초의 유리알 같은 눈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줄발했는가? 북궁연도 함께 출발했는가?"
"북궁연 낭자는 무림맹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검왕 북궁손우는?"
"그 역시 자신의 딸 옆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일 쯤 북궁세가의 인물들과 함께 출발할 것 같습니다."
야율초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그런가? 그렇다면 상황으로 보아 대전사님과 결전 이전까지 검왕과 권왕이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군."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래도 권왕은 금룡단과 움직일 테고 검왕은 무림맹의 원로들과 움직일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군,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을 쓰는 수밖에, 북궁연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무림맹의 지근에 있는 태실봉으로 향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실봉?"
"아무래도 떠나는 권왕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기 위해서 인 것 같습니다."
야율초의 눈에 기광이 어렸다.
"일을 더욱 쉽게 해주는구나. 탕룡광마 우칠도 권왕과 함께 출발하였는가?"
"그는 무림맹에 남아서 북궁연을 호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실봉으로 오르는 무리 중에 그가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건 유감이군. 하지만 그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지. 자네는 무림맹의 동태를 계속 살펴라! 그리고 나와 능사형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 반 시진 동안은 이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도록."
"명."
밀각의 각주가 허리를 숙이며 복명을 한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던 능유환이 야율초를 바라보았다. 야율초 역시 능유환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사형이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무림맹에 고수가 없는 상황이니 움직이기 유용할 것입니다."
"알았네."
둘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능유환은 절대고독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다음이었다. 차선 책 또한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야율초가 원한 자신의 역할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고 있는 기회는 의외로 쉽게 왔다.
무림맹의 근교 섬서성으로 떠나는 대로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태실봉 자락에 북궁연과 소홀, 그리고 옥룡이 서 있었다. 북궁연은 지금 떠나고 있는 아운의 모습을 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와 옥룡 그리고 소홀의 뒤쪽엔 우칠이 철봉을 어깨에 메고 서 있었고 그의 곁에는 매화단의 여무사 두 명과 호난화가 나란히 서 있었다.
금룡단이 모두 아운과 함께 출발했지만, 우칠은 북궁연을 호위하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홀이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결국은 말하지 못했네요."
북궁연은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며 말했다.
"돌아오시면 좋은 선물이 될 거라 믿어."
"아기씨도 자신의 아버지를 응원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옥룡은 놀란 표정으로 북궁연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가지신 것인가요?"
북궁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요, 언니."
북궁연이 엷은 미소를 머금고 옥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옥룡은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사랑은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받아 주고 그 사랑을 나누어 주기로 한 언니였다.
검왕이 자신에게 와서 말을 했을 때, 이미 북궁연과 많은 의논을 한 다음이었다는 것을 북궁연과 만나고 나서야 알았었다.
"축하드립니다. 주모님."
나직하지만 쩌렁한 목소리로 우칠이 축하를 하자, 호난화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아기씨가 놀라잖아요."
북궁연이 아기를 가졌다는 말에 싱글벙글하면서 축하를 했던 우칠은 찔끔해서 호난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게 제일 작은 목소리였단 말이요."
"흥, 목소리만 커가지고 눈치도 없는 바보, 여하튼 조용히 해요."
"아... 알았소."
우칠은 호난화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우칠이었지만, 이상하게 호난화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있었다. 특히 얼마 전 강제로 호난화의 방에 끌려갔다 나온 후부터 더욱 심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우칠이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둘만 아는 비밀이었다. 단지 우칠이 그날 방에서 나온 다음 이틀간 멍하니 넋이 나갔었다는 것을 매화단의 호위무사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여우같은 호난화에게 곰 같은 우칠이 완전히 먹힌 것이다.
우칠이 쩔쩔 매는 모습을 보면서 소홀과 북궁연, 그리고
옥룡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 최고의 고수 중 한 명이라는 우칠이 호난화에게 꼼짝 못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잠시지만 아운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있을 때 검왕 북궁손우가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여기 있었군."
"조부님 오셨어요."
북궁연이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자, 뒤이어 모두들 검왕에게 인사를 하였다. 검왕은 조금 침중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은 뒤 우칠에게 서신 한 장을 주면서 말했다.
"자네는 이것을 가지고 지금 당장 권왕에게 달려가게. 중요한 문서니 간직하고 있다가 대전사와 겨루기 직전에 주도록 하게,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네."
검왕의 표정을 보고 그 문서가 얼마나 중요한 문서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들 궁금한 표정들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구천혈맹에서 목숨을 걸고 구한 문서일세. 반드시 대전사와 겨루기 직전에 전하도록 하게, 어서 출발하게."
"반드시 명대로 하겠습니다. 어르신."
우직한 우칠의 말은 믿음성이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주모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북궁연에게 인사를 하고 주춤거리던 우칠이 호난화를 보고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누이 다녀오리다."
호난화가 조금 삐친 목소리로 말했다.
"흥, 그러던지."
우칠은 호난화가 삐진 것 같자, 우물쭈물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자신이 뭘 잘못한 것인지 몰라서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화난 거요?"
"화 안 났어요."
더 화나 보인다.
"나... 나 가도 되겠소?"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호난화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걸렸다. 남자는 이렇게 한 번씩 길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사실 지금 그녀가 우칠에게 화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단지 지금 헤어지면 오래도록 만나지 못할 텐데, 너무 덤덤하게 헤어지려는 그가 조금 얄미웠고, 마치 자기 자신만 헤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아서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기에 다소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게 어디 우칠의 잘못인가?
잘못은 잘못이다.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죄.
그래서 짐짓 토라진 척 한 것뿐이었다.
남녀 관계라면 아이 수준인 우칠이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웃으면서 우칠을 바라본다.
우칠은 괜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한 번 호난화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나 가도 되오?"
호난화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이리 와 보세요."
"헉, 뭐 ‥‥ 뭐가 문제 있소?"
"이리 와보시라니까요."
우칠이 엉거주춤 다가서자, 호난화가 달려들어 그의 입술에 냉큼 뽀뽀를 하였다.
쪼옥!
"잘 다녀오세요."
"헤헤..."
우칠이 풀어진 웃음을 머금었다가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민망한 표정으로 얼른 돌아서며 말했다.
"갔다 오겠소."
쌔앵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신법을 펼치던 우칠이 가로 누운 나무에 걸려 곤두박질하면서 그 앞에 있던 큰 나무에 충돌하였다.
"쿵" 소리가 나더니 제법 큰 나무가 뿌리 채 뽑아지면서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더욱 당황한 우칠이 허겁지겁 신법을 펼치면서 사라져 갔다.
"어머, 어머, 저걸 어째. 어디 안 다치셨을까?"
호난화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지켜보던 북궁연이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나무만 심하게 다쳤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모두 크게 웃자, 그제서야 호난화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모두들 웃고 있을 때 검왕만은 굳은 표정으로 우칠이 사라진 방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북궁연은 검왕 북궁손우를 바라보았다.
"조부님?"
우칠이 가지고 간 서신이 혹여 아운에게 불리한 일일까봐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내 너와 긴히 할 말이 있구나?"
북궁연은 갑자기 심각해진 검왕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두들 검왕의 말뜻을 알아듣고 조용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옥룡은 자리를 뜨기 전에 검왕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바라보다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
북궁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깊숙한 곳의 초점이 흐려져있었다. 마공을 익히고 있는 그녀는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녀는 이상힌 느낌에 더 이상 인사를 못하고 돌아섰다.
모두 물러선 다음 검왕 북궁손우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북궁연은 무슨 일인가 궁금한 표정으로 검왕이 말하길 기다렸다.
북궁연의 옆에 서 있는 검왕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무슨 일인가?'
문득문득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기억을 잃으면서 또 다른 인성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맞아 북궁연, 권왕의 연인을 납치해야지.'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인성을 잃은 채, 목적성만 가진 또 하나의 검왕으로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검왕이 조금이라도 정신이 들 때, 절대고독을 조종하고 있는 야율초의 얼굴에 힘줄이 돋아났었다.
반각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였다.
검왕이 갑자기 돌아서서 북궁연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시선엔 초점이 없었다.
절대고독의 독성이 그를 완전히 잠식한 것이다.
"조부님."
북궁연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검왕의 손이 북궁연의 혈을 점하려고 뻗어 나왔다. 북궁연이 가까스로 옆으로 피하며 물러서자 검왕의 감정기복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지마라! 이리 오너라!"
북궁연은 그 목소리를 듣고 검왕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대체 할아버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지?'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을 해결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장 급한 것은 검왕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었고, 아이를 지키는 일이었다.
북궁연이 다급하게 검을 뽑으려는 순간 검왕의 손이 매서운 기세로 그녀의 완맥을 잡아 왔다.
너무 눈에 익은 기술.
북궁세가의 대라구환수(大羅九幻手)였다.
한 번 펼치면 일수유에 아홉 번을 공격할 수 있는 금나수이자, 장법이었고 지법인 무공이었다.
북궁연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왼 손으로 공격해 오는 검왕의 손을 후려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검왕은 자신의 조부이자, 십사 대 고수 중 한 명.
북궁연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검왕의 손이 기묘하게 산개하면서 북궁연의 검을 낚아챘고. 뒤이어 발로 북궁연의 복부를 차 갔다. 북궁연은 다른 곳도 아니고 복부를 공격해 오자, 본능적으로 두 손을 휘둘러 배를 막아갔다.
'퍽 '소리와 함께 북궁연의 양 손이 검왕의 발과 충돌하였고, 그녀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모성본능으로 인해 검왕의 발길을 막긴 했지만 그녀의 한 쪽 팔은 충격으로 인해 거의 부러질 정도로 크게 다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검왕은 북궁연에게 빼앗은 검을 버리고 자신의 검을 뽑아 든 채 벌써 그녀를 공격해오고 있었다. 북궁연은 다친 손을 생각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라구환수를 펼치며 보법으로 검왕의 공격을 겨우 피해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 삼 합을 넘기기도 전에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리고 말았다.
북궁연의 시선이 절망으로 흔들릴 때 갑자기 검왕이 뒤로 물러섰다, 둘 사이로 옥룡이 뛰어 들었다.
마교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그녀는 검왕의 시선 깊은 곳에서 동질의 기운을 느끼고 혹시나 해서 뒤돌아왔던 것이다.
북궁연은 옥룡의 등을 마주하자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옥룡이 뒤돌아보지 않은 채 소리쳤다.
"언니 여긴 제가 감당할 데니 얼른 피하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옥룡이 검왕을 향해 자신의 최고 무공인 적봉옥령신공을 펼쳤다.
북궁연은 그래도 성한 한 손으로 자신의 조부가 빼앗았다가 땅에 던져 놓은 자신의 검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 조부님은 제 정신이 아니지만 절대 고수 중 한 분이야. 내가 피하면 혼자서 막기엔 불가능해."
옥룡은 대꾸 할 사이가 없었다.
검왕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자칫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상황이었다.
옥룡은 입술을 깨물고, 자신만의 비전인 적봉옥령신공에 금기마공인 잠력대법까지 전부 끌어 올렸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붉은 기운이 어리면서 날카로운 기운이 검왕의 검기를 향해 밀려갔다.
"퍽" 두 개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옥룡의 신형이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갔다. 하지만 검왕은 뒤로 주춤거리며 겨우 두 걸음 물러 섰을 뿐이었다.
"크윽" 무리한 때문에 피가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것을 억지로 집어 삼킨 옥룡은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이 아무리 마공을 익혔고 잠력대법까지 펼쳤다고 하지만 절대고수 중 한 명인 검왕을 상대하기엔 벅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얼른 북궁연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언니, 어서 피하세요. 그래야 나도 피할 수 있어요!"
북궁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우선 피하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그녀도 마음 놓고 도망이라도 갈 것이다.
"으아아."
그녀는 전 내공을 모아 날카로운 교성을 지르며 신법을 펼쳤다. 그녀는 자신의 고함을 듣고 누군가가 와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고함은 그리 멀리 퍼져가지 못했다.
검왕과 또 한 명의 절대자가 공력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북궁연은 불과 십장을 가기도 전에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능유환을 만나야 했다.
검왕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던 옥룡은 능유환이 나타난 것을 보고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옥룡이 주춤하는 사이 검왕은 대라칠정검법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칠성연환좌(七星連環座)를 펼치며 옥룡을 공격했다.
일곱 가닥의 검기가 북두칠성의 방위를 점하며 옥룡의 사혈만을 노리고 공격해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절대고독으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펼쳐서인가 조금 초식이 아주 정교하지는 못했다.
옥룡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제 아무리 삼무룡 중의 한명이었던 옥룡이지만, 칠성연환좌는 대라칠정검법의 최고 정수였고, 그것을 펼치는 인물은 십사 대 고수 중 한 명인 검왕이었다. 초식이 조금 거칠다고 그 위력까지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그저 굳어갈 뿐이었다.
막 그녀의 전신사혈을 유린하려던 검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검왕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어느새 검혼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옥룡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처 ‥‥철 공자님."
검혼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모르지만, 여긴 내게 맡겨 놓고 우선 치료부터 하시오."
옥룡은 검혼의 말에 대꾸할 여유도 없이 신형을 날렸다.
능유환을 만난 북궁연이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북궁연을 사지로 몰아가던 능유환은 갑자기 검혼이 나타나자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처음부터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작전이었지만, 그래도 이왕 시작한 것 임무는 완수하고 돌아가야 할 터였다.
'할 수 없다. 빨리 북궁연을 제압하여 돌아가자.'
능유환은 결심을 굳히며 검에 내공을 더욱 끌어 올렸다.
처음 북궁연을 막아서면서 칠절탈명검법의 은광섬과 팔황문의 절기로 그녀를 단 한 번에 제압하려 했었다. 하지만 북궁연 역시 대라칠절검법의 절초로 마주공격하면서 자신의 검초를 상대하였다. 강호무림에서 정과 사를 대표했던 두 개의 검초가 엉켜 들었었다.
한데 북궁연의 무공은 능유환이 생각한 것보다 강했다.
비록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대라칠정검법은 정교했고, 내공의 깊이도 소문 이상이었다.
그녀는 아운으로부터 불괴수라기공을 전수받고 내공까지 얻은 이후 많은 무공의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십사 대 고수 중 한 명인 능유환을 이길 순 없었다. 능유환이 팔 하나가 없지만 북궁연 역시 왼팔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능유환은 단숨에 북궁연을 제압하지 못하자, 호승심이 크게 일어 자신의 최고 절기를 연이어 펼쳐 내었다.
"차르릉" 하는 쇳소리와 함께 북궁연은 자신의 검초가 풀어지면서 능유환의 검기가 자신의 목줄을 향해 찔러 오는 것을 느끼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능유환의 검은 마치 북궁연의 목과 줄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녀가 움직이는 괘적을 타고 쫓아왔다.
겨우 세초를 막아 냈을 땐 이미 기진맥진하고 있었다.
힘이 풀어지고 검을 놓치기 직전에 옥룡이 능유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만약 조금만 늦었으면 북궁연은 변을 당했으리라.
능유환을 공격하는 옥룡은 적봉옥룡신공과 잠력대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상태였다. 제 아무리 능유환이라고 해도 한 손이 없는 상황에서 옥룡의 전 힘을 다한 공격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북궁연 또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후진들의 협공을 부담스러워 했단 말인가?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화가 났다. 자신의 팔을 가져간 아운에 대한 분노가 일었고, 그 분노는 바로 북궁연과 옥룡에게 이어졌다. 아직까지 북궁연을 사로잡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자격지심까지 생기는 능유환이었다.
능유환은 북궁연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빨리 제압을 한 후 데려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궁연의 무공은 적당히 상대하기엔 너무 강했다. 잠력대법까지 펼친 옥룡의 무공은 상상이상이었다.
북궁연을 공격하던 그의 검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탈명진천의 초식으로 옥룡을 공격하였다. 비록 왼팔로 펼쳤지만, 칠절탈명검법의 여섯 번째 초식인 탈명진천은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중 두 번째로 위력이 강한 비기였고, 왼팔로 펼치는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가장 위력적으로 펼칠 수 있는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옥룡의 손에서 펼쳐진 붉은 기운과 능유환의 검기가 스치듯이 비켜갔고, 그 사이로 다시 북궁연의 검이 질러갔다.
마치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세 사람의 그림자가 멈추었다가 빠르게 물러섰다.
북궁연은 겨우 검을 들고 서 있었는데, 어깨에 검상을 입고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능유환 역시 배꼽 위쪽으로 옷이 찢겨지며 제법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를 습격했던 옥룡은 어깨와 배 쪽에 상처를 입었지만, 의연한 자세로 서서 무서운 투기를 뿜어내며 능유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능유환을 공격해 들어갈 것 같았다.
북궁연 역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서히 검을 들어올렸다.
능유환은 두 사람을 보고 더 이상 지체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옥룡의 무공은 그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북궁연의 무공 또한 만만하지가 않았다.
두 손이 다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미 한 손을 잃고 적응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지금은 빠른 시간에 두 사람을 제압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검왕의 내공 수준으로 보아 절대고독을 사용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고, 잠시 후면 무림맹의 고수들도 들이닥칠 것이다. 갑자기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손 하나를 잃고. 두 명의 후기주수조차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도 서러운데 무인답지 않게 암계를 펼치고 있었다. 당당한 무인으로서 세상을 풍미하던 칠사의 일인인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허허 팔을 잃었으면 명예라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 그도 역시 나에겐 족쇄가 되는구나.'
능유환은 옥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교의 무공인가? 대단하군. 역시 무사는 무예로써 당당하게 겨루어야 하는 것인데, 선배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하지만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네. 이제 그 흉측한 암계는 깨졌으니 나는 이만 물러서겠네."
능유환은 그 말을 남기고 갑자기 사라졌다.
능유환이 사라졌지만, 옥룡은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능유환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궁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옥룡에게 다가와 말했다.
"동생 고마워.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어."
옥룡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언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그 보다는 검왕 어르신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옥룡의 말에 북궁연은 검혼과 검왕 북궁손우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둘의 대결은 아주 치열했다. 하지만 흐름이 유연한 검혼의 초식에 비해 검왕 북궁손우의 검초는 매우 불안하고 매끄럽지 못했다.
이미 정상이 아닌 검왕이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는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 북궁연과 옥룡이 힘을 합하자. 검왕은 십여 합을 견디지 못하고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고독의 힘이 약해지면서 희미하게 정신이 들기 시작한 검왕이 초식을 순간적으로 멈춘 것도 결전을 쉽게 끝낼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검혼은 검왕의 혈도를 점한 다음 다급하게 옥룡을 바라보았다.
그때 옥룡의 전음이 들려온다.
- 저를 걱정하지 말고 조용히 이곳을 떠날 수 있게 해주세요.
검혼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는 옥룡의 평온해 보이는 표정 안쪽에 숨어 있는 그녀의 희미한 생명력을 본 것이다.
옥룡이 북궁연을 보고 말했다.
"언니 이곳은 언니에게 맡길게요. 저는 검혼 소협하고 잠시 갔다 와야 할 곳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와 할 이야기도 많고요."
북궁연은 옥룡과 검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검혼이 옥룡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몽고의 황족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조금 걱정되는 표정으로 옥룡을 바라보자, 옥룡이 밝은 미소를 짓고 전음을 보냈다.
- 언니도 알다시피 검혼 공자는 저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는 지금 자신이 몽골의 황족이란 사실로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가 저를 찾아온 것은 할 이야기가 있어서겠지요. 그래도 그간의 정리가 있고, 제 생명의 은인이신 분이에요. 제가 잠시 시간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같이 가서 해결해야 할 일도 있고. 다녀와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북궁연은 옥룡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슬프게 들려왔다.
분명히 말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북궁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옥룡이 검혼을 바라보자, 검혼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장소저."
"알고 있습니다. 일단 이곳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기엔 합당한 곳이 아니니 다른 곳으로 가죠. 이제 곧 무림맹의 무사들이 오면 서로 불편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검혼이 북궁연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제가 장소저에게 불리한 일을 하거나 무례한 일을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공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럼."
검혼의 말이 끝나자, 옥룡이 앞장서서 신법을 펼쳤다.
검혼이 그 뒤를 따른다.
달리던 검혼은 갑자기 날아온 물방울을 느끼고 안색이 굳어졌다.
옥룡은 단숨에 십여 리를 달린 후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검혼이 다가 온 순간 천천히 그녀의 신형이 쓰러지고 있었다.
놀란 검혼이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입가로는 피가, 눈가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에게 날아온 물방울은 앞서서 달리던 그녀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장소저!"
장무린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검혼이 얼른 그녀의 맥을 잡고 그녀의 상태를 살피려 할때, 옥룡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내 몸은 제가 안답니다. 잠력대법은 나의 생명력을 담보로 펼치는 무공. 더군다나 계속해서 환환대법을 풀어 놓고있는 상태에서 너무 지나치게 사용했어요. 능유환의 마지막 검은 제 오장육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내가 살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검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혹시라도 그녀가 함께 해준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 묻혀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의 가슴엔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그녀가 그곳에서 쓰러지지 못했던 이유는 북궁연과 검왕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것이고, 그것은 결국 권왕 아운을 위한 배려였으리라. 그래서 당장 쓰러질 정도로 큰 내상을 입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으리라.
가슴이 아파온다.
그녀가 권왕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을 봐주길 원했다.
"잘하시었소, 바보같이."
장무린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철공자님 말씀대로 제가 바보긴 한가 봐요.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 분 생각만 나니."
그 말을 듣는 검혼의 마음은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철공자님, 염치없는 말이지만 죽기 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검혼 철위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의연하자, 의연해야 한다.'
"말하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리다."
무척 의연하고 담담하게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눈이 흐릿해지는 걸까?
"아운 공자님의 마지막 결전을 보고 싶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지켜보고 싶습니다.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리다. 그러니 내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견디시오."
검혼의 말을 들은 옥룡 장무린의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이 걸렸다.
'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려놓으리다. 꼭 그렇게 하리다. 그러니 쉽게 죽지 마시오. 아운, 그렇지 권왕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제발 살아 있으시오.'
철위령은 기어코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검혼은 그녀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모자라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달리지 않으면 자신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당장 초조해 하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고 싶었다.
지금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는 검혼의 모습은 그의 고통에 찬 비명과도 같았다.
전후사정을 들은 하영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인의 사정은 무인이 잘 아는 법이라고 들었어요, 마침 나군명 대협께서 아직 무림맹에 계시니 그 분에게 검왕 어르신의 상태를 살피게 하고, 빨리 사람을 보내 우칠 아저씨를 찾으라고 하세요. 그 서신은 오라버니에게 심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을 거예요. 다행히 결전 직전에 주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림맹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영영이나 북궁연 입장에서 보면 일이 이정도에서 마무리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하영영은 무림맹의 맹주대행도 아니고 어떤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무림맹의 무사들은 그녀의 말을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맹주대행을 하면서 보여준 능력으로 인해 많은 무인들에게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고, 또한 맹주인 권왕의 동생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군야평,
조금 쌀쌀한 바람이 사방 산자락을 휘감아 돌고 있었지만, 주변 수십 리 일대는 수만 명의 무인들이 들어차 추위를 느낄 틈이 없었다. 드디어 대전사와 아운의 결전 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무인들 중 군야평 안까지 들어간 무인들은 겨우 천여 명 정도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숫자의 몽골 전사들이 그 안으로 들어왔다.
그 외의 무인들은 군야평을 둘러싼 종남산 밖에 모여서 궁금함을 달래야 했다.
사방을 직각으로 솟아 오른 산이 둘러싼 군야평은 몇 군데만 막고서면 함부로 올라오기도 힘든 곳이었다.
군야평의 무인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자리를 잡고 웅성거리며 이번 결전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몽골의 전사들이 있는 북쪽과 무림맹을 중심으로 중원의 무인들이 있는 남쪽에서 각자 한 명씩의 장한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군야평의 동쪽에 미리 만들어 놓았던 거대한 북에 서서 서로 번갈아 가며 그 북을 치기 시작했다.
두 장한이 북 앞에 나서면서부터 그 동안 시끌벅적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둥, 둥, 둥......"
열두 번의 북소리가 들리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제 약속한 시간이 된 것이다.
군야평이 내려다보이는 서쪽의 산봉우리 위에 검혼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 내렸다.
그의 품안에는 옥룡 장무린이 안겨 있었다.
원래 군야평을 둘러싼 산 위에는 꽤 많은 무인들이 숨어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들은 군야평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강한 무공을 지닌 자들로 군야평을 지키고 있는 무인들 모르게 숨어든 자들이었다.
무림맹이나 몽골의 전사들도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들이라면 자신들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모르는 척 하는 중이었다.
검혼이 올라온 산봉우리는 군야평을 내려다보기에 가장 좋은 봉우리로 좋은 위치인 만큼 이 위에도 다섯 명의 무인들이 먼저 올라와 있는 중이었다.
다섯 명의 무인들은 위치가 좋은 곳인 만큼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제법 강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검혼이 여자를 안고 나타나자, 그에게 기세를 쏘아 보냈다.
힘이 모자라면 알아서 다른 곳으로 가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지만, 검혼은 코웃음을 치며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사라져라!"
그답지 않게 말이 거칠었다.
옥룡의 상태가 그를 거칠게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옥룡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가 그의 감정을 폭발시켰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섯 명의 무인들은 모두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검혼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래도 한 지방에서 십 위권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삼십을 넘어 보이는 검혼이 자신들을 무시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오십대 남자가 검혼을 노려보며 물었다.
"네 놈은 누구기에 그리 건방진 것이냐?"
"검혼, 철위령이 내 이름이다."
"욱!"
검혼이란 말을 들은 다섯 명의 무인들은 모두 안색이 굳어졌다.
이미 강호에서 그의 무공 수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가 몽고의 황가 줄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림맹에서 비밀로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나섰던 사람은 호북성에서 유명한 지검호 봉기라 불리는 무인이었다.
지법과 검법에 능하고 정사 중간의 인물이었다.
그가 군야평의 천명 안에 들지 못한 것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무림맹의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무공과 명성으로 보아서는 능히 그 안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자였다. 하지만 그런 지검호도 검혼이란 말에 반쯤 넋이 나가고 말았다.
"다, 당신 진짜 검혼 철대협이시오?"
검혼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자, 지검호는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무지막지한 기세 앞에서 숨통이 조여 오는 공포를 느낀 것이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검혼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저런 기세를 뿜어 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주춤거리다가 봉우리에서 도망치듯 사라지고 말았다.
다섯 명의 무인들이 사라지고 나자, 검혼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안타까운 시선으로 옥룡을 내려다보았다.
파리한 얼굴.
창백한 입술이 그녀의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검혼은 자신이 아는 방법을 다 동원하였고. 야율초를 찾아가 애원도 해 보았다.
옥룡만 고칠 수 있다면 자신은 뭐든지 할 수 있는 각오를 보였었지만, 천하의 야율초도 그녀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몽골 최고의 의원들도 고개를 흔들었다.
옥룡의 상세라는 것이 처음부터 고칠 수 없었던 지병을 가지고 있던 데다 남아 있는 자신의 생명력 자체를 전부 소진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영약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 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옥룡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미세한 것까지 전부 기억해 놓으려는 듯 검혼은 한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상이 모두 당신을 잊어도 나만은 당신을 잊지 않으리다.'
검혼은 호흡을 조절하고 눈가에 물기를 닦아 내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검혼은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한 후 옥룡의 몇 군데 혈을 짚었다.
'일어나시오, 그리고 당신이 그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시오.'
검혼의 기도를 들었음인가? 장무린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마침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권왕 아운이 군야평에 나타났고, 남쪽의 군웅들이 환호를 질러대었다.
이어서 대전사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움찔.'
옥룡이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시선으로 검혼을 바라보았다.
"철 공자님."
미약했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군야평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요."
옥룡 장무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제가 많이 기절해 있었나요?"
"조금 되었소."
"공자님껜 계속 신세만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검혼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신세라 생각하지 마시오, 이전엔 장소저의 일행이 저를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검혼의 말에 옥룡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검혼은 그 미소를 보고 오히려 가슴이 울컥하는 것을 겨우 참아 내었다.
"저를 조금만 일으켜 주세요."
검혼이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쳐 주었다.
아련하게 군야평 아래가 내려다보인다.
흐릿한 그녀의 시선 안에 대전사와 아운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꼭, 꼭 이기세요.'
그녀는 마치 자신의 시선 안에 아운을 집어넣기라도 할 것처럼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아운을 바라본다.
그 모습은 비수가 되어 검혼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또 뵙게 되었습니다."
아운의 차분한 말에 대전사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사이에 또 발전을 하였군, 참으로 대단하네."
"아직도 대전사님에 비하면 부족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도전을 했단 말인가?"
"방법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게 되면 죄 없는 희생자만 늘어날 테고, 어차피 무공이란 것이 지금처렁 계속 늘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부족하다 해서 꼭 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운의 말에 대전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대전사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투기였다.
"많은 준비를 한 모양이군."
아운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많이는 모르겠고,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는 했습니다."
"기대하겠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제법 차가운 바람이 스치듯이 달려오다가 갑자기 회오리바람으로 변하면서 흩어져 가고 있었다.
처음 긴장감은 자연스런 대화 속에 스러지고 마치 조부와 손자의 모습 같았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엔 무서운 기의 장막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결전을 시작한 것이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흔들림이 없는 눈.
"훌륭하다. 벌써 부동심안(不動心眼)의 경지까지 올라와 있다니 허허, 내 백 년 만에 전 힘을 다 기울인 결전에서 자칫하면 망신을 당할 수도 있겠군."
"이 정도는 되어야 대전사님과 겨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꼭 실현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자넨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그럼 이제 준비하시게."
"전 이미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대전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도를 뽑아 들었다.
앞에 아운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아운 역시 대전사가 도를 뽑아 들 때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대전사가 뽑아 든 도의 도신이 없었다.
손잡이만 있는 도.
지켜보던 무림맹 쪽 무인들의 입가에 탄성이 어렸다.
대전사를 잘 모르는 수많은 무인들은 그가 도신조차 없는 도를 꺼내자, 아운을 능멸하기 위해서인 줄 알았던 것이다.
"슈우욱."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밝은 광체가 어리더니 하나의 도신이 만들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비록 도신의 끝 세치가 잘려진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형체가 쇠로 만들어진 도신보다도 더욱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무림인 중 한 명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무형심도(無形心刀)의 경지다. 내 살아생전 무형심도를 보다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그의 말이 아니라도 무인들은 대전사가 보여준 무형심도를 보고 적잖게 충격을 받고 있었다.
검왕의 상세를 돌 본 후, 이곳에 와 있던 무당의 유령검제 나군명 조차도 넋을 잃고 대전사의 도를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전설에서나 나오는 경지라고 생각했던 무형심도가 준 충격은 그 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나군명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권왕이 이길 수 있을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나군명은 일단 실력에서는 아운이 대전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 함께 앉아 있던 서문정이 나군명의 표정을 보고 안색을 굳혔다. 그의 표정에서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앞쪽에 앉아 있던 야한이 두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런 썅, 무형심도라니. 저건 좀 너무 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소? 선배, 왜 저런 자가 심산유곡에 숨어서 기인이사로 살아가지 않고, 세상에 나타나서 피바람을 몰고 다니느냐 이거요. 이제 보아하니 나이도 많아 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이왕 갈려면 곱게 갈 것이지 왜 권왕 님을 괴롭히냐 이거요. 안 그렇소? 흠, 내 저 늙은이를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놓고 말 것이오."
흑칠랑이 묘한 시선으로 야한을 흘겨보고 시선을 군야평의 두 사람에게 고정시켰다.
'그래 대전사 잘한다. 흐흐 네가 이기면 난 권왕과 안 싸워도 된다. 그러니 꼭 이겨다오.'
흑칠랑은 열심히 대전사를 응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한은 흑칠랑이 자신을 상대조차 안하자, 갑자기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서문정 앞에서 괜히 어깨에 힘 좀 주려고 했다가 가볍게 무시당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걸 선배만 아니면 그냥 콱.'
갑자기 흑칠랑이 야한을 돌아보았다가 그의 매서운 시선을 보고 안색이 일그러졌다.
"너 지금 나 째려보는 것이냐?"
흑칠랑의 말은 나직했지만, 살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선배의 매서운 눈빛을 흉내 내는 중이었소, 훌륭한 후배는 선배의 좋은 점을 배워야 하지 않겠소. 험, 그런데 누가 이길까요?"
뭔가 조금 이상했지만, 지금 싸울 처지가 아닌지라 흑칠랑도 은근히 넘어가고 말았다.
"글쎄, 뭐 강한 자가 이기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야한은 아직 화가 안 풀렸다.
정적.
갑자기 군야평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물 한 잔 다 마실 시간이 흐르도록 두 사람은 그저 서로 마주보고만 있었다.
대전사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역시 기세에서도 크게 부족하지 않군,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얼군. 이제 시작해 보세 보는 사람들을 지루하게 찰 수야 얼지 ,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선배님."
아운 역시 부드럽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조금 충격을 받고 있었다.
'대치하고 있던 기세를 자연스럽게 풀면서 도를 들어 올렸다. 내가 뿜어낸 기세가 그냥 풀어져 버리다니, 역시 대전사다.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후후 무조건 이걱야 하는 결전이다. 무슨 마음 약한 생각이란 말인가? '
아운이 자신의 강정을 다스리고 있을 때, 대전사의 도가 섬전처럼 허공을 격하고 일도양단의 기세로 아운의 머리를 향해 찍어 왔다.
에비동작 하나 업이 펼쳐진 대전사의 도법은 너무 빨라서 그냥 한 줄기의 섬광이 하늘에서 룸어져 아운의 머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운이 주먹을 들어 대전사의 도를 비스듬히 막아갔다.
한쪽은 도이 고, 한쪽은 맨주먹이었다.
더군다나 도를 든 쪽이 더 고수였다.
무림맹 측의 무인들 표정이 굳어졌다.
일부는 눈을 감는 사람도 있었다.
대전사의 도가 아운의 주먹을 가르고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서걱"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대전사의 도가 아운의 주먹 세치 앞에서 멈칫하더니 갑자기 옆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맨 주먹인 줄 알았던 아운의 주먹에 밝은 광체를 뿜어내는 반월 모양의 강기가 감싸고 있었다. 대전사의 도가 미끄러짐과 동시에 아운의 왼 주먹이 대전사의 안면을 향해 질러가고 있었다.
이미 공격을 나간 대전사의 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회수되며 아운의 주먹을 막아갔다.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아운과 대전사가 서로 물러서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밑을 기점으로 땅거죽이 뒤집어지면서 십장까지 밀려나고 있었는데, 그 여파는 사방 삼십 장을 흙먼지로 뒤엎었다.
군야평에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서 부랴부랴 뒤로 물러서면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인간의 힘인가?"
몇몇 무인들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월광분검영과 분광파천뢰를 연이어 펼친 아운은 대전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각자 다섯 걸음씩 물러서 있었다.
처음 공격은 대전사가 하였고, 두 번째 공격을 한 것은 아운이었다. 실질적으로 정면 충돌을 한 두 번째 충돌에서 방어를 한 것이 대전사임을 감안하면 아직은 아운의 내공이 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순간에 두 번을 치고받은 두 사람이 어떻게 싸웠고, 아운이 주먹으로 대전사의 도를 어떻게 방어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운은 아쉬울지 모르지만, 대전사는 어지간히 놀란 표정으로 아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운의 실력이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운이 권공을 사용하는 방식도 이전과 달리 아주 특이하게 변했다.
설마 자신의 도를 주먹으로 막으면서 비스듬히 흘려보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주먹으로 도를, 그것도 강기로 만들어진 예리한 도를 막는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운은 정말 그렇게 했고. 대전사의 도를 막아 내었다.
"허허, 대단하군. 지금 권공을 그리 사용한 것은 나의 속도를 쫓아오기 위해서인가?"
아운은 숨기지 않았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내 실력이 대전사님에게 뒤지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몇 가지 준비한 것 중 하나가 강기를 주먹에 고정시킨 채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운의 말을 듣고 대전사는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기가 막힌 방법이군. 정말 좋은 생각일세, 소모성 강기를 주먹에 고정시켜 무기처럼 사용하리라곤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방법일세."
대전사는 정말 감탄하고 있었다.
권공(拳攻)
주먹에서 강기를 뿜어 상대를 공격하는 무공을 일반적으로 권공이라 부른다. 그리고 강호 역사상 이 권공이라 부를 수 있는 무공은 불과 대여섯을 넘지 않았다. 아주 많이 잡아주어도 열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기란 것이 허공을 격하고 상대를 공격해야 하는 만큼 계속해서 유지하기도 힘이 들고 멀리 있는 상대를 타격하는 무공이다. 보니 시간적인 면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까운 곳에서 강기 공격을 하면 될 수도 있지만, 무기를 든 상대가 거리를 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강기를 뿜어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예비동작이 있어야 한다.
한데 뿜어진 강기를 소모시키지 않고 손에 두른 채 사용한다면 마치 박투처럼 사용할 수 있고, 하나의 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말이 쉽지 이런 식으로 강기를 사용할 생각을 누가 했겠는가?
비록 아운의 무공이 대전사에게 필적할 만큼 다가서긴 했지만 속도에서는 미세하게 뒤졌고, 내공에서도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미세하게 뒤진다는 것은 고수들 사이에서 큰 차이라 할수 있었다. 그래서 아운은 강기를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먹에 두른 채 박투 형식으로 겨루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 상태로 동작을 최소화 하면서 싸운다면 도법을 사용하는 대전사보다 속도 면에서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먹이 도의 궤적보다 작기 때문이었다.
이는 대전사가 도에 도강을 장착시킨 것과 비슷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대전사가 도강을 쓴다면 아운의 주먹에 장착된 삼절황도 역시 강기였다. 단순히 맨 주먹이 아닌 주먹 자체를 강기화 시켜 무기화 시킨 셈이었다.
이렇게 함으로 속도에서 대전사보다 위에 선다면 모자라는 내공으로도 충분히 겨룰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한 것이다. 또한 기회를 보아 강기를 쏘아 보낼 수도 있으니 이것도 큰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대전사의 칭찬에 아운이 받았다.
"실력에서 뒤지기에 약간의 편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대전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상황에서도 초식을 바꾸는 것이 자유롭다면 절대 편법이라고 말할 수 없네. 자네의 기발한 생각으로 인해 권공을 사용할 수 있는 응용 범위가 좀 더 다양해졌고. 날카로워졌다고 할 수 있지. 허허 그런 식으로 내 속도를 따라 잡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를 이기진 못해."
아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물론입니다."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진다. 어떻게 하던지 십초 이내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
대답을 하면서 아운은 대전사와 결전이 길어지면 내공에서 뒤지는 자신이 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운은 양 손을 들고 몸을 웅크린 채 자세를 취했다.
박투를 할 때의 자세였다.
지금처럼 강기를 박투에 적응시키기 위해 무림맹의 지하 밀실에서 십여 일간 쉬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하였었다.
대전사 역시 도를 들어 올렸는데 동작이 아주 간소화 되어 있었다. 큰 동작으로 싸우게 되면 자신이 그 만큼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운은 천천히 보법을 밟기 시작했다.
상대가 공격을 한 다음 보법을 밟으면 불리하다.
보법으로 움직이다가 피하면서 받아치는 공격이 조금 더 위협적이고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가 움직였다.
순간 아운의 신형이 우측으로 급회전하면서 앞으로 밀고 들어갔다. 피하지 않고. 간격을 줄임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거리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도는 길고 주먹이 미치는 거리는 짧다.
타격점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거리를 줄이는 것이 유리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문제는 대전사가 휘두르는 도의 속도였다.
아운이 앞으로 밀고 들어가기도 전에 그의 도는 수직으로 후려쳐 오고 있었는데, 초식 안에 아운을 완전히 가둔 형태였다. 이 상태라면 보법으로 피하기도 어렵고 공격해가기도 어려웠다.
'역시 빠르다.'
아운은 다시 한 번 대전사의 속도에 감탄하며 주먹으로 대전사의 도강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일단 하나를 막으면 그 순간 다른 도의 강기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탕"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운의 지척에 이른 도강이 아운의 손에 둘러쳐진 월광분검영의 권강과 충돌하였다.
'큭'
아운은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손에 그 충격이 전해 온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 대전사의 도강을 비키듯이 흘려내려 하였지만, 대전사가 도강의 방향을 슬쩍 바꾸어 정면으로 충돌하게 하였던 것이다.
도강은 도에 맺혀 있고, 충격이 온다고 해도 도를 통해서 오기 때문에 완충지대를 거치지만, 권에 맺힌 권강은 충격 완화가 적고 직접적일 수밖에 없었다.
손에 가해진 충격은 아운의 가슴까지 밀고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어느새 이어진 도의 강기가 아운의 가슴과 다리를 노리고 밀려오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칠보둔형보법으로 겨우 피해내었지만, 그것은 한 번에 불과했다.
거리를 확보하기도 전에 다시 밀려온 도강은 피할 사이가 없었다. 결국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역시 대전사다. 나에게 거리를 주지 않으려 한다.'
아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강기를 뿜어서 막으려 했다면 초식을 펼치기도 전에 다리가 잘렸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이미 강기가 둘러진 주먹으로 막는 것이라 속도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퍽'
소리가 들리면서 주먹과 도가 두 번째로 충돌을 하였다.
손이 어깨까지 쩌릿해진다.
다행히 내공으로 충격을 완해 했지만, 손의 뼈가 부러지는 충격을 피하진 못했다. 그리고 그때 재차 공격해 온 대전사의 도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번엔 왼 주먹으로 그 도를 막으며 한 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팔이 탈구되는 듯한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더 이상 전진은 불가능했다.
대전사의 도는 빨랐고. 아운이 전진하려는 길을 교묘하게 방해하면서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도강의 날을 마음대로 바꾸면서 아운이 자신의 공격을 비스듬히 흘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 공격에서 아운이 자신의 도를 미끄러트리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대처 방법을 찾아 낸 것이다. 찰나의 순간 마음먹은 대로 강기의 날을 비틀어 바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전사의 능력을 알 수 있었다.
'대전사는 주먹과 충돌하기 전 방향을 바꾼 다음 도에 내공을 주입하고 있다. 그래서 강기가 방향을 바꾸어 권강과 정면충돌을 하여도 위력적인 것이다.'
아운은 그 원리를 알았으면서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당장 공격을 막기에도 벅찼다.
단 세 번이지만 두 팔이 마비되어 오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주먹의 속도가 느려졌고, 그것을 노렸다는 듯이 대전사의 도가 일직선으로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아운은 두 주먹을 들어서 막았다. "꽝"하는 소리가 나면서 아운의 몸이 땅으로 세치나 들어가 버렸다. 재차 충격이 쌓인 오른손이 부러질 듯 마비되는 충격을 받았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대전사의 도가 위로 튕겨 올랐다.
두손을 사용한 덕분에, 게다가 대전사의 도가 주먹을 치는 순간 월광분검영에서 분광파천뢰로 초식을 바꾼 때문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충격을 받는다면 대전사에게도 충격을 주기 위한 아운의 발악에 가까운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 반발력으로 인해 아운에게 전해진 충격도 적지 않았다.
"컥"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자신이 충격을 받은 만큼 대전사 역시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바라본 아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강기로 이 루어진 도신(刀身).
대전사의 도신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며 그 충격을 허공에 흘려버린 것이다.
충격에 억지로 견디면 도를 쥔 주인에게 부담이 전해온다.
대전사는 그것을 생각하고 일시적으로 도신을 날려 힘을 흘려보낸 후 다시 도신을 생성해 버린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어진 도신이었다. 도신이 사라지면서 분광파천뢰의 충격도 함께 사라겼다.
'급하다.'
아운은 상황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깨우쳤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대전사의 도가 수평으로 날아오며 자신의 목을 향해 쳐오는 것을 느꼈다.
대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도의 기세가 달랐다.
'승부를 걸어오고 있다.'
아운은 순간적으로 그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지금 대전사의 도에는 십성 이상의 힘이 실려 있었다. 한마디로 지금 이 일도에 대전사는 자신의 전력을 다 기울인 것이다. 피할 사이도 없었다.
아운은 이를 악물고 몸을 틀며 그 힘까지 이용해서 오른손으로 휘어쳤다. "깡." 강기와 강기가 충돌하였다. 쇳소리가 들리면서 아운의 신형이 옆으로 튕겨지듯이 날아갔다.
'으으'
신음소리가 입으로 세어 나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아운은 대전사의 도와 충돌하기 전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하여 그 힘이 쳐 오는 방향대로 몸이 날아가게 둔 것이다. 그렇게 충격을 완화 시켰기에 살아 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미련하게 버텼다면 손이 날아가면서 목까지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아운은 자신의 손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최소 두 세 개의 손가락뼈가 더 부러지고 금이 갔을 것이다.
"털썩," 아운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대전사는 다시 한 번 아운을 향해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남쪽의 무인들 대부분은 눈을 감았다. 아운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짧은 순간 아운은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지금 공격을 막지 못하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고, 막자니 분명 힘에 부쳤다.
'그래도 해야 한다. 충격이라도 최소화한 다음‥‥ 충격? 그렇지 도에 충격을 주면 다시 흘려버릴 것이다. 하지만 ‥‥‥?'
아운의 머릿속을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키며 양 주먹으로 대전사의 도를 향해 밀어 올렸다.
"퍽"
다시 한 번 충돌하는 순간 그 충격을 이기기 못한 아운은 다시 주저앉았고, 그 순간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대전사의 손이 날아가 버렸다.
"커억"
아운은 다시 한 번 피를 토해 놓고 비척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대전사를 바라보았다. 순간 군야평의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 고정된 채 고요한 정적에 잠겼다. 그렇게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대전사가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멋지군, 어떻게 한 것인가?"
"충격은 무기를 타고 주인에게 전해지더군요, 그것을 조금 이용해 보았습니다. 마치 격공장처럼 무기를 격해 대전사님의 손을 공격했을 뿐입니다. 무기가 아니라 무기를 통해 대전사님을 직접 공격한 것이죠. 마치 벼락이 나무를 가격했을 때, 그 나무를 잡고 있던 사람이 죽는 것처럼."
"허허, 그런가?"
모든 시선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한 번 대전사의 공격에 아운이 무조건 질 것이라 생각했던 군중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면서 대전사의 손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부서진 대전사의 손이 허공에서 재로 날아가고 있었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와 약간의 도신만 남아 있던 도가 땅에 떨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허허, 그렇군. 내가졌군."
대전사의 얼굴에 허탈함이 떠올랐다.
막고 어쩌고 할 틈이 없었다.
아운의 주먹과 자신의 도가 충돌하는 순간 그 도신을 격하고 아운의 분광파천뢰가 터졌다. 충돌하는 도신에 폭발 시킨 것이 아니라 도가 충돌하는 순간 태양무극섬과 분광파천뢰를 동시에 흘려보냈다. 즉 도를 격하고 도를 잡은 주인에게 직접 충격을 준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도신을 없애 충격을 완화시키는 방법도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도가 충돌할 때 그 충격이 도와 손을 통해 전해진 것이 아니라 도를 잡은 손과 그 손을 통해 대전사를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강기를 쏘아 보내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충돌하는 순간 공격을 당한 것이라 도신을 없애고 뭐고 할 시간도 없었다 대전사는 순간적으로 놀라 전 내공을 동원하여 막았지만, 아운은 두 손 중 한 손은 분광파천뢰를 그리고 또 한 손은 삼절황의 마지막 무공인 태양무극섬을 한꺼번에 펼쳤다.
덕분에 아운의 양손은 뼈가 어긋나고 깨졌지만, 대전사의 양손을 재로 만들고 오장육부를 흔들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운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순간 상대의 도신을 통해 공격한 태양무극섬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자신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혹여 도를 순간적으로 놓았다면 대전사의 내부까지 충격을 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인이 자신의 무기를 버릴 수 있겠는가?
"어.... 어떻게 된 것인가요?"
옥룡은 떨고 있었다.
흐릿한 시선으로 군야평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엔 정확하게 초점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눈에 힘을 주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어떻게 하던지 아운을 단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검혼은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참으며 마지막 남은 진기까지 짜내어 그녀에게 주입시키며 말했다. 검혼 정도의 고수라면 내공을 주입하며 말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처럼 장시간에 걸쳐 과도하게 내공을 나누어 주면서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검혼의 말투에는 어디에도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옥룡은 자신의 내부를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마지막 생기가 검혼이 쥐어짜고 있는 그의 내공임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다.
"권왕이 이겼소, 정확하게 어떻게 이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대전사의 손이 날아갔소."
그의 목소리는 조금 건조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친인척인 대전사였다. 그러나 아직 그런 기분이 든 것은 아니었다. 쉽게 그를 인정하기엔 그가 세상에 흘려버린 세월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친인척 이전에 원수라는 일면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대전사가 아운에게 지는 것을 보았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속도와 위력, 마지막에 어떻게 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아운의 공격.
그리고 친인척이자 자신과는 원수지간이라 할 수 있는 대전사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검혼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아픔은 더 큰 아픔으로 인해 그의 가슴 깊숙이 숨어 버리고 말았다.
'죽는 순간까지 나를 보지 않는구려, 하지만 끝까지 그대를 기억하는 것은 나일 것이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오.'
검혼은 마지막까지 권왕을 찾는 옥룡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한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던 옥령이 천천히 검혼을 바라보았다.
"고.. 공자님, 죄송‥‥ 그분에게 저는 행복하게,. 그렇게 산다고 나중에 전해 주세요."
"꼭 그러겠소. 그러니 정신을 차리시오."
옥룡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검혼은 입술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옥룡이 살아 있었던 것은 아운을 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란 사실을, 이미 며칠 전에 그녀의 생기는 모두 타고 재만 남아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아직도 아운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으으으"
검혼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다스렸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녀는 자신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너무도 허무하게 세상을 뜬 것이다 검혼은 옥룡을 끌어 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의 시신이 검혼의 뜨거운 가슴을 식혀 주고 있었다.
"눈을 뜨시오. 눈을 떠서 저기 권왕을 보란 말이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켜보란 말이오. 이렇게 죽으면 나는 어쩌란 말이오, 끄으으."
억지로 참아내는 남자의 울응이 그녀의 옷자락을 부둥켜 잡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대전사의 패배는 몽고의 전사들에게 근 충격을 주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야율초의 충격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대전사는 조금 허탈한 표정으로 아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돌아섰다. 엄호가 나서자, 대전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엄호는 더 이상 나서지 못했다. 번쩍 한 줄기 섬광과 함께 대전사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엄호는 조용히 대전사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아운에게 다가섰다.
"승리를 축하하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실질적인 실력에선 제가 뒤졌습니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능히 이길 자격을 가질 만한 실력이었네."
엄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아운은 그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말이 무엇인지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엄호는 갑자기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엄호와 광풍전사단이 권왕에게 도전하고자 하오, 이는 대전사님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단지 광풍대전사단의 이름으로 현 천하 제일고수인 권왕에게 도전하는 것일 뿐이오, 우리 도전을 받아 주시겠소?"
엄호는 갑자기 반 존칭을 쓰고 있었다. 이는 아운을 인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아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역시 광풍전사단과 겨루고 싶었던 참이었습니다."
이들이 중원을 헤집고 다니는 것보다 그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들의 도전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강호는 엄청난 혈란에 빠질 위험이 있었고, 몽고와의 일을 완전히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도전은 차라리 바라던 바였고, 어차피 도전을 받아 줄 것이면 수동적일 필요가 없었다.
엄호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졌다.
"광풍전사단은 강하오. 개인으로는 대협께 상대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삼백삼십삼 명이 협공을 하게 되면 광풍전사단은 무적이오. 대전사님이 열이 있어도 우릴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오. 당연히 우린 협공을 할 생각이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원단 직추 섬서성 위화분지내 소화평원에서 뵙겠습니다. 그 정도면 몽골에서도 가깝고 겨루기에도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소화산 근교의 소화 평원 말이오?"
"그렇습니다."
엄호로서는 거절찰 이유가 없었다 그 곳은 평야 지대로 기마술을 펼치기도 좋고, 광풍멸사진을 펼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이라면 나도 환영하네 그럼 그때 보겠네."
도전을 할 땐 반 존대를 하던 엄호가 다시 하대를 하였다.
도전할 때 정중했던 것은 무인으로서 권왕에 대한 예의였고, 지금은 선배로서 말을 놓은 것이리라,
엄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후 돌아섰다.
그의 등을 보면서 아운의 눈이 반짝였다.
'협공은 무적이다. 그 말은 나도 인정하오, 하지만 광풍전사단의 협공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때란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오.'
이렇게 새로운 결전이 약속되고 하나의 결전은 끝이 났다.
엄호 일행이 물러서고 나서야 남쪽 군웅들은 환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던 서문정 마저도 흥분한 듯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흑칠랑은 석상처렁 굳은 표정으로 아운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서 환호하던 야한이 흑칠랑의 모습을 보고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권왕님이 강하긴 하죠, 뭐 저 정도 강하다면 도전을 포기하셔도 선배님께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흑칠랑이 벌떡 일어서며 야한을 노려보았다.
"이 떡을 칠 놈아, 내가 그 정도로 밖에 안 보이냐? 광풍전사단 다음은 나 흑칠랑이 도전할 것이다. 역시 천하에 권왕과 겨룰 수 있는 강자는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다시 확인하였다."
"커컥."
야한은 가래가 목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 미쳤구나.'
차마 그 말을 입으로 말하진 못했지만, 야한은 빈정대는 시선으로 흑칠랑을 바라보았다. 혹칠랑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이놈시키가 지금 나한테 미쳤다고 말하려 했지?"
'헉 귀신이다.'
야한의 얼굴이 변하는 순간, 흑칠랑의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야한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갈 때였다.
"뭐하는 것이죠?"
"엥."
흑칠랑은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여자를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금 이 순간에 서문정이 나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불쾌한 시선을 하고.
"끼지 마시오, 후배 놈이 선배에게 대들기에 버릇을 가르치려는 것뿐이니."
"흥, 거짓말 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내가 다 지켜보고 있었는데, 야한 공자님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점잖아져야지, 죄 없는 후배나 닦달하면 되겠어요."
"헉, 공자씩이나?"
흑칠랑은 놀라서 서문정과 야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건 완전히 야한을 편들고 나서는 것 아닌가? 서문정은 자신이 야한을 치기라도 하면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흑칠랑은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허, 그렇게 된 것인가?"
흑칠랑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살수와 무림맹의 군사가 저래도 되는 것인가? 그건 그렇고 이제 포기할까 했더니 저 종자가 갑자기 자극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헛소릴 지껄이고 말았네.'
만약 아운이 광풍전사단 마저 이긴다면?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야한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그 옆에서 서문정이 야한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괜찮으신가요?"
"뭐 ‥‥ 나, 나야 괜찮소, 험험."
서문정도 막상 나섰다가 괜히 무안해져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근처에 있던 무림맹의 원로들이 두 사람을 수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북궁연을 바라보았다.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북궁연은 그녀가 들어와서 짓는 미소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이기셨구나?"
"이기셨습니다."
"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그녀가 받은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로지 아운이 이기기만을 기도하며 지낸 기간동안 그녀는 제대로 잠을 잔적은 물론이고 제대로 먹은 기억조차 없었다.
소홀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이제 좀 쉬세요."
소홀의 따뜻한 말에 그동안 참고 참았던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언니, 아이는 울보 엄마를 좋아하지 않는데요."
하영영이 안으로 들어서며 북궁연에게 말하자, 북궁연은 얼른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웃었다.
"어서와 동생."
"근데 그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던데 괜찮은 거예요?"
"나는 괜찮아! 그보다도 옥룡 동생의 소식은 아직 없는 것이지?"
"개방과 하오문에서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에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서 뭐라도 좀 드세요."
하영영의 말을 듣자마자, 북궁연의 배에서 꼬로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북궁연은 얼른 일어서며 말했다.
"맞아, 밥을 먹어야 해. 그 동안 아이가 많이 굶었을 거야."
그녀는 허겁지겁 식당으로 갔고, 그날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음으로 인해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대전사가 아운에게 패한 후 중원 무림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중원 무림맹의 이전 문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다음해 봄이 오면 섬서성으로 무림맹을 옮기는 것에 모두들 찬성을 하였다. 섬서성이 세외 세력으로부터 중원을 지키기에 유리한 곳이라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원 무림맹이 들어서야 할 터로 인해 몇몇 상단이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상단들은 아운의 지시로 그 곳에 미리 땅을 사 놓았던 칠보금검 소광의 가문인 하북성 무진상단을 비롯하여 강북 오대상단 중 한 곳인 용진회와 백마상단이 그들이었다.
두 상단은 아운과 사막에서 인연을 맺었던 곳들이었고, 아운의 지시로 무림맹의 총단이 들어설 자리에 미리 땅을 사 놓았었다. 무림맹을 중심으로 무림의 정화 작업이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야율초와 몽고의 전사들은 마지막 건곤일척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아운과 정면 대결을 해야 하는 엄호와 광풍전사단은 혈궁이 있는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저.. 정말이오?"
아운은 북궁연의 말에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북궁연의 얼굴이 붉게 물이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가을의 단풍처럼 아름다웠다. 새삼 아운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이제 혼자가 아님을 아시고 항상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이를 말이오. 후후, 내 항상 조심하리다."
아운의 얼굴에 자부심이 어리고 있었다. 이제 자신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는 조용히 북궁연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맹주부의 정원.
아운은 오랜만에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운의 옆에는 무림맹의 군사인 서문정이 따르고 있었다. 아운과 나란히 걷고 있는 서문정은 얌전한 시선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불과 얼마 전 보았던 대전사와의 결투가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결투 이후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반항을 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 번 깨우쳤다. 마음속으로부터 항복을 하고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그녀였다.
서문정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재 파악된 정보에 의하면 모두 오십여 명의 동심맹 고수들이 몽골과 손을 잡고 그들의 그늘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보고를 받는 아운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문정은 문득 자신이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혹시 이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최소한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몽골의 전사들과 싸우기 바쁘고 그 외의 시간은 무공을 수련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아운이었지만, 알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정확한 정보까지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동심맹엔 개방도들도 상당히 있었을 테니 그 정보는 하오문을 통해 들어온 정보인가보군."
"그렇습니다. 맹주님."
그녀는 대답을 하고 아운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묻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자들이오. 형평성을 위해서도 그들을 용서 할 순 없소."
서문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문파의 체면 어쩌고 하는 말은 씨도 안 먹힐 사람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괜히 힘들여 반대하지 않았다.
"계획은 있으신가요?"
"그들은 인과응보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깨우칠 것이오. 그리고 이 기회에 분명히 말하겠소. 무림맹이 존재하는 한 또 다른 사조직은 절대 용서할 수 없소. 그것은 그런 사조직으로 인해 무림맹과 각 문파내에서 파벌 싸움이 벌어질것을 미리 막자는 뜻에서 한 말이니 반드시 명심해야 할것이오. 사람은 요상해서 두 명만 모이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을 배제하는 심보를 지니고 있소, 처음엔 순수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지닌 것을 놓지 않으려는 것은 물론이고 남의 것도 가지려는 욕심을 부리게 되는데 그로 인해 어떤 순수 단체든지 뒤에는 변질되게 마련이오."
서문정은 아운이 대정회를 두고 하는 말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정회는 해체 할 것입니다. 이는 나대협과도 이미 협의를 마친 상황입니다. 맹주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정회에서 가진 직책이 아니라 나대협이라고 한 것은 이미 대정회가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잘 한 일인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오. 그리고 동심맹의 일은 나에게 맡겨 두시오, 어차피 시작한것, 마무리도 내가 하겠소. 군사는 무림맹의 체계를 세우고 극락원을 완전히 소멸하는데 힘써 주시오. 그리고 각 문파의 체질개선을 하는데도 도울 수 있는 한 도와 주시오. 각 문파나 세가는 이제 새로 태어나야만 하오. 그래서 그들이 진정한 정파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자리를 잡아야 무림이 평안해질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아운이 걸음을 멈추고 갑자기 서문정을 바라보았다.
서문정이 놀라서 아운을 바라본다.
"대정회 건은 참으로 고맙소."
아운의 갑작스런 말에 서문정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아운에게 처음으로 듣는 감사의 말이었던 것이다. 왠지 감동이란 불필요한 존재가 그녀의 가슴을 박차고 올라와 눈물이 핑 돈다.
"아‥‥ 아닙니다."
"그리고"
"예?"
"듣자하니, 우리 금룡단의 야교두와 열애중이란 소문이 무림맹에 전부 퍼졌던데. 언제 혼인식을 할 것이오."
서문정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 그런 소문이 어떻게?"
"이미 무림맹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아마도 무림 전체에 다 퍼져 나갔을 것이오. 소문에 의하면 두 분이 밤마다 좋은 시간을 가진다던데?"
서문정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다행이라면 밤마다 하는 해괴한 짓이 그냥 운우지정 정도로 소문이 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그녀도 은근히 중독되어 가는 중이었기에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것마저 소문이 나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을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칫하면 앞으로 시집은 다 갔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아운은 조금 의아한 시선으로 서문정을 보면서 말했다.
"설마 모두 헛소문이란 말이오? 하긴 개방의 혈전 이후 야교두의 인기가 높아 여자들이 많이 따르다 보니 소문이 조금 와전된 모양이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안 것 같군."
아운의 말을 들은 서문정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야 공자님의 인기가 좋은가 봐요?"
"당연하지 않소. 지금 야교두의 나이에 그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 몇이나 있겠소. 오전에도 보아하니 당가의 낭자와 함께 소곤거리며 걷는 것 같던데."
서문정의 눈에 시퍼런 독기가 어렸다.
'개자식 나한데 그런 이상한 짓이나 시켜 놓고 다른 여자들을 집적거린단 말이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어차피 이런 소문이 확 돌고 있으니 앞으로 야한이 아니면 시집가긴 그른 상황이었다.
서문정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면서 말했다.
"저‥‥ 전 잠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시오."
"그럼 전 이만.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맹주님."
서문정은 서둘러 맹주부를 떠났다.
아운은 그녀가 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맹주부 안쪽에서 흑칠랑과 한상아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흑칠랑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호적수, 어때 내 말이 즉효지? 저렇게 해 놓았으니 이제 야한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겠지. 흐흐. 그래도 내가 맘이 좋아 사실대로 소문을 안 냈지, 그렇지 않았으면 야한 고놈과 저 밉상의 군사는 그 날로 아주 끝장일 텐데."
아운은 흑칠랑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흑칠랑과 한상아의 부탁으로 서문정을 자극하였지만, 내심 우습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사랑은 유치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운이 가볍게 웃자, 흑칠랑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자네는 지금 상황이 유치한가? 하지만 오래전에 자네가 북궁제수씨에게 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흐흐"
아운이 흑칠랑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무슨 말이라니. 몰라서 묻나?"
"모르니까 묻지."
"뭐 종이책에다가 다 적어 놓으라고? 돌아오면 전부 혼내 주겠다고? 쯧쯧 그게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지 성인으로서 할 짓인가?"
말을 하면서 흑칠랑은 어때 좀 창피하지 하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아운을 바라보았지만, 아운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유치하다니, 난 진실이었네."
흑칠랑의 표정은 황당 그 자체였다.
"지.. 진실! 큭 이봐 내 유일한 호적수. 혹시 자네 권왕씩이나 되면서 자신의 여자에게 집적 거렸다고 주먹질을 하겠단 말인가?"
"그럼 자네라면 그냥 있을 텐가?"
대답을 하려던 흑칠랑은 갑자기 옆구리가 시려오자, 흠칫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한상아가 옆에서 살기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흑칠랑은 자신이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그 결과가 아주 참혹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크험, 아니 내 말은 말일세, 겨우 주먹질인가? 나라면 모조리 목을 자르고 말았을 것일세 암 그래야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아주 몹시 분개한 표정이었다.
한상아가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흑칠랑의 검은 얼굴이 더욱 검게 변했다.
"정말이라고. 누가 감히 우리 이쁜 상아에게......"
"흥 됐어요, 나중에 두고 보죠, 정말 그러는지."
그래도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심 안도하면서 흑칠랑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정말인데."
"뭐, 믿어 줄게요. 그건 그렇고 야한 도련님과 군사와의 관계는 어쩌자고 여기저기 다 떠벌리고 다닌 거예요?"
흑칠랑이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말이오. 생각해 보시오. 상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야한 그 놈이 언제 장가를 가보겠소. 이렇게라도 해야 서문군사가 꼼짝 않고 그 놈에게 안길 것 아니오. 이게 다 후배를 사랑하는 너그러운 선배의 마음이란 것이오."
"혹시 떠벌려 놓고 미안하니까? 서둘러 도움을 청한 것은 아니고요?"
어째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흑칠랑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놈이 좀 얄밉게 굴었다고 내 어찌 그런 만행을 저지르겠소, 절대 아니오. 암, 그렇고말고, 난 오로지 아끼는 후배 한 명을 구제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많은 계산 끝에 한 행동일 뿐이오 절대로 그 놈이 얄밉거나 그래서 한 짓은‥‥‥"
"그러니까? 야한 도련님이 얄미워서 그랬단 말이죠. 대체 야한 도련님이 뭘 잘못했기에?"
"절대 그런 것이 아니래도."
'그 후레자식 덕분에 끝까지 아운 저 미친놈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 정도 골탕은 작은 거지.'
흑칠랑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한상아 앞에서는 끝까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속 좁다는 것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내 보일 순 없었던 것이다.
보고 있던 아운이 흑칠랑에게 말했다.
"내가 부탁을 들어 주었으니 이제 내 부탁도 들어 주겠지?"
아운의 말에 흑칠랑과 한상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보게 이 흑칠랑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지."
"살수에게 부탁할 일이란 것이 뭐가 있겠나. 당연히 청부지."
"청부?"
흑칠랑과 한상아는 호기심이 어린 시선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구를 죽여 달라는 말인가? 아운은 흑칠랑과 한상아에게 전음으로 무엇인가를 부탁하였다.
다 듣고 난 추 흑칠랑은 가볍게 미소를 지은 후 말했다.
"걱정 말게 그 정도야 별로 어렵지도 않지. 그 보다도 자네에게 줄 것이 있네."
아운이 흑칠랑을 바라보았다.
주다니? 뭘 준단 말인가?
흑칠랑은 품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아운에게 내밀었다.
아운은 흑칠랑이 건네 준 책자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흐흐 너무 감격해 하지 말라고. 내 호적수가 겨우 광풍전사단 따위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도와주는 것뿐이니까?"
'으으, 내 상아와 야한의 강요에 못 이겨 전해 주지만, 제발 이기지 말고 그냥 광풍전사단과 싸우다 죽어다오. 아니면 반만 죽어서 오던지.'
흑칠랑은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호기롭게 웃고 있었다.
"정말 고맙네. 이건 큰 도움이 되겠어."
아운은 정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삼대 살수가 아운에게 전해 준 것은 의외로 큰 도움이 될수 있는 것이었고, 쉽게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운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을 본 한상아는 정말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호호, 이렇게 돼서 이제 천하제일인과 한 가닥의 확실한 끈을 만들어 놓았다.'
한상아는 아운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도와 준 것이 후에 자신과 흑칠랑에게 얼마나 큰 이득으로 돌아올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살수이기 이전에 여자였다.
흑칠랑과는 달리 천하제일 살수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은 안정적인 가정이었다.
사랑을 안 살수는 이미 살수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 후에도 음지에서 생활하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양지에서 떳떳한 부모로 자식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 고 있었다.
아운의 힘이라면 자신과 흑칠랑의 과거 정도는 가볍게 덮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의도한 대로 아운의 곁에 머물면서 연인인 흑칠랑이 무림의 영웅으로 거듭나지 않았던가? 그것만으로도 한상아는 아운에게 근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아운은 받은 책자를 살펴 본 후에 말했다.
"이왕 도와 준거 하나면 더 도와주게."
아운의 말을 들은 흑칠랑의 눈이 역 팔(八)자로 곤두섰다.
"뭐라고‥‥‥"
"형수님 도와줄 수 있으십니까?"
"허허, 혀....형수?"
흑칠랑의 눈이 보름달보다 더 커졌다.
"호호호, 말씀만 하세요."
"감사합니다. 자네는 어떤가?"
"으하하, 당연히 도와야지, 암."
"고맙네. 그리고 너무 좋아하지 말게. 내가 형수님이라 부른 것은 한소저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적당히 부를 말이 없어서 그리 부른 것 뿐일세."
"뭐 ‥‥ 뭐야?"
흑칠랑의 얼굴이 구겨졌다.
한상아가 얼른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어머, 싫다는 말이에요?"
팔에 그녀의 보드라운 피부가 느껴지자, 흑칠랑은 다시 흐물흐물해지고 말았다 사실 그가 무슨 배짱으로 한상아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그 정도의 배짱이 있다면 그녀에게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도 노총각으로 남아 있었으리라.
"싫은 것은 아니고."
아운은 속으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었다.
아무리 봐도 미워할 수 없는 호적수였다.
사실 적수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맹주부 밖으로 나온 서문정은 씩씩 거리면서 금룡각을 향해 달리다시피 걸어갔다.
"꽝!"
벼락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서문정이 금룡각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 고아하기 이를 때 없는 서문정이 거칠게 안으로 들어오자, 훈련에 열중하던 금룡단원들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훈련에 열중하는 금룡단원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쪽 풀밭에 누워서 오수(午睡)의 평안함을 즐기고 있는 야한에게 다가갔다. 금룡단원들은 이미 야한과 서문정의 소문을 듣고 있었지만, 설마 하는 심정들이었다. 그런데 서문정이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야한에게 다가가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본다.
자고로 남녀의 일엔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야한에게 다가간 서문정이 발길로 야한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녀에게 있어서 야한의 엉덩이는 치욕의 상징이자, 지금의 상황을 만든 원흉이었다.
"퍽! "
"컥!" 야한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갑자기 발길질을 할 줄은 생각도 못한 야한이었다.
눈을 번쩍 뜬 야한은 놀라서 서문정을 바라보았다.
"야! 이 나쁜 놈아. 네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나를 망쳐놓고 이젠 다른 여자랑 놀아나. 너 솔직히 말해 우리 사이를 고의적으로 소문낸 것이 너지?"
야한은 놀라서 서문정을 바라보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야한이 아무리 대차다고 하지만 이런 경우를 당해 본적은 없었거니와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문정이 따지고 들리란 생각은 전혀 해 본적도 없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자신이 변태로 소문이 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소문이라니?
"아‥‥ 아니 서문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서문정은 눈물이 글썽한 시선으로 야한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라니, 몰라서 물어요?"
"글쎄, 모르니까 묻는 것 아니오?"
"나를 희롱한 것도 모자라. 이제 다른 여자랑 놀아나다니, 정말 파렴치하군요."
"헉!"
야한은 안색이 노랗게 뜨고 말았다.
금룡단원들이 주변으로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내 ‥‥ 내가 언제?"
"이미 소문이 다 났는데, 무슨 변명을 하려는 것이죠. 저질러 놓고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소문을 내다니 이 파렴치한 자식."
생각하니까 분한 듯 다시 서문정의 말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결국 성질을 못 이긴 서문정,
"철썩!"
서문정의 손바닥이 야한의 뺨을 과격하게 가격하였다. 너무 놀란 야한은 그 손바닥을 피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안 피했을 수도 있고.
"대 ‥‥대체 ...... "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빨리 말해요."
한마디로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자는 말이었다.
여자가 수치고 자존심이고 다 버리고 덤비면 그건 정말 무섭다. 야한은 기가 질려서 대꾸도 하지 못했다.
"책임 못 지겠단 말인가요?"
서문정의 눈에 새파란 번개가 번쩍거리자, 야한은 기겁을 해서 고함을 쳤다.
"채‥‥ 책임지겠소. 정말이오. 내가 책임지겠소. 시키는 대로 다 하겠소."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고 말았다.
"그럼 이제 한 여자의 지아비로서 행동 똑바로 하세요.
알았죠?"
"아 ‥‥ 알겠소."
야한은 자신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하고 대답하였다.
금룡단원들은 모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훌륭한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야한은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지금 자신은 이제 서문정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야한의 약속을 받아 낸 서문정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당당하게 금룡각 문을 나선 다음 갑자기 손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한 같은 인간을 처음부터 휘어잡으려면 이런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문정이 나간다음 멍하니 서 있던 야한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졌는데, 아직도 그 의미가 잘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만졌다.
갑자기 묘한 쾌감이 그의 전신을 떨게 만든다.
'다음부터는 엉덩이가 아니라 뺨을 때려 달라고 할까? 그럼 자국이 남겠지?'
야한은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금룡단의 무사들은 그런 야한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문이 진실임을 확신하면서.
"제기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소."
천개 몽화가 낭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뿐이 아니라 몽골의 전사들과 손을 잡은 동심맹의 고수들은 모두 난감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대전사가 아운에게 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동심맹의 고수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아운이 자신들을 그냥 두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이 한 번 꼬이면 자꾸 꼬이게 마련이다.
동심맹의 고수들은 근래 들어 모든 일들이 비비꼬이는 느낌이었다. 어떤 일든지 되는 일이 없었다.
그 모든 원인은 아운이었다.
아니 아운 남매였다.
그들은 하씨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저주하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권왕 아운의 등장은 이들에게 있어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가 나타난 이후 그들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지금은 몽골의 그늘 아래서 겨우 목숨만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자신들의 행태가 알려지면 자파에서도 파문을 당하고 말 것이다.
어쩌면 벌써 자신들의 배신행위가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현재 이곳에 모여 있는 동심맹의 중심고수들은 사천으로 떠났다가 겨우 화를 모면한 청성과 당문 그리고 아미파의 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외에는 천개 몽화를 중심으로 하는 개방의 고수들이 있었다.
개방도 운 좋게 하영영의 귀계에서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개방의 혈겁으로 인해 무림맹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미파의 경우 현재 아운에게 납치되어 있는 독안신니 대신 유화신니가 아미파의 동심맹 고수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 외 청성의 청허상인과 사천 당문의 전대 가주인 암사혈(暗死血) 당명이 지금 모여 있는 동심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몽화의 말을 듣고 당명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오. 저들과 함께 몽고의 초원에 들어가서 양이나 키우다 죽는 것 아닌가 두렵소."
그의 말은 농담반 진담반이었지만, 사실상 농담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청허상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오, 내가 듣기로 광풍전사단의 강함은 대전사보다 더하다고 들었소,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소."
청허상인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약간의 희망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 희망을 여지없이 분질러 놓은 것은 몽화의 한마디였다.
"광풍전사단이 이긴다 해도 우리가 몽골의 전사들에게 얼마나 대접 을 받을 수 있을 것이 라 생각하는 것이오?"
모두 안색이 굳어졌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실력이 있다 해도 몽골이 천하를 지배하게 된다면 자신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 뻔했다.
청허상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율초가 한 말이 있소, 우리를 대접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은 한족의 무인들도 자신들에게 충성을 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 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내 생각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어차피 중원은 넓고, 몽골의 전사들은 많이 줄었소, 그들만으로는 중원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가 없소."
몽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이오, 하지만 우리는 중원을 배신한 자들이오, 우리를 우대하게 되면 중원의 무인들에게 더욱 많은 반발을 사게 될 것이오, 이는 작은 것을 얻기 위해 오히려 큰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소. 영리한 야율초가 과연 그렇게 하겠소? 뿐만 아니라 원의 잔당들은 중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또한 그들은 얼마든지 새로운 전사들을 길러 낼 수 있소, 그들을 길러 낸 후 우린 그대로 토사구팽 당할 것이오."
몽화의 말에 모두들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표정들이다.
"그런 사실을 생각했다면 몽장로는 어째서 우리더러 몽고와 손을 잡자고 하시었소?"
청허상인의 물음에 몽화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때 당시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는 길이 있었소? 사실 그대로 있었다면 권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를 죽였을 것이오. 그리고 같은 문파 내에서도 우리가 설수 있는 입지가 너무 없었소. 또한 그때는 대전사가 있었소, 대전사는 정직한 무인이라 그가 우리의 신변을 보장한다면 믿을 수 있었소. 그는 약속을 중히 여기고 대인의 마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었소. 하지만 이제 대전사는 없고, 영리한 야율초만 남았소. 자고로 머리 쓰는 자의 혓바닥은 믿을게 못 된 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 것이오."
몽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개방의 대장로였다.
정보를 알고 그것을 분석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봐야 했다. 그의 말대로 대전사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차이가 있다고 봐야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란 말인가?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유명신니가 나직하게 불호를 왼 후 말했다.
"그래도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혀를 물고 죽을지언정 모욕은 당하지 않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용기가 있을 리도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런 용기와 의기는 모두 갖다 버린 그들이었다.
몽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라고 동료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요. 우리에게도 기사회생의 방법은 있소. 들어보시겠소."
모두 기대어린 시선으로 몽화를 바라보았다.
당명이 조금 조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몽장로님,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어서 말해 보시오."
"야율초를 우리가 잡는 것이오."
모두 놀란 표정으로 몽화를 바라본다.
청허상인이 되물었다.
"야율초를?"
"그렇소, 흐흐 지금 우린 그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오, 그 때 야율초를 잡아서 무림맹으로 개선하는 것이오. 그리고 우린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오. 동심맹 때의 잘못을 씻기 위해 우린 모험을 한 것이고, 그 모험이 성공하여 야율초를 사로잡았다고."
당명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몽골에 협조를 한 것은 사실상 야율초를 잡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렇게 이유를 댄다. 이 말이죠?"
"맞소, 야율초만 잡으면 우린 얼마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소. 그렇게 각 파로 돌아간 다음 우린 다시 부활하는 것이오. 물론 그 전에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지은 잘못을 어느 정도는 시인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 잊혀질 일이오."
모두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유명신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연 우리가 야율초를 잡을 수 있을까요?"
몽화가 강한 시선으로 유명신니를 보면서 확신하는 말투로 말했다.
"나에게 방법이 있소."
모든 시선이 다시 한 번 몽화에게 모였다.
"우리의 입지를 위해 아주 중요한 정보를 준다고 야율초를 만나는 것이오. 물론 우리 네 명과 야율초 이렇게만 말이오. 야율초는 우리의 지금 상황을 잘 알고 있소, 또한 그는 대전사가 패한 이후 많이 초조해 하고 있을 것이오. 그 두 가지 마음 때문에 그는 우리를 어느 정도 믿을 것이요, 그는 우리가 우리의 입지를 위해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자신과 협상하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오. 그렇기에 우리의 뜻대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오. 그때 기습을 하면 우리 넷이서 설마 야율초 한 명이야 못잡겠소? 야율초만 사로잡으면 우린 모든 것을 우리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오."
유명신니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야율초가 바보가 아닌 이상 밖에서 단독으로 우리를 만나려 하진 않을 것이에요."
"혈궁 안에서 만나면 되지 않겠소."
"그럼 혈궁에서 어떻게 빠져 나오죠?"
"야율초가 있지 않소, 그를 인질로 해서 빠져 나오면 될것이오. 물론 우리 동심맹의 고수들이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합세를 하면 조금 쉬울 것이라 생각하오."
모두들 몽화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쉽지 않을 텐데."
"약간의 모험도 하지 않고 어찌 이 난국을 이겨 나가려 하는 것이오, 그럼 우리가 몽골의 개자식들 심부름이나 하다 팽 당하고 비참한 말로를 보내는 것이 좋단 말이오. 우리는 원래대로 복귀만 하면 문파의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숨겨 놓았던 재물로 남은 인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소. 오히려 지금 같은 어려움이 우리에겐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는 일이오."
몽화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암사혈 당명이 자신의 품안을 더듬으며 말했다.
"해봅시다. 그가 내 곁에서 일장 안으로만 온다면 내 암기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아니면 내게 있는 독만으로도 그를 중독 시킬 수 있을 것이오."
모두의 안색이 밝아졌다.
생각해보니 암수에 독과 암기만한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의 조종이라는 당문의 태상장로가 여기 있지 않은가? 몽화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그렇다면 우리에겐 미리 해약을 주시오.
혹시라도 자칫해서 우리가 잘못 될 수도 있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오."
당명의 말에 모두들 활기찬 모습으로 변했다.
독과 암기를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혈궁의 밀실.
제법 넓은 밀실에 몽화와 유명신니, 그리고 청허상인과 암사혈 당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덜컥, 밀실의 문이 열리며 야율초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한 명의 호위무사가 복면을 쓴 채 밀착 호위를 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리라.
일순 밀실 안은 약간의 긴장이 감돌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야율초가 입가에 미묘한 비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나를 찾았다고? 얼마나 중요한 소식이기에 나만 은밀히 만나자고 하였소?"
몽화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우선 앉으십시오. 권왕에 대한 이야기로, 분명 값어치가 있는 정보라고 우리는 장담하는 바이오. 이 정보로 인해 군사는 우리를 더욱 믿을 수 있을 것이오."
야율초는 조금 기대가 간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야율초가 자리에 앉는 순간 당명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어렸다. 야율초가 당명의 얼굴에 떠오른 득의의 표정을 보고 흠칫하는 순간 당명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들어 올린 손에서 당가의 극독 암기인 절명침(絶命針) 수십 개가 쏟아져 야율초와 그의 호위무사를 향해 날아갔다.
당명은 야율초를 사로잡기 위해 절독 대신 강력한 산공독을 발라 놓았고, 야율초가 앉은 의자위에도 같은 종류의 산공독을 발라 놓은 상태였다.
야율초가 의자에 앉은 순간 그는 이미 독에 중독 된 것이다.
물론 직접 중독이 아니었기에 완전히 중독된 것은 아니었지만 무인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인 독이라 할 수 있었다.
절명침은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야율초를 손쉽게 사로잡게 해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율초의 양 옆에 앉아있던 유명신니와 청허상인이 동시에 야율초를 향해 출수를 하고 있었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한 것 같았다.
당명과 청허상인 유명신니가 그렇게 믿는 순간이었다.
야율초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야율초의 손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순간 날아오던 절명침들이 그의 손에서 뿜어진 기운에 튕겨 나갔고, 야율초를 공격하던 유명신니와 청허상인은 호위무사가 휘두른 도에 기겁을 해서 뒤로 물러서야 했다.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다.
호위무사의 무공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독에 중독되었으리라 생각했던 야율초가 멀쩡하게 무공을 펼치자, 당명은 당황했다. 자신이 의자에 뿌려놓은 산공독은 당기비전으로 어지간한 고수라도 독에 닿는 순간 바로 중독이 된다. 물론 직접적인 중독은 아니라서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공을 끌어 올리는 순간 최소한 내공이 절반 이하로 줄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야율초가 멀쩡했던 것이다.
당황한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어차피 시작한 것이다.
청허상인과 유명신니가 빠르게 눈빛을 교환 한 후 한 명은 호위무사에게 한 명은 야율초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당연히 당명과 몽환이 합세해 줄 것을 믿고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순간 당명은 다시 품안에서 독탄을 꺼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독탄을 꺼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끄르륵!"
그는 원독에 찬 시선으로 자신의 심장을 파괴한 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화가 그의 앞에서 씨익 웃고 있었다.
"너.. 너는?"
- 잘 가시오.
몽화의 전음을 들으면서 당명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야율초가 왜 중독되지 않았는지 알았지만, 너무 늦었다.
유명신니와 청허상인은 마지막까지 발악하려 하였으나,
야율초와 호위무사에게 걸려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야율초가 비록 무공이 약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광전사들 중에서나 하는 이야기지, 강호의 일반 고수들과 비교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무공은 능히 각파의 선은들보다 훨씬 강했다.
일정 이상의 고수가 아니면 절대로 광전사가 되지 못하는 것이 몽골의 불문율이기 때문이었다.
사마가의 인물들이 군사로서는 뛰어났지만, 광전사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야율초의 무공은 극락원에서 찌든 동심맹의 장로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호위무사로 대동한 자는 광전사 중에서도 중급 이상인 사마정이었다.
유명신니와 청허상인이 힘을 합해도 사마정 한 명조차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정과 야율초는 그들에게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살수를 펼쳤다. 어차피 살려 두어 보았자, 도움은 안 되고 골치만 아플 존재들이었다.
야율초가 필요한 자는 몽화 한 명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청허상인과 유명신니는 죽으면서도 지금 상황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절대 강자라 할 수 있는 야율초와 사마정의 공격을 받느라 몽화가 당명을 죽이는 광경을 그들은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모두 죽은 것을 돌아보면서 몽화가 야율초를 바라보았다.
야율초가 그런 몽화를 마주보며 말했다.
"정말 고맙소, 몽 장로님의 언질과 해약이 아니었으면 봉변을 당할 뻔 했소."
몽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 해도 야율군사가 이런 멍청한 속임수에 넘어갔겠소. 아마 따로 보자고 한 순간 알아챘을 것이오, 나는 그런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그래서 절대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내 말을 무시하고 나까지 덤으로 죽이려 하니 내가 어찌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겠소. 후후, 덕분에 이제 나는 정말 돌아갈 길이 없게 되었소. 부디 잘 부탁하오."
"걱정 마시오, 나는 은원 하나는 제법 확실한 편이오. 내가 몽장로를 홀대하면 앞으로 누가 나를 돕겠소, 내 성심껏 몽장로를 도울 것이오. 그러니 몽장로는 권왕에 대한 정보나 확실하게 수집해 주시오,"
"흐흐, 그거라면 걱정 마시오. 내 권왕에 대한 것은 철저하게 알아 봐 주리다. 대신 밖에 있는 떨거지들이나 확실히 처리해 주시오, 자칫하면 오늘 비밀이 새 나갈 수도 있으니."
"그건 걱정 마시오. 그들은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오."
둘은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것으로 몽화는 야율초에게 어느 정도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혈궁 외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십여 명의 동심맹 고수들은 갑자기 나타난 몽골의 전사들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아 있던 동심맹의 고수들 중 가장 연장자인 청성파의 청진도장은 뒤로 몸을 날리며 말했다.
"도망쳐라!"
동심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혈궁 외곽이라 도망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몽골의 전사들도 그들을 공격하는데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도 저곳에도 가지 못한 자들 굳이 힘들여 죽이다가 쥐에게 물리는 고양이 꼴이 되고는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단 한명이라도 살려둬선 안된다. 그들이 살아나면, 몽화의 배신을 알게 될 데고, 그렇게 되면 몽화의 이용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천천히 몰아가며 한 명씩 한 명씩 죽여 가는 맛은 제법이었다.
혈궁 근처 백리 안은 산과 산뿐이었다.
시간은 많았다.
동심맹의 고수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그리고 이곳에 가담하지 않은 동심맹의 고수들 몇몇은 섬서성 장안 근교에서 이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삼대살수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동심맹은 그렇게 뿌리 채 뽑히게 된 것이다.
아운은 동심맹의 핵심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최후의한 명까지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을 용서하기엔 그 죄 값이 너무 컸던 것이다.
단지 미미하게 가담하는 정도였던 자들은 자파가 알아서 정화하게 함으로 동심맹에 대한 것은 일단락 지었다.
그 후 독안신니에게 팔 하나를 잃었던 유정신니(독비신니라고도불림)는 남아 있던 아미의 동심맹 잔당들을 뿌리채 뽑음으로 아미파를 정화시켰다.
아미파가 확실히 정화가 된 후, 아운은 납치했던 독안신니를 정식으로 아미파에 인도하였다. 물론 거기엔 독안신니가 이전에 전 아미파의 장문인인 유연신니를 죽인 사실을 포함해서였다.
그 외에도 그녀가 지은 죄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또 한 명 사마무기는 스스로 자살함으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그는 스스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살을 한 것이다. 아무리 고문이라고 해도, 무림의 치부를 전부 불어 버렸던 그로선 다시 예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렇게 무림의 정화 작업이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아운은 다시 한 번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최후의 결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아운과 광풍전사단의 결전을 앞두고 무림맹과 몽골의 전사들은 치열한 정보전을 시작하였고, 그 중심엔 하영영과 서문정, 그리고 야율초와 천개 몽화가 있었다. 또한 삼대 살수들은 아운과 많은 시간을 의논 한 후 조용히 무림맹을 떠났다 그들은 아운의 부탁을 받고 따로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찬바람이 산허리를 감고 올랐다가 소화평원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고 있었다. 드넓은 평야의 작은 갈대들은 산을 통과하며 난폭해진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어떤 방어력도 가지지 못한 채 고스란히 그 심술을 견디어야 했다.
차가운 한 겨을 날씨와 더불어 한기가 깃든 바람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그곳에, 눈까지 더불어 내리고 있었다.
한 올씩 떨어지는 눈발은 허허 벌판에 서 있는 아운에게 매서운 한기를 선사하였지만, 무공의 경지가 극의에 이른 그는 아직까지 큰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점차 여명이 밝아오는 어스름한 아침과 어울려 멀리서 희끗 거리고 나타나는 무리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아운은 손에 들고 있던 육포를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결전을 생각해서 반 시진 전에 밥을 먹었지만, 만약을 위해 조금 더 영양분을 보충해 놓은 것이다. 물론 먹는 양은 절대 많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쉽게 끝날 결전은 아니다. 그렇다면 체력과 내공의 안배가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아운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광풍전사단이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입안에 씹고 있는 육포의 질긴 맛을 음미하며 눈 내리는 평원에서 적을 기다리는 운치도 제법 괜찮다고 아운은 스스로를 달래는 중이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림자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운은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총 삼백삼십삼 명의 광풍전사단.
그들 중 전사단장이자, 대부령인 엄호를 필두로 광풍전사단의 부단주이며 수석 대군령인 무형마창(無形魔槍) 수타르, 궁도대군령 등천마궁(登天魔弓) 추상, 창검대군령 등천금창(登天金槍) 어린, 순부대군령 신안마부(神眼魔斧) 모단극 등이 앞장을 서고 있었다.
광풍전사단은 모두 삼 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백구 명은 창을 들고 허리에 대환도를 한 자루씩 차고 있었으며, 또 한 조의 백십 명은 활과 대환도를 그리고 마지막 백구 명은 방패와 두세 개의 손도끼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특히 손도끼를 허리에 찬 전사들은 말안장에도 작은 손도끼들을 몇 개씩 준비해 놓고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 아운 자신이 싸운 광풍사와는 같은 듯하면서도 약간 달랐다.
실력이 다르고 사용하는 무공이 달랐으며 같은 광풍멸사진이라도 그 위력과 기세가 달랐다.
그들 모두는 황금색이 번쩍이는 경갑주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엔 경량화된 투구를 쓰고 있었다. 벌판엔 수평선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날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위용은 대단했다.
번쩍거리는 황금물결과 그들이 밟고 지나가는 갈대들은 소화평원의 고독을 단 한 번에 씻어 갔다. 멀리서 아운의 그림자를 발견한 등천마궁 추상이 엄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권왕인 것 같습니다."
엄호는 아운의 암기가 미치는 거리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는 분명히 무림맹 안에 있다가 어제 이곳에 도착했다했었지?"
"분명합니다. 개방 몽화의 정보가 그렇고, 무림맹을 감시하던 세작들의 보고도 일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장난칠 시간은 별로 없었겠군, 대신 밀실에서 우리를 상대하기 위한 무공 연구를 했었겠지, 과연 어떤 준비를 해 왔는지 궁금하군."
"연구한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지. 우리도 준비를 한 것이 있지. 모두 전진. 백팔십 장 앞까지 다가선다."
그 말을 듣고 추상이 엄호를 바라보았다.
아운을 상대하기 위해 광풍전사단의 신무기인 철궁탄시의 살상력을 이백이십 장까지 늘려 놓은 상황이었다. 한데 굳이 백팔십 장까지 접근하려는 의도를 몰랐던 것이다. 추상의 생각은 이백 장 정도에서 원거리 공격을 시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엄호는 추상의 뜻을 알고 웃으면서 말했다.
"권왕의 암기는 약 백오륙십 장 정도다. 조금 더 늘어났다고 해도 백팔십 장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정도 접근은 용이하다. 그리고 권왕은 신법과 보법에도 일가견이 있다. 사십 장은 그가 뒤로 피할 수 있는 거리를 생각한 것이다. 혹여 물러선다고 해도. 우리는 미리 거리를 확보하고 싸울 수가 있다. 그가 백팔십 장 안으로 들어와 암기를 쏘며 마주 싸운다면 숫자가 많은 우리야 환영할 일이고."
추상은 그제야 엄호의 뜻을 알 수가 있었다.
물론 사십 장의 여유 거리도 처음부터 아운이 도망치기만 한다면 소용없는 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싸우러 온 자가 무조건 도망치진 않을 것이고, 나중에 도망치려 한다면 그 사십 장은 죽음의 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왕의 성격을 아는 엄호와 추상은 그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돌진해 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백팔십 장이란 거리는 아운에게 정면 승부를 건 셈이었다.
도전.
이건 엄호와 광풍전사단이 바라는 일이었다.
추상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정면 대결에서 화살만으로 끝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무 싱겁지 않겠습니까?"
엄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만하지 마라! 상대는 권왕이다. 그렇게 쉽게 당할 자가 아니다. 철시가 아무리 위력이 강하다 해도 원거리 공격으로 권왕을 잡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저희가 준비한 것은‥‥‥."
"그도 준비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방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금물이다."
추상이 표정을 굳혔다.
"명심하겠습니다."
추상은 엄호의 말대로 화살로는 아운을 잡을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란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철시의 위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큰 부상을 당하게 할 순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만이라도 된다면 그것은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광풍전사단은 아운의 백팔십 장 앞에서 일제히 멈추었다.
엄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우리 광풍전사단 모두는 여기서 뼈를 묻을 각오가 되어 있네. 권왕은 조심하시게."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내공의 힘을 빌려 아운의 귓전에 또렷한 목소리로 남았다.
"나는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기에 죽을 생각은 없소."
"권왕다운 자신감 하지만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걸세."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 주는 법, 나는 준비가 되어 있소."
"어차피 말로 끝날 일은 아닌 것. 그럼 시작하겠네."
"언제든지."
"철궁탄시!"
엄호가 나직하게 외치자. 활을 들고 있던 백십 명의 전사
들이 앞으로 나서며 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들의 앞
에는 궁도전사()들의 대군령인 등천마궁 추상이
당당하게 자신의 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운과의 거리는 백팔십 장.
사실 그 거리를 화살이 날아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
야기였고. 또한 화살이 설혹 그 정도의 사거리를 가졌다고
해도, 그만큼 날아가서 무림의 절대고수를 살상한다는 것
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광풍전사단이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려 하
는 화살은 아운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궁탄시였다.
속도, 사거리, 힘에서 일반 화살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아운은 이미 그들의 철궁탄시를 받아 본 적이 있었기에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개인의 내공뿐 아니라 진의 폭발력을 추진력으로 이용해
화살을 날려 보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화살의 위력
은 내 상상을 넘어서리라!'
아운은 지금 형성된 광풍멸사진이 얼마 전 무림맹 정문에
서 겨루었을 당시의 광풍멸사진보다 더욱 완벽하고 단단하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풍전사단 개개인의 능력도 더
욱 강해겼고, 당연히 그들이 쏘려는 화살의 힘도 더 무서울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충분히 강하다는 자부심 때문에 더 강해
지는 것에 목말라 하지 않던 광풍전사단은 아운이 나타난
후 달라졌다. 아운은 그들이 더욱 강해지는 촉진제가 되었던 것이다.
"발사!"
등천마궁 추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백십 발의 화살이 아
운을 향해 일제히 날아갔다. 그러나 명령을 내린 추상은
아직 시위를 놓지 않고 대기 상태였다.
지금은 겨을, 바람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고 있었다. 그
리고 남쪽의 무림맹에서 올라온 아운은 남쪽에, 북쪽의 초
원 지대에서 내려온 광풍전사단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에 화살을 쏜 광풍전사단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화살은 바람을 타고 있었으며 조금씩 강해지는 하얀 눈발
은 아운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후후, 좋아. 이중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군. 하지만 나도
기다리고 있었다."
아운의 신형이 갑자기 뒤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상대의 화살이 어디까지 날아오는지 그 사거리를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운이 갑자기 뒤로 물러서자, 엄호와 추상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뒤로 물러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추상은 지체하지 않고 시위를 놓았다.
사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아운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엄호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권왕은 철궁탄시의 사거리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쏘지마라!"
엄호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추상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화살은 날아가고 있었다.
아운은 온 힘을 다해 신법을 펼치고 있었지만, 날아오는 화살의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역시 팔호의 정보대로 철궁탄시는 위력뿐이 아니라 속도
에도 많은 심혈을 기울인 것이 분명하구나.'
자신의 빠른 신법과 보법을 감안한 철궁탄시들은 사방 십
장의 범위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움직인 탓에 약간의 여유는 있었다.
날아온 화살들이 아운이 떠난 맨바닥에 떨어지고 있었으
며 일부는 끈질기게 아운의 뒤를 쫓아왔다. 아슬아슬하게
화살을 따돌리며 이백이십 장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슈욱!
아주 가냘픈 소리와 함께 하나의 화살이 아운을 향해 쏘
아왔다. 수많은 화살 중에 갑자기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오
자 아운은 빠르게 몸을 회전하며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화살은 무려 이십여 장이나 더 날아가 바닥에 꽃혔는데,
화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깊숙이 박혀 들었다.
'가장 멀리 날아온 화살이 이백사십 장. 이 화살을 쏜 자가 추상이겠지.'
아운은 이백오십 장까지 몰러선 다음 돌아섰다. 그리고
갑자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섬광어기풍 신법 중의 질
풍비영()이 전력으로 펼쳐진 것이다. 아운이 달려
오는 것을 본 추상이 얼굴을 굳히며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면 도전이군요, 과연 권왕입니다. 한데 인간의 신법이
어떻게 저리 빠를 수 있는지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추상의 말에 엄호의 안색도 굳어졌다.
달려오는 아운의 속도가 상상을 불허했기 때문이었다.
"사격 "
엄호의 고함과 함께 백여 발의 화살이 아운을 향해 직선
으로 날아갔다. 바람을 타고 나는 화살들의 속도는 그야말
로 섬광처럼 빠르고 날카로웠다. 달려오던 아운의 신형이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허공으로 십여 장이나 날아올랐다.
그의 발밑으로 화살들이 스칠 때 제이제삼의 화살들이 그
가 피할 수 있는 사방을 전부 뒤덮고 날아왔다.
"야압"
고함과 참께 아운은 연환 육영뢰를 펼쳤고, 여섯 개의 강
기가 소용돌이치면서 아운의 앞에 날아오는 화살들을 전부 쳐 내고 있었다.
아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성공이다.'
여섯 개의 권강들이 유기적으로 회전하며 날아오는 화살
들을 쳐내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운은 이전에 사용
하던 방법을 더욱 진화시켜 광풍전사단의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개발해 낸 것이다. 물론 광풍전사단에 가까
이 다가갈수록 힘들겠지만, 거리를 어느 정도 확보하는 데는 더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이는 강기를 미세한 부분까지 제어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해 보기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이제 시작인가?'
이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런 결전에서는 누가 싸움을 주도하느냐 하는 점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아운의 신법이 더욱 빨라졌다.
"가라!"
일단 거리가 확보되자, 수라마정을 날렸고, 엄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권강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이미 무극의 경
지에 도달한 것이 분명한 것 같구나, 하지만, 질 수 없지.'
"돌격하라! "
엄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광풍전사단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말을 몰아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방패수가 앞에
서고 그 뒤쪽에 선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쏘며 벌판을 달
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아운이 쏜 수라마정과 백여개의 화살들이 서로 교차되어 날아갔다.
광풍전사단의 궁수들은 이미 이차 삼차로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삼살수라마정이 그들의 선두를 덮쳤다.
"우와아!"
순부전사(盾斧戰士)들 사이에 고함이 터졌고, 광풍전사단
은 광풍멸사진을 통해 앞에 선 순부전사들에게 자신들의 힘을 나누어 주었다.
퍽! 퍽!
다시 연이어 소리가 들렸지만 삼살수라마정은 방패를 뚫
지 못하고 중간에 멈추었다가 사라졌다.
아운에게 회수가 된 것이다.
아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암기를 회수하면서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쏜 화살들이 바로 코앞까지 날아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이차 삼차로 날아오는 화살들은 하늘을 가득 메
우고 있었다. 또한 연환육영뢰의 권강들은 이미 약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리상 연환육영뢰만으로는 날아오는 화살
들을 연이어 막기에는 조금 모자란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
행이라면 이제 그가 원했던 위치까지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판단이 서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아운
이었다 아운은 연환육영뢰를 거두어들이고 분광파천뢰를
펼치며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꽝!
분광파천뢰가 십 장 앞에서 터지면서 그 폭발력에 날아오
던 화살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폭발로 인해 흙먼지가 사방으로 튕겨 올라가 눈보라와 겹
치면서 아운과 광풍전사단 사이의 시야를 가렸다.
광풍전사단의 궁수들은 그 흙먼지 사이에다 계속 화살을
쏘면서 말을 몰아 달려오는 중이었다.
엄호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먼지가 가라앉은 곳에 아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숨었는가?"
광풍전사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들
은 아운의 기척을 찾기 위해 작은 움직임이라도 놓치지 않
으려 하였다. 하지만 아운은 암혼살문의 진전을 이은 자.
불괴수라기공은 기척을 숨기고 자신을 엄폐하는데도 최고의 무공이었다.
그들이 무슨 수로 백 장 이상의 밖에서 아운의 기척을 찾
을 수 있겠는가? 엄호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어차피 그가 있던 곳에서 방원 십 장 밖으로는 못 갔을
것이다. 숨어 보았자, 땅속 밖에 없을 것 화살을 그 안에
쏘아라! 돌격!"
말들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엄호는 어차피 화살로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살로 그의 행동반경을 묶어 놓고
말과 함께 밀어 버릴 생각이었다. 다시 한 번 화살들이 일
제히 날아올랐다.
철시들은 원래 아운이 있던 곳에서 십 장 방원을 완전히
차단한 채 날아 내렸다.
엄호의 예상대로 미리 파 놓은 땅속에 숨어 있던 아운은
숭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튕겨 나간 자리에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다시 아운에게 화살을 겨누었던 광풍전사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앞으로 내달리는 아운은 분명 한 명이었다. 그런
데 갑자기 그의 신형이 분열되면서 무려 열두 명의 아운이
만들어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마주 공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엄호는 물론이고 광풍전사들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누구를 공격해야 하는가?
"모단극!"
엄호의 외침에 네 명의 대군령 중 뒤쪽에 있던 신안마부() 모단극이 앞으로 나오면서 열두 명의 아운을 보
고 고개를 흔들었다.
"대부령님, 누가 진짜 권왕인지 나의 신안으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특히 사방에 내리는 눈보라 때문에 더욱 상대를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단극의 말을 들은 엄호는 단호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열두 명을 동시에 쏴라!"
백여 명의 궁수들이 화살을 분산하여 쏘았다.
추상은 화살을 시위에 먹인 채 아직 조용히 때를 기다렸
다. 그가 화살을 쏠 땐 가장 결정적일 때일 것이다.
그는 지금 아운과 광풍전사단과의 거리를 감안했을 때 자
신이 아운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야 두세 번, 적으
면 단 한 번 정도 밖에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진짜 아운을 얼마나 빨리 찾아내느냐에 달린 일이었다.
한편 아운은 숨어 있던 땅속에서 뛰쳐나오자마자, 미리
설치해 두었던 동경십이잔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삼대살수들이 미리 와서 만들어 놓은 이 진법은 야한이
도망칠 때 사용하는 환문의 진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열두
명으로 분열시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진법이었다.
동경십이잔영진 안에 있는 열두 개의 긴 동경처럼 진 안
의 상대를 비추어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 준다.
아운은 광풍전사단이 나타날 곳을 어느 정도 예상해서 이
진법을 두세 군데나 만들어 놓았었다.
물론 이는 아운의 부탁으로 미리 이곳에 와서 어느 정도
진법을 완성시킨 삼대살수의 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운 혼자서 하룻밤 사이에 동경십이잔영진을 지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 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동경십이잔영진 안의 아운들 중 비록 실제는 하나고 나머
지는 환상에 불과하지만, 진의 오묘한 작용으로 인해 아무
리 고수라도 누가 진짜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진 안에 있는 열두 개의 길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열두 개의 분신이 움직이는 방향이 다 달라진다.
아운은 앞으로 달리면서 불괴수라기공의 모든 기감을 전
부 끌어 올렸다 자신을 포함한 열둘의 환영 중 어느 누가
먼저 화살을 맞을지 모른다.
그 화살을 맞게 되면 환영과 진짜가 구분될 것이다. 그렇
다고 진짜인 자신만 피한다 해도 들키는 것은 마찬가지였
다. 결국 맨 처음 화살을 맞는 환영을 기준으로 회피 동작
을 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 와중에 몇 개는 들킬 수밖
에 없겠지만, 그땐 이미 자신이 광풍전사단과 결전을 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다음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불괴수라기공만 한 것이 없었다.
사방에 날아오는 화살의 기세를 보지도 않고 읽을 수 있
기 때문이었다. 열두 명의 아운이 동시에 칠보둔형보법을 펼쳤다.
가장 앞서 있던 환영이 화살을 피함과 동시에 아운은 열
두 명이 모두 한꺼번에 화살을 피할 수 있는 방위로 보법을 펼쳤다.
다행이라면 백여 대씩 날아오는 화살이 열둘로 갈라지다
보니 일정 이상의 방위만 피하면 이상 없이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진법을 펼
쳤기에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미리 확보되어 있던 점도
그에겐 다행스런 일이었다. 몇 개의 환영이 화살을 맞고
자신의 실체를 드러냈지만 아직 아운은 일곱 명이었다.
엄호와 추상, 그리고 어린 등의 표정이 굳어졌다.
"교활한 놈. 대체 언제 저런 준비를 해 놓았단 말인가?"
추상은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엄호가 그런 추상을 보고 짧게 호통을 쳤다.
"정신 차려라! 벌써 평정심을 잃게 되면 어쩌겠는가?"
추상은 엄호의 호통에 얼른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일
단 추상을 진정시킨 엄호는 광풍전사단을 향해 고함을 쳤다.
"사각지대까지 포함해서 화살을 쏴라!"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다. 광풍전사단은 이미 엄호의
의도대로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화살들이 다시 날아가는
순간 열두 명의 아운들 역시 동시에 삼살수라마정을 쏘아보냈다.
"제길!"
신안마부 모단극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꺼번에 서른여섯 개의 암기가 사방으로 퍼져 날아오니
광풍멸사진의 힘을 어느 한곳으로 집중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운은 교묘하게 환영이 쏘아 보낸 화살에도 아주 약간씩
의 기를 실어 보내고 있었기에 더욱 진짜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광풍전사단의 돌진력과 더해진 삼살수라마정은 절대적인
살상력을 가질 것이다.
'어차피 희생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단극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날아온 암기는 세 명의
광풍전사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갔다. 방패로 막았지만, 힘
이 분산된 광풍멸사진의 능력으로는 삼살수라마정을 막기는 힘들었다.
"크하하! 어떻소, 선배? 정말 멋지지 않소? 비록 나의 비
기를 빌려 주긴 했지만, 역시 나의 환문은 과히 천상천하유아독존? 뭐 그런 거 아니겠소!"
광풍전사단과 아운의 결전이 벌어지고 있는 소화평원에서
조금 벗어난 언덕 위에 야한과 흑칠랑 그리고 한상아가 나
란히 숨어서 아운과 광풍전사단의 결전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물주머니와 육포가 들려 있었는데, 그야말
로 구경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온 모습들이었다.
야한은 자신의 환문진으로 아운이 멋진 반격을 하자, 신
이 나서 흑칠랑에게 자랑을 하였고, 흑칠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정도껏 자랑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왜 나오는가 말이다.
"이 멍청한 후배 자식아! 저 환진이 별것 있냐, 그냥 안
에 있는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밖에 없잖아! 내
호적수인 아운이가 적절하게 움직여서 환진이 조금 대단해
보인 것 갖고 유세 떨지 말고 입 좀 닥쳐라! 냄새 무지 나네."
흑칠랑의 반격에 야한은 입이 툭 튀어나왔다.
이럴 때 칭찬 좀 하면 뭐가 잘못된단 말인가?
"그래도 대단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선배, 혹시 질투하는 것 아니오?"
흑칠랑의 눈에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니 대가리 단단하다. 단단해. 에이 썅!"
흑칠랑은 화가 났지만 차마 주먹질을 하진 못했다.
옆에 한상아가 있는데, 여자 앞에서 자신의 무자비함을 보여 줄 순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지금 아운과 광풍전사단의 결전이 점입가경의
경지로 들어서고 있었기에 한눈을 팔 시간이 없었다.
싸우던 살수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결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상의 눈이 번쩍 빛났다.
비록 세 명의 전사가 죽었지만, 그걸로 실체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전사들을 죽인 암기를 쏘아 낸
자. 그것이 진짜 아운일 것이다.
그의 손이 시위를 놓았다.
번쩍 !
한 줄기 섬광이 열두 명의 아운 중 오른쪽에서 네 번째를
향해 날아갔다. 아운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그 화살의 무시할 수 없는 힘에 조금 놀랐다.
자신에게 활을 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팔 호로부터 전해들은 광풍전사단에 대한 정보가 그
의 머릿속에 한꺼번에 떠오른다.
'저자가 추상이란 자겠지?'
광풍전사단을 이기기 위해서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자 중 한명,
결전 중에 숨어서 화살을 날린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암수
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타 광풍전사단의 궁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빠르기와 날카로움을 가진 추상의 화살은
벌써 아운의 심장 가까이 날아와 있었다.
"찻!"
아운은 허공에 뜬 채로 몸을 틀어 추상의 화살을 피했다.
하지만 뒤이어 날아오는 화살은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
가와 있었고, 이미 아운의 실체를 눈치 챈 광풍전사단의
화살들이 그 뒤로 하늘을 뒤덮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아운은 드디어 승부를 결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이제 광풍전사단과의 거리는 겨우 삼십오 장 정도.
그들의 선두는 창을 든 전사들로 교체가 되어 있었다. 그
리고 지금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허공에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던 아운의 신형이 섬광어기
풍 신법의 갤정이라 할 수 있는 이형신기광()으
로 쾌속하게 움직였다.
추상의 화살이 아운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 아운의 신형은
꺼지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광풍전사단의 바로 오장 앞에 나타났다.
선두를 달려오던 광풍전사단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아운의 신법에 놀란 것이다. 그
러나 그들은 백전노장들만 모인 광풍전사단에서도 선두를
맡은 자들이었다. 놀라긴 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들고 있던 단창을 들고 아운을 향해 돌진하였다.
광풍멸사진의 한 축인 질풍돌격진
동시에 아운의 주먹에서도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양측의 격돌.
아운의 도전은 마치 거대한 해일을 향해 달려드는 작은
소년의 무모한 모험심 같았다. 황금물결을 이루며 밀려오
는 광풍전사단의 창들과 아운의 분광파천뢰가 충돌하였고,
추상의 화살이 다시 아운을 향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꽈꽈꽝!
거대한 폭발음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먼저 아운과 전사단
이 던진 창이 충돌하면서 첫 폭발이 일어났다. 뒤이어 광
풍전사단이 달려오는 땅바닥 전부가 뒤집어지며 거대한 폭
발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땅속에 숨겨 놓았던 십여 개의 분광파천뢰가 한꺼번에 터
진 것이다. 폭발과 폭발력이 서로 화합하고 다시 충돌하면
서 그 힘은 더욱 거대해졌고, 달려오던 광풍멸사진을 뒤흔들었다.
수십 명의 광풍전사가 허공으로 십여 장이나 튕겨 올라갔
다가 떨어져 내렸다. 폭발을 정면으로 받은 자들이었고,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말들이 놀라서 울부짖었고, 광풍멸사진이 흩어졌다.
엄호와 대군령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그 순간, 아
운은 다시 한 번 섬광어기풍의 신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
의 신형은 자신에게 맨 처음 상처를 준 추상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추상은 흙먼지 사이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살기를 느끼
자 지체하지 않고, 그곳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우웅!
은은한 소리를 담고 대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 한 대
엔 추상의 모든 내공이 담겨 있었다. 아운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의 힘을 느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저자를 죽이기 힘들다.'
화살을 쏘는 자.
분명히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쪽에 숨어서 기회를 노릴
것이다. 지금처럼 혼란스런 상황이 아니라면 다시 그와 상대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진다.
아운은 태양무극섬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 그대로 질러갔다.
번쩍!
흙먼지를 뚫고 한 줄기의 섬광이 추상의 얼굴을 향해 날
아갔다. 보고도 피찰 수 없었다. 피하려 하는 순간 이미
태양무극섬은 추상의 머리를 친 상황이었다.
아운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은 태양무극섬에 걸려 중간에
엿가락처럼 녹아 땅에 떨어져 몇 방울의 쇳물로 변해 버렸
고, 추상의 몸은 서서히 재로 흩어졌다.
단 한 주먹에 화살과 그 화살의 주인을 완전히 제압한 것
이다. 이제 뒤통수를 조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추
상 외에 궁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광풍전사단
최고의 궁사였으며 다른 전사들의 궁은 아운의 불괴수라기
공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운은 일단 자신의 의도가 성공하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했던 지점을 향해 다시 한 번 신법을 펼
치면서 연이어 주먹을 휘둘렀다.
한 주먹에 여섯 개씩의 강환이 사방으로 비산했는데 아운
이 여섯 번 주먹을 휘두르자 그 강환은 무려 서른여섯 개
가 되어 날아갔다. 강환은 가장 가까이 있는 광풍전사들만을 노리고 밀려갔다.
땅속에 묻어 두었던 분광파천뢰로 인해 흩어졌던 광풍전
사들은 아운의 공격을 제대로 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들
중 그래도 충격을 덜 받은 전사들이 아운의 공격을 막았지
만, 처음 것을 막으면 그 다음 강환이 공격해 왔다.
부서지고 날아간다.
아운이 원했던 곳에 도착했을 땐 무려 열일곱 명이 그 강
환에 맞아 죽어 갔다.
하지만 아운이 진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도착했
을 땐 거의 완전히 무너졌던 광풍멸사진이 그 짧은 시간이
다시 발진하려 하고 있었다.
'진이 닫히면 나도 살아남지 못한다.'
아운은 지금 광풍멸사진이 완전하게 발동하게 되면 자신
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죽일 수 있지만, 결국 자신도 탈진
해 죽을 것이다. 아운은 태양무극섬을 무려 세 번이나 연속으로 펼쳤다.
지금까지 그가 태양무극섬을 한꺼번에 두 번 이상 펼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파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며 막 진세를 이루면서 힘이 모아지던
세 명의 소군령과 이십여 명의 광풍전사들이 재가 되어 눈
보라와 함께 흩어져 버렸다. 아운은 그 틈새로 분광파천뢰를 다시 연이어 두 번이나 찔러 넣었다.
꽝, 꽈광!
연쇄적인 폭발과 함께 십여 명의 광풍전사가 사방으로 날
아가며 쓰러졌다. 엄호와 살아남은 세 명의 대군령들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엄호는 수하들에게 그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비록 대폭발로 수십 명의 전사들이 죽었고, 아운의 주먹에
추상과 몇 십 명 이상의 수하들이 죽어 갔지만, 광풍전사
들은 의연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고 광풍멸사진의 힘을 아운
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아운은 그 기세를 읽고 더욱 동작이 빨라졌다.
하지만 내심으로 은근히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지간하면 이 정도 타격에 흔들리거나 주눅이 들 텐데.
이들은 정말 대단한 전사들이다.'
감탄은 감탄이고 지금 그는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운은 자신의 공격으로 인해 생긴 틈 사이로 신법을 펼
치면서 주먹을 휘둘러 삼살수라마정을 쏘아 보냈다. 이미
암기를 주먹으로 쏘아 보내기 시작하면서 삼살수라마정 자
체가 권강처럼 변한 지 오래였다. 수라마정 자체가 내공이
고, 이기어검술의 일종이라 권강과 함께 응용하기가 아주 쉬었던 것이다.
삼살수라마정은 바로 지상에서 한 자 정도의 사이를 두고
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한데 비행을 시작한 수라마정에 갑
자기 반월형의 날개가 생겨났다. 삼살수라마정에 월광분검
영의 강기를 날개처럼 실어서 쏘아 보낸 것이다.
삼살수라마정은 광풍전사들이 내린 채 진 밖으로 몰아내
고 있는 말들을 향하고 있었다. 이미 대폭발로 인해 많은
말들이 죽었다. 땅이 움푹움푹 파인 상황에서 말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광풍전사들이 말에서 내리자, 말은 진법을 발휘하는
데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광풍전사들은 광풍멸
사진을 형성하면서 말들을 진 밖으로 몰아내는 중이었다.
아운은 그 말들을 노리고 공격을 한 것이다.
수라마정에 날카로운 날개로 붙어 버린 월광분검영은 사
방으로 날면서 말의 다리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엄호의 안색이 일변했다.
"막아라!"
그의 고함은 적절했지만, 아직 광풍멸사진은 제대로 가동
되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 광풍전사가 수라마정을 쳐내려
하였지만. 수라마정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들을 비켜 날아갔다.
수라마정이 말들의 다리 아래로 사라진 순간 말들이 날뛰
기 시작했다. 아무리 제대로 훈련을 받은 명마들이라지만
다리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냉정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라마정은 될 수 있는 한 말에게 상처만 주고 죽이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날뛰는 말들로 인해 광풍멸사진의 형성이 늦
어졌다. 엄호는 냉랭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말들을 전부 죽여라!"
삽시간에 말들이 죽어 갔다. 하지만 전사들이 말을 죽이
고 있는 그 짧은 순간 아운의 신형이 말들이 있는 사이로
뛰어 들어가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손에서 뿜어진 반월의 강기가 허공을 비행하면서 광풍전
사들을 휩쓸고 날아갔다. 다섯 명의 광풍전사의 머리가 예
리하게 갈라지면서 쓰러졌고 겨우 아운을 따라잡은 대군령
모단극이 두 개의 도끼를 아운에게 던졌다.
부우웅!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면서 두 개의 도끼는 아운의
심장과 머리를 당장이라도 부술 것만 같았다. 아운은 코웃
음을 치며 연환육영뢰로 날아오는 도끼를 비스듬히 쳐냈고,
튕겨 나간 도끼는 아운에게 달려드는 두 명의 전사들에게
날아가 그들의 머리를 부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뿌드득!"
모단극은 이를 갈면서 아운에게 다시 달려들었지만, 아운
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가 향한 방향은 여전히 북쪽이었다.
다시 십여 명의 광풍전사가 죽었을 때 아운은 어느덧 광
풍멸사진의 포위망을 벗어나 있었다. 모단극은 광풍멸사진
을 이룬 무리의 맨 앞에서 아운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아
운은 일단 포위망을 벗어나자 모단극과 정면으로 겨루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뒤쪽으로 광풍전사가 돌아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아운은 광풍전사들보다 빠른 신법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연속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아운을 바로 코앞에 둔 상태에
서도 그들은 아운을 제대로 공격할 수 없었다.
화가 난 모단극은 전력으로 아운을 쫓아가려 하였지만,
그의 신법으로는 아운을 잡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아운은 뒤로 도망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고, 아
운을 쫓는 광풍전사들의 속도 역시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아운은 그들과 적당한 사이를 두고 수라마정과 연환육영
뢰로 공격을 하면서 뒤로 도망을 쳤다. 전면에 나선 창검
전사들과 순부전사들 뒤에서 궁도전사들이 활을 쏘아 아운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는 속도로 인해 정확한 시위를 당기기가 힘들
었다. 아운은 교묘하게 앞에서 공격해 오는 창검전사들과
순부전사들을 이용해 그들의 시야를 어지럽혔으며 간간이
수라마정을 이용해 활을 쏘려는 궁사들을 공격하였다.
아운에 대한 공격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피해만
늘어나자 보다 못한 대군령 무형마창 수타르가 앞쪽으로
뛰쳐나오며 아운을 공격하려 하였다.
보통 지휘자는 함부로 앞에 나서면 안 되지만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고맙군, 그렇지 않아도 이제 슬슬 변화를 주려던 참인데."
아운은 나직하게 말하며 분광파천뢰로 수타르를 공격하였다.
꽝!
폭발음과 함께 수타르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만약 광풍멸사진의 도움이 아니었
다면 오장육부가 전부 흔들렸을 것이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멈춰라!"
모단극이 고함을 지르며 들고 있던 도끼를 던졌다.
아운은 그 도끼를 깨끗이 무시하고 갑자기 돌아서서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십 발의 화살이 그 뒤를 쫓고 있었지만 아운을 위협하진 못했다.
수타르와 모단극이 이를 갈며 신법을 펼치려 할 때, 허공
에서 아운의 신형이 멋지게 용틀임을 한 다음 땅에 내려섰
고, 그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갈대 숲 사이로 사라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야한과 흑칠랑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야한이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고함을 쳤다.
"걸렸다. 이 바보 놈들."
흑칠랑이 야한의 뒤통수를 탁 하고 치며 말했다.
"호들갑 좀 그만 떨어라! 아직 확실하게 걸린 것은 아니다."
야한의 이마에 힘줄이 확 돋아났다.
'어휴! 이걸 그냥 확! 참는다. 참어. 선배만 아니면 정말.'
야한은 정말이지 달려들어 마구 패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
도 살수계의 질서를 위해 선배에게 달려드는 하극상은 범
하지 않았다. 절대로 힘이 없어서 달려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야한은 속으로 화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저들은 이미 우리가 만들어 놓은 천문기화진()
안에 들어왔으니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 않소?"
흑칠랑은 의외로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했다.
"권왕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저들이라면 천문기화진을 부술 수도 있다."
"우리 삼대살수와 권왕의 암혼살문이 가지고 있던 진법의
장점만 골라서 만든 진법이오. 우리가 저 진을 만드느라
물경 열흘 동안 꼬박 이 허허벌판에서 중노동을 했단 말이
오. 그리 쉽게 열리진 않을 것이라고 나는 장담하오."
"제대로 된 진법 하나 만드는데 열흘이 많은 것인가?"
"하지만 어차피 저 자리는 암혼살문의 안가가 있던 자리
요. 그 안가의 진법에 우리의 진법을 가미한 것이니 열흘
은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라고 할 수 있소."
"그렇긴 하지만 광풍전사단은 그 이상으로 강하다. 결코
방심은 안 되지 그리고 팔 호라는 분의 정보에 의하면 어
린이란 자가 진법에 제법 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신안이라는 모단극도 있다."
야한은 신음을 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흑칠랑의 말대로 광풍전사단은 정말 강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흑칠랑은 진 안에서 대치하고 있는 아운과 광풍전사단을 보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주먹 좋은 놈은 잔머리라도 나쁜데. 어떻게 저 자식은
골고루 발달되어 있단 말인가? 이런 허허벌판에 암혼살문
의 안가가 있을 것이라곤 저 똑똑한 엄호도 생각을 못했겠
지. 더군다나 우리 삼대살수가 안가의 절진을 더욱 견고하
게 만들 줄은 더더욱 몰랐을 테고, 근데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가? 젠장."
흑칠랑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야한이 나직하게 대꾸하였다.
"잔머리와 똥배짱은 얼추 견줄 만하던데."
흑칠랑의 독사눈이 야한을 향했다.
야한은 하늘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어휴 웬 눈이 이렇게 오나? 꼭 자존심에 구멍 뚫린 누구처럼 하늘에도 구멍이 ‥‥ 컥!"
빠각!
야한은 한쪽 눈을 감싸고 아픔에 발발 떨면서 자신을 친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상아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선배에게 말을 함부로 하다니. 대체 언제부터 우리
살수계의 계보가 이리 흐트러졌지? 가가는 대체 어떻게 행
동하고 다니기에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이렇게 기어오르고 있는 거죠?"
야한은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멍하니 한상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먹을 들어 올렸던 흑칠랑마저도 얼떨떨해하는 분위기였다.
"그‥‥‥ 그게 헉! 시작했다."
한상아는 바로 야한을 무시하고 결전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야한은 두 연인의 뒤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진다.
"흑흑, 내 사랑 서문 소저가 보고 싶다."
"시끄러."
"딸꾹."
흑칠랑의 짧은 고함에 야한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문
득 맞은 눈언저리에서 이상하게 짜르르한 기분이 느껴진다.
'한 대 더 맞아 볼까?'
야한은 망설이며 슬쩍 두 사람에게 다가섰다.
'참자, 자칫해서 눈알이 잘못되면 우리 서문 소저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야한은 정말 꾹 참았다.
아운이 갑자기 사라지자, 엄호는 불안해지는 마음을 겨우 다스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적.
휘날리는 눈보라 이외에는 특별한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엄호는 전신을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모두 멈추어라!"
광풍전사단이 일제히 멈추었다.
엄호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후후, 모두들 나의 안가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엄호가 무엇인가 꺼림칙한 것을 생각했을 때 아운이 그들
의 십 장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모단극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네놈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곳이 네 안방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사실이 그렇다."
모단극은 아운이 너무 쉽게 인정을 하자, 조금 어리둥절
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주 불어오는 눈보라와
마른 갈대밭, 그리고 눈이 쌓이기 시작한 너른 평야.
자세히 사방을 둘러보던 모단극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진법이군."
"이제야 알아보는군. 맞다. 광풍멸사진과 맞서기 위해 만든 나의 신무기라고 할 수 있지."
모단극이 코웃음을 쳤다.
"너는 살수문의 환진 따위로 광풍멸사진을 상대하려는 것이냐?"
아운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 진법이 아니라도 광풍전사들의 사분의 일 이상
을 쓰러트렸다. 그리고 너희들은 아직 여기 설치된 천문기
화진의 진정한 힘을 느껴 보지 못한 상황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래 보았자 우리 광풍전사단의 힘을 이기진 못할 것이다."
아운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 진의 이름이 왜 기화진인지 아는가?"
모단극이 흠칫하는 시선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엄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직접 느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운은 갑자기 주먹을 사방에 대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간 아운의 주먹에서 뿜어진 삼매진화가 아운의 앞쪽 갈
대숲을 태우기 시작했다.
엄호와 무단극을 포함한 광풍전사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 부는 바람은 자신들을 향해 불어오고 있
었으며, 비록 눈발은 거세지만 평원의 갈대밭은 바싹 말라 있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광풍전사단을 덮쳤다.
엄호가 이를 갈아붙이며 고함을 질렀다.
"뒤로 물러서지 말고, 앞으로 뚫고 나가라!"
모단극이 놀라서 엄호를 바라보았다.
"뒤로 도망치려면 진법을 뚫어야 한다. 내가 진법을 살펴
본 바로는 비록 이각이면 뚫을 수 있는 진이지만, 그 사이
면 화마가 우리를 휩쓸 것이고 권왕에게 뒤를 내주게 된다.
차라리 앞으로 뚫고 들어가 권왕을 치는 것이 옳다. 그리
고 앞쪽에는 불이 없다. 진법의 파괴는 어린이 맡는다."
엄호의 명령에 광풍전사단이 앞쪽으로 전진하려고 할 때였다.
파악!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사방에서 한꺼번에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광풍전사단을 휩쓸었다.
"크으."
엄호는 이를 악물었다.
비록 불길이 강하긴 하지만 광풍멸사진은 이 정도는 충분
히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권왕 아운이였다. 아운이 자신들로 하여금 불길과
싸우고 있게 그냥 두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운은 심호흡을 하였다.
'여기서 어느 정도 승부를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부가 정말 길어질지도 모른다.'
아운은 결심을 하자 망설이지 않고 불길 속을 뚫고 나오
려는 광풍전사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선 가장 정면에 있
는 모단극이 그의 목표였다.
모단극 역시 정면 승부를 즐기는 전사답게 아운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 스스로는 아운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만 뒤를 받치고 있는 광풍멸사진의 힘을 믿고 있었다.
일단 공력을 끌어 올리자, 불길 속에서도 그에게 상당량
의 힘이 모아지고 있었다.
"오너라!"
고함과 함께 모단극의 전투 도끼가 아운을 향해 쪼개 갔다.
아운 역시 피하지 않고 주먹을 직선으로 지른다. 연환육
영뢰 중 육영추의 권강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변하며 모단극의 도끼를 정면으로 마주 공격해 갔다.
퍽!
소리가 들리면서 육영추의 권강은 모단극의 도끼에 충돌
하자 절 반 이상 뚫고 들어간 후에 멈추었다.
"크으! 지독하다."
모단극은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한 충격에 하마터면 도끼
를 놓칠 뻔하였다. 모단극이 충격을 받고 주춤할 때 아운
의 양옆에서 두 자루의 단창이 아운을 향해 찔러갔다.
광풍전사들 중, 창을 든 전사 두 명이 협공을 한 것이다.
아운은 칠보둔형으로 두 자루의 창을 피하면서 양 주먹을
휘둘렀다. 창이 부러지면서 얼굴이 뭉개진 광풍전사가 바
닥에 쓰러지면서 그들의 몸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광풍멸사진으로부터 격리가 되었고,
격리된 시신은 불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단극은 자
신을 대신해서 죽은 두 명의 전사를 보면서 눈에 불이 나는 느낌이었다.
"이노옴!"
타고 있는 두 시신의 모습을 하나씩 담은 모단극의 눈이
극도로 팽창하면서 자신의 전 내공을 쥐어짠 그의 도끼가
다시 한 번 아운의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근교에 있던 광풍전사들이 협공을 한다.
'허공에 한 명. 뒤에서 두 명 그리고 활을 겨눈 자가 세명 , 그 외?'
아운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였지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일단 모단극을 처리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아운의 주먹이 대각선으로 교차하면서 연이어 휘둘러졌다.
그의 손에는 반월형의 강기가 맺혀져 있었다. 모단극은
자신의 도끼와 아운의 주먹이 충돌하는 순간 갑자기 손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끼가 아운의 반월강기에 잘려 나간 것이다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운의 주먹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광풍멸사진의 힘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아운
의 주먹은 그 멸사진의 강기를 자르고 들어와 모단극의 목을 자른 것이다.
하지만 아운은 모단극을 죽인 대가로 극도의 위기 상황을
맞이 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악착같이 달려드는 두 명 이외에 허공에서 한 명,
그리고 세 대의 화살과 두 개의 창이 그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칠보둔형 보법.
신기라는 말을 가진 유일한 보법을 아운은 십이성 공력으
로 펼쳤다. 아슬아슬하게 화살과 창이 그를 스치듯이 비켜
날아가는 사이 아운의 양 주먹이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
큼 빠르게 움직였다. 그 주먹에는 마치 월아극처렁 생긴
월광분검영의 강기가 맺혀져 있었다. 허공에서 달려드는
자와 뒤에서 공격하던 세 명이 서너 조각으로 갈라져 바닥
에 무너졌고, 그들의 몸에는 바로 불이 붙어 버렸다.
그 사이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고, 그 눈보라 속에서도 천
문기화진 안에서의 불은 전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길은 더욱 거세지고 뜨거워겼다. 일부
광풍전사들은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진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천문기화진은 말 그대로 불을 가두고 촉진시키는 진일뿐
만 아니라 화로와 같은 역할을 하여 더욱 뜨거운 불로 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진법이었다.
무극신공은 양의 기운이 강한 무공이었다. 특히 태양무극
섬은 극도의 화기를 지닌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아운은
자신의 무공을 믿고 자신이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천문기화진은 광풍멸사진을 흩어 놓을 수 있는 진법이었다.
아운은 모단극과 함께 협공을 했던 자들을 처리하자. 자
신이 생각했던 방위에 얼른 자리를 잡았다 아운이 위험을
감수하며 모단극을 처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방위를 먼저 밟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운은 자신이 원했던 곳을 선점하자마자 근처에 있던 제
법 큰 바위를 한쪽으로 슬쩍 밀어 놓았다.
순간 화마가 넘실대는 천문기화진 안에서 유일하게 그곳
만 불이 접근을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진 안에 기묘한
기운이 만들어지면서 광풍멸사진의 힘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천문기화진이 제대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엄호와 대군령들은 진 안에서 갑자기 기묘한 힘이 작용을
하자 깜짝 놀랐다. 그들이 상황에 대처하기도 전에 아운의
주먹에서 분광파천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순부 소군령 중 한 명인 모개는 자신의 모든 힘을 전부
동원하여 아운의 분광파천뢰를 향해 마주 공격하였다. 하
지만 전투 도끼를 휘두르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 공격을 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 올리면 광풍
멸사진은 그 기운에 동조하여 공격하는 사람에게 힘을 밀
어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 전이된 힘이 너무 미약했던 것이다.
근처에 있던 십여 명의 동료들한데서만 힘이 전해져 왔다
는 것을 안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꽝!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폭발음과 함께 소군령 모개와 그
의 동료들 십여 명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아운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그의 기세는 불과 눈
보라를 동반한 폭풍처럼 거셌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그의 손에서 뿜어진 강기들은
단 한 번에 서너 명씩의 광풍전사단을 쓸어 갔다. 광풍전
사들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아운의 주먹은 닿는 대로
부수고 자르고 폭발시켜 버렸다.
아운의 자신의 힘을 전부 쥐어짠 대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크하하! 그래 잘한다. 역시 내 적수다."
흑칠랑이 신이 나서 주먹질까지 하며 아운이 싸우는 모습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야한 역시 입에 침까지
흘리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역시 권왕은 정말 무적이라 할 만하지 않소? 저 박력, 저 기교하며‥‥‥."
"그렇지 흐흐, 나만 빼고 나면 천하에 적수가 없는 것이 맞지."
"하하! 사실 지금 선배라면 혹시 권왕님의 한주먹은 버틸 수 있을 지도 모르지요."
"그럼! 권왕과 싸워서 버틸 수 있는 건 나뿐......?"
빠각!
흑칠랑의 주먹이 야한의 이마를 강타하였다.
"나야말로 권왕의 진정한 적수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 그럴지도‥‥‥ 당연히 그렇지요."
'아씨, 이걸 선배라고. 그냥 콱! 주먹이 더러워서 참는다.'
"흐흐! 역시 후배는 나를 알아주는구만."
"그럼요. 선배의 더럽고. 치사한 성격을 나 말고 누가 알겠습니까?"
"후배."
"말씀하십쇼."
"아무래도 권왕과 결전 이전에 실전 감각을 위해 후배가
나의 수련 상대가 되어 주어야겠네, 물론 진검으로 말일세."
"헉! 서, 선배."
"말해 보시게."
"지금 권왕님의 활약을 보면 마치 선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런가?"
"그러문요, 허허, 천하에 선배님이 아니면 누가 권왕 앞에서 걸리적거리겠습니까?"
'아씨,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야한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역시 인생의 선배는 잘 만나야 한다.
아니면 통한의 눈물로 좌절하던가?
한상아는 멀뚱거리며 이 다정한 선후배를 바라보고 있었
는데,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엇인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근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았던가요?"
한상아의 말에 흑칠랑과 야한은 서로 멀뚱거리고 바라보
았다. 그러고 보니 무엇인가 빠트린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헉! 선배, 우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권왕님
이 부탁한 그놈이 있지 않소!"
"아차! 빨리 서두르자."
"아직 안 늦었을 것이오. 어차피 지금 이 허허벌판에서
숨어 있을 곳도 몇 군데 안 되고, 그곳이라면 이미 우리가
전부 조사를 해 놓았으니 별문제가 없을 것이오 어여 갑
시다."
"흠, 그러자고, 빨리 가서 처리하고 우리도 얼른 저 싸움
에 끼어들어 한바탕 놀아 보자고."
야한이 놀라서 흑칠랑을 바라보았다.
흑칠랑이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자넨 무림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은가?"
"그야 당연히 ‥‥‥."
"생각해 보게. 오늘 결전은 무림사에 영원히 기록될 만한
결전 아닌가? 그러니 우리도 슬쩍 끼어들어......"
"선배 저들의 무공은 우리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수준이
오. 설마 그까짓 이름 석 자 남기자고 자살하자는 말은 아니겠죠?"
흑칠랑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헉! 뭐, 선배야 무지 강하지만 나는 좀‥‥‥ 약해서."
"이런 멍청한 놈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우린 지금 저 아
래 설치된 천문기화진에 대해서 완전히 숙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린 살수고."
"그야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우리가 천문기화진에 숨어들어 뒤쪽에 있는 놈부터 한두
명씩 처리하는 거다. 그러면 우리도 당당하게 이 결전의
승리에 한 힘 보탠 인물로 ‥‥ 험험."
'에라. 이 얌체 고양이 벼룩 같은 놈아! 결국 권왕이 다
해 놓은 거 가로채자, 이 말이잖아!'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지를 뻔한 야한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겨우 참아 내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별로 싫지 않았던 것이다
"흠‥‥‥ 뭐 일단, 일 처리부터."
"가자."
삼대살수가 빠르게 움직였다.
흑칠랑은 자리를 뜨면서 아운이 있는 곳을 힐끔 바라보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 새낀 멀 처먹고 자라서 저리 잘 싸우냐? 젠장, 사부
영감은 저런 놈과 어떻게 싸우라고 나한데 그런 지랄 같은
숙명을 내려 줬단 말인가? 에구. 내 팔자야!'
흑칠랑은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오죽했으면 어젯밤엔 권왕과 결전을 벌이다 져서 그에게
하루 종일 두드려 맞는 꿈을 꾸었겠는가?
입에 도끼 자루까지 처박히는 꿈은 정말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분풀이할 수 있는 야한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괜히 어깨가 욱신거린다.
엄호는 지금 상황으로는 도저히 아운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벌써 이백여 명이나 되는 광풍전사들이 쓰러
졌다. 한주먹이면 광풍전사들이 무려 대여섯 명씩 쓰러지
고 있었는데 어떻게 대적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할 것 같다."
엄호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에게 다가와 있던 무
형마창 수타르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최고 지휘자가 나서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권왕의 표적
이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추상과 모단극이 죽은 지금 엄호 외에 나설 수 있는 절대
강자라면 무형마창 수타르와 등천금창 어린이 있었다.
엄호는 최고 지휘관이었다. 함부로 나섰다가 변이라도 당
하면 그 타격은 바로 광풍전사단에 미치게 된다.
엄호가 있는 광풍멸사진은 끝까지 유지된 채 모두가 전멸
할 때까지 아운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
만 엄호가 죽으면 광풍멸사진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물론 광풍전사들은 끝까지 싸우겠지만, 지휘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엄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 누구 한 명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차라
리 우리 둘이 앞장을 선 채 일제히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싸우다 죽는다면 나도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엄호의 말에 수타르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현재 기묘한 진법으로 인해 광풍멸사진이 제대로 발휘가
안 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아운에게 당한 전사들도 많았
지만 불길에 타 죽거나 그 뜨거움을 이기지 못해 주저앉
은 자들도 갈수록 늘고 있는 참이었다. 더 이상 주저하다
가 제대로 겨뤄 보지도 못하고 광풍전사단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알았습니다, 단주님."
수타르가 결심을 굳히고 창대를 세웠을 때였다.
"이 진법을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어린이 돌아와서 하는 말을 들은 엄호와 수타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진만 파괴되면 아직은 반격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야율초는 초조한 시선으로 결전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능유환을 보면서 말했다.
"권왕의 나이가 몇인데 저리 강해도 된단 말입니까, 사형?"
"허허, 내가 보기에도 하늘이 세상에 사기를 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저 상태라면 광풍전사단도 무사하진 못할 것 같아."
야율초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진법의 파괴 방법을 알아도 알려 줄 방법이 없었다. 거리
가 너무 멀어 전음으로 알려 주기도 힘들었지만. 진은 밖
에서 들어오는 음파도 차단하는 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아운은 이런 상황을 감안하고 진법을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보다 못한 사마정이 자신의 무기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가서 도와줄까?"
야율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진이 발동된 다음이라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지만, 지금 우리만 이 근처에 있는 것
이 아닐 것입니다. 분명히 무림맹에서도 와 있을 것입니다.
저 진법 근처에 도착하기도 전에 무림맹과 결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야율초는 자신의 말에 동조를 구하는 시선으로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천개 몽화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야율 군사의 말이 맞소. 지금 이 소화평원에는
무림맹의 절정고수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숨어서 저 대결을 지켜 보고 있는 중이오."
그가 그렇다면 확실할 것이다.
천개 몽화는 그들만큼이나 광풍전사단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강호를 배신하고 몽고에 붙은 상
황에서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광풍전사단
이 무너지고 있으니 내심으로 속이 타고 있을 것이다. 그
것은 곧 몽화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과 같았다.
야율초와 능유화는 그의 심정을 읽고 있었다. 지금 그들
도 몽화 이상으로 초조하고 상실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너무 허탈해서 기운마저 빠져 가고 있었다.
원나라의 모든 염원이 아운 한 명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
었던 것이다. 야율초는 마음속에 일던 갈등을 모두 지워버렸다.
'결국 대군사의 안배를 쓸 수밖에 없겠구나. 하지만 아깝
구나. 저 기묘한 진으로 인해 광풍전사들이 너무 많이 죽
은 다음이라 큰 효과는 없을 것 같다. 아운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하는 데까지 해 봐야겠다.'
질 땐 지더라도 권왕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이 그
의 생각이었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그는
대군사의 안배를 꺼내 들면서도 끝까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익혔다.
대군사가 만든 광풍멸사진을 형성하는 내공심법 자체가 그
무공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제 명령을 내리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무공을 끌어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류의 무공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지만 야율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두 넷. 우리는 셋."
야한이 흑칠랑을 보고 말하자, 한상아가 가볍게 웃으면서
자신의 부군 대신 대답하였다.
"저들 중 한 명은 우리 편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넷, 저쪽
은 셋. 우리가 유리하지. 우린 살수고, 저들 중 한 명은
팔 하나가 없거든."
"하지만, 형수님 저들 무공은 우리보다 위일지도 모릅니다."
"무공? 우린 살수야."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선배는 무엇을 믿고 우리
면 충분하다고 큰소리를 쳤는지 그 배짱 하나만은 정말 인
정하지 않을 수 없단 말이오."
야한은 약간 불만인 표정으로 흑칠랑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광전사란 종자들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자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이 절대고수들로 암수를 쓴다 해
서 쉽게 죽일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흑칠랑은 야한이 어떤 생각을 하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내가 누구냐? 권왕의 유일한 적수인 흑칠랑 님이 아닌가?
이 정도는 해야지. 흐흐!"
흑칠랑의 큰소리에 한상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정말 방법 이 있는 거예요?"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나를 믿어."
'당연하지, 내 이럴 줄 알고, 이전에 호연세가의 남은 독
을 조금 얻어다가 우리 살문의 독을 섞어 저들이 올만 한
장소마다 전부 살포해 두었지. 그래 봐야 두세 군데. 딱 걸렸지 뭐 , 별수 있나.'
흑칠랑이 보는 그들은 이미 시체였다.
원채 미량이라 천천히 퍼지지만 저들이 내공을 끌어 올리는 순간 모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먼저 습격을 해서 단 일 격에 저들을 처리하는 것
이다 저들이 독에 중독된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한상아와 야한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얼마나 존경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볼 것인가?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
엄호와 어린, 그리고 수타르의 활약으로 천문기화진이 무
너지자, 갑자기 열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평원 전체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진
법이 파훼되면 인위적으로 불이 꺼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쌓인 눈으로 인해 불길이 오래가진 않았을 것이지
만, 불길이 갑자기 사라진 것만으로 광풍전사들에게 큰 득
이었다. 하지만 엄호와 어린의 생각대로 진 자체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진의 생문이 사방으로 열린 것뿐이었다.
그 생문으로 열기가 나가는 것을 본 광풍전사들은 사방으
로 흩어지면서 생문을 찾아 진 밖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치명타라 할 수 있었다.
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그나마 조금
이라도 유지되고 있던 광풍멸사진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조금씩 지쳐 가던 아운은 이때를 노리고 있었다.
엄호와 수타르는 뜰어지는 광풍전사들을 보고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아운의 신형이 우선 눈앞에 보이는 광풍전사들을 향해 달
려들면서 엄호와 수타르 등이 있는 곳을 향해 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엉호와 수타르 그리고 어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섯 명의 광풍전사들이 아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라!"
고함과 함께 아운의 손에서 뿜어진 연환육영뢰가 그들을
단 한 번에 쓸고 지나갔다. 눈보라 속에 그들의 시신이 어
육으로 변해 바닥에 무너졌다. 그가 달리는 동안 앞을 가
로막는 자들은 누구도 단 일 권을 막지 못하고 쓰러졌다.
광풍멸사진이 아닌 개인으로 누가 아운의 한주먹을 막을 수 있겠는가?
수타르와 어린이 단창을 든 채 앞으로 뛰쳐나갔고, 진 밖
으로 나갔던 광풍전사들이 무엇인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엄호가 있는 곳으로 뭉치려 이동을 하였다.
수타르와 어린 주변에 있던 이십여 명의 광풍전사들이 합
세를 하여 아운을 공격해 왔다. 엄호 역시 자신의 애도를
뽑아 들고 당장이라도 아운을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여차하면 합세할 기세였다.
'이제 승부다.'
아운은 광풍전사단과의 결전이 여기서 승부가 날 것이란
것을 예감하였다. 아운은 무극신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다음 수타르와 어린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마주 돌진하였다.
"이야아아!"
전사들이 고함과 함께 아운을 향해 창과 도끼를 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허리에 찬 대환도를 뽑아 든 채 달려든다.
아운의 손에서 연환육영뢰가 연이어 펼쳐지면서 날아오던
도끼와 창들이 반대로 튕겨 나가 돌진해 오는 수타르와 어
린, 그리고 광풍전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무기가 얽히고 사람과 사람이 얽히면서 그 위로 아운이
달려들었다. 아운은 손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찔러 오는 수
타르와 어린의 창을 쳐 내고 몸을 회전하며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십여 개의 반월 강기가 터져 나오며 광풍전사들의 몸이
조각난 채 땅바닥으로 모래성처럼 부서져 내리는 가운데,
수타르와 어린만이 겨우겨우 아운의 반월강기를 쳐 내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았다.
그때였다.
"크아악!"
괴이한 고함과 함께 아운은 자신의 전 공력을 갑자기 밀려오는 거대한 힘을 막는 데 사용해야만 했다.
꽝!
"크으!"
작은 신음과 함께 아운의 몸이 약간 휘청하였다.
그는 놀라서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엄호?"
놀랍게도 아운을 공격한 것은 엄호였다. 그런데 엄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힘은 아운마
저도 놀랄 정도로 강력했다.
'철권단사() 송문이 익혔던 무공과 같은 종류의
무공이지만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하지만 같은 맥락의 무공이 분명하다.'
대전사를 대신하여 그림자 무사로서 살아야 했던 송문의
무공과 비슷한 무공을 엄호도 익히고 있다가 지금 그 무공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왜 이제야 저 무공을 펼친단 말인가? 아운은 엄호
의 눈동자를 보고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엄호가 공격을 시작하자 수타르와 어린이 동시에 아운을
공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도 엄호가 조금 이상하다
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아운에 대한 공격이 먼저였다.
아운은 칠보둔형보법으로 그들의 무기를 피하면서 바로
엄호에게 달려들었다. 삼절파천황이 연이어 펼쳐지며 엄호
를 공격하였고, 엄호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아운의
공격을 정면으로 마주 상대한다. 그리고 엄호를 공격하는
아운의 뒤를 어린과 수타르가 협공하였다.
퍽!
아운의 반월강기가 엄호의 도와 충돌하면서 엄호가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 사이 수타르의 창이 아운의 어깨를
스쳤고, 어린의 창은 아운의 옆구리에 상처를 내었다.
아운은 자신의 상처를 도외시한 채 분광파천뢰를 펼쳤고,
"꽝" 하는 폭발과 함께 엄호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동시에 아운은 신형을 돌리며 양손을 교차하였고, 수타르
와 어린의 창이 그 손에 맺힌 반월 강기에 밀려 다시 비켜
지나갈 때 아운은 어린에게 다가서며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아운의 동작이 너무 빨라 어린은 미처 그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급한 대로 한 손으로 창을 잡으며 남은 한 손에 공력을 모아 아운의 주먹을 막아 내려 하였다.
그의 손이 아운의 주먹에 닿은 순간 "꽝!" 하는 폭발음과
함께 그의 손과 몸이 터지면서 뒤로 삼 장이나 날아가 처박혔다.
분광파천뢰에 당한 것이다.
하지만 아운이 어린을 공격하는 동안 수타르와 엄호가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타르의 창과 엄호의 도가 어느새 아운의 지척까지 다가
와 있었다. 아운의 신형이 팽이처럼 돌아가며 양손을 휘둘렀다.
파직!
엄호와 수타르의 몸이 서서히 재로 부서지며 날아갔다.
하지만 아운 역시 다리를 부르르 떨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의 고갈된 진기로 인해 내공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지금 충돌로 인해 몸 안의 오장육부가 뒤흔들린 것이다.
"죽어라!"
고함과 함께 살아남은 광풍전사단의 전사들이 이를 악물
고 아운에게 달려들었다. 지휘자가 죽었고 그렇게 많은 동
료들이 죽었지만 그들의 기세는 여전했다.
아운은 그 위험 속에서도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진정한 전사로구나.'
감탄은 감탄이고 위기는 위기였다.
상대가 강하면 더욱 승부욕이 앞서는 것이 바로 아운이었다.
정면의 전사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순간적으로 진기가
모아지지 않았다. 전사와 아운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를 내리치던 전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뒤
로 넘어갔다. 그의 머리엔 수라마정이 뚫고 지나간 구멍이
생겨 있었고, 그곳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수라마정으로 일단 한 명을 죽인 아운은 연이어 수라마정
을 던지면서 남아 있는 힘을 전부 짜낸 채 월광분검영으로 주먹을 무장하였다.
이제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한 광풍전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아운은 그들의 전사혼에 자신의 혼을 던졌다.
주먹이 휘둘러진다.
칠보둔형으로 피하고 주먹을 휘두르면 그 주먹에 걸린 것
은 무엇이든 반으로 잘라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
고 있었지만 아운은 무아지경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아운
을 공격하는 광풍전사들 역시 집단 최면으로 걸린 것처럼 아운에게 달려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한 명이 아운에게 죽었을 때 아운의 진기는 단 일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털썩
삼백삼십삼 번째의 전사가 쓰러짐으로 광풍전사단원은 모
두 몰살하였다. 그들은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공격
을 멈추지 않았고, 아운은 마지막 주먹을 뻗은 채로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무려 스물두 군데의 상처를 입었고 내외상이 심했지만,
아운은 무아지경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
켜보던 사람들도 역시 숨을 죽인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추에 무림사가들이 소화평원의 대혈투라고 불린 결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날 이후 무림에서는 세상에 진정한
무적은 권왕뿐이다. 라는 말이 돌기 시작하였고, 사가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평원에 피가 흘러 강을 이루었고, 눈보라가 그 피의 강을
덮었다. 광풍전사단은 비록 졌지만, 최후의 일인까지 무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강했다. 단지 권왕이 더 강했을 뿐이다.
심한 눈보라는 삼대살수에게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
다. 흑칠랑과 야한, 그리고 한상아는 아주 느릿하게 오 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때 야율초는 절대고독을 조종
하여 엄호로 하여금 금기의 무공을 사용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었고, 사마정과 능유환은 결전에 신경 쓰느라 살수들
의 접근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삼 장까
지 접근했을 때, 능유환은 미세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확하게 삼대살수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고, 야한은
미처 숨지 못하고 능유환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
"누구냐?"
능유환이 고함을 쳤고, 야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들켰다.'
야한은 자신이 들켰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살수 본능을 발휘하여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 미친놈!"
능유환의 외침에 놀라서 돌아선 사마정이 야한을 막아서
며 자신의 무기를 뽑아 들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내공을 끌어 올리던 사마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야한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독에 중독된 것을 안 것이다.
"이런 비겁한!"
고함을 치며 야한의 공격을 막았다.
땅!
쇳소리가 들리면서 사마정은 입으로 피를 토했다.
겨우 버틸 정도로 그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놀란 능유환이 검을 뽑으며 야한을 공격하려다가 기겁을
하였다. 옆에서 몽화가 공격을 해 왔던 것이다.
"이놈!"
능유환의 공격에 몽화가 뒤로 일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내공을 끌어 올린 능유환의 표정이 금방 검게 변
했다. 야한은 자신의 공격에 사마정이 피를 토하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맞아, 내가 그동안 권왕님과 함께 있으면서 어느새 무공
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야, 흐흐, 나는 할 수 있다.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야한은 속으로 외치며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사마정은 제대로 막지 못하고 어이없이 죽었다.
사실 내공을 끌어 올리면서 독이 발작하고 야한의 처음
공격을 막느라 내공을 사용한 순간 그는 죽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야한은 사마정을 죽이고 나자 바로 능유환을 공격하였다.
능유환은 내공을 끌어 올려 독이 퍼진데다가 몽화의 암격
을 받아 내느라 자신의 무기인 탈명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상태였다. 그리고 몽화를 공격하느라 독이 격발된 상태였
다. 한마디로 야한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야한의 검이 능유환까지 베어 버렸다.
야율초는 기겁을 했다.
절대고독에 집중을 하던 중이라, 야한의 공격에 방비할
방법이 없었다. 비록 절대고독을 조종하는 데 내공이 필요
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지금 정신이 흐트러지면 고독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두 사형이 어이없게 죽는 것을 느낀 순간
그는 어쩔 수 없이 집중력을 풀고 야한을 맞이하려 하였다.
그때 엄호가 아운에게 죽었다. 야율초는 급한 대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때 야한의 검이 그대로 야율초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가장 내공이 약했던 야율초는 심력까지 낭비한 상황이라
독에 취약했고, 내공과 함께 독이 격발되자 야한의 공격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몽골의 군사 야율초는 그렇게 죽었다.
아직 남은 한 개의 절대고독을 사용조차 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흑칠랑과 한상아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삼대고수가 살수 한 명에게 죽은 것이다.
한마디로 영웅 탄생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뒷면에는 흑칠랑의 피눈물이 있었지만.
'저 도둑놈의 새끼. 내가 다 해 놓은 걸 지가 가로채다니.
어흐흐흐! 더군다나 이것들 상대하느라 권왕의 싸움엔 끼어 들지도 못했는데.'
흑칠랑은 정말 울고 있었다.
야한은 그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했다.
'흐흐, 선배. 이제 내가 무서워 눈물까지 흘리는구려, 오
늘 이후 살수계의 지존이 바뀌는 것이외다.'
야한은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까짓 권왕의 결전
에 끼어들어 굳이 이름을 올리지 않아도 자신은 이미 영웅이 되고도 남을 공을 세운 것이다.
두 살수가 이상한 기 싸움을 하고 있을 때, 한상아는 얼
른 몽화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미처 해독약을 얻기도
전에 내공을 끌어올린데다 능유환의 일격을 맞으면서 이미 오장육부가 녹아들고 있었다.
"선배님."
한상아가 안타깝게 부르자, 몽화가 조용히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
"권왕에게 전해 주게. 구천혈맹의 팔 호는 이렇게 죽었다
고, 그리고 나의 죽음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라 이르게."
"용서라니요. 선배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몽화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내 비록 자청해서 팔 호가 되었고, 동심맹과 무림맹을
강시하기 위해 동심맹에 들어 그들과 함께하였지만, 그 유
희 속에 나의 진실도 있었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어
느새 나도 그들과 동화되어 가는 것을 알고 깜짝깜짝 놀라
곤 하였네. 속으로는 이들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이고
무림 정의 때문이라고 했지만, 진실은 나도 그들 속에 녹
아 있었던 것인 게야. 그래서 나는 알고 있는 것도 구천혈
맹에 제대로 전해 주지 않았네. 뒤늦게 권왕이 나타나면서
팔 호로 돌아왔지만,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네, 이것으로 내가 지은 죄의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하
게. 내 제자들에게도 미안하다고, 그렇게 전해 주게."
몽화의 눈이 감겼다.
한상아는 조용히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이로써 동심맹의 주축 장로들은 모두 죽었다.
권왕 아운이 몽골의 광풍전사단과의 대결에서 이겼다는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게 강호를 강타하였다. 그리고 야율
초와 남은 광전사 두 명이 무링맹의 새로운 영웅인 긍룡단
의 두 교두와 한상아에게 죽었다는 소문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로써 무림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무림맹.
정문 앞에 무림맹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검왕 북궁손우가 아쉬운 시선으로 아운과 배가 약간 부른
자신의 손녀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떠날 것인가?"
"어르신과 장인어른, 그리고 서문 소저와 나 대협이면 무
림맹은 제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어차피 저는 오랫동안 무림맹주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어르신도 아시겠지만. 저는 이런 자리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북궁손우는 아운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권하
지 못했다. 그리고 손녀가 아이를 낳기 위해서라도 시댁으
로 가는 것은 당연하였다. 어차피 무림맹에서 간단한 예식
을 치르고 정식 부부가 된 사이였다. 아쉽다면 함께 결혼
식을 올려 주려 했던 옥룡이 검혼을 통해 서신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검왕은 그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검혼과 좋은 인연이
되기를 기원하여 주었었다.
"부디 행복하게 살게, 그리고 무림맹에 가끔 들러 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들 하게."
서로 떠들썩하게 인사를 나누었고, 한쪽에 얼굴이 팅팅
부은 야한이 서문정의 손을 잡고 쉽게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서문 소저, 내가 곧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걱정 마시고 잘 다녀 오세요."
"그럼."
야한은 흑칠랑의 눈치를 보면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채 흑칠랑에게 도전하였다가 하루
밤낮 동안 도끼 자루에 난타 당했었다. 그러고도 살아 있
는 야한은 역시 대단한 인간임은 분명했다.
물론 그는 서문정에게 말할 땐 야율초를 죽일 때 당한 상
처라고 애써 거짓말을 했고, 그로 인해 서문정에게 존경
이상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얼마나 맞았는지
아직도 붓기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야한은 이제 흑칠랑의 그림자도 밟지 못할 만큼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운과 북궁연을 따라나선 인물들은 우칠과
호난화 그리고 삼대살수들이었다. 그들은 무림맹의 중요
인물들하고 인사를 나눈 후 금룡단의 호위를 받으며 무림맹을 떠났다.
떠나는 아운의 귀에 검왕의 전음이 들려왔다.
- 북경에 가면 구천혈맹의 구 호를 만나 안부나 전해 주게.
검왕의 말에 아운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구 호와 자신은 좋은 관계로 만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내의 조부가 부탁하는 말이었다.
- 그리 하겠습니다.
역시 전음으로 대답을 하였지만, 조금 찜찜하다.
'하필이면 구 호가 고대성, 그 자식의 부친이시라니, 하
지만 그렇다고 내 결심이 흔들릴 순 없지. 이제 기다려라
고대성.
아운의 입가에 조금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자신이 묵은 한을 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금룡단은 무림맹 삼십 리 밖까지 따라 나와서 권왕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했지만, 아운의 명령에 못 이겨 무림맹으
로 돌아갔다. 그렇게 권왕 일행이 무림맹을 떠나서 북경
근처 에 다다랐을 때였다.
"오라버니."
하영영이 쭈뼛거리는 한 남자를 데리고 아운 앞에 나타났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이라니요. 오라버니가 오신다기에 마중을 나왔죠.
그리고 소개시켜 줄 남자도 있구요."
"남자?"
아운은 어디서 본 듯한 남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가가, 인사하세요, 제 오라버니예요."
남자는 아운 앞으로 다가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대성이라고 합니다."
아운은 너무 조심거리는 상대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야? 무슨 남자 자식이 이렇게 대가 약해. 내 여동생이
이렇게 남자 보는 눈이 ‥‥‥ 고대성?'
아운의 눈이 커졌다.
고대성?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아닌가? 설마 하는 심
정으로 다시 한 번 남자를 살펴보았다. 이때 하영영이 얼른 나서며 아운 앞에 섰다.
그녀는 아주 예쁘게 웃은 다음 돌아섰다.
"야, 고대성 네가 감히 오빠를 괴롭혔단 말이지. 똑바로 안 서!"
고대성이 놀라서 바로 섰다.
순간 퍽! 소리와 함께 하영영의 주먹이 고대성의 코를 가격하였다.
"크으!"
신음과 함께 고대성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영영은 고대성에게 눈을 찡긋하고 돌아서서 아운을 보고 말했다.
"이전에 제가 말했죠? 한 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고. 그리
고 오빠는 허락을 했구요, 제 부탁은 아주 간단해요. 제가
대신 오빠의 복수를 하게 해 달란 것이에요. 그리고 요렇게 복수를 했구요."
하영영이 손가락으로 코피가 터진 고대성의 코를 가리켰다.
아운은 멍하니 하영영을 바라보았다.
아운의 뒤에서 북궁연이 웃고 있었고, 흑칠랑과 야한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두 남매를 바라본다.
특히 흑칠랑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저런 독한 것들하고 내가 정말 싸워야 하나. 이씨, 그냥 다 때려 치우고 산속으로 들어가?'
정말 그러고 싶었다.
조금씩 기을어 가는 태양이 거의 울 것 같은 흑칠랑의 얼
굴을 얌전히 비추고 있었다 은은하게 물들어 가는 노을을
보는 흑칠랑은 마치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야한이 흑칠랑을 보고 무심결에 말했다.
"선배 권왕님을 상대하기 전에 하영영 아가씨를 먼저 어
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유? 그렇지 않음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은데."
실실 웃고 있는 야한의 모습은 말 그대로 얄밉기가 하늘만하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몸이 덜덜 떨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뭐 저 정도는 되어야 싸울만하지."
야한은 질린 표정으로 흑칠랑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막바지인 겨울바람이 서늘하게 흑칠랑을 감싼다.
무림인물열전은 무림의 천고기재라는 천기자가 남긴 책으
로 수많은 무인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무림에서는
이 책자를 무림의 보물로 여기며 그 안의 내용을 신뢰하고
무인들에 대한 평가의 척도로 삼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무림의 무인 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궁서//권왕은 자신의 결심대로 강호무림천하를 자신의 주먹 아래 평정하였다. 천하에 무인은 많지만 권왕의 주먹질 아홉 번을 견딘 자가 없었다. 그만이 진정한 무적이었다.//
후인들은 이 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