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 맹주대행(盟主代行)
안으로 들어온 서문진은 천천히 걸어가 하영영 앞으로 다가섰다.
"서문진입니다."
"하영영이에요. 그냥 편하게 총사라 부르시면 됩니다."
하영영은 맹주대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맹주라고 부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무림의 원로들 입장에서도 이제 약관을 갓 넘은 문사 출신 여자에게 맹주라 부르는 것이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영영은 이 호칭문제를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북궁연이 맡았던 총사의 직위를 생각하고 자신을 그냥 총사라 부르게 하는 중이었다. 부르는 사람들이나 하영영이나 훨씬 부담이 덜가는 호칭이었던 것이다.
서문진은 하영영을 바라보았다.
단아한 모습.
지혜롭게 반짝이는 눈.
귀엽고 여려 보이는 하영영의 모습은 그녀의 나이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성큼 다가서서 끌어안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상큼한 하영영의 모습에 서문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후욱"
숨을 토해내자 긴장된 가슴이 풀어졌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마음에 든다. 이 서문진의 여자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짝을 찾은 느낌이었다.
서문진의 나이는 올해 서른다섯이었다.
잘 생긴 외모와 강한 무공 탓에 꽤 여럿의 여자들이 그를 따랐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도 서문진의 마음을 음직인 여자는 없었다.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지면서 여자에 대한 편견과 자신에 대한 과신을 가지게 된 서문진에게 하영영 역시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어떤 여자든 쉽게 차지했던 서문진이었기에 하영영 역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텅 빈 맹주의 거처에 단 둘만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묘한 호승심 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서문진이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을 보기만 하자, 하영영은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똑똑할지는 모르지만 순진한 여자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감은 용기로 다가왔고, 용기는 서문진을 대범하게 만들었다.
"훗, 공석에서는 총사라고 부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굳이 총사라는 호칭을 쓰기가 어색합니다. 다른 호칭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하영영은 서문진을 바라보았다
서문진이 말한 의도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뭐라 부르고 싶으신 것인가요?"
"내가 나이가 꽤 많은 편이니 하매라 부르면 어떻소."
하영영이 놀란 시선으로 서문진을 바라보았다.
서문진은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사실 무림맹에 젊은 수뇌부는 몇 명 되지 않으니 서로 친하게 지내면 좋지 않겠소, 내가 하매를 맹주 대신 친동생처럼 돌보리다."
하영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쩌죠?"
"뭐가 말이오?"
"나는 지금 있는 오라버니 하나로도 족해요. 그 한 명만으로도 감당하기가 벅차답니다. 그래서 서소협의 과분한 친절은 받기가 어려워요, 그냥 총사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사석에서야......"
"제가 사석에서 서소협을 볼 일이 있나요?"
서문진의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이제야 하영영이 확실하게 거절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싫어서는 아닐 것이다.
'흥, 자존심인가? 하긴 이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겠지 . 그래도 제법이네.'
더욱 승부욕이 자극되었다.
서문진의 굳어졌던 표정이 펴지면서 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그거야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이거 볼수록 하소저는 매력이 있는 여자요."
"그거 저를 희롱하는 말인가요?"
"칭찬을 하는 소리요."
하영영의 표정이 새침해졌다.
그 모습도 귀엽다.
마치 어린 소녀가 골이 난 모습이 저럴까?
"서 소협."
서문진은 마치 귀여운 여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하영영을 보면서 대답하였다.
"말하시오."
"전 맹주대행인 총사고, 여긴 맹주실입니다. 예의를 지켜 주세요."
"알겠소, 그럼 사석에서는 이제 하매라고 부르겠소."
"전 허락한 적 없습니다."
서문진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얼굴을 하영영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알고 지내면 되었지, 서로 무슨 허락이 필요 하겠소, 괜히 어색하게 굴지 말고 서로 편하게 지냅시다."
하영영 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서 소협."
"말하시오, 하매, 아니 총사님."
서문진의 표정은 아직도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재미 있나요?"
"물론 나는 재미 있소."
"그럼 더 재미있게 해 드리지요."
하영영의 말에 서문진은 하영영을 빤히 바라본다.
"우칠 아저씨."
나직하게 하영영이 부르자, 그녀의 뒤쪽에 있는 문이 열리며 우칠과 소홀이 안으로 들어왔다.
우칠을 본 서문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탕룡광마(蕩龍狂魔) 우칠.
현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 고수 중 한 명일 것이다.
제 아무리 서문진이라 해도 말로만 듣던 우칠을 보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기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름대로 무공에 자신을 가지고 있던 서문진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큰 키와 덩치 앞에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저를 아주 우습게 아는 분이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맹주 대행이신 아가씨를 우습게 아는 자는 주군을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영영은 서문진을 돌아보았다.
"그렇다는 군요."
서문진은 움찔 했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총사님을 우습게 알았단 말입니까? 전 다만......"
"제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게 만든 것은 그쪽의 실수지요."
"저는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럴 마음이 있었던 아니던 그건 저와 상관없습니다. 댁이 조금 전 저한데 들이대던 그때 역시 제 감정에 관심이 없었던 것과 같죠."
서문진은 하영영의 말에 조금 당황했다.
"총사 나는 정말 호의로 한 말이오."
"우칠 아저씨."
"예 아가씨."
"저 자는 맹주 대행인 저를 모욕한 것은 물론이고, 나를 희롱하였어요, 그에 해당하는 엄벌을 부탁드립니다."
서문진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요. 하매 나는......"
하영영이 서문진에게 다가섰다.
서문진의 코앞까지 다가선 하영영이 말했다.
"난 너처럼 멍청하고 느끼한 자식을 오라비로 둔 적이 없다. 구역질나니까 하매란 말 함부로 쓰지 마!"
하영영의 갑작스런 욕설에 서문진은 머리가 거꾸로 도는 느낌을 받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익!"
"감히!"
우칠이 고함을 지르며 주먹으로 서문진의 얼굴을 강타해 버렸다.
"퍽! "
소리와 참께 서문진의 몸이 뒤로 오장이나 날아가 벽모서리에 쳐 박히고 말았다. 강하다면 제법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서문진이었지만, 우칠의 무식함을 상대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으윽, 네 놈들이 내가 누가라고‥‥‥"
우칠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한 달음에 달려와 서문진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죽인다."
서문진은 입을 다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칠의 무감정한 말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그의 말이 얼마나 진실성을 가지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문진은 자신이 입을 열면 정말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입을 다문 것이다.
하영영이 서문진에게 다가왔다.
우칠은 서문진을 바닥에 내려놓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우칠이 뒤로 물러서고 하영영이 다가오자, 겁을 먹었던 서문진은 다시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좋아했던 하영영에게 당한 모욕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내가 누군데, 어떻게 이렇게 다룰수 있단 말인가?'
너무 화가 나고 분했다.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고 어쩔 것이오, 후환이 두렵지 않소?!"
하영영이 얼굴을 찡그렸다.
"후환이라! 우칠 아저씨."
"말씀하십시오, 아가씨."
"이 자식 죽여서 묻어 버리세요, 그게 후환이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칠이 철봉을 들고 다가오자 서문정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조글 전 죽이라고 말하는 하영영의 눈동자를 보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눈과 감정 없는 표정.
이들은 자신을 정말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몰론 우칠의 성격이야 익히 아는 것이니 설마 죽이랴? 하는 멍청한 의심은 할 필요가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목우성승의 제자다.
지금 이런 일로 인해 대정회와 갈등이 생길 것 같으면 정말 죽이고 실종 처리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의 시체를 찾았을 땐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난 다음일 것이다.
"자‥‥잠깐, 총사님 잠시만."
서문진이 다급하게 하영영을 불렀다.
밖으로 나가려던 하영영이 귀찮은 표정으로 서문진을 보았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쯤에서 용서를 해 주시면 모든 일을 잊겠습니다."
'일단 살고 보자, 살고 난 다음에 복수도 복수다.'
서문진은 이를 갈면서도 일단 사과를 하였다.
하영영은 그에게 다시 다가온 다음 우칠을 보고 말했다.
"우칠 아저씨. 이 자식의 모든 혈을 점하고 내공을 잠시만 쓰지 못하게 해주세요. 물론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고."
우칠이 충실하게 하영영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하영영 은 손으로 서문진을 밀어 버렸다.
"털썩"
서문진이 뒤로 넘어지자. 하영영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서문진에게 다가갔다. 서문진은 바닥과 충돌한 뒤통수의 고통을 감내하며 눈동자를 굴려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문진에게 다가온 하영영이 발을 들어 올려 그의 사타구니를 힘껏 밟아 버렸다.
권왕의 여동생답게 그녀의 발엔 힘이 있었다.
아무리 서문진이라도 내공이 흩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조금 강한 남자일 뿐 일반 남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영영의 맨발에 정통으로 밟힌 서문진의 눈동자가 돌아가면서 입에서 거품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발로 한 번 더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소홀은 달걀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소홀은 고개를 돌렸고, 우칠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일을 마친 하영영이 씩씩하게 돌아서면서 말했다.
"부실한 새끼, 겨자씨만해서 별 느낌도 없네."
소홀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하영영을 바라보았다.
'그 오빠에 그 여동생이다.'
우칠은 그런 하영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역시 고금천추 천하 제 일 인이신 주군의 여동생은 고금천추 천하 제 일의 여장부십니다. 내가 정말 주군은 제대로 골라서 모셨습니다. 그 동생도 저렇게 멋지다니."
하영영이 그런 우칠을 보고 상큼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저씨 저거 가져다 버리세요."
그녀의 손가락은 서문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홀이 놀라서 그녀를 보고 말했다.
"괜찮을까요. 저런 망신을 당했는데."
"꼴에 자존심은 있어 보이니 어디 가서 말도 하지 못할 거예요, 말해 보았자 어차피 자신만 손해겠지요."
우칠이 하영영을 보고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이놈을 어디다 버릴까요?"
하영영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다음날 한 명의 하녀가 시궁창에 알몸으로 쳐 박혀 있는 서문진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거의 보일 듯 말듯 작은 그의 거시기엔 다음과 같이 써진 천 하나가 매어져 있었다.
- 그래도 겨자씨보다는 조금 큽니다.
그날 이후 서문진의 거시기가 겨자씨 만하다는 소문이 무림맹안에 전부 퍼져 버렸다. 그리고 그가 시궁창에 쳐 박힌 사연에 대한 억측들이 무사들 사이에 수백 가지 이상 퍼졌음은 물론이었다.
섬서성 혈궁.
야율초는 조금 초조한 표정으로 사마정을 바라보았다.
"사형, 사부님께서는 아직도 고집을 꺾지 않고 계신가요?"
사마정은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 것 같네, 그 분에게 권왕은 백년 만에 만난 유일한 적수라 할 수 있네. 지금 죽이기엔 아까우신 게지 . 그리고 지금 그분의 혈육이 모두 죽었네, 당분간 이 곳에서 자신의 자식과 손자, 그리고 증손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려 하시는 것 같네. 그 분의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이건 전쟁입니다. 전쟁을 기분만으로 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으로 인해 산 사람까지 죽는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사부님이 아니라도 우리는 충분히 이길 수 있네."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권왕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굳이 사부님이 아니라도 우리에겐 광풍전사단이 있네, 광풍전사단의 연수 합격은 사부님 일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엄사형에게 부탁하여 광풍전사단이 권왕을 상대하게 하세, 그렇다면 사부님도 아무 말씀 안 하실것이네."
"물론 그도 확실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광풍전사단은 인원이 많습니다. 권왕이 그들을 피해 도망 다닌다면 그들로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사부님이 나서야 권왕을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사형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권왕을 죽이지 못하면 이후의 일은 정말 힘들어집니다. 지금도 권왕은 끝없이 강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제는 권왕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누군가가 강해지는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일세 그리고 사제는 십년 안에 권왕이 대전사인 사부님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지금 권왕의 발전 속도를 보면 아주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사부님이 나서신다면 십 할의 가능성이 있는데, 왜 어렵게 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지금 자칫하면 대초원의 꿈은 권왕 한 명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마정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또한 아운의 터무니없는 강함과 믿을 수 없는 발전 속도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전사께서도 갈등하고 계시네. 하지만 조만간 결정을 내릴것이라 생각하네. 그 분도 사람인데, 자신의 직계 자손들을 모두 잃고 복수심이 없겠는가?"
야율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더 이상의 불상사나 없었으면 합니다. 사부님의 결정이 늦어질 수록 우리 피해는 갈수록 늘어날 것입니다."
"알았네, 나도 노력을 해보지. 그렇지 않아도 모든 사형들이 힘을 합해 사부님을 설득하는 중일세, 하지만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이 부족해."
야율초의 얼굴이 씰룩 거렸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소식이 올 때가 되었는데.'
야율초의 눈이 기광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이때 한 명의 전령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야율초가 기다리던 소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