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장
환환대법
- 사랑은 별과 함께 깊어가고, 엇갈린 감정은 고통 속에 잠이 든다.
등평객잔.
정하촌에 있는 객잔들 중에 중급의 객잔이었다.
주로 장사치들이 많이 사용하는 객잔으로 크지는 않지만 뒤쪽에 있는 두 개의 별채는 깨끗하고 운치가 있었다.
그 중 하나의 별채에 옥룡 일행이 묻고 있었다.
이미 객잔마다 사람이 넘쳐나고 있었기에 이 별채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은 경쟁이 있었던 터였다.
다행이 객잔의 주인과 유가령이 서로 아는 사이라 반강제로 이 별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탕문과 아사라를 잃은 일행의 분위기는 한 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라한이나 유가령 , 그리고 아라한 라마승은 이미 인생의 높고 낮음을 끊임없이 경험한 노강호들이었다.
두사람은 슬픔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기에, 그 침체된 분위기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이른 새벽, 등평객잔의 별채.
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일어난 검혼은 검을 수련하기 ㅜ이해 뒤뜰로 나왔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곳에는 이미 자신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묵묵히 서서 작은 인공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별이 막 스러져 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그녀는 그렇게 서 있었다.
검혼은 그녀가 상당히 오랜 시간 그렇게 서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촉촉이 젖은 그녀의 옷자락 사이로 그녀의 아픔과 외로움이 함께 베어 나오고 있엇지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가 가진 단점을 모두 합친 것보다 백배는 더 아름다울 것이다. 검혼은 자신의 몸이 경직되는 기분을 느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직도 자신의 등에 뭉클거리며 느꺼지던 여인의 향기를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옥룡울 주시하듯이 옥룡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많은 시간을 찬 이슬과 함께 누군가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라워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유 없는 분노가 울컥하는 것을 느낀 검혼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 본다. 한 가닥이 진기가 단전에서부터 올라와 그의 몸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을 느낀다.
문득 유가령에게 들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구음절맥을 타고 난 여자.
나이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불치의 병.
의술에도 뛰어난 장 우사가 사천성 북구에 양재를 채취하러 갔을 때였다. 도적들이 한 마을을 습격해서 씨 몰살을 하고 있을 떄 마침 장우사가 그들을 응징했다. 그러나 이미 마을 사람들은 구 할이 죽고 난 다음이었다.
장 우사가 옥룡 장무린을 만난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부모와 친인척이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은 젖먹이 여아.
당시 옥룡은 태어난 지 채 석 달도 되지 않았었다고 했다.
울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장 우사는 그녀의 재능에 흥분했다가 구음절맥임을 알고 좌절했었다. 그러나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장 우사는 그녀를 양녀 겸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장 우사는 큰 기연을 만나게 되었고, 그 기연 속에서 완치는 아니지만 그녀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사천성의 성도에 있는 오래된 고서점에서 장 우사가 얻은 기연은 네 개의 마공이었다.
마교의 삼대호법 무공 중 하나라는 적봉옥령신공과 환환대법, 천마잠력대법 그리고 섭혼음공인 귀혼마음이었다.
처음엔 마교의 무공이고 자신이 익힌 태극신청강기 또한 그에 못지 않은 무공인지라 없애려 했던 장우사는 비급들을 읽어 보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그 중 가장 기묘한 무공은 환환대법이었다.
일종의 변환술로 이 환환대법을 익히게 되면 여자가 남자로, 남자가 여자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장우사는 이 환환대법을 익혀서 남자로 변하게 되면 음기으 체질도 양기의 체질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장문산은 옥룡에게 장무린이라는 남자 이름을 주고 그때부터 최우선으로 환환대법을 익히게 하였따.
다행히 구음절맥의 장무린은 천재였다. 그리고 환환대법은 배우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은 무공이었다.
환환대법을 익힌 것이 그녀의 나이 여섯 살.
장 우사는 옥룡을 남자로 키우기 시작했다. 무림의 친구들에게도 남자 제자로 소개했다. 물론 그중엔 장무린의 정체를 아는 인물들도 몇몇 있게 되긴 하였다.
그렇게 장무린은 환환대법으로 남자가 되어 있는 동안에는 구음절맥이 더 이상 깊어지지 않게 되었고, 도가의 무공을 익히는 데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평생 환환대법을 펼친 채 살아갈 수 없는 것.
이는 환환대법의 한계 때문이었다.
환환대법을 펼친 후 육 개월이 지나면 저절로 그 대법이 풀어지고, 그 후 이 개월이 흘러야 다시 환환대법을 펼쳐 남자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이 개월간 구음절맥은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환환대법을 강제로 풀게 되면 음의 기운이 격발되어 옥룡의 수명은 더욱 짧아지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음절맥은 고통스럽다.
처음엔 이 개월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그 고통을 적봉옥령신공을 익히면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적봉옥령신공은 여자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으로 마교에서도 교주의 대부이만이 익힐 수 있었던 무공이었다.
음의 무공이자 구음절맥의 그녀에겐 최고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무공이 옥룡 장무린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장무린은 적봉옥령신공을 수련하면서 천마잠력대법과 귀혼마음도 함께 익혔다.
모두 음기를 품은 무공들이라 옥룡에게 있어선 최적의 무공들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무공들은 환환대법으로 남자일 땐 절대로 펼칠 수가 없는 무공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 개월씩 익힌 마공들은 육 개월씩 익힌 장 우사의 도가 무공들보다 오히려 더욱 빠른 진전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장 우사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내가 무린을 발견하고 삼 년 후에 적봉의 마공과 환환대법을 얻은 것은 마치 하늘이 안배를 한 것 같았다. 너무도 공교로워 어느 땐 혹시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검혼은 유가령에게 들은 옥룡의 비밀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검혼은 최대한의 용기를 내고 있었다.
"연목에 무엇이 보입니까?"
옥룡의 시선이 연못에서 천천히 거두어진다.
그녀는 이미 검혼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지나온 과거의 흔적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 장 소저의 정인도 있어 보입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느낌이 든다.
검혼은 묻고 나서 후회했다.
웬지 마음을 들킨 것 같았고, 적절하지 않은 물음 같았던 것이다.
"바보 같은 놈. 겨우 그런 것이나 묻다니. 장소저가 얼마나 비웃을까?"
그러나 그것은 검혼의 기우였다.
옥룡이 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본다.
그녀는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이미 검혼의 시선 속에 자신을 향한 감정을 읽은 옥룡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슴속에 이미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감정에 익숙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로서 보다는 남자로 살아온 세월이 더 많았고,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저 한 번 마나서 친구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모습이 가슴속에 살아서 움직이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감정이 그녀를 불안하게 하였다.
이미 여자가 있는 남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여자가 자신이 누나라고 불렀던 북궁연이었다.
장 우사와 권왕이 만났을 당시에도 남장을 한 옥룡은 북궁연을 만나 누나라고 불렀던 것이다.
당시 너무도 아름다운 북궁연을 옥룡은 한없이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그 추억도 너무 오랜전이라 지금은 그녀가 자신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신도 가물거리는 추억 속에 겨우 그 흔적을 집어냈을 뿐이었다. 당시의 그 아름다웠던 여자.
삼봉의 한 명인 그녀가 권왕의 여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어떤 장애물도 검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다.
권왕 아운을 만다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런데도 결국 권왕에게 연락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다.
어떤 핑계를 대도 결국 권왕에게 소식을 전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란 것을.
"흔적 속에 묻혀 두기엔 감정의 무게가 너무 큰 모양입니다. 철공자님에게 바로 들킨 것을 보면."
"하하."
검혼 철위령은 약간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검혼이었다.
그의 웃음 속에 어쩔 수 없이 묻어 나오는 허탈함을 옥룡은 읽을 수 있었다.
검혼은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어차피 내친 걸음이다.
"누구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옥룡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냥 가슴속에 묻어 두어야 할 사람이라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 않습니다."
검혼은 애써 감정을 숨기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더 이상 옥룡과 이야기를 나누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입니다. 이제 천천히 식사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검혼은 자신이 쫓겨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인가?"
검혼도 자신의 감정에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검에 인생을 걸고 살아온 그로선 이 낮선 감정을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는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백전노장도 결국 사랑 앞에서는 당황하고 허우적거린다는 것을 난생처음 사랑을 알게 된 검혼이 알 리 없었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검혼의 안색이 굳어졌다.
- 누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굉장한 실력자입니다.
전음에 놀란 옥룡은 검혼의 시선을 쫓아 별채의 오른쪽 담장을 바라보았다.
소달극도 느낌이 있었는지 천천히 별채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두 가작의 그림자가 담을 넘어 들어온다.
"둘?"
철위령은 당황할 정도로 놀랐다.
소달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한 사람의 기척밖에는 느끼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은 별채에 내려서자마자 그 중 한 명의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노인은 한 쪽 팔이 없었따.
노인을 보자 옥룡의 안색이 파르르 떨린다.
'사부님."
옥룡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막 검을 잡아가던 검혼이 동작을 멈추고 놀라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린아!."
장문산 역시 떨리는 목소리였다.
옥룡은 사부에게 큰 절을 하고 일어선다.
눈에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들지 않았다.
"그간 고생이 많았겠구나?"
"저는 괜찮았습니다. 이렇게 건강한 걸요. 그런데 사부님은?"
그녀는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장문산의 잘려진 팔을 바라보았다.
"허허. 이거 말이냐? 걱정 말거라! 세상을 살아가는데 크게 불편하진 않다. 그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었느니라!"
많은 사연이 있으리라.
한편 장무린의 뒤똑에 서 있는 아운은 난감한 표정으로 옥룡을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여자일 거라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다. 그리고 장 우사를 통해 확인도 했었다.
이미 그녀가 남자로 분하고 있었던 이유도 다 들은 아운이었다.
그런데 능히 삼봉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일 줄은 생각치 못했었다.
서로 호형호제하던 자가 여자라니 조금 멋쩍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문산과 해후를 한 옥룡의 시선이 아운을 향한다.
옥룡은 애써 태연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아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거 장 형이 여자인 줄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라니. 진즉에 알았으며 그때 포달랍궁까지 쫓아갔을 텐테, 참으로 아쉽습니다."
옥룡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겨우 참아낸 옥룡이 말했다.
"공자님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신분을 속였었ㅅ브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사막에서 뵈었을 떄보다 더욱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아운은 그저 씨익 웃는다.
괜히 어색해진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검혼은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운을 바라보는 옥룡의 따스한 눈빛.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는 아운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언제나 자신이 넘어야 할 산 중 하나로 생각했던 적수가, 이제는 자신의 사랑마저 가져간 경쟁자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소달극이 다가왔다.
"아미타불, 장 우사님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무량수불."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도호가 장 우사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저와 린으로 인해 포달랍궁이 혈겁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거군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미천한 제자를 돌봐 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소달극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 뿐입니다. 설사 옥룡 시주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포탈랍궁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서성거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명라한이 앞장을 서고 모든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간다.
유가령과 아라한 라마가 나오다 장문산과 아운을 보고 놀라서 황급히 다가와 인사를 한다.
서로 안부를 물르며 일행은 모두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서로 할 이야기가 쌓여 있는 사이였다.
"아미타불, 소승은 명라한이라고 합니다."
소달극의 인사에 아운이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아운입니다. 새외삼존의 한 분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영광입니다."
마치 서생처럼 인사를 하는 권왕을 보고 소달극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과격하다고 소문이 난 것돠 달리 서생 같은 분위기를 지닌 시주로다. 허허. 그런데 내가 아무리 보아도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참으로 놀랍도다. 이미 반박귀진. 오기조원을 넘어 무극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공을 검실 수 있는 특수한 무공을 익힌 것인가?"
소달극은 아운을 보면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혹여 아무리 자신이 기운을 숨길 수 있는 무공을 익혔다 해도. 지금처럼 서로 코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조차 기운을 숨길 수있는 경지라면 이는 그 무공을 극한으로 익히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떤 무공이든지 극한으로 익힌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소달극은 잘 알고 있었다.
"권왕이란 이름이 천하를 진동하기에 참으로 한 번쯤은 뵙고 싶던 참이었습니다. 아미타불, 뵙고 보니 참으로 명불허전이란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과찬이십니다."
소달극이 고개를 흔들었다.
"라마승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운은 더 가면 자신이 점점 더 민망해질 것 같았다.
그는 얼른 시선을 검혼에게 돌렸다.
마침 검혼도 아운을 보는 중이었다.
아운이 먼저 말했다.
"우리는 두 번째 뵙는군요."
"으음."
검혼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 했는데."
왠지 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감정을 얼굴에 표헌하고 싶지 않은 검혼이었다.
"무림맹 근처에서 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내게 물은 것이 몽혼지약임도 분명하겠지요."
"맞습니다."
몽혼지약이란 말이 나오자 장문산의 눈이 빛났다.
"혹시 검혼이 아니십니까?"
"헉"
검혼이 놀란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미미하게 분하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길! 어째 나는 저자를 모르는데, 저자는 내가 검혼임을 안단 말인가? 절대로 대원의 잔당은 아닐 진데."
별것도 아닌 것인데, 자꾸만 옥룡의 앞에서 자신이 밀리는 느낌이 드는 검혼이었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자네가 정말 검혼이 맞는가?"
이번에 물은 것은 장 우사였다.
검혼은 얼른 고개를 낮춘다.
그는 옥룡의 사부였던 것이다.
"분명히 맞습니다. 제가 당대의 검혼입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도혼을 잘 알겠군."
검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혼을 아십니까?"
장문산은 잘려진 손을 들어 보이여 말했다.
"잘 알지, 그에게 나의 손이 이렇게 되었네."
검혼과 소달극은 놀라서 장문산의 손을 바라보낟.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검혼이 물었다.
"그의 무공은 그렇게 강했습니까?"
"상상 이상일세, 나는 그에게 삼초도 견디지 못했네."
이젠 경악이다.
명라한 소달극과 옥룡, 유가령은 물론이고 검혼 역시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저 장문산을 바라만 본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의 말은 사실일세. 자네의 무공은 어느 정도인가?"
장문산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다. 검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탈명검사에게 패했습니다."
장문산은 말없이 검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탈명검사에게 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는 얼마나 버티다 어떻게 졌는지가 중요했다.
장무산의 마음을 읽었음인지 검혼 대신 소달극이 말했다.
"아미타불, 내가 지켜본 바로는 검식과 무공에서는 별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험에서 뒤진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현재 검혼 철소협의 정확한 무공 수준은 십사대 고수와 거의 동급입니다."
소달극의 말이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장문산은 고객를 끄덕였다.
이미 검혼의 무공 수준이 십사대 고수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장문사이었다.
검혼의 나이가 이제 삼십대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에 권왕 말고 젊은 세대에서 십사대 고수와 견줄 수 있는 또 한 명의 고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장문산은 참으로 암울하기만 했다. 그는 내심 검혼이 도혼과 같은 나이대의 노고수이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도혼을 견제할 수 있는 기인이길 바란 것이다. 도혼이 살아있다면 당시 도혼과 겨룬 검혼도 살아 있지 않을까 하던 막연한 기대는 검혼을 보면서 무너졌다.
당대의 검혼이라면 이미 전대의 검혼들은 죽었다는 이야기로 들렸던 것이다. 권왕이나 검혼이라면 미래의 무림의 대들보다 될 것이고 능히 도혼을 견줄 수 있는 실력을 쌓아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지금 당장 도혼을 상대할 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장문산을 힘들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일단 현 상황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장문산은 결심을 굳히면서 검혼에게 말했다.
"이제 검혼의 사명은 자네에게 이어졌네. 내 생각엔 지금 당장엔 자네가 도혼을 이기는 것을 불가능한 일일세. 하지만 지금 실력이라면 앞으로 십 년이 지난 후 가능성이 있다고 보네. 자네는 앞으로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일세, 그래야 도혼을 넘어서 중원의 혼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네. 그나마 자네 같은 젊은 무인들이 있어서 다행일세."
"감사합니다. 장 우사님. 반드시 노력해서 도혼을 제 손으로 처리할 것입니다."
"권왕이 아닌 내가."
마지막 말은 검혼의 가슴에서만 메아리친다.
검혼은 장문산이 자신을 칭찬하자 힘이 나는 것을 느꼈다. 특히 권왕이 아닌 자신을 가리켜 말해 주자. 괜히 아운을 이긴 기분이었다. 특히 장 우사는 옥룡의 사부가 아닌가?
"반드시 제가 하겠습니다."
검혼은 스스로 그렇게 다짐했다.
그날 아침, 장 우사를 비롯해서 옥룡 일행과 아운 그리고 검혼은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운은 결전을 앞둔 상황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온 것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제 이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맹주부와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를 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직은 맹주부의 힘에 비하면 정말 부족했다. 그러나 아운은 이들만으로도 가슴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승산에서 온 바람. 소림을 돌아 나서고.
무산에서 온 구름, 태극의 검을 감춘다.
한바탕 검무를 추고 났더니,
지켜보던 연인 어느새 주름이 가득.
세월은 나를 잡고 있는데, 무인의 꿈은
장강에서 멈추었다.
--- 중략.
무인들이 좋아하는 다섯 개의 노래 중 하나인 낭인무가의 가사처럼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무림맹의 외성 중앙에 있는 무림대광장.
맹안에서 가장 넓은 광장으로, 무림 대전 등 큰 행사를 위해 마련한 이 광장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인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다.
마련된 귀빈석에만 하여도 수백 명이나 되는 노고수들이 앉아 있었고, 그 자리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장로급 이상이나 되어야 겨우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귄빈석은 동서남북에 따로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동쪽엔 북궁세가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고, 북쪽엔 무림맹의 맹주부 인물들이, 그리고 남쪽인 동심맹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으며, 서쪽에 호연세가를 중심으로 귀빈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 중앙엔 사방 이십장에 달하는 큰 공터가 오늘의 결전을 위해 비워져 있었다.
두웅.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귀가 멍할 정도로 시끄럽던 대광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드디어 비무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나중에 사가들은 이 결전 이후 아운을 일컬어 이렇게 말했다.
구권무적이오.
칠보신기라.
주먹질 아홉 번이면 이길 자가 없었고.
발걸음 일곱이면 피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권왕만이 진정한 무적이었다.
< 권왕무적 1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