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환신권
- 여자의 질투는 무섭다
명라한 등이 떠나고 일각이 지난 후.
탈명우사 지국과 백팔탈명마검대의 수하들이 바위 사이로 나타났다.
사방을 자세히 살피던 지국은 바위 위를 손으로 천천히 더덤다가 어느 한곳에 멈추었다.
잠시 동안 손을 대고 있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바위의 온기로 보아 이곳을 떠난 지 약 일 각 정도 된것 같다."
사람이 떠난 후 일각이 지난 다음까지도 그곳의 온도를 측정해서 떠난 시간을 계산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능력이었다.
아주 미세한 온도의 차이까지 찾아내어 상대를 추적하는 것은 탈명우사의 장기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국은 탈명마검대의 대주인 탈명귀검 타르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수하들 중 몇 명을 시켜서 내가 말한 사실을 탈명검사님께 알려라!"
"명!"
타르가 몇 명의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을 때, 탈명우사는 명라한과 옥령 일행들이
사라진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쪽이다. 모두 내 뒤를 따라라!"
조용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 탈명우사 지국의 신형이 섬전처럼 날아갔고, 이미 명령을
다 내린 타르가 수하들을 대동한 채 그 뒤를 따라 신법을 펼쳤다.
그들 중 몇 명만이 타르의 명령에 따라 탈명우사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반대편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맹주님이 권왕을 불렀다고?"
사마무기의 물음에 밀영일호가 더욱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음, 하긴 반드시 만나 봐야 할 사람이긴 하지."
"그래, 그것이 언제인가?"
밀영일호가 조금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망설이지 말고 확실하게 말을 해라!"
"바로 응해서 이틀 후에 맹주부에서 만나기로 했답니다."
사마무기는 조금 뜻밖이란 표정이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을 찾으라면 그것은 분명히 권왕이란 종자일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성정으로 보아 맹주가 오란다고 냉큼 만나는 것이
아무래도 조금 이상했던 것이다.
사마무기의 생각을 읽었는지, 밀영일호가 말했다.
"아무래도 맹주님의 초청장이 정중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초청장도
우호법님이신 사마정 님이 직접 들고 가서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무림맹의 수하라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인간이 너무 쉽게 응했따는
생각인데."
어쩌면 그 정도 예의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권왕이고 보니
무엇인가 찜찜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따.
"밀영"
밀영일호의 표정이 흠칫하고 굳어진다.
사마무기의 목소리가조금 달라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밀영일호는 확실하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 루주님!"
"잠시만 기다려라!"
명령을 내린 사마무기는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서신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비호, 있으면 안으로 들어와라!"
사마무기의 명령과 함께 비호대 대주인 비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을 맹주님께 전해라! 원래는 지금 내가 직접 가야 하지만 나는 갑자기 일이 생겼다.
일단 먼저 이 서신을 보내 놓고 여기에 대한 설명은 내가 직접 가서 다시 설명할 거라고 전해라!"
"명!"
비호가 사라지고 난 후 사마무기는 밀영일호에게 말했다.
"권왕이 맹주님을 만나러 가기 전에 내가 먼저 봐야겠다. 일단 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시려고 그럽니까?"
"매화각으로 직접 찾아갈까 한다. 들리는 소문도 확인해 볼 겸, 오랜만에 총사의 얼굴도 한번 볼 겸해서."
밀영일호는 움찔했다.
소문이란 아운과 북궁연이 이미 합방을 하고 있따는 소문일 것이다. 그래서 금룡각이 아니라
매화각으로 권왕을 만나러 가려는 것이리라. 밀영일호는 가슴이 조금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을까?'
사실 안 괜찮을 이유가 없다
단지 총사 북궁연과 권왕 아운을 만나는 것뿐이다.
어쩌면 진즉에 권왕을 만났어야 했다.
그런데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존재감 때문인가?'
생각해보니 와룡 사마무기가 무림맹의 군사로서 가지는 존재감은 결코
부맹주에 못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그만큼 무림맹의 실세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마무기의 존재감이 권왕 아운의 앞에서 작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 그것이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밀영일호는 스스로 반문해 보았다.
무엇인가 꺼림칙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잡히지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사마무기가 그동안 권왕을 만나지 않고 조금씩 미룬 이유가 그것과
아울러 종잡을 수 없는 아운의 성격 때문이었다는 점이었다.
아운을 만나면 어떻게 대접을 해야 할지 난감한 면도 있었다.
나이 어린 후배이고 무림맹에서의 위치는 훨씬 아래지만 무림에서의 명성과
위치로 따지면 무림맹에서 그와 견줄 수 있는 고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이야기이고 혈궁칠사의 한 명인 고구가 그의 손에 죽으면서
사실상 권왕 아운의 존재감은 신수 조진양과 동격이거나 그 이상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누구든지 그를 만나면 꺼림칙할 수 밖에 없었다.
"루주님, 혹시 그를 만나시려는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사마무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왕이 맹주부에 올때. 그때가 권왕의기세를 꺾어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전에 미리 권왕의 존재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총사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자 하는 것이다. 출발 준비를 해라! 함께 가는 일행은 잠환과
호위무사 몇 명으로 하되, 내가 매화각으로 가는 것은 비밀로 하라!"
"명!"
금룡각의 연공실.
아주 천천히 주먹을 질러가는 아운의 팔목으로 내공의 힘이 연이어 밀려들어 갔다가
일순간에 사라진다.
육삼쾌의연격포.
구천무적신권 이라고도 불리는 이 권공은 신수 조진양의 삼대무공 중 하나인
선풍사자신권, 그리고 혈궁칠사 중 한명인 철권단사 송문의 광룡철권과 함께 중원
무림의 삼대권공 중 하나였다.
여기서 북룡철권 우문각의 노호풍권을 합해서 사대권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노호풍권은 우문각이 스스로 알고 있는 네 가지의 권공을 합해서 새로 창조한 권공인지라
오래 전부터 중원에 전해 오는 삼대권공과 구별되어 불린다.
아운은 십단무극신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육삼쾌의연격포를 스스로 재창조하여 이미
기존의 무공과는 전혀 다른 무공으로발전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에서 전 육식인 연환육영뢰는 그 무공 자체가 건드리기 어려운 점이 있어서
크게 바꾸지 않고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중이었다. 대신 연환육영뢰를 바탕으로
여기에 옥룡이 펼쳤던 중첩장의 장점을 차용해서 새롭게 하나의 무공을 만들어 냈었다.
그것이 오호연환중첩권이었는데, 아운은 지금 그 오호연환중첩권을 천천히 수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실상 오호연환중첩권은 연환육영뢰의 연장선상에 있는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단지 연환육영뢰가 초식을 나누어 펼치는 데 비해 오호연환중첩권은 연이어 두 초식이나
세 초식씩 한 번에 펼친다는 것 정도였다.
원래 육삼쾌의연격포는 권경을 바탕으로 펼치는 초식이 아니라 권강이나 권기를 중심으로
펼치는 권공이었다. 그래서 각 초식은 변화를 가진 하나의 권 초로 구분되었다기보다는,
무극신공으로 응축된 권기나 권강을 얼마나 강하게 어떤 방식으로 뿜어내는가 하는
정도의 차이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환육영뢰는 무공을 펼칠 때 일 초식부터 순차적으로 펼쳐야만 하며,
지금 아운의 경지로는 모두 네 번 이상을 연이어 펼칠 수 없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자신의 전 힘을 쥐어 짜 펼치는 무공이라 위력이 강한 대신 사용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이 있었떤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삼쾌의연격포의 전 육식인
연환육영뢰는 후 삼식인 삼절파천황에 비해서 위력에 큰 차이가 있었다.
이는 원래부터 위력의 차이가있었던 점도 있지만, 아운이 삼절파천황을 연구하여
이전보다 훨씬 강하고 매서운 무공으로만들어 놓은 다음부터는 더욱 심해졌다.
지금의 삼절파천황은 이전과 이름만 같을 뿐 그 위력이나 무공의 형식에서 완전히
다른 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절파천황은 연환육영뢰보다도 더욱
제한이 많은 무공이었기에, 함부로 펼칠 수도 없었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무공도 아이었다.
그래서 아운은 연환육영뢰의 단점을 보완하면서도 삼절파천황에 근접한 위력을 가진 무공을 연구하여
오호연환중첩권을 만들어 냈다.
아운은 오호연환중첩권의 전 삼식의 제일 초식인 일운섬광부터 마지막 후 이식의
낙성혼원기 까지 차례대로 펼쳐 보았다.
일 초식인 일운섬광은 연환육영뢰의 일 초식인 일기영과 이초식인 이벽권을 한 번의 주먹질에
연이어 뿜어내는 무공이었다. 이 초식인 연환중첩과 삼초식인 금강추혼도 이런 방식으로
연환육영뢰의삼사 초와 오육 초를 연이어 펼쳐내는 방식이라 실제는 연환육영뢰와 같은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단지 중첩권의 후 이식 중 일 초식인 일권삼절풍은 연환육영뢰의 일, 삼, 오 초식을,
이 초식인 낙성혼원기는 이, 사,육 초식을 한번에 쏟아낸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중첩권의 사오 초식을 펼치고 나면 연환육영뢰를 두 번 펼친 것과 같다.
그리고중첩권 역시 일 초부터 펼치기 시작해서 마지막 초식까지 순차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점도 연환육영뢰가 같았다.
이는 모두 연환육영뢰를 어떻게 펼치느냐 하는 방법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연환육영뢰를 네 번 펼칠 수 있는 아운은 이 두 무공을 함께 펼친다면
연환육영뢰와 오호연환중첩권을 각각 한 번씩 펼친 후 일각 동안은 이 두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연환육ㄹ영뢰를 세 번 사용하고 난 후 오호연환중첩권을 사용하다면 삼 초식까지밖에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십단무극신공이 구 단계에 이르지 못한 아운의 한계였다.
내공을 뿜어내지 않은 채 오호연환중첩권을 끝까지 펼친 후 아운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따.
"휴 어렵구나, 어려워."
아운은 중첩권의 후 이식이라 할 수 있는 사 초식 일권삼절풍과 오 초식 낙성혼원기에서
착안하여 삼절파천황이나 연환육영뢰를 일 초식부터 순차적으로 펼쳐야만 하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연구 하고 있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아운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일권삼절풍은 연환육영뢰의 일,삼,오 초식을 한 번에 밀어내는 방법이고, 낙성혼원기는
이,사,육 초식을 한 번에 밀어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미 여기서 연환육영뢰를
순차적으로 펼쳐야만 하는 한계는 벗어난 것이다. 이방법을 잘 이용하면 무엇인가
좋은 방법이 떠오를 것도 같은데.......'
실마리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
아운은 다시 한 번 명상에 잠겼다.
우선 오호연환중첩권을 펼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먼저 연환육영뢰는 한 호흡에 여섯 초식을 한 번에 사용하는 무공이다. 실제 일초
육식의 무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운은 여기서 방법을 착안하여 중첩권을 만들었다.
먼저 한 호흡에 끌어 올린 연환육영뢰의 진기를 단전에서 바퀴처럼 맹령하게
회전을 시킨 다음, 공격하는 주먹 쪽으로 두 초식씩 강제로 밀어 넣었다.
돌아가는 회저에 의해 여섯 도막으로나누어져 있던 내가진기가 순간적으로
두 개씩 밀려 나갔고, 처음 두 개의 초식이 공격에 이어지는 순간 또 하나의 육영뢰가
꼬리를 물고 이어서 딸려 온다.
그리고 앞의 육영뢰가 회전하는 힘에 의해 두 번째 딸려 온 육영뢰는 더욱 빠른 속도로
회전을 하였고, 그 빠른 회전에 의해 여섯 개의 기운으로나누어진 기운을 두 개로
나눌 수 있게 된다.
이는 육영뢰가 일,삼,오 초식은 강을 띤 양성을 지니고 이,사,육 초식은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음성를 띠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육영뢰는 이런 성질을 이용하여 연이어 펼쳐질 때 강함과 부드러움을 서로 배합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내공을 회전하여 두 가지 성질을 분리하는 방법은 통 안에다가 모래를 넣고 빠르게 돌리면
고운 모래와 두터운 모래가 분리되는 방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처음부터 육영뢰의 진기를 빠르게 회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처음 끌어 올린
육영뢰의 진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가속이 되기에 연환육영뢰엔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가속이 된다 해도 결국 일,삼,오에 이,사,육 하는 형식으로만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방식은 연환육영뢰에만 가능하고 삼절파천황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육삼쾌의연격포의 후삼식인 삼절파천황은 각각 초식이 완저히 분리가 되어 있어서 한 번에
끌어 올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운은 연환육영뢰를 이런 식으로 나누어 사용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나누어져 있는 삼절파천황은 따로따로 펼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 중이었다,
그리고 회전의 방법을 조금 더 연구하면 연환육영뢰를 순차적이 아니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운은 명상에 잠겼다가 다시 눈을 뜨며 가볍게 웃었다.
연환육영뢰를 연구하고 중첩권을 만들어 내면서 십단무극신공에 더욱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고,
지금 고민하는 문제도 심단무극신공이 구 단계에 이르면 어느 정도 해결될 문제란
것도 알고 있엇다. 그러나 실상 십단무극신공의 구 단계가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강호 무림엔 자신과 견줄 수 있는 고수들은 연이어 나타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운은 지금 가진 무공으로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특히 근래 들어 지닌 무공의 응용과 초식의 원활함이 크게 향상되어 비록 십단무극신공은
그대로지만 자신 스스로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초조해 하지 말자, 집착하면 오히려 더욱 멀어지는 것이 깨달음이다. 일단은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이 안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아운의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만족한 아운은 수련실에서 나와 금룡각의 본 건물 대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삼대살수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아운을 바라본다.
아운은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금룡단의 수련은 잘 되고 있겠지?"
야한이 부동자세까지 취하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시키는 대로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흐흐,지들도 말 안 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별수 있겠습니까?"
말을 하면서 품 안의 도끼 자루를 소중히 만지작거린다.
그모습을 보면, 안봐도 알 것 같았다.
흑칠랑이 열 받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시키는 도끼 자루에 중독되었어. 저런게 어떻게 삼대 살수에 들어갔는지 원.에이. 쪽팔료."
흑칠랑이 투덜거리자, 야한이 발끈해서 그를 노려보고 말했다.
"아니, 선배는 그러면서 은근히 즐기잖소. 내가 보기엔 선배가 더 심하게 중독된것 같은데, 아니오?"
흑칠랑이 열 받은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가 지금 나하고 해 보자는 것이냐?"
뭐 그래도 아니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흑칠랑은 어떤 면에서 참 정직한 살수였다.
불행하게도 그의 바로 아래 후배인 야한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단 점이었다.
"아니, 이런 염병할. 그래 단주님께는 아직 도전도 못하면서 내가 그리도 만만하오."
"이 자식아, 그것은 내가 바쁜 단주의 심정을 이해해서 뒤로 양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나하고 대결하다 심한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쩔 것이냐? 안 그런가, 권왕? 허허험."
야한과 한상아가 기가 차서 말을 못하고 멍하니 흑칠랑을 바라본다. 저 태연하고 뻔뻔한 표정이라니.
아운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제 그만."
모두조용해진다.
"내가 세 사람을 부른 이유가 있다."
모두들 아운을 바라본다.
그겋지 않아도 그것이 궁금했다.
아운이 흑칠랑과 야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매화각을 지키고 있는 매화단이란 여 호위무사대가 있다. 모두 알고 있겠지.
이번에 금룡단을 수련시키면서 그녀들에게도 특별한 수련을 시키려 하는데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모두들 호기심이 동한 표정이었다.
"그녀들의 무공은 제법 강하지만 틀에 박혀 수련만 하다 보니 무공이 너무 정직한 편이다.
그래서 이번 수련 과정에서는 그녀들에게 살수들의 은형술을 가르쳐 볼까 하느데, 세 사람의 의향은 어떤가?"
그 말에 야한이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오."
한상아가 말했다.
"그런데 단주님, 그 은형술하고 우리하고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요?"
아운이 한상아를 보면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아무래도 은형술하면 세 분 이상 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분에게
그녀들의 교두가 되어 달라고 할 참입니다."
아운의 말을 들은 야한과 흑칠랑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야한이 말까지 더듬으며 말한다.
"그, 그러니까 지금 단주님께서는 저희더러 그녀들의 무공 교두가 되어 달라고 하실 참입니까?"
아운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야한의 입이 하늘까지 벌어졌다.
매화단.
한마리도 여자 호위무사들이다.
듣기로 거의 다 처녀라고 했었다,
당연히 예쁜 여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걸 싫다고 할 총각이 있으면 그건 고자거나 남색을 즐기는 변태뿐일 것이다.
야한은 그렇지 않아도 은근히 흑칠랑을 부러워하는 중이었다.
"아..하하, 그거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무렴요, 그래도 은형술 하면 저희만 한 사람도 없지요."
옆에 있던 흑칠랑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했다.
"허험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뭐, 우리만 한 교두 구하기도 정말 어렵지. 내 좀
바쁘긴 하지만, 권왕의 부탁이라 특별히 그녀들의 교두가 되어 주겠네..흐흐흐."
결국 끝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카랑한 한상아에게 주눅 들어 살던 흑칠랑으로서는, 이제 자신의 말이라면 하늘처럼
여기는 여제자들이 득실글한 꽃밭에서 논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았다.
'잘하면 이 기회에..........'
흑칠랑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엔 항상 마가 끼는 법인가?
좋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때로는 화를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흑칠랑은 생각하지 못했다.
"오라버니."
부드러운 한상아의 목소리에 흑칠랑이 얼른 정색을 하고 한상아를 바라 보았따.
"저랑 잠시만 이야기 좀 해요."
"으응? 나 말이야? 난 별로 할 말이 없는데."
한상아의 눈에 족기가 어렸다.
"난 할 말이 있거든요."
"허걱!! 그, 그러지,"
한상아가 흑칠랑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 야한은 눈을 끔뻑거리며 그들이 나간 문 쪽을
바라본다. 무슨 이야기인지 무척 궁금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온 한상아가 흑칠랑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우선 입가에 침부터 닦아요."
싸늘하다
뭐가 이상하다고 느낀 흑칠랑은 얼른 입가를 주먹으로 닦아 냈다.
'헉 !! 웬 침을 이리 많이 흘렸지.'
흑칠랑은 손에 묻은 침을 보며 찔끔했지만 좀 태연하게 말했다.
"하하, 이 침 때문에 부른것이오? 이게 언제 이렇게......"
"흥!! 야, 흑칠랑."
"그래, 여자들 가르친다니까 그리도 좋으냐?"
"하, 하 한매."
"이게 벌써부터....."
한상아의 두 손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사정없이 훑어 내리고 있었다.
한상아 사문의 그 유명한 음한마조 라는 무공이었다.
살수들에게는 가장 매서운 무공 중 하나로 알려진 절기였다.
피하기엔 너무 늦었고, 너무 돌발적이었다.
시퍼런 손톱의 광기에 흑칠랑의 얼굴을 내리 긁었고, 정확하게 열개의 고랑이 패였다.
흑칠랑의 얼굴에.
"꺼 거 걱....."
흑칠랑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감히 입도 열지 못한다.
만약 거기서 대들면 한상아의 살기어린 시선으로 보아 정말 살인이 일어날지도 모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죽는 것은 흑칠랑 자신이 될 것이다.
여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우치면서 오늘도 흑칠랑은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면서 흑칠랑이 엉거주춤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흐윽! 나, 난 아무래도 빠져야겠네. 나마저 매화단의 수련에 참가하면 금룡단의 수련 감독은
누가 하겠나? 그러니 난 제발 좀 빼주게."
나중 말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그렇지 않아도 셋 중 한 명은 금룡단에 보낼 참이었기에, 아운으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말이었다.
그렇지만 흑칠랑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본심이 아닌 것 같았다.
야한은 흑칠랑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했다.
"선배, 그 사이에 문신 새겼네? 정말 멋있소. 그런데 어찌 그리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거요?
가지런하게도 긁어 놓았네, 거참."
야한의 말에 흑칠랑의 눈이 가로로 쭉 찢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억울하고 아파 죽을 지경인데, 야한의 말이 무지하게 신경을 긁은 것이다.
그렇다고 발작해 보았자 자신의 체면만 무너질 거란 것은 너무도 뻔했다.
"이런 씨팔! 끄응. 하하. 이거 말인가? 글쎄 잠시 조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 긁힌 것일세."
"허, 그게 조금 긁힌거요? 그러다가 제대로 긁히면 얼굴에 거미집짓고 죽겠소. 쯧
그러게 알아서 기지 않고 살수답지 않게...."
말을 하던 야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흑칠랑의 표정이 터지기 직전이었떤 것이다.
야한은 다급하게 변명을했다.
"하하, 그게 혹시 살수행에 복면을 하기 싫어 얼굴에 가면을 만든 것이었소?
여, 역시 선배님은 정말 세상을 앞서 가는 선구자, 아니 살수시오!"
급한 김에 말을 돌리고 보니 좀 이상하다.
한상아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지만, 흑칠랑의 인내는 한계에 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손은 이미 검을 잡고 있었다.
"그래, 내 어찌 이런 가면을 혼자 쓸 수 있겠느냐? 네놈의 얼굴에 만들어 주마."
"헉쓰!! 서, 선배. 참으시오!!"
후다닥 도망간 그의 신형이 아운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