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선풍검법(旋風劍法)
- 나를 이용하려 들지 마라.
휘장이 가려진 방 안에 아련한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휘장 밖에는 몽진 나한이 합장을 한 채 앉아 있었다. 휘장 안의 섬세한 그림자를 바라보는 몽진의 표정은 경건하였다.
그가 휘장 안의 사람을 상당히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상대방이 얼굴을 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 듯 그것에 대해서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몽진 나한은 아직 휘장 속의 인물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를 믿는 마음에 의심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약에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부를 의심하는 것이나 진배없으리라.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단 말이죠?”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것으로 보아 휘장 안의 섬세한 그림자는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소리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는 섬세한 몸매가 그렇고, 아름다운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이 그 목소리에 묻어 나왔던 것이다.
몽진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것을 느끼곤 하였다. 순수한 감정으로 그녀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졌지만, 마음 한쪽으로 감추고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문상.”
“어떤 일을 벌이려 하는지는 모르구요?”
몽진 나한은 휘장 안을 바라보았다.
먼저 물어보리라 생각했던 것은 뒷전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권왕이 내게 지시를 한 상황과 장소를 생각하면 이미 대정회의 주축이 무림맹 안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문상이 그 부분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이 없는 것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눈치 채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인가? 단주나 문상이나 참으로 예측하기 힘들구나.”
몽진은 그 점이 궁금했지만 역시 묻지 않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말했다.
“아미타불, 단주님은 제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인물입니다. 제가 비록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이전에는 물론이고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그와 같은 인물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나는 단주님이 하려는 일을 짐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문상께서도 그분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 것이 옳으리라 생각합니다.”
휘장 안의 여자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몽진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 상당히 묘한 여운을 남겼다. 어떻게 들으면 휘장 속의 문상이 대단하지만 권왕 아운의 존재는 그 이상이란 말과도 같았다.
휘장 속의 여자가 듣기에 따라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문상은 몽진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애써 무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차를 몇 모금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문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전에 권왕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고 했었지요?”
“그것이 단순한 짐작인지 아니면 정말 눈치를 챈 것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 말 이외에 다른 말은 없었던가요?”
“다시 한 번 자신의 힘을 이용하려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하라 했습니다.”
휘장 속의 문상은 다시 한 번 침묵했다. 그러나 몽진은 문상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몽진은 조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나에게 그 말뜻을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극락원의 일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
문상은 순순히 말을 해 주었다.
몽진 나한의 표정이 일시적으로 굳어졌다가 펴졌다.
짐작은 했었지만 사실로 밝혀지자 조금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오히려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는 아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경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극락원의 존재를 단주님에게 알린 것은 지금 상황을 그분에게 알리고 어떻게 대응하는지 떠보려 한 것입니까? 아니면 단순히 단주님을 이용한 것입니까?”
“둘 다 옳을 것입니다. 차후 우리의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궁금했고, 극락원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도 궁금했습니다.”
몽진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아미타불, 결론이 어떻게 나왔는지 그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단주님과 우리 대정회가 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적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상대해야 할 적만 해도 상대하기가 벅찬 상황인데, 권왕 같은 강자를 적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그의 협조를 받고 싶은 생각입니다. 최상이라면 그를 우리 대정회의 주축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몽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아는 단주님은 남이 만들어 놓은 틀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권왕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몽진이 고개를 흔들면서 중간에서 휘장 속 여자의 말을 끊었다.
“미리 말하지만, 문상께서 나에게 더 이상 단주님에 대해서 묻지도 말고 그분과 관련해서 어떤 지시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젊은 나이에 맞아 죽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상대도 되지 않는 절대 강자에게 객기를 부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 줄 수 있는 말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직 단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몽진의 단호한 말에 휘장 속의 문상이 조금 침중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묻는다.
“그 정도입니까?”
“어떤 말을 해도 모자라는 표현이 될 테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내 견해를 말한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려면 그분과 적이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접근하고 차라리 솔직하게 흉심을 털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던 그것은 문상과 무상 그리고 회주님이 판단할 일입니다.”
“몽진 나한님은 저희 대정회의 오대 호법 중 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 지금처럼 말씀하시면 제가 조금 답답해집니다.”
“아미타불.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소승이라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말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상대이기에 솔직하게 말한 것뿐입니다. 자칫해서 대세를 망치는 것보다 차라리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심을 굳히고 하시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제가 더 이상 몽진 나한님에게 큰 도움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내가 무공을 숨기고 있는 것까지 단주님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눈을 피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문상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정말 그뿐입니까?”
몽진 나한이 휘장 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금룡단의 단원입니다. 단주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그 전에 대정회의 오대호법이십니다.”
“금룡단 안에서는 아닙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대정회를 위하는 길이며 현 무림을 바로 잡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단주님은 현 무림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게 내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문상의 침묵이 이어졌다.
세 번째의 침묵이었고, 이번 침묵은 이전에 비해서 조금 더 길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저희도 준비를 하겠습니다. 몽진 나한님의 판단을 저도 믿겠습니다.”
몽진 나한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비록 권왕을 만나고 그 존재감이 조금 흐려지긴 하였지만, 역시 문상은 대단한 여자였다.
자신의 도발적인 말에도 그녀는 끝까지 담담했고, 지금처럼 자신의 견지를 지킬 줄 알았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문상. 그럼 소승은 이만.”
몽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몽진이 나간 후 휘장 안에서 아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정이 넘어 축시 중엽이 되었을 때, 십여 대의 마차가 무림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사두마차들이 갑자기 일복 대나 나타나자, 무림맹을 지키던 무사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성을 지키던 금강 선위대의 조장인 추정금검(錐釘金劍) 구상은 수하들을 정렬시키고 마차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선 마차 위에 나부끼는 깃발과 선두 마차에 탄 무사를 보고 분분히 자리를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한 마리의 금룡이 새겨진 깃발은 그 마차가 금룡단 소속이란 것을 말해 주고 있었으며, 선두의 마차 위에는 이전 금강선위대 소속 부대주였던 육자명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육자명은 과거 금강선위대 소속이었던 구상의 직속상관이었다. 항상 엄겼했던 육자명을 존경하고 따랐던 구상이었고, 그가 금룡단에 들어간 후로는 더욱 존경하고 있었다.
설사 그것이 아니라도 무림맹의 젊은 무인들에게 있어서 금룡단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누구라도 금룡단이라면 일단 피하고 볼 상황이었다.
“모두 물러서라!”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구상이 차렷 자세로 예를 취하자, 육자명이 그를 보고 말했다.
“고맙네, 그럼 수고하게.”
“당연한 일입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구상의 외침과 동시에 십여 대의 마차는 서서히 무림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들은 내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금룡단의 마차가 내성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은 곧 내성을 지키는 선위조에게 전해졌다.
무림맹의 내성은 금강선위대가 아니라 내성수호대였다. 그리고 내성수호대는 따로 풍운수호대라고도 불렸다.
또한 내성수호대는 호연란이 령주로 있는 무림맹 최고의 신비조직인 비월령의 예속이었다.
내성수호대란 내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살피는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그 정보를 비월령에 전달하게 되어 있었다.
내성수호대의 이 조 조장인 규혼(赳魂) 음충서는 금룡대의 깃발을 단 마차가 내성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내성수호대의 부대주인 유대석에게 보고를 하였다.
유대석은 그렇지 않아도 권왕 아운에게 불만이 많았던 자였다.
처음 아운이 무림맹에 들어왔을 때, 호되게 당했던 기억은 지금도 가장 기억하기 싫은 추억 중 하나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오한이 나면서도 모욕감에 몸을 떨곤 하였었다. 언제고 틈만 나면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지만, 아운만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고 아랫도리가 후들거리곤 하였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진정이 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의 원한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고 복수할 수 있는 시기만 노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원한을 삭여 오던 유대석은 음충서의 말을 듣자,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오는 마차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새벽에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중요한 물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정당하게 아운을 골탕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먼저 확인해 둘 일이 있었다.
그는 보고를 하러 온 수하를 보고 물었다.
“권왕이 함께 오는 중이냐?”
“그렇진 않습니다. 지금 마차를 목고 오는 자들은 어제 오전에 나갔던 무리들인 것 같은데, 당시 권왕은 함께 하지 않았었습니다.”
유대석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권왕만 아니라면 된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권왕이지 그의 수하들이 아닌 것이다. 최소한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서 골탕을 먹일 순 있을 것 같았다.
"알았다. 내가 나갈테니 모두 대기하도록."
"복명."
수하가 구호를 외치고 밖으로 나가자, 유대석도 서두르기 시작했다.
육자명의 안색이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내성으로 통하는 문에 내성호위대의 무사들 삼십여명이 도열해 있었고, 그들 사이에 유대석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원래부터 외성을 지키는 금강선위대와 내성호위대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더군다나 내성호위대의 부대주인 유대석의 오만방자함은 이미 무림맹내에서도 유명했고, 특히 금강선위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전에 아운에게 유대석이 호되게 당했을 때 가장 박수를 친것도 바로 금강선위대였던 것이다.
육자명은 대열을 정비하고 서 있는 내성수호대의 수하들을 보면서 점점 불안해지는 것을 느꼇다.
육자명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유대석을 생각해 보았다.
'과거의 나였다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이면 나도 그렇게 쉽게 지진 않을 것같다.'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사이에 마차는 어느새 내성의 성문앞에 멈추어 섰다.
유대석은 희죽거리며 육자명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육 부대주."
"지금은 금룡단의 단원이니 그렇게 불러주시오."
"오오, 이거 참. 내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군. 그런데 마차에 무엇이 있는지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금룡각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로 마차의 문을 열지 말라는 단주의 명령이 있었소. 그러니 그것은 불가하오."
유대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금룡단의 단주.
권왕 아운.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꼇다.
자신도 모르게 사방을 둘러본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운은 없었고, 이 자리에 나타날 확률도 많지 않았다. 일단 조금 안심이 되자, 자신의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육자명이 눈에 거슬린다.
이전이라면 자신의 앞에서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자다. 그런데 금룡단이라는 간판을 달더니 제법 의연해졌다.
왠지 무시당한 느낌도 들었고, 이젠 나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시위를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유대석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흥, 그건 난 모른다. 나는 내성을 지키는 수호대의 부대주로서 마차 안을 반드시 조사해야겠다. 그러니 잔소리 말고 마차 안에서 내려라."
육자명의 얼굴 근육이 꿈틀하였다. 이때 야한의 전음이 들려왔다.
ㅡ그놈, 네 선에서 확실하게 처리해라. 내가 보기에 지금의 너라면 그놈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야한의 말을 들은 육자명은 더욱 용기가 났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정말 싹수가 전부 벌레에 먹힌 놈이군. 금룡단에서 기밀을 요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젠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상대를 해 주지.”
갑자기 당당해진 육자명을 보고 유대석은 처음엔 조금 당황하였다. 설마 자신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도전을 해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미친놈이 권왕의 수하가 되더니 자신은 검귀라도 된 줄 착각한 것 아닌가? 감히 내게 도전을 하다니.’
유대석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정당한 방법으로 육자명을 혼내 주고 마차를 잡아 둘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제아무리 권왕이라도 정당한 대결까지 참견할 순 없을 것이다.
“흐흐, 네 놈이 먼저 도전을 한 것이렷다.”
“물론이다.”
“그렇다면 내가 거절할 명분이 없지. 내려오너라! 네 놈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기에 정신마저 혼미해졌는지 알아보아야겠다.”
육자명이 마차에서 내려오고, 삼십여 명의 선위무사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여유가 있었다.
유대석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고, 육자명의 실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한 육자명은 유대석보다 최소 두 단계 이상은 아래의 실력이었다. 아무리 권왕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시간이란 것이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육자명이 유대석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지녔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이 마주보자, 금룡단의 단원들도 마차 위에서 자리를 지키며 지켜보았다.
그들도 육자명의 무공이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육자명의 무공이 늘은 만큼 자신들도 늘었을 것이다.
유대석은 강호 사패 중 하나인 복건성 유가장의 둘째였다.
그의 아버지인 수운검객(水雲劍客) 유상은 강호에서도 입지적인 인물이었고, 특히 호연세가의 가신 중 한 명으로 유가장은 사실상 호연세가의 강남 총지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대석은 아버지로부터 수운검법을 물려받았고, 호연세가에서 또 다른 비기를 비밀리에 배워 왔다.
덕분에 그는 내성호위대의 부대주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이 마주서자, 유대석은 입가에 묘한 비웃음을 머금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수운검법의 기본 자세였다.
육자명은 아운으로부터 배운 선풍연환검법의 기수식을 취한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운으로부터 검법을 배울 때가 생각이 난다.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고, 백골마진 안에서는 숨이 턱에 닿아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때를 생각하자, 다시 한 번 용기가 샘처럼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생기고 있었다. 용기가 생기면 침착해지고, 침착해지면 시야가 넓어진다. 그리고 없던 여유도 생기게 마련이었다. 막상 여유가 생기고 난 후 유대석을 보니 정말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왕 아운과 겨루면서 무공을 배웠었다.
권왕의 몸에서 뿜어지는 투기는 당장이라도 몸을 뭉개 버릴 것 같아 처음에는 검도 휘두르지 못하고 주저앉았었다. 거기에 비하면 유대석의 몸에서 뿜어지는 투기는 하품이 날 정도였다.
용기에 용기가 더해지면서 육자명은 어쩌면 자신이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히려 침착한 육자명을 바라보는 유대석이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투기를 너무 쉽게 받아 내고 있었으며 오히려 기도에서 자신이 밀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유대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저놈이 권왕에게 뭔가 배우긴 배운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굼벵이가 산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놈, 더 크기 전에 오늘 싹을 잘라 주마.’
유대석의 눈에 살기가 돌면서 그의 검이 호선을 그리고 육자명의 심장을 찔러 갔다. 물처럼 부드럽고 구름처럼 변화무쌍하다는 수운검법의 절초가 펼쳐진 것이다.
‘보인다. 검이 흘러가는 길이 보인다.’
육자명은 눈을 부릅뜨고 유대석의 검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이 흘러가는 길이 보이고 있었다.
이전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육자명이 유대석을 검을 보고 있는 사이 검 끝이 파란 살기를 담고 그의 목을 끊어 왔다.
“와아!”
함성이 선위무사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고, 놀란 외침이 금룡단 무사들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유대석의 검이 막 육자명의 목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육자명의 검이 흐릿하게 변하면서 간단하게 위로 쳐 올라갔다.
따앙 하는 맑은 쇳소리와 함께 유대석의 검이 위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육자명의 검이 유대석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검법이었지만, 동작이 작고 빨랐다.
유대석은 다급하게 수운검법으로 육자명의 검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공격을 시작한 육자명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며 유대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숨 몇 번 몰아쉬는 동안 육자명은 팔기연환검법의 육 초식을 쏟아 붓고 있었다. 한 초 한 초가 간단한 변식에 불과했지만, 검에 실린 힘은 제아무리 유대석이라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유대석은 자신도 모르게 다섯 걸음이나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말았다.
선위 무사들은 이 뜻밖의 상황에 모두 멍청한 표정을 지었고, 금룡단의 무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환성을 지르며 육자명을 응원하였다.
제대로 공격 한 번 못해 보고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린 유대석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밀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놈,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를 갈아붙인 유대석의 검에서 갑자기 새파란 청광이 뻗어 나왔다. 그동안 감추어 놓았던 비기를 펼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력이 강한 검초는 내공을 모으는 속도도 느리게 마련이다.
고수라면 모르지만 유대석은 아직 의지 하나로 기를 모으는 단계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검법을 펼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초식을 바꾸는 동안, 조그만 틈이 생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검에서 청광이 뿜어지며 숨겨둔 초식을 펼치려는 순간 육자명의 검은 이미 유대석의 목에 닿아 있었다. 강호 무림에서 무명이나 다름 없었던 소혼검 육자명의 이름 석 자가 강호에 정식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