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검왕마도(劍王魔刀)
- 북풍한설에 검화가 피었다.
산동성 청도는 바다를 접한 해안 도시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하지 않아,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기후를 가진 곳이다. 특히 기암절벽을 병풍처럼 두른 해안가와 근교의 산세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시였다.
현재 산동성 청도에서 그것 이외에도 가장 대표적인 자랑거리가 있는데 무림의 천하제일세가라 일컬어졌던 북궁세가였다. 비록 검왕 북궁손우가 실종되면서 지금은 호연세가에게 제일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권왕이 북궁세가의 사위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북궁세가의 힝은 하루가 다르게 욱일승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현 북궁세가의 실질적인 가주이자, 북궁연의 아버지인 군자검(君子劍) 북궁단은 좀처럼 북궁세가의 문을 열어젖히지 않고 있었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꼭 필요한 몇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는 중이었다.
그걸 두고 많은 사람들은 호연세가에 대반격을 준비하는 중이라고도 하였고, 아버지이자, 신주오기의 한 명인 북궁손우를 찾기 위해 다른 것은 신경 쓸 틈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북궁세가는 청도에서 약 십 리 정도 떨어진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바다로 뚝 떡어져 있고, 북쪽으로는 제법 높고 험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으며, 그 산에서 발원한 작은 물줄기가 폭 오 장 정도의 작은 강을 형성하면서 서쪽을 감아 돌아 남쪽 북궁세가의 땅을 가르고 지나서 바다로 흘러 나갔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 물줄기를 북궁천이라고 불렀다.
결국 북궁세가의 터는 동으로는 바다와 절벽이요, 북으로는 산이고 남과 서로는 물이 감싸고 있는 형세였다. 그 안에 존재하는 터의 크기가 삼만 평이었고, 그 안에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북궁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
어둠은 산과 북궁세가의 경계마저 검은 비단으로 완전히 가려 놓고 있었다.
평야를 줄기차게 달려온 바람이 북궁세가의 담장에 충돌하고 부서지면서 기묘한 소리를 내었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경비무사는 없었다.
자시가 넘어 인시가 되어 가는 무렵, 북궁세가의 정문을 향해 달려오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모두 백오십여 개나 되는 그림자들은 거침없이 달려와 북궁세가의 경계선인 북궁천을 신법으로 넘은 다음 바로 북궁세가의 정문으로 당당하게 다가섰다.
북궁세가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선위무사는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보고 빠르게 비상종을 울린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타난 자들은 어느새 북궁세가의 정문 앞에 도열해 있었고, 그들의 맨 앞에는 한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한 자루의 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으며, 중년의 여인은 차가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여인은 하얀 궁장 차림이었고,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았다.
노인이 여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빙사, 괜찮겠는가?”
여자가 서늘한 시선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인가요?”
“마음의 준비 말이다.”
“그것이 필요한가요?”
노인이 가볍게 숨을 내쉬면서 잠시 침묵하였다가 말했다.
“검왕을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는 너무도 담담했다.
노인의 입장에서는 그 부분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나는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네가 그에게 살수를 펼칠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여자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들어 놓은 조각상 같았다.
“사형, 그런 말씀 마세요. 이미 일 갑자 전의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어떤 잔재가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요?”
노인은 잠시 동안 자신의 사매인 요가람을 바라보았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이지만, 지금 정도의 어둠은 담대환 같은 고수에겐 전혀 지장을 주지 못했다.
그는 충분히 요가람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혈궁칠사의 일인으로 빙한천사(氷寒天使)라 불리는 그녀답게 냉랭하고 얼굴의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기에 조금 불안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지금 그녀는 별다른 감흥이 있는 것 같진 않다는 사실이었다.
담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때때로 자신의 이성을 배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세. 사매가 상처를 받을까 봐 하는 말이니 지금이라도 빠지고 싶으면 이곳에서 기다려도 좋다는 말이네.”
“걱정하지 마세요. 단지 사형에게 부탁이 있어요.”
“말해 보시게.”
“검왕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면 제게 맡겨 주세요. 그게 그나마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었던 제 배려라고 생각해요.”
노인은 요가람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북궁세가의 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전 이미 준비를 끝내고 있답니다.”
혈궁칠사의 한 명인 마도신사(魔刀神死) 담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당하게 정문으로 왔으니, 지금쯤 우리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럼 시작하기로 하지. 도환.”
한 명의 장년인이 앞으로 걸어 나와 허리를 숙였다.
“우리가 왔음을 알려라! 비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새벽에 오긴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고 싸우는 부분은 정정당당하게 한다.”
담대환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칠사의 일인으로 검왕이 없는 북궁세가는 그의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의 옆에 있는 빙한천사 역시 칠사의 일인이니, 천하에 무엇이 두렵겠는가?
칠사 둘이면 검왕이 건재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복명.”
구호를 외친 후, 도환은 정문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북궁세가의 거대한 정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이윽고 활짝 문이 열리면서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고, 갑자기 사방에서 횃불이 밝혀졌다. 광장에는 수많은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한 명의 건장한 장년인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담대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제법 멋진 광경이군. 그럼 들어가 볼까?”
담대환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빙한천사 요가람을 비롯해서 혈궁의 수하들이 그 뒤를 따라 줄줄이 북궁세가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혈궁의 수하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 포진해 있던 오백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장년인이 홀로 걸어와 마도신사 담대환의 오 장 앞에 서서 포권지례를 하였다.
“북궁가의 단이라 합니다. 오신 분들은 어디서 무슨 일로 이 새벽에 본가를 방문하셨는지요?”
담대환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현 북궁세가의 임시 가주가 바로 자네였군. 오래전 자네의 아버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기개와 성품에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 아들이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군. 과연 검왕의 후예답다.”
“아버님의 친우분들이십니까? 그런데 이 야밤에 어인 일이신지요?”
담대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아무렴, 친우라고 할 수도 있지. 나는 혈궁의 담대환이라고 하네. 무림에서는 마도신사라고 부른다더군. 혹시 자네의 아버님에게 들어보았는가?”
북궁단의 얼굴이 굳어졌다.
혈궁의 칠사 중에 한 명이라니,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적이었다. 그러나 북궁단은 침착했다.
“높으신 이름은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슨 영광씩이나, 어차피 나도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닐세. 자네도 그건 알고 있겠지. 그럼 피차 피곤한 말은 하지 말기로 하세.”
북궁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궁이 여기에 왜 왔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
“어쩌길 바라시는 것입니까?”
“간단하다. 모두 여기서 죽든지, 아니면 북궁가의 가주인 너를 비롯해서 중요 인물 열 명만 나에게 잡혀 주든지, 양자택일하면 된다.”
북궁단이 고개를 흔들었다.
“둘 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담대환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됐군. 시간 없으니 빨리 하세.”
담대환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뽑아들었다. 이때 마치 환청처럼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성격이 급하군.”
그 목소리를 들은 마도신사 담대환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러나 그의 옆에 있던 요가람은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담대환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면서 말했다.
“검왕의 목소리라니, 분명히 큰 화를 당한 것으로 아는데? 역시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믿을 게 못 되는군.”
“화를 당했던 것은 맞네. 하지만 이젠 괜찮아졌지.”
담대환의 입가에 아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허, 이거 내가 운이 없군.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그랬으면 오늘 본가는 몹시 힘들었을 것일세.”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너와 나는 백중세지만, 여기 내 사매는 누가 막을 텐가? 자네도 잘 알다시피 빙한천사의 손속은 좀 매운 편이네. 그리고 우린 오기 전에 자네가 나타나면 둘이 협공하기로 약속을 했지. 자칫해서 양패구상하는 것보다 그게 좀 더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좋은 생각이군.”
“자네는 우리를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인생사 다 그런 것 아닌가?”
“서운하진 않네. 하지만 빙사가 왔을 줄은 몰랐군.”
검왕의 목소리가 조금 감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두 명의 노인이 허공을 가로질러 오더니 다대환과 빙사의 바로 앞에 내려섰다.
나타난 두 노인을 본 담대환과 요가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검왕이 정말 온전한 것도 뜻밖이었지만, 함께 나타난 노인은 더욱 뜻밖이었던 것이다.
검왕은 담대환을 바라보았다가 요가람의 얼굴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요가람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오랜만이오. 그동안 잘 있었소?”
“덕분에 맘고생은 심했지만,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건강하군요. 지금쯤 병상에 누워 있든지, 아니면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검왕의 입가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더 이상 다정다감했던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더없이 담담하고 건조한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검왕에게 부담을 주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검왕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년에 손녀사위를 잘 두어 그 덕을 톡톡히 보았소.”
담대환과 요가람은 검왕이 말하는 사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담대환은 허리에 찬 도의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으면서 말했다.
“권왕의 이름이 강호를 진동한다더니 의술까지 뛰어날 줄은 몰랐군. 그보다도 북룡철권(北龍鐵拳) 우문각(禹門覺) 형이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늘.”
검왕과 함께 나타난 노인은 우람한 체구에 얼굴이 둥글둥글해서 보기엔 마음 좋은 동네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검, 도, 권, 공, 장으로 대표되는 신주오기 중에 한 명인 북룡철권 우문각이었다.
우문각이 웃으면서 말했다.
“우 모가 참으로 오랜만에 담 형을 뵙습니다. 그간 보아하니 공부가 더욱 출중해진 것 같습니다.”
“뭐, 잘 있기야 했지만, 보아하니 우 형도 나 못지않게 많은 발전이 있었던 것 같소이다.”
우문각이 고개를 흔들었다.
“긴 세월 동안 노력은 했지만, 이제 겨우 주먹이 조금 가벼워진 것 밖에는 진전이 없습니다.”
담대환의 얼굴 표정이 조금 더 침중해졌다.
‘오늘 일은 쉽지 않겠구나. 혹시나 해서 빙사까지 대동했는데, 하필 우문각이라니. 주먹이 가벼워졌다 함은 이미 허(虛)의 경지에 올라 신(身)에 기(氣)를 싫지 않아도 저절로 강기(?氣)가 응축되어, 초식 속에 깃든다는 권강심형(拳?心形)을 이루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나 빙사라 해도 승리를 점치기 어렵겠구나.’
마음과는 달리 담대환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우 형, 대성을 축하하오. 그런 의미에서 나하고 한판 겨루어 봅시다. 그렇지 않아도 몇 십 년간 뼈마디가 녹이 슬어 이제 좀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소.”
우문각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정도야 담 형이라면 예전에 올라간 경지라 그저 쑥스러울 뿐이오. 비록 모자람은 알지만 담 형이 그렇게 말하는데 제가 무슨 배짱으로 거절하겠소.”
우문각이 대답을 하고 천천히 걸어 나가려 하자, 검왕이 먼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우 형은 어디까지나 이곳의 손님. 내가 담 형의 적적함을 달래 주지. 이전의 빚도 있고 하니 내가 나서는 것을 이해하리라 믿겠네.”
담대환의 눈썹이 곤두섰다.
“그것도 좋지.”
담대환과 검왕 북궁손우가 삼 장의 거리를 격하고 마주섰다. 지켜보던 무사들이 모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데, 다들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삼 장은 넓은 거리지만 검왕이나 마도신사라 불리는 두 사람에게 있어선 지척지간이라 할 수 있었다.
일검, 일도에 승부가 날 수도 있는 거리였다.
두 사람이 은은한 투기를 뿜어내자, 그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상이 정지되어 갔다.
사방에 불을 밝힌 횃불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지 않다면 지금 상황이 하나의 그림이라고 생각할 만큼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움직임을 멈춘 상태가 되자, 마도신사의 손이 천천히 도의 손잡이로 이동하였다.
검왕 역시 천천히 자신의 검을 잡아 갔다.
척.
손잡이를 잡는 소리가 들린 것이 아니었다.
보던 사람들이 그렇게 들렸다고 느끼는 순간 두 가닥의 섬광이 어둠으로 채색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삼 장의 거리를 넘어서, 기의 흔적이 상대의 심장을 가르려 할 때,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무기가 생명력이 깃든 것처럼 자연스럽게 당겨지면서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이 눈에 뚜렷하게 보여서 그다지 빠른 것 같지 않은데 허공을 가르고 그것을 방어하는 기의 흐름은 수십 가닥이 넘었다.
파공성도 없었고, 기가 충돌하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동작이 멈추었다.
단 한 호흡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시간은 멈춰진 시간이었다.
팔락.
작은 바람이 두 사람을 감싸면서 검왕의 어깨를 감싼 옷자락이 예리하게 베어져 벌어지고 있었으며, 마도신사 담대환의 배 부근 옷이 나풀대며 갈라졌다.
첫 대결에서는 누구도 이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꿀꺽, 누군가 참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담대환의 입가에 괴소가 어렸다.
“흐흐, 재미있어. 역시 결투란 강자와 겨루어야 손맛이 제대로 우러나온단 말이지.”
검왕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역시 담 형의 도는 맵군.”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두 사람의 생사의 대결이 아니라 친구끼리 간단한 대련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담대환이 자신의 도를 직선으로 세우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정식으로 겨루어 볼까? 조심하시게.”
“나야 언제든지 환영이지.”
“그럼.”
담대환의 신형이 무섭게 앞으로 전진하였다. 동시에 그의 도가 반원을 그렸고, 차가운 한기가 반짝이며 검왕의 목을 노리고 베어갔다. 지금의 마도수사를 있게 만든 한음월영도법(寒陰月影刀法)의 절초인 한월령(寒月囹)이었다.
이미 상대의 무공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북궁손우는 상대가 도법을 펼치는 순간 상대의 초식을 알았다. 검왕의 도가 아래에서 위로 쳐 올라가며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대라 칠정검법이 펼쳐진 것이다.
두 사람의 신형이 묘하게 얽히면서 서늘한 검기와 도기가 새벽의 밤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강호 무림을 호령하던 십사대고수의 대결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대결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는다.
물 몇 모금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이십여 합을 겨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한 초식을 끝까지 펼치는 경우도 없었고, 무기가 충돌하는 경우도 없었다.
지켜보던 일반 고수들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하고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우문각이나 요가람의 표정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겅왕고 마도신사의 대결이 극히 위험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군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치명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검왕과 마도신사의 무공은 백중세라 누가 이기고 진다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문각과 요가람은 여차하면 뛰어들 기세였지만, 서로를 의식하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요가람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어서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요가람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검왕의 부재를 감안하고 왔던 요가람과 혈궁의 무리들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검왕이 나타난 것도 뜻밖인데, 북룡철권 우문각까지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상황이라면 전면전이 벌어진다 해도 어디가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어느 한쪽이 이긴다 해도 큰 피해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가람은 전면적인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다시 반 각의 시간이 흘렀다.
온 힘을 다한 두 고수의 대결은 마치 두 개의 유령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움직이는 기척도 시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타 무사들처럼 바람을 가르는 검의 파공성조차 없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대결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렬해졌지만, 보기에는 오히려 두 사람의 동작이 조금씩 느려져 보이고 있었다.
마도신사 담대환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이렇게 하다간 끝이 안 날 것 같다. 그렇다면 모험이다.’
결심을 굳힌 담대환의 도에서 갑자기 흰색의 한광이 일 장이나 뿜어져 나왔다. 뼈를 엘 것 같은 차가운 한기가 사방 이십여 장을 휘감자, 그 기세에 놀란 사람들이 모두 뒤로 물러섰다.
“도망가지 말고 와라, 북궁손우.”
고함과 함께 담대환의 도가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무서운 속도로 검왕 북궁손우를 향해 사선을 그렸다.
빠르다.
마치 한 줄기의 섬광이 대지에 거꾸로 꽂히는 것 같았다.
보던 사람들의 시선엔 도의 궤적 안에 들어간 대기의 수분들이 얼음으로 변해 날아가는 장면만이 착시 현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십삼 초의 한음월영도법의 정수인 후삼식.
그중 하나인 한음정사(寒陰征死)의 살초가 펼쳐진 것이다.
따로 삼한빙살마도(三寒氷殺魔刀)라고도 불리는 이 삼초식의 도법은 지금의 마도신사를 있게 만든 도법이었으며, 능히 무적이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도법이었다.
검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대가 승부를 걸었다.
그렇다면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담 형은 이미 한음월영도법을 십일성 이상으로 대성했다.’
그 정도라면 능히 천의무봉이라 할 수 있는 경지였다.
상대의 능력을 깨우치는 순간 검왕의 검에서 밝은 청색의 검강이 매섭게 뿜어져 나왔다.
검강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한음정사의 도강과 충돌해 갔다. 대라칠정검법(大羅七精劍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수유선기(水流旋氣)를 검강의 형태로 펼친 것이다.
검강이 돈다.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돌아가는 검강은 강맹한 한음정사의 도강에 비해서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 질김과 날카로움은 담대환의 도강을 능히 상대하고 있었다.
꽈드등 하는 굉음이 들리면서 두 사람의 강기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큭!”
하는 짧은 비명이 북궁손우와 담대환의 입에서 터진 것 같았다. 환청처럼 그 소리가 북궁세가의 연무장으로 퍼져 갈 때, 이번에는 검왕의 검이 한순간에 서른여섯 번이나 변하면서 담대환을 공격해 갔다.
지켜보던 수많은 무사들이 볼 땐 마치 수십여 가닥의 검강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담대환을 공격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문각과 요가람은 검왕의 검에서 뿜어진 네 가닥의 실낱 같은 강기가 각각 담대환의 얼굴, 목, 심장, 단전을 노리고 모두 아홉 번씩 허공을 휘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네 가닥의 강기가 각각 아홉 번씩 모두 서른 여섯 번의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그것이 너무 빨라서 마치 서른여섯 번 검을 휘두른 효과를 내었는데, 이는 대라칠정검법의 가장 무서운 두 가지 초식 중 하나인 사환구윤수화(四幻九輪修花)라는 절초였다.
담대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공을 가득 메우고 밀려오는 검강의 그물이 그의 심신마저 조여 왔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 검왕과 잠깐의 손속을 나누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검왕은 이 초식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같은 초식이라도 그 위력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역시 나 혼자 발전한 것은 아닌가? 하긴,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오로지 무공에만 전념하고들 있었겠지.’
담대환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일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었고, 그의 마도는 이미 검왕의 검법에 저절로 대항하고 있었다.
담대환의 마도에서 백광이 더욱 짙어졌다.
대지를 얼려 놓을 것 같은 도광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검왕의 공격에 정면으로 충돌해 갔다. 도가 그리고 가는 원호 안은 완전히 백광으로 가득했고, 그것은 네 개로 갈라지면서 방패처럼 검왕의 검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우문각이 경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완벽한 도환(刀環)에, 도벽(刀壁)을 가미하다니, 삼한빙살마도의 한월환벽강(寒月環壁?)이 새롭게 진화를 하였구나, 과연 마도다.”
도환이나 도벽은 완벽하게 도강과 심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펼칠 수 없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두 개를 합해서 동시에 펼쳤다면 그 능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형식의 도법은 세상에 없었다.
우문각이 아는 한 삼한빙살마도의 두 번째 초식인 한월환벽강이 조금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마도신사 담대환이 펼친 초식은 우문각이 아는 한월환벽강과는 또 달랐다.
그동안 한월환벽강이 새롭게 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이 부셨다.
세상이 검과 도의 강편(?片)으로 가득해지는 것 같았다.
강기와 강기가 충돌하고 기와 기가 다변하면서 땅바닥이 지진이 난 것처럼 갈라져 나갔다. 그리고 기파의 폭풍이 회오리처럼 두 사람을 감싸고 맴을 돌면서 대기를 갈가리 찢어 놓고 있었다.
보고 있던 무사들 중에는 그 기세에 눌려서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다.
“큭!”
동시에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검왕과 마도신사는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온몸이 다 찢겨져 나가는 고통을 짧은 신음 속에 토해 놓았다.
둘 다 적지 않은 내상으로 인해 입과 코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 한 사람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밀리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각자 최후의 초식을 준비하고 휘두르려 하였다.
무서운 기세로 충돌한 두 사람의 기운이 다시 변하려 할 때, 그것을 보던 우문각의 표정에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제 두 사람이 마지막 초식을 펼치려 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지막 초식으로 다시 충돌하면 양패구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둘 중 한 명이 이기더라도 중상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정당한 두 사람의 대결에 뛰어들을 수도 없었다.
우문각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담대환이 모든 내공을 전부 동원해서 도를 휘두르며 호기롭게 고함을 질렀다.
“이제 끝내자.”
“오너라!”
검왕 역시 마지막 힘까지 전부 쥐어 짜내 초식을 펼치며 마주 고함을 질렀다.
우문각이 긴장한 표정으로 주춤할 순간이었다.
“모두 멈춰요, 이 미련퉁이들이!”
앙칼진 고함과 함께 요가람의 신형이 바람처럼 두 사람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것을 본 우문각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마지막 초식을 펼치던 검왕과 마도신사는 갑작스런 고함과 함께 요가람이 뛰어들자 기겁을 해서 초식을 회수하였다.
전 내공을 실어서 공격하던 것을 중간에서 멈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검왕과 마도신사는 거짓말처럼 초식을 멈추었다.
잔여의 기세는 요가람이 멋지게 회전하면서 이화접목의 비기로 허공에 흩어 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날아온 우문각은 바로 요가람의 코앞에서 주먹을 멈추었다.
혹시나 해서 공격을 하려 했던 것이다.
요가람은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우문각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흥, 과연 북룡철권이군요.”
우문각이 주먹을 내리면서 말했다.
“내 어찌 빙한천사와 견주겠소.”
요가람이 우문각을 한번 매섭게 노려본 후 검왕을 보면서 말했다.
“어차피 싸워 봐야 서로 이득이 없을 것 같으니 우린 이만 돌아 가겠어요. 혹시 불만이 있나요?”
심한 내상을 겨우 억누르고 있던 검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무슨 배짱으로 막겠소? 나는 불만이 없소.”
요가람이 돌아서서 담대환을 보고 말했다.
“이제 돌아가기로 해요. 어차피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없어요.”
담대환 역시 내상을 억누르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야겠지. 제길! 그동안 죽어라 노력해서 이번엔 이길 줄 알았는데. 뭐, 저 늙은이도 그동안 놀진 않았을 테니 내 욕심이겠지.”
요가람은 그 말을 귓전으로 흘리면서 냉담하게 북궁세가의 대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오자 혈궁의 무사들은 좌우로 갈라지면서 그녀에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담대환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르며 말했다.
“허허, 이거 참. 요, 요매! 함께 갑시다.”
요가람은 대답도 안하고 걸어간다.
그 뒤를 따라 혈궁의 무사들이 북궁세가의 대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담대환이 대문을 나서다가 고개를 돌리고 검왕을 쏘아보면서 한마디 했다.
“늙은이, 검을 잘 벼려 놓아라. 다음번엔 난도질을 해주마.”
검왕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다음엔 나도 봐주지 않겠다.”
“뭐, 뭐라고, 이런 개 같은 늙은이가. 다시 한 번 붙자.”
당장 달려갈 기세였다.
요가람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치켜뜬다.
“뭐 해요!”
담대환이 움찔해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가는 중이야.”
터덜거리면서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담대환을 보고 있던 우문각이 검왕 북궁손우를 보면서 말했다.
“갔구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더군. 그렇지 않은가?”
검왕은 우문각을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자네는 즐기고 있었던 것 같군. 애들도 있는데, 이만 넘어가세.”
우문각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자네는 언제나 점잖은 체하는군. 하지만 말일세. 자네의 그 고리타분함이 때론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흠.”
검왕은 간단하게 헛기침을 한 후 돌아섰다.
북궁단을 비롯한 북궁세가의 무사들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듯 멍한 표정들이었다. 조금 전 보았던 검왕과 마도의 대결은 그들에게 그 이상의 충격을 준 것이다.
특히 북궁단의 충격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했다.
‘아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멀었어.’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북궁단은 두 사람의 대결을 보고서야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깨우친 것이다. 그리고 북궁손우가 펼친 대라칠정검법은 그가 알고 있던 그것이 아니었다.
같지만 같지 않은 검법.
북궁단에게는 큰 깨우침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검왕과 우문각이 돌아서서 걸어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북궁단이 황급하게 북궁손우에게 다가왔다.
“많이 다치신 것 같습니다.”
“나는 괜찮다. 걱정하지 말고 뒷마무리나 하여라!”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서 북궁세가의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백의 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취한다.
그들 사이를 걸어가면서 우문각이 북궁손우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하려던 말을 속으로 집어넣었다.
조금 더 걷던 우문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이 녀석이 뭔가 깨우친 모양이군.”
북궁손우 역시 흠칫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한계가 있네. 북궁세가의 가주로서는 충분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인 게야. 뭐,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네.”
우문각은 검왕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도 나는 자네의 손녀사위에 대해서 조금 더 듣고 싶네. 정말 들리는 소문대로 우리와 겨룰 정도가 되는가? 듣기로 아직 삼십도 안 된 아이라 하던데.”
검왕은 잠시 아운을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자신이 바로 북궁가의 사위인 하영운이며 바로 권왕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한 청년.
그 전에 먼저 자신의 독상을 완전히 고쳐 놓았었다.
독상을 치료하고 무공이 어느 정도 돌아온 다음에도 검왕은 아운의 무공 수준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처음 그가 북궁세가에 와서 자신이 권왕이요, 북경 하씨 가문의 장자라고 주장했을 때, 북궁세가는 그것을 밎지 않았고 결국 시비가 붙었었다고 했다.
당시 아운은 북궁세가에서 자랑하는 북궁대검진을 주먹질 세 번에 무너트렸다고 했었다.
비록 그것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운의 무공은 결코 자신의 아래라고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북궁단이 밖으로 나갔을 땐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라고 했으니, 주먹질 세 번이란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아운의 무공 자체를 쉬이 믿을 수도 없었다.
“나도 그의 실력을 잘 모르겠네.”
“듣기로 명왕수사 고구도 그의 손에 쓰러졌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장차 천하제일인을 손녀사위로 두게 되는 것 아닌가?”
검왕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아직은 좀 더 두고 봐야겠지.”
“늙은이가 좋으면 좋다고 할 것이지. 에잉, 같이 못 놀겠다.”
우문각이 고개를 흔들며 앞장을 서자, 검왕이 그 뒤를 따라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우문각이 걸음을 갑자기 멈춘 후 돌아서며 말했다.
“그래, 그 잘난 손녀사위는 언제 소개해 줄 참인가? 이젠 국수 먹을 때도 되지 않았나?”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북경으로 사람을 보내려고 하는 중일세.”
“하하! 좋구나, 좋아.”
우문각의 웃음소리가 북궁세가의 새벽을 뒤흔들었다.